• 최종편집 2023-06-07(수)

평택시사(平澤市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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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시간 평택시사(平澤市史) 기사

  • 평택시史로 보는 ‘조선 선조 충신 이대원의 묘’
    왜구가 흥양에 침입하자 군사 이끌고 손죽도에서 싸우다 전사 ▲ 이대원 묘역 ◆ 이대원(李大源)의 묘(소재지: 포승읍 희곡리 산83-5) 이대원(1566~1587)의 본관은 함평(咸平)이며, 자는 호연(浩然)이다. 1583년(선조 16)에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을 역임하였고, 전라도 녹도(鹿島) 만호(萬戶)가 되었다. 1587년(선조 20) 남해안에 왜구가 출몰하자 그들을 토벌하는데 큰 공을 세웠고, 이후 왜구가 흥양(興陽)에 다시 침입하자 군사 100여 명을 이끌고 손죽도(巽竹島)에서 싸우다 전사하였다. 속저고리에 피로 써 보낸 절명시 28자를 받아 고향 대덕산 밑에 장사를 지냈고, 제일(祭日)은 말이 혈서의 속적삼을 물고 온 날인 2월 20일로 정해 제향한다. 임진왜란 6년째인 정유년에 왜군이 전라도 손죽도에 몰려와 이장군의 사당에 불을 지르자 갑자기 소나기가 와서 불이 꺼졌기에, 나라에서 소나기 ‘확’ 자를 써서 ‘확충사’라고 사액이 내려졌다고 한다. 1675년 사당 입구에 신도비가 만들어졌다. 신도비는 높이가 300cm이며, 비신은 220cm, 너비 85cm, 두께 40cm이고 대리석이다. 대좌에는 물결무늬가 조각돼 있고, 글씨는 비교적 보존상태가 좋은 편이다. 비문은 남구만이 찬하고 김진규가 전액했고 조상우가 글씨를 썼다. <참고문헌: 평택시사(평택시사편찬위원회 펴냄)> ※ 다음호(682호)에서는 ‘평택시 각 지역 묘역 - 원균(元均)의 묘’가 이어집니다. 김지영 기자 ptlnews@hanmail.net
    • 평택시사(平澤市史)
    2023-06-02
  • 평택시史로 보는 ‘병자 삼학사 홍익한의 묘’
    병자호란 때 척화파로서 청나라에 끌려가 뜻 굽히지 않고 죽임당해 ▲ 홍익한 묘역 ◆ 홍익한(洪翼漢)의 묘(소재지: 평택시 팽성읍 본정리 322) 홍익한(1586~1637)의 묘는 처형 장소나 매장처가 확실치 않아, 그가 평소 타던 안마와 의금만을 수습해 함정리(옛 경정리)에 장사지냈다. 일제가 군사시설을 설치하면서 1942년 본정리 꽃산에 묘만 이장했고 묘비·비석들은 그대로 버려져 있다가 1964년 현재의 위치로 비각을 옮겼다. 1982년 비각 전부를 꽃산의 홍학사묘 옆에 옮겨 놓았다. 홍익한은 초명은 홍습(洪霫), 자는 백승(伯升), 호는 화포(花浦)·운옹(雲翁), 본관은 남양(南陽)이다. 찬성(贊成) 홍숙(洪淑)의 현손(玄孫), 진사 홍이성(洪以成)의 아들로 백부인 교위(校尉) 홍대성(洪大成)에게 입양된 후 서울 마포에서 자랐다. 병자호란 때 소현세자·봉림대군·윤집·오달제와 함께 척화파로서 청나라에 끌려가 끝까지 뜻을 굽히지 않고 죽임을 당한 ‘병자(丙子) 삼학사(三學士)’의 한사람이다. 묘소 앞에는 묘표와 문인석 2기가 있고, 묘역 전면에는 그의 충절을 기리기 위한 포의각이 있다. 홍익한 묘표는 2기가 있는데, 현재 묘소 앞에 세워진 것은 1689년(숙종 15)에 만들어진 것으로 월두형 비신양식이다. 규모는 비신 48.5×17×127cm이고, 비대는 87×57×29cm로 외증손 심사성이 글을 쓴 것이다. 포의각 내에 있는 묘표는 비신이 54×21.5×124cm, 비대는 106×82×24cm, 옥개석은 104×79×39cm로 1831년(순조 31) 이의현이 찬한 것이다. 홍익한 묘갈은 1725년(영조 1)에 포의사가 전결을 획급 받을 때 1726년(영조 2) 건립한 것이다. 비문은 송시열이 찬하고, 민진원이 전액하고, 이의현이 쓴 것으로 글씨가 마멸돼 내용을 알기는 어렵다. 비문의 23행 중 왼쪽 모서리가 깨어져 1행은 소멸됐다. 규모는 비신이 54.5×29×125cm이다. <참고문헌: 평택시사(평택시사편찬위원회 펴냄)> ※ 다음호(681호)에서는 ‘평택시 각 지역 묘역 - 이대원(李大源)의 묘’가 이어집니다. 김지영 기자 ptlnews@hanmail.net
    • 평택시사(平澤市史)
    2023-05-29
  • 평택시史로 보는 ‘평택서남부지역의 성곽 유적’ ③
    석정리 장성, 마장의 말들을 보호하기 위해 축성된 장성인 마장성 ▲ 석정리 장성 ◆ 석정리 장성(소재지: 안중읍 학현리·성해리, 포승읍 석정리 일대, 시대: 조선시대) 홍원목장 마장성은 경기도 박물관의 지표조사 결과에 따르면 ‘평택 홍원목장 마장성’과 ‘평택 석정리 장성’으로 보고된 바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수원도호부에 “홍원곶은 용성현에 있는데 수원부 남쪽 55리이다. 둘레가 75리이고 목장이 있다”라는 기록이 있고, 홍원목장에는 감독관이 파견돼 주변 일대의 목장까지 관장했다. 양성현조에는 “괴태길곶마장 현서쪽 100리 승량동면에 있는데 세 방향이 바다로 가로 막혀 있고 한 면이 육지와 연결돼 있다. 홍원목에 속해 있었는데 지금은 없다”라고 기록돼 있다. 수원부의 홍원곶마장과 양성현 괴태곶 마장을 수원부 홍원마장에서 관리하면서 마장성이 변화했다. 평택시 안중읍 덕우리 피라산 기슭으로부터 시작해 평택시 안중읍 성해리(城海里)·포승읍 석정리(石井里)·원정리(遠井里)·괴태길곶(槐台吉串)봉수에 이르기까지 약 8Km 정도에 걸쳐 토축으로 쌓아진 마장(馬場)의 말들을 보호하기 위해 축성된 장성(長城)인 마장성(馬場城)이 됐다. 목장토성 관련 유구로 동·북·서 세 방향에 토담을 두른 대형 집자리에는 내부에 3기의 건물이 존재했다. 조선시대 후기 기와편과 백자편이 발견되며, 목관(牧官)이 거처하던 관아터로 추정된다. <참고문헌: 평택시사(평택시사편찬위원회 펴냄)> ※ 다음호(680호)에서는 ‘평택시 각 지역 묘역 - 홍익한(洪翼漢)의 묘’가 이어집니다. 김지영 기자 ptlnews@hanmail.net
