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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택시사(平澤市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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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평택시史로 보는 ‘평택지역의 성곽 유적’ ⑥
    부락산성, 서쪽 동벽 상단 1m, 하단 3~5m, 높이 5~6m 정도 송장성지, 토축으로 만들어졌고 석축 일부 보강한 평산성 ▲ 지산동 부락산성 서쪽 부분 동벽 ◆ 지산동 부락산성(소재지: 지산동 부락산, 시대: 고려시대 추정) 지산동 부락산성은 부락산을 동서로 하는 포곡형 장성형태다. 서쪽 부분은 고려시대에 견산리 진위현에서 오리곡, 송장현으로 연결된다. 예비군 훈련장으로 사용되던 곳으로 현재 경작지로 쓰이고 있다. 서쪽 토성지 동벽에는 상단너비 1m, 하단너비 3~5m, 성벽 높이 5~6m, 성벽길이 70m 정도의 토루와 동문지가 확인된다. 오리곡을 거쳐 지산동 건지마을에서 송장현 치소인 동령리로 통하는 길목이다. 최고봉인 우곡봉(127.9m) 정상에는 회색 무문 기와편들이 산재하고 지형여건상 장대지의 군창으로 생각되며 북쪽에는 북치성이 있다. 우곡봉 정상 남쪽에 대수골 빈대바위에는 550년 전 절이 있었고, 스님 한 분이 기거했다는 전설이 있으며, 고려시대 양식인어골문 기와편들이 산재하고 있다. 고려 고종 때 몽고의 살리타이를 사살한 김윤후가 일찍 승이 돼 흰치고개에서 수도했다는 기록이 있어 연관성이 보인다. ▲ 송장성지 동벽 ◆ 동령리 송장성지(松莊城址, 소재지: 이충동 동령마을, 시대: 고려시대 추정) 송장성지는 주로 토축으로 만들어졌고 석축을 일부 보강한 형태의 포곡형 평산성이다. 단면은 동고서저, 북고남저의 삼태기형 모양이다. 송장성지가 있는 이충동 동령마을은 삼국시대에 송장부곡, 940년(고려 태조 23)에는 송장현, 1424년(세종 6)에는 진위현에 이속되면서 송장면이 된 지역으로 치소(治所)와 관련된 읍성(邑城)으로 추정된다. 동쪽으로 통하는 성황목 아래는 동문지로 추정되며, 동벽이 장안동 코오롱 하늘채 아파트 윗부분까지 토루의 흔적이 보인다. 또한 역사적으로 성(城)과 같은 관방유적의 경우 지명(地名)에서 흔적을 찾을 수 있는데, 마을 입구를 ‘성물백이’라고 부르고, 송탄고등학교로 넘어가는 고개를 ‘성현(城峴)’이라고 부르고 있다. 성물백이라는 말은 ‘성문 밖’이라는 뜻이고, 성현은 우리말로 ‘성 고개’라는 뜻이다. 서문지에 석축을 일부 쌓은 것으로 보이며, 최근 주택 개발로 인해 파괴되고 있다. 『고려사』에 따르면 고려 말 왜적의 침입이 양성, 송장지역에 미친 것으로 보아, 이에 대비해 쌓은 것으로 보인다. <참고문헌: 평택시사(평택시사편찬위원회 펴냄)> ※ 다음호(671호)에서는 ‘평택동남부지역 - 동삭동 영신고성’이 이어집니다. 김지영 기자 ptlnews@hanmail.net
    • 평택시사(平澤市史)
    2023-03-10
  • 평택시史로 보는 ‘평택지역의 성곽 유적’ ⑤
    퇴봉산성, 진위면 마산4리 퇴봉산 8부 능선에 축조된 테뫼식 토석성 ▲ 마산리 퇴봉산성 ■ 평택동남부지역 평택동남부지역은 천덕산에서 뻗어 내려온 산줄기가 동서로 학이 많은 형국을 이루고 있는 다학산(多鶴山)과 부락산으로 이어진다. 다학산의 최고봉인 퇴봉산에는 마산리 퇴봉산성이 있다. 부락산 정상 우곡봉에서 기와편이 발견되고 서쪽 능선에 토루 흔적이 있는 부락산성과 가지능선에 동령리의 송장성은 고려시대 송장현이 있었던 점을 감안할 때, 송장현의 치소(治所)였을 것으로 추정되며 동령리에 읍성의 형태로 왜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축성됐을 것으로 보인다. 진위천변의 울성마을의 지제동산성, 방축리성, 동삭동 영신고성은 통일신라 영풍현, 고려 현종 때 수주부의 영현(領縣)이었던 영신현의 치소와 관련된 작은 성(城)이다. 축성(築城) 시기는 삼국시대부터였을 것으로 보인다. 왜구가 1378년 아산만 일대에 침투한 일이 있었다. 종덕(宗德)·송장(松莊)·영신(永新) 등 여러 현을 침구했으나 원수 최공철, 왕빈, 박수경 등의 반격으로 더 이상 전진하지 못하고 패퇴했는다는 기록과 임진왜란 시 사명대사가 머물렀다는 기록으로 보아 진위천 남안의 산성들이 이때 큰 역할을 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 마산리 퇴봉산성(소재지: 진위면 마산4리 퇴봉산, 시대: 삼국시대) 진위면 마산4리에 위치한 퇴봉산 8부 능선에 축조된 테뫼식 토석성이다. 