    • 평택시사(平澤市史)
    2023-05-19
  • 평택시史로 보는 ‘평택서남부지역의 성곽 유적’ ②
    덕목리성, 통일신라 수성군 4영현 중 광덕현의 치소가 있었던 곳 ▲ 덕목리성 ◆ 덕목리성(소재지: 현덕면 덕목4리, 시대: 고려시대) 덕목리성은 통일신라 수성군(水城郡)의 4영현 중 광덕현의 치소(治所)가 있었던 곳이다. 고등산의 끝자락 낮은 구릉인 성안마을 방향으로 가는 길을 중심으로 60m의 거리를 두고, 독특하게 동성(東城)과 서성(西城)으로 나누어져 배치돼, 동서 방향으로 있는 토축의 방형 평지성이다. 성벽의 높이는 외벽이 8~10m, 내벽은 2~3m, 하단 너비 5~7m, 상단 너비 1~1.3m 가량 된다. 성 밖으로는 폭 3~4m, 깊이 0.5~1m 정도의 외황이 설치돼 있다. 1942년 발간된 『조선고적조사자료』에는 “현덕면 덕목리, 토루고1간내지3간(土壘高一間乃至三間) 폭이 넓은 곳은 5간 정도, 주위 약 180간 명칭불명(周圍 約180間 名稱不明)”이라고 돼 있고, 문화유적총람(1977년)에는 “…4각의 토성으로 2개의 성지가 있으며 동쪽은 2,000평가량, 서쪽은 4,000평가량으로 일부는 주택이 건립돼 있고 1개의 성지는 현재 형태만 잔존하고 있고, 소나무가 무성하게 우거져 있다”라고 기록돼 있다. 축성방식은 사질점토와 점질토를 교대로 다져쌓기(판축)를 했다. 현재 동성은 거의 파괴되고, 성문지(城門址)는 서성의 북벽에서 확인되며 현재는 농로로 이용되고 있다. 성곽 시설물로는 서성 내에 문지 1개소, 치성 1개소, 건물지 1개소 등이 있다. 고려 말기에는 하양창 등을 중심으로 왜구의 노략질이 극심했던 지역이었다. 성곽이 많이 축성된 지역으로 성(城)의 규모가 작고, 성곽 축조 방법으로 보아 광덕현 읍성(邑城)으로 고려시대 축성됐을 것으로 보인다. <참고문헌: 평택시사(평택시사편찬위원회 펴냄)> ※ 다음호(679호)에서는 ‘평택서남부지역의 성곽 유적 - 석정리 장성’이 이어집니다. 김지영 기자 ptlnews@hanmail.net
    • 평택시사(平澤市史)
    2023-05-12
  • 평택시史로 보는 ‘ 평택서남부지역의 성곽 유적’ ①
    농성, 구릉의 경사지 이용해 고려시대 해안 방어 위한 토축의 평지성 ▲ 농성 평택서남부지역의 성들은 옛 폐현(廢縣)과 관련돼 축성됐거나, 조운(漕運)로의 확보를 위해 축성된 것으로 보인다. 먼저 안정리 농성(農城)은 평택현의 읍성, 덕목리 광덕현성은 동, 서로 2개의 성이 마주 보고 축조됐는데, 덕목리는 고려 초 수주부의 광덕현의 치소(治所)로 광덕현 읍성(邑城)이었을 것이다. 포승읍 원정리 목장성은 고려와 조선시대에 포승면 홍원리와 원정리에 설치된 목장의 말과 소들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었으나 목장이 확대되면서 석정리 감기마을에서 성해리까지 쌓았다. ◆ 농성(소재지: 팽성읍 안정리 산41-5, 지정번호: 경기도기념물 제74호) 안정리 농성(農城)은 ‘이성(夷城)’, ‘이성(里城)’이라고 부르며, 구릉의 경사지를 이용해 고려시대 해안 방어를 위해 축조한 토축의 평지성이다. 평면 형태는 남북 방향을 장축으로 하는 장방형을 하고 있다. 성벽은 전체 길이가 305m로 동벽 93m, 서벽 85m, 남벽 56m, 북벽은 71m이다. 성벽의 높이는 동벽과 북벽이 8~10m로 높고, 남, 서쪽은 6~8m로 다소 낮다. 내벽 높이는 3~4m 정도이고 상단 높이 1.5m~2m 하단너비가 4~7m 정도이다. 성내 면적은 14,900㎡이며, 문지는 동벽과 서벽 중간부에 위치하며 크기는 상단 너비 8~10m 하단너비 2m 내외이다. 높이는 4~5m가량이다. 축성 시기는 삼국시대, 나말여초, 고려설 또는 임진왜란설 등 많은 이견(異見)이 있다. 성곽 축조 방법이 고려 때 만들어진 덕목리성, 처인성 등과 유사하며 출토유물들이 고려시대 것이 많다. 이성(夷城)이라는 명칭으로 보아 『고려사』에 고려 1377년(우왕 3) 왜적이 경양을 침범하고, 평택을 점령해 양광도 부원수 인해가 이기지 못했던 기록이 있어 고려 말에 축조 활용했을 것으로 보인다. <참고문헌: 평택시사(평택시사편찬위원회 펴냄)> ※ 다음호(678호)에서는 ‘평택서남부지역의 성곽 유적 - 덕목리성’이 이어집니다. 김지영 기자 ptlnews@hanmail.net
    • 평택시사(平澤市史)
    2023-05-12
  • 평택시史로 보는 ‘평택서북부지역의 성곽 유적’ ⑤
    무성산성, 성벽 동·남·북벽은 산 정상부 감싸며 축조된 테뫼식 용성리 강길마을성, 토축 성으로 성벽 길이는 약 90m 잔존 ▲ 무성산성 ◆ 무성산성(武城山城, 소재지: 청북면 옥길리, 후사리 산48 일대, 지정번호: 경기도기념물 제202호, 시대: 삼국시대) 무성산성은 무성산의 능선이 남북으로 길게 뻗은 형태여서 남쪽 덕우리 원덕우 마을 뒤의 자미산, 비파산으로 이어진다. 성벽(城壁)의 동·남·북벽은 산 정상부를 감싸며 축조된 테뫼식이지만, 서벽(西壁)은 계곡을 가로질러 축성돼 포곡식과 테뫼식이 혼용된 형태를 보이고 있다. 성의 모양은 남북이 길쭉한 장타원형이다. 경기도 박물관의 발굴조사(1999) 결과 성내의 총면적은 5,650㎡이고 둘레는 547m임이 밝혀졌다. 또 남북의 길이는 157m이고, 동서의 길이는 77m이었다. 성내의 시설물은 문지(門址) 2개소, 치성(雉城) 2개소, 장대지 1개소, 수구지 1개소 추정, 건물지 6개소가 발견됐다. 성벽의 너비는 상단이 남벽은 1.5~2m, 서벽은 1~1.5m, 북벽은 1.5~2.5m, 동벽은 1.5~2m로서 전체적으로 2m 내외이다. 외벽 높이는 남벽 7~9m, 서벽 6~7m, 북벽 4~6m, 동벽 5~7m이다. 내벽 높이는 대체로 1.5~3m 내외이며 회곽도가 개설돼 있다. 성벽의 해발 고도는 전체적으로 평균 100m 내외를 유지하고 있다. ▲ 용성리 강길마을성 ◆ 용성리 강길마을성(소재지: 안중읍 용성2리 강길마을, 시대: 고려시대 추정) 용성리 강길마을성은 성벽이 강길마을 서북 방향에서 북쪽의 산 능선으로 오르는 농경로와 평행하게 진행되는 토축(土築)의 성이다. 성벽의 길이는 약 90m가 잔존한다. 현재는 북서쪽의 경사면이 평평하게 깎여서 농경지화 했고 나머지 토루(土壘)들도 보존상태가 좋지 못하나 성벽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특히 길을 건너 남서쪽으로 진행하던 약 30m가량의 토루는 거의 흔적이 없어졌다. 토루 내벽 높이는 1~2m, 외벽의 높이는 1.5~2.5m이며, 상단 너비는 1m, 하단너비는 1~2m가량이다. 전체적인 성벽의 진행 방향으로 볼 때 강길 마을을 타원형으로 감싸는 형태였던 것으로 보인다. <참고문헌: 평택시사(평택시사편찬위원회 펴냄)> ※ 다음호(676호)에서는 ‘평택서남부지역의 성곽 유적’이 이어집니다. 김지영 기자 ptlnews@hanmail.net
    • 평택시사(平澤市史)
    2023-04-21
  • 평택시史로 보는 ‘평택서북부지역의 성곽 유적’ ④
    용성리성, 안중읍 용성3리 낮은 구릉 따라 축조된 토축 평지성 백봉리 산성, 청북면 백봉1리 육자봉에 축조된 토축 테뫼식 산성 ▲ 용성리성 ◆ 용성리성(龍城里城, 소재지: 안중읍 용성리 455외 28필지, 지정번호: 경기도기념물 제205호, 시대: 고려시대) 용성리성은 안중읍 용성3리 낮은 구릉을 따라 축조된 토축 평지성(平地城)이다. 1942년 발간된 『조선보물고적조사자료』에는 “토루 주위 약 260칸, 높이 1칸 내지 2칸, 폭이 높은 곳은 5칸인데 용성현시대의 향교지라 전한다”라고 기록돼 있다. 용성리성은 비파산 동쪽 능선에 위치하고 있는데 평면 형태는 북벽이 약간 짧은 사다리꼴 형태로 보이나 축조당시에는 장방형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지형은 단면상 북고남저(北高南低), 동고서저(東高西低)로, 동서 길이는 87m, 남북길이가 128m, 전체둘레는 449m, 면적 10,550㎡이다. 성지의 시설물로는 문지(門地)는 3개소, 치성은 5개소가 확인되며, 성내 시설물은 건물지 5개소와 수구지 1개소가 있다. 용성리성은 규모가 작고, 능선으로 연결돼 있어 비파산성지와 연계된 방어시설로 일종의 부성(副城)으로 추정된다. ◆ 백봉리 산성(소재지: 청북면 백봉 1리 원백봉, 시대: 삼국시대 백제) 백봉리 산성은 청북면 백봉1리 육자봉(61.5m) 정상부를 중심으로 축조한 토축의 테뫼식 산성이다. 평면은 동서가 약간 긴 장타원형을 하고 있으며 지형은 서쪽이 높고 동쪽이 낮은 형태를 하고 있다. 둘레는 220m이고 성벽 높이 3~5m 내외로 서벽과 북벽이 다른 성벽보다 높게 쌓여 있다. 성벽은 편축식으로 축조했으며, 동북 모서리 부분에만 외벽에 유단시설이 남아 있다. 무문토기와 백제시대의 타날문 토기가 출토돼 백제시대에 축조한 것으로 보인다. <참고문헌: 평택시사(평택시사편찬위원회 펴냄)> ※ 다음호(676호)에서는 ‘무성산성(武城山城)’이 이어집니다. 김지영 기자 ptlnews@hanmail.net
    • 평택시사(平澤市史)
    2023-04-14
  • 평택시史로 보는 ‘평택서북부지역의 성곽 유적’ ②
    비파산성, 북쪽과 남동쪽 용성리 뒷골 포함 포곡식 토축 평산성 ▲ 비파산성 ◆ 비파산성(琵琶山城, 소재지: 평택시 안중읍 용성리 산6-1 외 24필지, 지정번호: 경기도기념물 제204호) 비파산성은 안중읍 용성3리 설창마을과 덕우1리 원덕우 마을 경계에 위치하고 있는 비파산(琵琶山, 해발 102.2m)의 북쪽 정상부와 남동쪽 하단부의 용성리 뒷골을 포함해 축조된 포곡식 토축 평산성이다. 1942년 발간된 『조선보물조적조사자료』에는 “토루 주위는 약 700칸으로 토루가 확실한 곳은 약 300칸이며 높이는 약 9척으로 용성현지라고 한다고 전한다”와 1977년 발간된 『문화유적총람』에는 “…높이 8m, 폭 3m, 길이 90m의 토성의 흔적이 남아 있었으나 1962년 부락에서 제방공사를 했다”라고 기록돼 있다. 비파산성은 지형상 서고동저(西高東低) 북고남저(北高南低)의 형상을 하고 있다. 서벽과 북벽은 비파산의 주능선을 따라 진행되고, 남벽과 동벽의 일부는 얕은 능선이 감싸며 돌아가고 있다. 이 양 능선 사이의 계곡을 막아 동벽을 축조했다. 성벽의 길이는 동벽 약 124m, 남벽 339m, 서벽 430m,북벽 682m로 전체길이는 약 1,622m에 이른다. 성내 시설물로는 문지 5개소와 치성 4개소, 건물터 14개소, 음료유구 5개소가 확인되고 있다. 성내외에서는 고려에서 조선시대까지의 기와편과 토기편, 자기편이 산재해 있다. 비파산성은 거성현 치소로 축조돼 행정치소 및 해안방어의 중심 기능을 했던 성으로 당시 지방제도의 형성과정을 살펴볼 수 있는 중요한 유적이다. <참고문헌: 평택시사(평택시사편찬위원회 펴냄)> ※ 다음호(675호)에서는 ‘용성리성(龍城里城)’이 이어집니다. 김지영 기자 ptlnews@hanmail.net
    • 평택시사(平澤市史)
    2023-04-07
  • 평택시史로 보는 ‘평택서북부지역의 성곽 유적’ ①