평면 형태는 남북 방향을 장축으로 타원형을 하고 있다. 퇴봉산성은 퇴봉산 정상부인 해발 168.2m로부터 20여m 아래에 있다. 토성벽의 축조에는 능선을 깎아 토루를 만드는 삭토공법(削土工法)을 활용하고 토루 안에는 능선을 삭토해 성벽을 만들었는데 성벽 안쪽에 폭은 1.5m이고 높이는 2m 정도로 3군데의 테가 남아 있다. 둘레는 100m~150m가량 되며 이 회곽도를 통해 산허리를 쉽게 올라가는 길이 나있다. 퇴봉산성은 규모가 작은 산성에서 산봉우리를 중심으로 정상부근 테를 두른 듯한 테뫼형으로 높은 산봉우리에 쌓고 있는 것으로 보아 삼국 초기 산성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성내시설물로는 장대지 1개소, 건물지 1개소, 동문지 1개소, 토축의 회곽도가 있다. 돌과 자연활석이 혼합된 토석성은 삼국초기 백제산성이다. <참고문헌: 평택시사(평택시사편찬위원회 펴냄)> ※ 다음호(670호)에서는 ‘평택동남부지역 - 지산동 부락산성’이 이어집니다. 김지영 기자 ptlnews@hanmail.net
    • 평택시사(平澤市史)
    2023-03-04
  • 평택시史로 보는 ‘평택지역의 성곽 유적’ ④
    봉남리 산성, 진위면 봉남리 아곡마을을 둘러싼 포곡형 평산성 아곡산성, 아곡마을 동쪽 봉우리에 위치한 테뫼식·토석 혼축성 산성 ▲ 봉남리 산성 ◆ 봉남리 산성(鳳南里山城, 소재지: 진위면 봉남리 아곡마을, 시대: 조선시대) 봉남리 산성은 진위면 봉남리 아곡마을을 둘러싼 포곡형 평산성이다. 평면 형태는 복합식으로 ∏형태이다. 단면은 북고남저형으로 성내에 비교적 넓은 평탄지가 형성돼 있다. 삼국시대에 읍치의 북편으로 연봉에 2개의 고루와 봉남리 부산고성와 조선시대의 봉남리 아곡산성이 읍치를 보호하기 위해 산성을 축조했다기보다는 읍치의 입지 선정 과정에서 방어상 유리한 기존의 산성의 위치를 고려한 것으로 생각된다. 또한, 고려 말경에 진위현의 읍치가 견산리에서 봉남리로 옮기게 되면서 읍치를 보호하기 위해 적을 물리치고, 동태를 살필 수 있는 역할을 여러 개 산성이 함께 하게 된다. 치성·망대지·장대지 등이 북쪽과 남쪽의 왜적을 살피고 침입을 막기 위한 역할을 하며 3개의 산성이 통합되고, 봉남리 아곡마을을 둘러싸는 독특한 평면구조로 변화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성내시설물로는 문지 5개소, 장대지 1개소, 치성 10개소, 건물지 1개소 등이 남아 있다. ▲ 봉남리 아곡산성 ◆ 봉남리 아곡산성(鳳南里 牙谷山城, 소재지: 진위면 봉남리 아곡마을 산22-1, 시대: 조선시대) 봉남리 아곡산성은 진위면 봉남리 아곡마을 동쪽 봉우리(121.5m)인 산 22-1번지에 위치하는 테뫼식 산성이며 토석 혼축성이다. 평면 형태는 세장방형으로, 봉우리면의 9부 능선을 삭토한 후 부분적으로 암반을 떼어내고 축성했다. 성의 중앙부에 건물지와 장대지가 있고, 성의 둘레가 170.6m 성의 높이가 1~5m로 북벽에는 높이 1.5m 길이 20m 되는 병풍바위가 있는데 “옛날 북쪽에서 내려오는 적군을 방어하기 위해 대피소로 사용됐던 곳”으로 전하는 것으로 보아, 봉남리 산성의 유사시 입보농성을 하면서 진위천 등 주변을 조망하기에 유리해 망대 역할을 했을 것으로 보인다. <참고문헌: 평택시사(평택시사편찬위원회 펴냄)> ※ 다음호(669호)에서는 ‘평택동남부지역 - 마산리 퇴봉산성’이 이어집니다. 김지영 기자 ptlnews@hanmail.net
    • 평택시사(平澤市史)
    2023-02-27
  • 평택시史로 보는 ‘평택지역의 성곽 유적’ ③
    성벽의 동벽과 북벽 원형 잘 남아... 서벽과 남벽은 대부분 파괴돼 ▲ 견산리 부성 북문지 ◆ 견산리 부성(釜城, 소재지: 진위면 견산리, 시대: 고려시대) 견산리 부성은 무봉산을 주봉으로 해 진위천변으로 뻗은 남서쪽 35~55m 능선 일봉산 골짜기의 벌미마을을 둘러싼 토축의 포곡형 평산성이다. 평면 형태는 북동-남서방향인 동서 장축의 삼태기형이며, 단면은 동고서저, 북고남저이다. 성벽의 동벽과 북벽은 원형이 잘 남아 있고, 서벽과 남벽은 대부분 파괴됐으며, 성벽의 길이는 427.6m이다. 성벽의 높이는 바깥쪽이 4.5m~5.4m, 안쪽은 1.9~4.6m 내외이며, 북쪽의 성벽이 경사가 심하다. 표토에서 1m 아래 두께 5cm 정도의 숯층이 있어 판축기법이 확인된다. 성내 시설물은 문지 1개소, 치성 5개소, 부가토루, 회곽도, 외황 등이 파악된다. 문지는 북벽에 위치하며 치성은 서벽 1개소 북벽과 동벽에 각 2개소씩 확인된다. 1530년 간행된 『신증동국여지승람』 부산고성에 “동쪽 1리에 있는데 산의 형세가 솥과 같고 장호천이 그 앞으로 흐르고 향교가 그 가운데 있다”라고 기록돼 있어 현의 동쪽 1리 지점인 현재의 진위향교를 둘러싸고 있는 성이 ‘부산고성’인 것이 확인된다. 견산리 부성지에 관한 기록은 1899년 간행된 『진위읍지』에 “현의 서쪽 3리 지점에 있는데, 둘레가 1리를 넘지 않으며, 성첩은 무너져 있다. 고려 때 읍의 터였으며 관백은 첨사였다”라고 한 것으로 보아 견산리 부성(釜城)은 고려시대 읍치고, 고려 말기 읍치가 봉남리로 이동하면서 성의 기능을 상실한 것으로 보인다. <참고문헌: 평택시사(평택시사편찬위원회 펴냄)> ※ 다음호(667호)에서는 ‘평택지역의 성곽 유적 - 봉남리 산성(鳳南里山城)’이 이어집니다. 김지영 기자 ptlnews@hanmail.net
    • 평택시사(平澤市史)
    2023-02-21
  • 평택시史로 보는 ‘평택지역의 성곽 유적’ ②
    연봉고루, 한성백제시대 축성했거나 고구려가 쌓은 것으로 추정 봉남리 부산고성, 해발 30~42m 정도의 낮은 구릉을 따라 축조 ◆ 연봉고루(延峯古壘, 소재지: 진위면 봉남리 아곡, 시대: 삼국시대) 무봉산에서 북동쪽으로 2km 지점인 진위천 상류지역 용인시 무봉리에 토축의 테뫼식 무봉리고루와 서남쪽으로 이어지는 해발 80~130m의 연봉 능선을 따라 동서로 가운데가 약간 들어가고 양쪽 끝은 두 개의 작은 봉우리 형태의 긴 말안장 모양인데, 양쪽 봉우리에 연봉고루 두 군데가 있다. 평택관방유적(Ⅱ), 봉남리산성 익성구역, 북벽과 서벽일부구간에서 무문토기와 백제토기가 다량 채집됐다. 무문토기를 비롯한 백제토기들이 발견되는 것으로 보아 한성백제시대 축성했거나, 고구려가 이 지역을 차지하면서 쌓은 것으로 추정된다. ▲ 봉남리 부산고성 ◆ 봉남리 부산고성(釜山古城, 소재지: 진위면 봉남리 산17, 시대: 삼국시대) 봉남리 부산고성(釜山古城)은 무봉산에서 뻗어 내려와 평원을 중심으로 동서로 뻗은 연봉이 있으며, 남쪽으로 뻗어 내려온 부산이 향교를 감싸며 해발 30~42m 정도의 낮은 구릉을 형성하는 것을 따라 축조된 토축의 테뫼식이다. 성의 둘레가 750m 정도로 평면형은 삼태 기형이고 단면은 동고서저 북고남저이다. 부산의 위치에 대한 기록은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산천조에 “부산(釜山) : 현 동쪽 2리 지점에 있는데 진산이다”가 있고, 『한국땅이름큰사전』에는 “부산 : 경기-평택진위면 봉남리와 가곡리 경계에 있는 산 높이 129m, 진위읍내의 진산이 됨”으로 기록돼 있다. 『여지도서(與地圖書)』 성지조에 “부산고성(釜山古城) : 동쪽으로 1리에 있는데 산의 형세가 솥 걸이와 같고, 좋은 내가 그 앞에 흐르며, 향교가 그 가운데 있다”라는 기록이 있어 현재의 진위향교를 둘러싸고 있음이 확인된다. 부산고성은 이러한 점에서 고구려 산성이 대체로 삼면이 높은 산 또는 절벽으로 둘러싸이고 남쪽만 완만하게 경사가 낮아진 곳에 쌓았으며 성벽은 수직을 이루는 경우가 많다. 김정호가 『대동지지(大東地志)』 목차에서 “삼국이 분쟁할 때 모두 요충지에 성을 축조했다. 지금 소읍에 혹 2~3개의 옛 성이 있고 산마루와 협애한 곳 및 교외에도 고성 고루가 있는데 모두 삼국시대의 유적이다”라고 한 내용 등으로 보아 고구려 장수왕이 475년 안성천 이북인 진위지역을 점령하면서 진위지역은 부산이라는 이름을 갖게 돼, 부산고성을 축성했다. 1843년 간행된 『진위읍지(振威邑誌)』 에는 부산고성이 기록에서 없어지는 것으로 보아 봉남리산성이 이용되면서 부산고성은 성곽으로서의 기능이 사라진 것으로 보인다. <참고문헌: 평택시사(평택시사편찬위원회 펴냄)> ※ 다음호(666호)에서는 ‘평택지역의 성곽 유적 - 견산리 부성(釜城)’이 이어집니다. 김지영 기자 ptlnews@hanmail.net
    • 평택시사(平澤市史)
    2023-02-21
  • 평택시史로 보는 ‘평택지역의 성곽 유적’ ①