    아산만 입구, 안성천 하류의 전략적 중요성 알 수 있는 삼국시대 산성 ▲ 자미산성 평택서북부지역의 성곽유적은 백제시대와 통일신라시대 거성현(車城縣), 고려의 용성현(龍城縣), 조선시대를 거치며 축성됐다. ◆ 자미산성(慈美山城, 소재지: 안중읍 용성리 산68 외 14필지, 지정번호: 경기도기념물 제203호, 시대: 삼국시대) 자미산성은 북쪽의 무성산에서 뻗어온 산줄기가 산성이 위치한 자미산(110.8m)으로 이어져 남쪽의 비파산까지 내려간다. 그래서 북쪽으로 무성산성, 동쪽으로 용성리 강길마을성, 남쪽으로 약 100m 거리에 비파산성, 용성현성 등이 자리 잡아, 아산만 입구와 안성천 하류의 해양방어체계에서 이 지역의 전략적 중요성을 확인할 수 있는 삼국시대의 산성이다. 1942년 발간된 『조선보물조적조사자료』에는 “토루 주위 약 삼백간이 모두 붕괴되어 명확하지 않으나 산의 사면이 삭토해 이곳에 토벽을 붙인 듯하다 하여 자미산성이라 한다”고 기록돼 있다. 또한 『문화유적총람』에는 “지금 남아있는 석성(石城)의 형태가 원형으로 둘레의 길이는 약 150m에 이른다”고 기록돼 있다. ‘자미’는 ‘북두칠성’을 나타낸다. 자미산 정상부 주위를 토축으로 축조한 내성(內城)과 정상부에서 이어지는 7~8부 능선을 따라 석축으로 이루어진 외성(外城)과 자미산 정상부에서 동쪽 능선의 110m 거리에 토축으로 이루어진 부성(副城)이 있어 전체적으로는 내성·외성과 부성으로 이루어진 삼중구조이다. 성내 시설물로는 건물 추정지 9개소, 장대지, 추정 동문지와 적대, 추정 수구지, 동·서·북 치성 등이 있다. <참고문헌: 평택시사(평택시사편찬위원회 펴냄)> ※ 다음호(674호)에서는 ‘비파산성(琵琶山城)’이 이어집니다. 김지영 기자 ptlnews@hanmail.net
    • 평택시사(平澤市史)
    2023-03-31
  • 평택시史로 보는 ‘평택지역의 성곽 유적’ ⑧
    고려시대에 축성돼 아산만, 안성천, 진위천 통해 들어오는 왜적 방비 ▲ 방축리산성 동치성 ◆ 방축리산성(소재지: 고덕면 방축2리, 시대: 삼국시대 추정) 방축리산성은 방축 안 마을을 둘러싸고 있는 장안산(해발 53m) 토축의 포곡식 평산성이다. 성의 둘레가 2.2km 정도로 지형의 단면은 동고서저, 북고남저 형으로 동서를 장축으로 사다리 형태로 농경지를 따라 형성돼 있다. 서천사 뒷편 성황목자리 주변이 동치성으로 추정되며, 옆으로 동문지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장안산에서 기와편이 나와 건물지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방축리는 동고리, 궁리 등과 함께 본래 양성현 지역이었으나, 통일신라시대인 757년(경덕왕 16) 영풍현으로 고쳐 수성군의 영현으로 삼았다. 고려시대 특수행정구역인 오타장(吾朶莊)이 있었고 조선시대 오타면이 있었던 곳이다. 영풍현의 읍성을 보호하면서 조선초기 항곶포와 내륙수로를 확보하기 위해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1994년 편찬된 『송탄시사』에 의하면 방축리 성지로 소개되는데 약 400여 년 전에 경주 김씨(경순왕의 29세손)가 성두(城頭, 성머리)마을에 입향(入鄕)했을 때 마을에는 도적떼가 심해 토족(土族)이었던 공(孔)씨, 봉(奉)씨 문중과 의형제를 맺은 후 뒷산에 토성(土城)을 쌓고 도적을 방비했다고 한다. 고려시대에 축성돼 아산만과 안성천, 진위천, 좌교천을 통해 들어오는 왜적을 방비했고, 조선시대에는 조창과 관련해 항곶포를 보호했다. 임진왜란 때 승병 1,500명을 이끌고 서천사 부근에 머물렀던 사명당이 왜적의 방비를 위해 쌓았다고 한 것으로 보아 임진왜란 때도 이용됐을 가능성이 크다. <참고문헌: 평택시사(평택시사편찬위원회 펴냄)> ※ 다음호(673호)에서는 ‘평택서북부지역 - 자미산성(慈美山城)’이 이어집니다. 김지영 기자 ptlnews@hanmail.net
    • 평택시사(平澤市史)
    2023-03-24
  • 평택시史로 보는 ‘평택지역의 성곽 유적’ ⑦
    영신고성, 동고서저·북고남저 삼태기형... 토축 포곡식 평산성 지제동산성, 울성마을 북쪽 테미산에 위치하는 테뫼식 토축산성 ▲ 영신고성 동벽 ◆ 동삭동 영신고성(永新古城, 소재지: 동삭동 원동삭(작은말), 시대: 고려시대 추정) 동삭동 영신고성은 두리봉에 있는 토축의 포곡식 평산성이다. 단면은 동고서저, 북고남저의 삼태기형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영신고성’이라 기록돼 있고, 평택문화원에서 1991년 간행한 『향토사료집』 제1권에는 “마도 두리봉에 토성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영신마을에서 칠괴동으로 통하는 곳이 북문지로 추정된다. 영신지역은 고려 초인 940년(태조 23) 영풍현을 영신현으로 개칭해 1018년(현종 9) 수원의 속현으로 됐다가, 조선 초인 1433년(세종 15) 진위현에 병합됐다. 『여지도서』에 여방면 관할동리가 6개 리가 있는데, 그 가운데 영신리가 있다. 이 영신리가 고려시대 영신현의 읍치였던 것으로 생각되는데, 지금의 동삭동으로 모산골, 서재, 영신 자연마을이 있으며, 영신은 동삭·중간말·큰말로 나뉜다. 동삭동 영신마을(작은말-원동삭-동촌) 동편에 있는 두리봉(해발 43m)의 야트막한 구릉에 오르면 30미터 내외의 주변 구릉들이 한눈에 보이며, 영신골·영신들·배기다리까지 잘 조망된다. 조선 태종 때 폐지된 옛 영신현의 읍성을 방비하기 위한 목적으로 축성됐을 것으로 생각된다. ▲ 지제동산성 ◆ 지제동산성(소재지: 지제동 울성마을, 시대: 삼국시대 추정) 지제동산성은 울성마을의 북쪽 봉우리 테미산(해발 56.1m)에 위치하는 테뫼식의 토축산성이다. 둘레는 220m 정도이며, 평면은 동서로 긴 타원형을 하고 있다. 북사면으로 공동묘지가 있어 성벽의 파괴가 극심한 편이고, 동·남사면에서만 일부 편축(片築)한 흔적을 확인할 수 있다. 서벽부는 밭으로 경작되고 있으며, 정상부에는 동서 14m, 남북 22m의 평탄대지가 조성돼 있다. 유물은 청동기시대의 무문토기류와 백제시대 타날문토기류가 채집되고 있다. <참고문헌: 평택시사(평택시사편찬위원회 펴냄)> ※ 다음호(672호)에서는 ‘평택동남부지역 - 방축리산성’이 이어집니다. 김지영 기자 ptlnews@hanmail.net