    삼국시대에 중국으로 통하는 거점이자 삼국이 각축을 벌인 전략 지역 평택동북부지역 성곽 유적은 옛 진위현 중심으로 무봉산 일대에 배치 ▲ 무봉산성 원경 ■ 동·서남부지역으로 나누어 분포된 성곽 유적 평택지역은 삼국시대에 중국으로 통하는 거점이며, 삼국이 각축을 벌인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지역이었다. 고려~조선시대에는 수도(首都)에 인접한 지역이고 한강유역에서 금강유역으로 통하는 점이지대로서 군사적·전략적뿐 아니라 국가 경제적으로 매우 중요한 지역이었다. 대부분의 관방유적(關防遺蹟)은 삼국시대와 고려시대에 축성된 것으로 진위천 상류인 진위면을 중심으로 하는 동북부지역과 안성천 하류 및 진위천 중 하류지역인 안중읍 용성리를 중심으로 하는 서북부지역, 그리고 옛 폐현(廢縣)의 치소(治所)나 내륙의 수로(水路)와 관련된 성곽이 동·서남부지역 등으로 나누어 분포돼 있다. ■ 평택동북부지역의 성곽 유적 평택동북부지역의 성곽 유적은 옛 진위현을 중심으로 무봉산 일대에 배치돼 있다. 무봉산 정상부의 무봉산성을 비롯해 북동쪽에는 무봉리고루, 남쪽 기슭에는 봉남리 부산고성, 남서쪽 능선인 연봉에는 연봉고루, 서쪽 기슭에는 견산리 부성이 있었다. 고려 말경 진위현의 치소 이동에 따라 연봉고루와 연접해 있는 봉남리 아곡산성과 연결됐다. 봉남리 아곡마을을 둘러싼 봉남리 산성이 만들어졌으며, 경기지역에서 규모가 최대로 긴 하나의 산성이 됐다. ◇ 무봉산성(舞鳳山城, 소재지: 진위면 동천리 무봉산, 시대: 삼국시대) 무봉산성은 무봉산(해발 208.6m)의 9부 능선에 위치하는 테뫼식 석축산성이다. 평면 형태는 남북이 긴 장방형이며, 단면은 성의 중앙부가 높은 원뿔형이다. 현재 성의 둘레는 255.5m이고 성벽 높이는 3∼5m로 성벽 상면에는 회곽도가 폭 2.5~5m가 선명히 남아 있다. 체성벽은 1~2단이며 하단의 기초 보축은 별도의 성벽을 덧댄 형식으로, 성벽의 축성 방법이 2곳에서 확인된 결과 체성벽의 축조 방법, 기단 보축의 형태, 성돌의 재질이 다르다. 석성의 자체 무게로 가운데 부분이 튀어 나오는 것(배부름)을 방지하기 위해 원래의 석성(기초성벽)은 허리께까지 보축성벽을 쌓아 올린 구조로 서벽이 다른 성벽보다 낮게 쌓여 있다. 성내 시설물로는 장대지, 추정 저수유구, 추정 수구지가 1개소, 추정문지, 건물지가 있다. <참고문헌: 평택시사(평택시사편찬위원회 펴냄)> ※ 다음호(666호)에서는 ‘평택지역의 성곽 유적 - 연봉고루(延峯古壘)’가 이어집니다. 김지영 기자 ptlnews@hanmail.net
    • 평택시사(平澤市史)
    2023-02-07
  • 평택시史로 보는 ‘평택지역의 나루·포구 유적’ ⑧
    조선시대 말과 소를 운송했던 곳... 화성시 장안포와 연결된 나루 ▲ 포승읍 홍원리 호구포(2005) ◆ 평택시 포승읍 홍원리에 위치했던 호구포와 자오포 조선시대 홍원목장의 말과 소를 운송했던 곳이며, 화성시 장안면 장안포와 연결됐던 나루다. 청북면이나 포승읍, 안중읍의 주민들은 발안장을 보거나 수원을 다녀올 때 자오포나 호구포에서 배를 타고 장안포에서 내렸으며, 화성시 장안면 사람들도 자오포를 통해 안중장을 오갔다. 홍원목장은 홍원리와 포승면 원정리, 도곡리 등 5곳에 걸쳐 있었으며 초기에는 말을 사육하다가 후기에는 소도 길렀다. 목장의 말은 제주도에서 어린 말을 들여와 사육한 뒤 자오포나 호구포에서 실어냈다. ◆ 포승읍 만호리 대진이 대당교역 중심 역할 맡아 지금까지 평택지역의 나루와 포구 유적을 알아보았다. 아산만 유역에 수로(水路), 해로(海路) 교통이 발달한 것은 삼한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삼국통일을 전후해 평택시 포승읍 만호리의 대진(大津)이 대당교역의 중심 역할을 했으며, 근대 전후에도 충청도 내포지역을 연결하는 교통 및 교역창구 역할을 했다. 조선시대의 지리지(地理誌), 읍지(邑誌)에는 안성천, 진위천 변의 여러 포구 유적이 소개되어 있으며, 16세기에 제작된 『신증동국여지승람』 진위현 조에는 나루와 포구가 나와 있지 않고 평택현의 오을미곶포(吾乙未串浦)·시포(市浦)·신덕포(新德浦)·군물진이 소개되어 있다. 조선후기 대동법이 실시되면서 경강상인들의 조운활동과 선상활동이 활발해졌고, 이로 인해 평택지역에도 나루와 포구들이 만들어졌으며, 1899년 『진위군읍지』에는 군문포·황구포·고잔포·해창포가 수록돼 있다. 또한 18∼19세기의 고지도에 기존의 나루, 포구 외에도 다라고비진·동청포·항곶포(황구포)가 표시돼 있으며, 18세기 초에 편찬된 『팽성지』에는 곤지나루·신덕포·삽교포·통복개·시포 등 5개의 나루와 포구가 기록되어 있다. 이외에도 1808년(순조 8)에 편찬된 『만기요람』에는 만호리의 대진(大津)을 소개하고 있다. 대진은 옛 기록에 솔개바위나루 또는 한진으로 불렸다. <참고문헌: 평택시사(평택시사편찬위원회 펴냄)> ※ 다음호(665호)에서는 ‘평택지역의 성곽 유적’이 이어집니다. 김지영 기자 ptlnews@hanmail.net