    • 평택시사(平澤市史)
    2023-03-17
  • 평택시史로 보는 ‘평택지역의 성곽 유적’ ⑥
    부락산성, 서쪽 동벽 상단 1m, 하단 3~5m, 높이 5~6m 정도 송장성지, 토축으로 만들어졌고 석축 일부 보강한 평산성 ▲ 지산동 부락산성 서쪽 부분 동벽 ◆ 지산동 부락산성(소재지: 지산동 부락산, 시대: 고려시대 추정) 지산동 부락산성은 부락산을 동서로 하는 포곡형 장성형태다. 서쪽 부분은 고려시대에 견산리 진위현에서 오리곡, 송장현으로 연결된다. 예비군 훈련장으로 사용되던 곳으로 현재 경작지로 쓰이고 있다. 서쪽 토성지 동벽에는 상단너비 1m, 하단너비 3~5m, 성벽 높이 5~6m, 성벽길이 70m 정도의 토루와 동문지가 확인된다. 오리곡을 거쳐 지산동 건지마을에서 송장현 치소인 동령리로 통하는 길목이다. 최고봉인 우곡봉(127.9m) 정상에는 회색 무문 기와편들이 산재하고 지형여건상 장대지의 군창으로 생각되며 북쪽에는 북치성이 있다. 우곡봉 정상 남쪽에 대수골 빈대바위에는 550년 전 절이 있었고, 스님 한 분이 기거했다는 전설이 있으며, 고려시대 양식인어골문 기와편들이 산재하고 있다. 고려 고종 때 몽고의 살리타이를 사살한 김윤후가 일찍 승이 돼 흰치고개에서 수도했다는 기록이 있어 연관성이 보인다. ▲ 송장성지 동벽 ◆ 동령리 송장성지(松莊城址, 소재지: 이충동 동령마을, 시대: 고려시대 추정) 송장성지는 주로 토축으로 만들어졌고 석축을 일부 보강한 형태의 포곡형 평산성이다. 단면은 동고서저, 북고남저의 삼태기형 모양이다. 송장성지가 있는 이충동 동령마을은 삼국시대에 송장부곡, 940년(고려 태조 23)에는 송장현, 1424년(세종 6)에는 진위현에 이속되면서 송장면이 된 지역으로 치소(治所)와 관련된 읍성(邑城)으로 추정된다. 동쪽으로 통하는 성황목 아래는 동문지로 추정되며, 동벽이 장안동 코오롱 하늘채 아파트 윗부분까지 토루의 흔적이 보인다. 또한 역사적으로 성(城)과 같은 관방유적의 경우 지명(地名)에서 흔적을 찾을 수 있는데, 마을 입구를 ‘성물백이’라고 부르고, 송탄고등학교로 넘어가는 고개를 ‘성현(城峴)’이라고 부르고 있다. 성물백이라는 말은 ‘성문 밖’이라는 뜻이고, 성현은 우리말로 ‘성 고개’라는 뜻이다. 서문지에 석축을 일부 쌓은 것으로 보이며, 최근 주택 개발로 인해 파괴되고 있다. 『고려사』에 따르면 고려 말 왜적의 침입이 양성, 송장지역에 미친 것으로 보아, 이에 대비해 쌓은 것으로 보인다. <참고문헌: 평택시사(평택시사편찬위원회 펴냄)> ※ 다음호(671호)에서는 ‘평택동남부지역 - 동삭동 영신고성’이 이어집니다. 김지영 기자 ptlnews@hanmail.net
    • 평택시사(平澤市史)
    2023-03-10
  • 평택시史로 보는 ‘평택지역의 성곽 유적’ ⑤
    퇴봉산성, 진위면 마산4리 퇴봉산 8부 능선에 축조된 테뫼식 토석성 ▲ 마산리 퇴봉산성 ■ 평택동남부지역 평택동남부지역은 천덕산에서 뻗어 내려온 산줄기가 동서로 학이 많은 형국을 이루고 있는 다학산(多鶴山)과 부락산으로 이어진다. 다학산의 최고봉인 퇴봉산에는 마산리 퇴봉산성이 있다. 부락산 정상 우곡봉에서 기와편이 발견되고 서쪽 능선에 토루 흔적이 있는 부락산성과 가지능선에 동령리의 송장성은 고려시대 송장현이 있었던 점을 감안할 때, 송장현의 치소(治所)였을 것으로 추정되며 동령리에 읍성의 형태로 왜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축성됐을 것으로 보인다. 진위천변의 울성마을의 지제동산성, 방축리성, 동삭동 영신고성은 통일신라 영풍현, 고려 현종 때 수주부의 영현(領縣)이었던 영신현의 치소와 관련된 작은 성(城)이다. 축성(築城) 시기는 삼국시대부터였을 것으로 보인다. 왜구가 1378년 아산만 일대에 침투한 일이 있었다. 종덕(宗德)·송장(松莊)·영신(永新) 등 여러 현을 침구했으나 원수 최공철, 왕빈, 박수경 등의 반격으로 더 이상 전진하지 못하고 패퇴했는다는 기록과 임진왜란 시 사명대사가 머물렀다는 기록으로 보아 진위천 남안의 산성들이 이때 큰 역할을 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 마산리 퇴봉산성(소재지: 진위면 마산4리 퇴봉산, 시대: 삼국시대) 진위면 마산4리에 위치한 퇴봉산 8부 능선에 축조된 테뫼식 토석성이다. 평면 형태는 남북 방향을 장축으로 타원형을 하고 있다. 퇴봉산성은 퇴봉산 정상부인 해발 168.2m로부터 20여m 아래에 있다. 토성벽의 축조에는 능선을 깎아 토루를 만드는 삭토공법(削土工法)을 활용하고 토루 안에는 능선을 삭토해 성벽을 만들었는데 성벽 안쪽에 폭은 1.5m이고 높이는 2m 정도로 3군데의 테가 남아 있다. 둘레는 100m~150m가량 되며 이 회곽도를 통해 산허리를 쉽게 올라가는 길이 나있다. 퇴봉산성은 규모가 작은 산성에서 산봉우리를 중심으로 정상부근 테를 두른 듯한 테뫼형으로 높은 산봉우리에 쌓고 있는 것으로 보아 삼국 초기 산성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성내시설물로는 장대지 1개소, 건물지 1개소, 동문지 1개소, 토축의 회곽도가 있다. 돌과 자연활석이 혼합된 토석성은 삼국초기 백제산성이다. <참고문헌: 평택시사(평택시사편찬위원회 펴냄)> ※ 다음호(670호)에서는 ‘평택동남부지역 - 지산동 부락산성’이 이어집니다. 김지영 기자 ptlnews@hanmail.net
    • 평택시사(平澤市史)
    2023-03-04
  • 평택시史로 보는 ‘평택지역의 성곽 유적’ ④