    • 평택시사(平澤市史)
    2023-01-30
  • 평택시史로 보는 ‘평택지역의 나루·포구유적’ ⑦
    ‘조선방역지도’에 따르면 대진(大津)은 삼국시대 신라의 대당교역항 ▲ ‘대진’이 있었던 포승읍 만호5리 솔개바위 마을 ◆ 아산만 연안과 발안천 수로의 포구 1. 대진(大津, 위치: 평택시 포승읍 만호5리 솔개바위) 포승읍 만호리의 솔개바위나루의 옛 지명이다. 김정호의 대동여지도에는 한진(漢津), 『만기요람』에는 대진포로 표기돼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수원부 편에는 ‘치소(治所)로부터 남쪽 1백리 지점 포내미에 있다’고 했다. 대진은 좌우 폭이 10여리나 됐다. 대진 부근은 암석이 많으며 물 흐름이 무척 세고 빨랐다. 『신증동국여지승람』과 『만기요람』에도 ‘바람이 일면 파도가 매우 심하다, 조세(潮勢)가 사납다’라고 기록했다. 조선 고종 때 ‘조선방역지도’에 따르면 대진(大津)은 삼국시대 신라의 대당교역항이었다. 『조선방역지도』 여백에 ‘대진삼국시백제어혜군지가리저동치수군창신라평백제치관적욕호수관당지사개상매개취관라인조공역유자인명대진(大津三國時百濟於槥郡之可里渚東置水軍倉新羅平百濟置館積穀號稤館唐之使价商賈皆就館羅人朝貢亦由此因名大津)’라는 문장이 표기돼 있다. 대진은 백제 때는 수군창이 있었으며, 신라의 영역이 되면서 당나라를 오가는 사신들과 상인들이 드나들었다. 포승읍은 1914년 행정구역을 개편하면서 포내면과 승량동면에서 각각 한 글자씩 취해 만들어진 지명이다. 포내면은 고려시대에 포내미부곡에서 유래됐다. 조선시대에도 ‘포내미’라고 불렀다. ▲ 포승읍 만호리 대진나루 조선 초에는 수군첨절제사가 설치됐다. 수군첨사의 설치는 고려 말 왜구의 침입 때문이었다. 그러다가 수군만호로 격하됐고, 1457년(세조 3) 1월에는 왜구의 침입이 중단되면서 아산만 입구 난지도의 수군만호와 통폐합됐다. 수군만호가 폐지된 뒤에도 대진은 충청도 내포지방을 연결하는 해로교통의 요지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도 ‘만조(滿潮) 때에 배로 건너면 홍주(洪州)와 면주(沔州) 등 여러 읍으로 통하는 첩로(捷路)이다’라고 해, 충청도 서북부의 당진·면천(주)·서산·태안·홍성(주) 등 여러 읍(邑)과 교통했음을 알 수 있다. 해방 전후에도 대진은 내포지방을 연결하는 해로교통로로 역할을 했다. 만호리 주민들은 안중장날이면 당진·서산·태안에서 한선에 소를 싣고 오가는 소장수들로 인해 나루터가 붐볐다고 기억하고 있다. <참고문헌: 평택시사(평택시사편찬위원회 펴냄)> ※ 다음호(664호)에서는 ‘아산만 연안과 발안천 수로의 포구 - 호구포(虎口浦)와 자오포’가 이어집니다. 김지영 기자 ptlnews@hanmail.net
    • 평택시사(平澤市史)
    2023-01-13
  • 평택시史로 보는 ‘평택지역의 나루·포구유적’ ⑥
    항곶포, 1970년 전후까지 서정리장 보러 오는 사람들도 이용해 토진포, 간척이 되기 전에는 갯골이 형성되어 배가 드나들어 ▲ 항곶포가 있었던 서탄면 황구지리 부근(2007) ◆ 진위천의 나루와 포구 1. 항곶포(진) 서탄면 황구지리에 있었다. 『진위현읍지』에는 황구포(黃口浦)라고 했고 ‘예전에는 항곶포(項串浦)라고 했으며, 현(縣) 서쪽 20리 지점에 있는데 수원 경계로 통한다’라고 기록했다. 김정호의 『대동지지(大東地志)』에 ‘항곶진(항곶포)’으로부터 비롯됐다. 진위천과 합류하는 황구지천의 본류는 수원 광교산에서 발원한다. 그러다가 수원 시내를 관통하면서 유천과 합류하고, 다시 대황교에서 원천과 합류해 흐르다가 서탄면 내천리에서 내천이 되고, 항곶포가 있는 황구지리 부근에서 황구지천(항곶천)이 돼 진위천(장호천)과 합류한다고 해 본래 항곶포였지만 19세기 후반에 황구포로 바뀌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항곶포는 화성시 양감면의 장안나루와 연결됐다. 1970년 전후까지만 해도 화성시 양감면 용소리 학생들이 배를 타고 건너다녔고, 서정리장을 보러 오가는 사람들도 이 나루를 이용했다. ▲ 옛 톷나루터였던 청북면 토진1리 2. 토진포(위치: 청북면 토진1리) 청북면 토진1리에 있었다. 톷나루·텃나루·선살미나루라고 했다. 반대편의 고덕면 동청리 동청나루와 연결됐으며, 현덕면의 신흥포나 계두진에서 수원을 거쳐 한양을 오가는 소로(小路)와 공수다리가 나루 옆에 있었다. 조선 말기 기록에 토진(土津)은 현곡리의 신포와 함께 청북면 삼계리의 ‘옹포’ 영역이었으며, 경우궁에서 포세(浦稅), 선세(船稅)를 받아 갔다. 나루의 정확한 위치는 토진1리에서 2리로 넘어가는 구릉 건너편 토진1리 주민 김학목의 가족묘 자리에 있었다. 간척이 되기 전에는 갯골이 형성돼 배가 드나들 수 있었다. 일제강점기 근대교통로가 새로이 형성되면서 쇠퇴했다. <참고문헌: 평택시사(평택시사편찬위원회 펴냄)> ※ 다음호(663호)에서는 ‘아산만 연안과 발안천 수로의 포구’가 이어집니다. 김지영 기자 ptlnews@hanmail.net
    • 평택시사(平澤市史)
    2023-01-06
  • 평택시史로 보는 ‘평택지역의 나루·포구유적’ ⑤
    다라고비진, 조선 후기 진위현 → 서평택으로 건너는 중요한 나루 동청포, 고덕면 동청리와 청북면 토진리 톷나루를 연결하는 나루 ▲ 다라고비진 포구마을 고덕면 궁1리(2007) ◆ 진위천의 나루와 포구 1. 다라고비진(위치: 고덕면 궁1리) 고덕면 궁리 궁안교 아래에 있었으며, 조선 후기 진위현에서 서평택으로 건너가는 가장 중요한 나루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수원부 남쪽 67리에 있다’고 기록됐다. 다라고비진은 장호천(진위천), 항곶천(황구지천), 토현천(오산천)이 합류해 흐르다가 안성천과 합류하는 지점이었다. 일제강점기에는 소청나루라고도 불렀으며, 현재의 위치는 궁안휴게소 아래 서정천과의 합류 지점이다. 1930년대 후반까지만 해도 막사리 때 안성천을 거슬러 올라온 조기젓배들이 황구지까지 올라갔다고 한다. 1930년 소청교(궁안교)가 놓이면서 큰 배들이 올라가지 못하게 되자 이곳에 배를 대었고 옹진군 덕적도에서 내려온 조개젓, 새우젓, 소라젓배들도 이곳에서 곡물과 물물교환을 했다. ▲ 동청포가 있었던 고덕면 동청2리 원동천(2007) 2. 동청포(위치: 평택시 고덕면 동청2리) 고덕면 동청리와 청북면 토진리 톷나루를 연결했던 나루였다. 조선시대에는 양성현의 읍치 동항리에서 도일동과 고덕면 율포리를 거쳐 동청포를 건너 한산리와 옹포로 건너갔다. 일제강점 뒤에는 청북면 주민들이 서정리역에서 열차를 타거나 서정리장을 갈 때에도 이 나루를 이용했고, 반대로 고덕면이나 서탄면에서 청북으로 건널 때에도 이곳으로 건넜다. 나루는 동청2리 뱃터였지만 일제강점 전후에 계루지들이 간척되면서 동연교 아래로 옮겨졌다. 한국전쟁 직후만 해도 나루터에는 배를 건너 주는 사공이 있었고 주민들은 뱃삯으로 일 년에 얼마씩의 쌀과 보리를 거둬 주었다. 동청포 일대는 아산만의 바닷물이 진위천의 민물과 만나는 지점이어서 어패류가 풍부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우여·붕어·메기·뱀장어·바다새우·민물참게가 많이 잡혔다 하고 『수원부선세혁파성책』에 따르면 백화염 1항아리마다 1냥, 석화염 1항아리마다 1냥 5전을 1884년(고종 21)에 해방영에서 거둬갔고, 배 1척마다 2냥을 선세로 수북면의 서상돈이 거둬갔다고 기한다. <참고문헌: 평택시사(평택시사편찬위원회 펴냄)> ※ 다음호(662호)에서는 ‘진위천의 나루와 포구 - 항곶포(진)’가 이어집니다. 김지영 기자 ptlnews@hanmail.net
    • 평택시사(平澤市史)
    2022-12-30
  • 평택시史로 보는 ‘평택지역의 나루·포구유적’ ④
    신흥포, 아산만 방조제 건설 전 팽성읍 경양포와 아산 백석포 이어 계두진, 육로로 안중 지나 수원 연결... 한양 가는 상인들 많이 이용 ▲ 신흥포가 있었던 신왕1리(2012) ◆ 안성천의 나루와 포구 1. 신흥포(新興浦, 위치: 현덕면 신왕1리) 조선시대 수원부 광덕면이었고 현재는 현덕면 신왕1리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수원부 조에 ‘당포진’으로 기록됐다. 신흥포는 광덕현에서 충청도 평택현이나 아산현으로 건너가는 창구였다. 1974년 아산만 방조제가 건설되기 전에는 팽성읍 노양리 경양포와 아산의 백석포로 건너가는 나루뿐 아니라 안성천 하류의 어항으로도 큰 역할을 했다. ‘수원부선세혁파성책’에 청어 1동마다 5전, 조기 1동마다 5전, 미역 1동마다 2냥, 조 1섬마다 1전, 쌀 1섬마다 2전, 대맥 1섬마다 1전, 돈 백냥을 1년 포세로 주인이 거둬갔다. 또 청어 1동마다 3냥, 조기 1동마다 2냥, 미역 1동마다 3전, 대맥 1섬마다 2전, 염 1섬마다 2전, 목화 1척마다 3냥, 창호지 1동마다 15냥, 우피 1장마다 1냥, 담배 1척마다 1냥 5전, 돈 100냥을 포세로 주인이 거둬갔는데 1886년(고종 23)부터 순화궁에서 거둬갔다는 기록이 있다. 