    봉남리 산성, 진위면 봉남리 아곡마을을 둘러싼 포곡형 평산성 아곡산성, 아곡마을 동쪽 봉우리에 위치한 테뫼식·토석 혼축성 산성 ▲ 봉남리 산성 ◆ 봉남리 산성(鳳南里山城, 소재지: 진위면 봉남리 아곡마을, 시대: 조선시대) 봉남리 산성은 진위면 봉남리 아곡마을을 둘러싼 포곡형 평산성이다. 평면 형태는 복합식으로 ∏형태이다. 단면은 북고남저형으로 성내에 비교적 넓은 평탄지가 형성돼 있다. 삼국시대에 읍치의 북편으로 연봉에 2개의 고루와 봉남리 부산고성와 조선시대의 봉남리 아곡산성이 읍치를 보호하기 위해 산성을 축조했다기보다는 읍치의 입지 선정 과정에서 방어상 유리한 기존의 산성의 위치를 고려한 것으로 생각된다. 또한, 고려 말경에 진위현의 읍치가 견산리에서 봉남리로 옮기게 되면서 읍치를 보호하기 위해 적을 물리치고, 동태를 살필 수 있는 역할을 여러 개 산성이 함께 하게 된다. 치성·망대지·장대지 등이 북쪽과 남쪽의 왜적을 살피고 침입을 막기 위한 역할을 하며 3개의 산성이 통합되고, 봉남리 아곡마을을 둘러싸는 독특한 평면구조로 변화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성내시설물로는 문지 5개소, 장대지 1개소, 치성 10개소, 건물지 1개소 등이 남아 있다. ▲ 봉남리 아곡산성 ◆ 봉남리 아곡산성(鳳南里 牙谷山城, 소재지: 진위면 봉남리 아곡마을 산22-1, 시대: 조선시대) 봉남리 아곡산성은 진위면 봉남리 아곡마을 동쪽 봉우리(121.5m)인 산 22-1번지에 위치하는 테뫼식 산성이며 토석 혼축성이다. 평면 형태는 세장방형으로, 봉우리면의 9부 능선을 삭토한 후 부분적으로 암반을 떼어내고 축성했다. 성의 중앙부에 건물지와 장대지가 있고, 성의 둘레가 170.6m 성의 높이가 1~5m로 북벽에는 높이 1.5m 길이 20m 되는 병풍바위가 있는데 “옛날 북쪽에서 내려오는 적군을 방어하기 위해 대피소로 사용됐던 곳”으로 전하는 것으로 보아, 봉남리 산성의 유사시 입보농성을 하면서 진위천 등 주변을 조망하기에 유리해 망대 역할을 했을 것으로 보인다. <참고문헌: 평택시사(평택시사편찬위원회 펴냄)> ※ 다음호(669호)에서는 ‘평택동남부지역 - 마산리 퇴봉산성’이 이어집니다. 김지영 기자 ptlnews@hanmail.net
    • 평택시사(平澤市史)
    2023-02-27
  • 평택시史로 보는 ‘평택지역의 성곽 유적’ ③
    성벽의 동벽과 북벽 원형 잘 남아... 서벽과 남벽은 대부분 파괴돼 ▲ 견산리 부성 북문지 ◆ 견산리 부성(釜城, 소재지: 진위면 견산리, 시대: 고려시대) 견산리 부성은 무봉산을 주봉으로 해 진위천변으로 뻗은 남서쪽 35~55m 능선 일봉산 골짜기의 벌미마을을 둘러싼 토축의 포곡형 평산성이다. 평면 형태는 북동-남서방향인 동서 장축의 삼태기형이며, 단면은 동고서저, 북고남저이다. 성벽의 동벽과 북벽은 원형이 잘 남아 있고, 서벽과 남벽은 대부분 파괴됐으며, 성벽의 길이는 427.6m이다. 성벽의 높이는 바깥쪽이 4.5m~5.4m, 안쪽은 1.9~4.6m 내외이며, 북쪽의 성벽이 경사가 심하다. 표토에서 1m 아래 두께 5cm 정도의 숯층이 있어 판축기법이 확인된다. 성내 시설물은 문지 1개소, 치성 5개소, 부가토루, 회곽도, 외황 등이 파악된다. 문지는 북벽에 위치하며 치성은 서벽 1개소 북벽과 동벽에 각 2개소씩 확인된다. 1530년 간행된 『신증동국여지승람』 부산고성에 “동쪽 1리에 있는데 산의 형세가 솥과 같고 장호천이 그 앞으로 흐르고 향교가 그 가운데 있다”라고 기록돼 있어 현의 동쪽 1리 지점인 현재의 진위향교를 둘러싸고 있는 성이 ‘부산고성’인 것이 확인된다. 견산리 부성지에 관한 기록은 1899년 간행된 『진위읍지』에 “현의 서쪽 3리 지점에 있는데, 둘레가 1리를 넘지 않으며, 성첩은 무너져 있다. 고려 때 읍의 터였으며 관백은 첨사였다”라고 한 것으로 보아 견산리 부성(釜城)은 고려시대 읍치고, 고려 말기 읍치가 봉남리로 이동하면서 성의 기능을 상실한 것으로 보인다. <참고문헌: 평택시사(평택시사편찬위원회 펴냄)> ※ 다음호(667호)에서는 ‘평택지역의 성곽 유적 - 봉남리 산성(鳳南里山城)’이 이어집니다. 김지영 기자 ptlnews@hanmail.net
    • 평택시사(平澤市史)
    2023-02-21
  • 평택시史로 보는 ‘평택지역의 성곽 유적’ ②
    연봉고루, 한성백제시대 축성했거나 고구려가 쌓은 것으로 추정 봉남리 부산고성, 해발 30~42m 정도의 낮은 구릉을 따라 축조 ◆ 연봉고루(延峯古壘, 소재지: 진위면 봉남리 아곡, 시대: 삼국시대) 무봉산에서 북동쪽으로 2km 지점인 진위천 상류지역 용인시 무봉리에 토축의 테뫼식 무봉리고루와 서남쪽으로 이어지는 해발 80~130m의 연봉 능선을 따라 동서로 가운데가 약간 들어가고 양쪽 끝은 두 개의 작은 봉우리 형태의 긴 말안장 모양인데, 양쪽 봉우리에 연봉고루 두 군데가 있다. 평택관방유적(Ⅱ), 봉남리산성 익성구역, 북벽과 서벽일부구간에서 무문토기와 백제토기가 다량 채집됐다. 무문토기를 비롯한 백제토기들이 발견되는 것으로 보아 한성백제시대 축성했거나, 고구려가 이 지역을 차지하면서 쌓은 것으로 추정된다. ▲ 봉남리 부산고성 ◆ 봉남리 부산고성(釜山古城, 소재지: 진위면 봉남리 산17, 시대: 삼국시대) 봉남리 부산고성(釜山古城)은 무봉산에서 뻗어 내려와 평원을 중심으로 동서로 뻗은 연봉이 있으며, 남쪽으로 뻗어 내려온 부산이 향교를 감싸며 해발 30~42m 정도의 낮은 구릉을 형성하는 것을 따라 축조된 토축의 테뫼식이다. 성의 둘레가 750m 정도로 평면형은 삼태 기형이고 단면은 동고서저 북고남저이다. 부산의 위치에 대한 기록은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산천조에 “부산(釜山) : 현 동쪽 2리 지점에 있는데 진산이다”가 있고, 『한국땅이름큰사전』에는 “부산 : 경기-평택진위면 봉남리와 가곡리 경계에 있는 산 높이 129m, 진위읍내의 진산이 됨”으로 기록돼 있다. 『여지도서(與地圖書)』 성지조에 “부산고성(釜山古城) : 동쪽으로 1리에 있는데 산의 형세가 솥 걸이와 같고, 좋은 내가 그 앞에 흐르며, 향교가 그 가운데 있다”라는 기록이 있어 현재의 진위향교를 둘러싸고 있음이 확인된다. 부산고성은 이러한 점에서 고구려 산성이 대체로 삼면이 높은 산 또는 절벽으로 둘러싸이고 남쪽만 완만하게 경사가 낮아진 곳에 쌓았으며 성벽은 수직을 이루는 경우가 많다. 김정호가 『대동지지(大東地志)』 목차에서 “삼국이 분쟁할 때 모두 요충지에 성을 축조했다. 지금 소읍에 혹 2~3개의 옛 성이 있고 산마루와 협애한 곳 및 교외에도 고성 고루가 있는데 모두 삼국시대의 유적이다”라고 한 내용 등으로 보아 고구려 장수왕이 475년 안성천 이북인 진위지역을 점령하면서 진위지역은 부산이라는 이름을 갖게 돼, 부산고성을 축성했다. 1843년 간행된 『진위읍지(振威邑誌)』 에는 부산고성이 기록에서 없어지는 것으로 보아 봉남리산성이 이용되면서 부산고성은 성곽으로서의 기능이 사라진 것으로 보인다. <참고문헌: 평택시사(평택시사편찬위원회 펴냄)> ※ 다음호(666호)에서는 ‘평택지역의 성곽 유적 - 견산리 부성(釜城)’이 이어집니다. 김지영 기자 ptlnews@hanmail.net
    • 평택시사(平澤市史)
    2023-02-21
  • 평택시史로 보는 ‘평택지역의 성곽 유적’ ①
    삼국시대에 중국으로 통하는 거점이자 삼국이 각축을 벌인 전략 지역 평택동북부지역 성곽 유적은 옛 진위현 중심으로 무봉산 일대에 배치 ▲ 무봉산성 원경 ■ 동·서남부지역으로 나누어 분포된 성곽 유적 평택지역은 삼국시대에 중국으로 통하는 거점이며, 삼국이 각축을 벌인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지역이었다. 고려~조선시대에는 수도(首都)에 인접한 지역이고 한강유역에서 금강유역으로 통하는 점이지대로서 군사적·전략적뿐 아니라 국가 경제적으로 매우 중요한 지역이었다. 대부분의 관방유적(關防遺蹟)은 삼국시대와 고려시대에 축성된 것으로 진위천 상류인 진위면을 중심으로 하는 동북부지역과 안성천 하류 및 진위천 중 하류지역인 안중읍 용성리를 중심으로 하는 서북부지역, 그리고 옛 폐현(廢縣)의 치소(治所)나 내륙의 수로(水路)와 관련된 성곽이 동·서남부지역 등으로 나누어 분포돼 있다. ■ 평택동북부지역의 성곽 유적 평택동북부지역의 성곽 유적은 옛 진위현을 중심으로 무봉산 일대에 배치돼 있다. 무봉산 정상부의 무봉산성을 비롯해 북동쪽에는 무봉리고루, 남쪽 기슭에는 봉남리 부산고성, 남서쪽 능선인 연봉에는 연봉고루, 서쪽 기슭에는 견산리 부성이 있었다. 고려 말경 진위현의 치소 이동에 따라 연봉고루와 연접해 있는 봉남리 아곡산성과 연결됐다. 봉남리 아곡마을을 둘러싼 봉남리 산성이 만들어졌으며, 경기지역에서 규모가 최대로 긴 하나의 산성이 됐다. ◇ 무봉산성(舞鳳山城, 소재지: 진위면 동천리 무봉산, 시대: 삼국시대) 무봉산성은 무봉산(해발 208.6m)의 9부 능선에 위치하는 테뫼식 석축산성이다. 평면 형태는 남북이 긴 장방형이며, 단면은 성의 중앙부가 높은 원뿔형이다. 현재 성의 둘레는 255.5m이고 성벽 높이는 3∼5m로 성벽 상면에는 회곽도가 폭 2.5~5m가 선명히 남아 있다. 체성벽은 1~2단이며 하단의 기초 보축은 별도의 성벽을 덧댄 형식으로, 성벽의 축성 방법이 2곳에서 확인된 결과 체성벽의 축조 방법, 기단 보축의 형태, 성돌의 재질이 다르다. 석성의 자체 무게로 가운데 부분이 튀어 나오는 것(배부름)을 방지하기 위해 원래의 석성(기초성벽)은 허리께까지 보축성벽을 쌓아 올린 구조로 서벽이 다른 성벽보다 낮게 쌓여 있다. 성내 시설물로는 장대지, 추정 저수유구, 추정 수구지가 1개소, 추정문지, 건물지가 있다. <참고문헌: 평택시사(평택시사편찬위원회 펴냄)> ※ 다음호(666호)에서는 ‘평택지역의 성곽 유적 - 연봉고루(延峯古壘)’가 이어집니다. 김지영 기자 ptlnews@hanmail.net
    • 평택시사(平澤市史)
    2023-02-07
  • 평택시史로 보는 ‘평택지역의 나루·포구 유적’ ⑧
    조선시대 말과 소를 운송했던 곳... 화성시 장안포와 연결된 나루 ▲ 포승읍 홍원리 호구포(2005) ◆ 평택시 포승읍 홍원리에 위치했던 호구포와 자오포 조선시대 홍원목장의 말과 소를 운송했던 곳이며, 화성시 장안면 장안포와 연결됐던 나루다. 청북면이나 포승읍, 안중읍의 주민들은 발안장을 보거나 수원을 다녀올 때 자오포나 호구포에서 배를 타고 장안포에서 내렸으며, 화성시 장안면 사람들도 자오포를 통해 안중장을 오갔다. 홍원목장은 홍원리와 포승면 원정리, 도곡리 등 5곳에 걸쳐 있었으며 초기에는 말을 사육하다가 후기에는 소도 길렀다. 목장의 말은 제주도에서 어린 말을 들여와 사육한 뒤 자오포나 호구포에서 실어냈다. ◆ 포승읍 만호리 대진이 대당교역 중심 역할 맡아 지금까지 평택지역의 나루와 포구 유적을 알아보았다. 아산만 유역에 수로(水路), 해로(海路) 교통이 발달한 것은 삼한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삼국통일을 전후해 평택시 포승읍 만호리의 대진(大津)이 대당교역의 중심 역할을 했으며, 근대 전후에도 충청도 내포지역을 연결하는 교통 및 교역창구 역할을 했다. 조선시대의 지리지(地理誌), 읍지(邑誌)에는 안성천, 진위천 변의 여러 포구 유적이 소개되어 있으며, 16세기에 제작된 『신증동국여지승람』 진위현 조에는 나루와 포구가 나와 있지 않고 평택현의 오을미곶포(吾乙未串浦)·시포(市浦)·신덕포(新德浦)·군물진이 소개되어 있다. 조선후기 대동법이 실시되면서 경강상인들의 조운활동과 선상활동이 활발해졌고, 이로 인해 평택지역에도 나루와 포구들이 만들어졌으며, 1899년 『진위군읍지』에는 군문포·황구포·고잔포·해창포가 수록돼 있다. 또한 18∼19세기의 고지도에 기존의 나루, 포구 외에도 다라고비진·동청포·항곶포(황구포)가 표시돼 있으며, 18세기 초에 편찬된 『팽성지』에는 곤지나루·신덕포·삽교포·통복개·시포 등 5개의 나루와 포구가 기록되어 있다. 이외에도 1808년(순조 8)에 편찬된 『만기요람』에는 만호리의 대진(大津)을 소개하고 있다. 대진은 옛 기록에 솔개바위나루 또는 한진으로 불렸다. <참고문헌: 평택시사(평택시사편찬위원회 펴냄)> ※ 다음호(665호)에서는 ‘평택지역의 성곽 유적’이 이어집니다. 김지영 기자 ptlnews@hanmail.net