위의 품목을 보면 조선 말기의 신흥포는 단순히 어항이나 나루뿐 아니라 선상(船商)들에 의한 포구상업도 활발했다. ▲ 계두진이 있었던 평택호관광지 일대(2011) 2. 계두진(鷄頭津, 위치: 현덕면 권관리) 현덕면 권관리 노랑바위에 있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수원부 조에 ‘수원부에서 남쪽으로 80리(『대동지지』도 동일함)인데 아산으로 통한다’고 했다. 조선 후기에는 아산시 인주면 공세포나 백석포에서 배를 타면 계두진에 내릴 수 있었다. 계두진에서는 육로로 안중을 지나 수원으로 연결됐기 때문에 한양으로 가는 과객들이나 상인들이 많이 이용했다. 해방 전후에는 주로 어항과 나루로 기능했지만 1974년 아산만방조제로 막힌 뒤에는 기능을 상실했다. 지금은 요트와 윈드서핑장으로 활용되고 있다. <참고문헌: 평택시사(평택시사편찬위원회 펴냄)> ※ 다음호(661호)에서는 ‘진위천의 나루와 포구 - 다라고비진’이 이어집니다. 김지영 기자 ptlnews@hanmail.net
    • 평택시사(平澤市史)
    2022-12-16
  • 평택시史로 보는 ‘평택지역의 나루·포구유적’ ③
    삽교포, 신대동에 있었던 포구... 배 타면 지제동까지 올라가 곤지진, 삼국시대에는 배 타고 현덕면 신흥포로 건너가 ▲ 삽교포 포구마을 신대동 삽교(2010) ◆ 안성천의 나루와 포구 1. 삽교포(揷橋浦, 위치: 신대동 삽교) 신대동 삽교마을 신대교 아래에 있었던 포구다. 안성천과 도일천이 합쳐지는 지점인데다 바닷물이 유입돼 하천이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주민들은 하천에 섶다리를 놓고 건너다녔는데 이것이 마을 이름이 됐다. 옛날 이곳에서 배를 타면 지제동까지 올라갈 수 있었으며, 고덕면이나 팽성읍과도 통했다고 한다. 삽교포는 1922년 신대교 가설과 주변 지역의 간척으로 역할이 줄어들다가 1974년 이후 폐지됐다. ▲ 곤지진이 있었던 옛 대추리 곤지머리(2005) 2. 곤지진(昆地津, 위치: 팽성읍 (구)대추리) 지금은 미군기지 확장공사로 편입된 팽성읍 구 대추리에 있었다. 대추리 지역은 해방 전후 도두리벌이 간척되기 전까지는 포구였다. 삼국시대에는 경주에서 청주와 진천 또는 천안을 거쳐 북상하면 곤지진에서 배를 타고 현덕면 신흥포나 계두진으로 건넜다. 18세기 초에 편찬된 사찬(私撰) 『팽성지』에 의하면 ‘이곳은 수원으로 왕래하는 나루이다. 밀물 때는 배를 타고 건너지만 썰물에는 옷을 걷고 건널 수 있다. 고깃배 새우젓배들이 나루에 매어져 있다. 이 나루의 위쪽에 기우단(祈雨壇)이 있다’는 기록이 있다. 김정호의 『대동지지』에도 ‘수원부와 소북면으로 통한다’고 했다(여기에서 수원은 서평택지역의 오성면과 현덕면을 말한다). 크게 번성했던 곤지진은 1899년 『평택현읍지』가 편찬될 때쯤에는 포구로서의 기능을 거의 상실했다. ‘토사가 많이 쌓여 배가 들어올 수 없다’는 기록이 있어 오랜 시간 토사가 쌓여 나루로서의 기능을 거의 상실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52년 K-6 미군기지가 주둔할 때까지만 해도 소금배나 고깃배가 드나들었으며, 뱃터에는 주막집이 세 집이나 있었다고 한다. <참고문헌: 평택시사(평택시사편찬위원회 펴냄)> ※ 다음호(660호)에서는 ‘안성천의 나루와 포구 - 신흥포(新興浦)’가 이어집니다. 김지영 기자 ptlnews@hanmail.net
    • 평택시사(平澤市史)
    2022-12-12
  • 평택시史로 보는 ‘평택지역의 나루·포구유적’ ②
    이포진, 수원부에서 남쪽으로 70리... 평택으로 통한다고 기록돼 통복개, 진위현 남쪽 30리 지점... 통복천 하류에 있었던 나루 ▲ 이포진(아래소청나루)이 있었던 동고리(2006) ◆ 안성천의 나루와 포구 1. 이포진(위치: 고덕면 동고1리) 이포진은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처음 나온다. ‘수원부 남쪽 70리에 있으며 평택으로 통한다’고 돼 있다. 조선 후기에 편찬된 『여지도서』 수원부 조에는 금물촌면에 있다고 기록됐고, 다른 읍지(邑誌)에는 평택현으로 넘어가는 나루였다고 했다. 김정호의 『대동지지』에는 수원부에서 남쪽으로 70리 떨어져 있으며 평택으로 통한다고 했다. 일제강점기에는 아래소청나루라고 해 국도38호를 지나 서평택으로 넘어가는 차량과 사람을 실어 날랐다. 