    • 평택시사(平澤市史)
    2023-01-30
  • 평택시史로 보는 ‘평택지역의 나루·포구유적’ ⑦
    ‘조선방역지도’에 따르면 대진(大津)은 삼국시대 신라의 대당교역항 ▲ ‘대진’이 있었던 포승읍 만호5리 솔개바위 마을 ◆ 아산만 연안과 발안천 수로의 포구 1. 대진(大津, 위치: 평택시 포승읍 만호5리 솔개바위) 포승읍 만호리의 솔개바위나루의 옛 지명이다. 김정호의 대동여지도에는 한진(漢津), 『만기요람』에는 대진포로 표기돼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수원부 편에는 ‘치소(治所)로부터 남쪽 1백리 지점 포내미에 있다’고 했다. 대진은 좌우 폭이 10여리나 됐다. 대진 부근은 암석이 많으며 물 흐름이 무척 세고 빨랐다. 『신증동국여지승람』과 『만기요람』에도 ‘바람이 일면 파도가 매우 심하다, 조세(潮勢)가 사납다’라고 기록했다. 조선 고종 때 ‘조선방역지도’에 따르면 대진(大津)은 삼국시대 신라의 대당교역항이었다. 『조선방역지도』 여백에 ‘대진삼국시백제어혜군지가리저동치수군창신라평백제치관적욕호수관당지사개상매개취관라인조공역유자인명대진(大津三國時百濟於槥郡之可里渚東置水軍倉新羅平百濟置館積穀號稤館唐之使价商賈皆就館羅人朝貢亦由此因名大津)’라는 문장이 표기돼 있다. 대진은 백제 때는 수군창이 있었으며, 신라의 영역이 되면서 당나라를 오가는 사신들과 상인들이 드나들었다. 포승읍은 1914년 행정구역을 개편하면서 포내면과 승량동면에서 각각 한 글자씩 취해 만들어진 지명이다. 포내면은 고려시대에 포내미부곡에서 유래됐다. 조선시대에도 ‘포내미’라고 불렀다. ▲ 포승읍 만호리 대진나루 조선 초에는 수군첨절제사가 설치됐다. 수군첨사의 설치는 고려 말 왜구의 침입 때문이었다. 그러다가 수군만호로 격하됐고, 1457년(세조 3) 1월에는 왜구의 침입이 중단되면서 아산만 입구 난지도의 수군만호와 통폐합됐다. 수군만호가 폐지된 뒤에도 대진은 충청도 내포지방을 연결하는 해로교통의 요지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도 ‘만조(滿潮) 때에 배로 건너면 홍주(洪州)와 면주(沔州) 등 여러 읍으로 통하는 첩로(捷路)이다’라고 해, 충청도 서북부의 당진·면천(주)·서산·태안·홍성(주) 등 여러 읍(邑)과 교통했음을 알 수 있다. 해방 전후에도 대진은 내포지방을 연결하는 해로교통로로 역할을 했다. 만호리 주민들은 안중장날이면 당진·서산·태안에서 한선에 소를 싣고 오가는 소장수들로 인해 나루터가 붐볐다고 기억하고 있다. <참고문헌: 평택시사(평택시사편찬위원회 펴냄)> ※ 다음호(664호)에서는 ‘아산만 연안과 발안천 수로의 포구 - 호구포(虎口浦)와 자오포’가 이어집니다. 김지영 기자 ptlnews@hanmail.net
    • 평택시사(平澤市史)
    2023-01-13
  • 평택시史로 보는 ‘평택지역의 나루·포구유적’ ⑥
    항곶포, 1970년 전후까지 서정리장 보러 오는 사람들도 이용해 토진포, 간척이 되기 전에는 갯골이 형성되어 배가 드나들어 ▲ 항곶포가 있었던 서탄면 황구지리 부근(2007) ◆ 진위천의 나루와 포구 1. 항곶포(진) 서탄면 황구지리에 있었다. 『진위현읍지』에는 황구포(黃口浦)라고 했고 ‘예전에는 항곶포(項串浦)라고 했으며, 현(縣) 서쪽 20리 지점에 있는데 수원 경계로 통한다’라고 기록했다. 김정호의 『대동지지(大東地志)』에 ‘항곶진(항곶포)’으로부터 비롯됐다. 진위천과 합류하는 황구지천의 본류는 수원 광교산에서 발원한다. 그러다가 수원 시내를 관통하면서 유천과 합류하고, 다시 대황교에서 원천과 합류해 흐르다가 서탄면 내천리에서 내천이 되고, 항곶포가 있는 황구지리 부근에서 황구지천(항곶천)이 돼 진위천(장호천)과 합류한다고 해 본래 항곶포였지만 19세기 후반에 황구포로 바뀌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항곶포는 화성시 양감면의 장안나루와 연결됐다. 1970년 전후까지만 해도 화성시 양감면 용소리 학생들이 배를 타고 건너다녔고, 서정리장을 보러 오가는 사람들도 이 나루를 이용했다. ▲ 옛 톷나루터였던 청북면 토진1리 2. 토진포(위치: 청북면 토진1리) 청북면 토진1리에 있었다. 톷나루·텃나루·선살미나루라고 했다. 반대편의 고덕면 동청리 동청나루와 연결됐으며, 현덕면의 신흥포나 계두진에서 수원을 거쳐 한양을 오가는 소로(小路)와 공수다리가 나루 옆에 있었다. 조선 말기 기록에 토진(土津)은 현곡리의 신포와 함께 청북면 삼계리의 ‘옹포’ 영역이었으며, 경우궁에서 포세(浦稅), 선세(船稅)를 받아 갔다. 나루의 정확한 위치는 토진1리에서 2리로 넘어가는 구릉 건너편 토진1리 주민 김학목의 가족묘 자리에 있었다. 간척이 되기 전에는 갯골이 형성돼 배가 드나들 수 있었다. 일제강점기 근대교통로가 새로이 형성되면서 쇠퇴했다. <참고문헌: 평택시사(평택시사편찬위원회 펴냄)> ※ 다음호(663호)에서는 ‘아산만 연안과 발안천 수로의 포구’가 이어집니다. 김지영 기자 ptlnews@hanmail.net
    • 평택시사(平澤市史)
    2023-0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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