이포진에서 배를 타면 안성천 건너 원봉나루나 곤지진, 진위천 건너 오성면 신리 삼동촌으로 건너갈 수 있었다. 이포진은 1930년 궁안교가 가설되고, 1938년 콘크리트 교량으로 교체되면서 역할이 줄었다가 일제 말 수로가 바뀌고 주변 지역이 간척되면서 사라졌다. ▲ 통복포터로 추정되는 화촌(2011) 2. 통복개(포, 위치: 통복동) 통복천 하류에 있었던 나루이다. 『대동지지』에 ‘진위현 남쪽 30리 지점에 있으며, 양성 가천역 하류로 평택으로 가는 길과 통한다’라는 기록이 있다. 1770년경 편찬된 『팽성지』에는 ‘평택현 관아에서 북쪽으로 8리 지점에 있는데, 진위현과 수원부로 갈라지는 경계다’라고 했다. 통복포의 위치는 통복동 화촌으로 보인다. 화촌은 1974년 이전까지만 해도 경기만의 소금과 새우젓, 굴젓이 거래되던 포구였다. <참고문헌: 평택시사(평택시사편찬위원회 펴냄)> ※ 다음호(659호)에서는 ‘안성천의 나루와 포구 - 삽교포’가 이어집니다. 김지영 기자 ptlnews@hanmail.net
    • 평택시사(平澤市史)
    2022-12-02
  • 평택시史로 보는 ‘조선시대 수로 및 해로 교통유적’ ③
    경양포, 팽성읍 서부·현덕면 신흥포 연결한 수로교통로 옹포, 포면세·대동미 담당... 취급량은 총 16,989석 내외 ▲ 양성현의 해창 청북면 삼계리 옹포(2008) ◆ 직산현과 평택현의 해창(海倉) 경양포(위치: 팽성읍 노양1리 뱃터) 조선 건국 후 한양으로 천도하면서 하양창은 폐지됐다. 태조 5년에 경양현도 폐현(廢縣)돼 직산현 경양면이 됐다. 직산현에 이속된 뒤 경양포에는 직산현의 해창으로 경양창이 설치됐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직산현 조에 “경양포(慶陽浦)는 경양현(慶陽縣)에 있는데 해포(海浦)이다”라고 했으나 경양창은 나중에 평택현의 세곡까지 관장하게 돼, 직산현과 평택현 두 고을의 해창이 됐다. 경양포는 팽성읍 서부지역과 현덕면 신왕리 신흥포를 연결한 수로교통로이기도 하다. 나루에는 사공이 상주했으며, 근대 이후에는 서평택 주민들이 열차를 이용할 경우 배를 타고 경양포로 건너와 평택역으로 이동했다. ◆ 양성현의 해창(海倉) 옹포(위치: 청북면 삼계2리 옹포) 옹포(瓮浦)는 고려시대 감미부곡이었고, 조선 초 양성현에 편입돼 감미동면으로 편제됐다. 19세기 전반 청구도(1834)에는 ‘저포’라고도 기록됐고, ‘독개’ 또는 ‘양성독개’라고도 불렀다. 옹포는 양성현의 해창이었다. ‘양성군읍지’에 따르면 옹포에서 담당하던 조세는 포면세(浦面稅)와 대동미(大同米)였고, 취급량은 총 16,989석 내외였다. 본래 이곳에 창고 4개가 있었다. 갑오개혁 뒤에 조세가 금납화되는 과정에서 2개로 줄었다. 옹포에서는 세곡(稅穀)뿐 아니라 포구상업도 활발했다. 나루에는 객주와 여각이 있었고, 대한제국 시기에는 경우궁에서 포세(浦稅)와 선세(船稅)를 징수했다. 일제강점기에 옹포 앞으로 장둑이 축조되고 동척농장들이 간척되면서 옹포는 소작료나 공출미를 반출하는 포구가 됐다. 일제강점기만 해도 벼 2백 섬을 실은 배들이 인천 도정공장으로부터 들어와서 벼를 실어갔다. 해방 후 장둑 아래까지 간척되면서 포구로의 기능을 상실했다. <참고문헌: 평택시사(평택시사편찬위원회 펴냄)> ※ 다음호(656호)에서는 ‘사창(司倉)’이 이어집니다. 김지영 기자 ptlnews@hanmail.net
    • 평택시사(平澤市史)
    2022-11-11
  • 평택시史로 보는 ‘조선시대 수로 및 해로 교통유적’ ②
    하양창, 주로 경기남부와 충청북부 일부 지역의 세곡 담당해 해창포, 봉남리-진위천-신장1동-당현리-좌교리 거쳐 세곡 운송 ▲ 하양창이 설치되었던 팽성읍 노양1리 경양포(2002) ◆ 고려 13조창 하양창(위치: 팽성읍 노양1리 뱃터) 고려시대 평택지역의 조창으로는 전국 13조창 중 하양창(河陽倉)이 있었다. 하양창은 팽성읍 노양1리 타이포(또는 편섭포)에 있었다. 조창이 설치된 것은 10세기 초 전국 12조창이 설치되면서다. 『고려사』에 하양창에 한척에 1,000섬을 실을 수 있는 초마선 6척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하양창에서는 주로 경기남부와 충청북부 일부 지역의 세곡을 담당했다. 이곳의 세곡을 관리하고 운송하기 위해 외관록 20석을 받는 판관을 배속했고, 세곡의 징수와 관리 그리고 운송책임은 고을의 향리와 백성들로 구성된 뱃사공, 소공, 수수와 같은 조군(漕軍)들이 맡았다. 하양창의 중요성 때문에 노양리 일대를 경양현으로 승격시키고 조세운송과 염(鹽)장관을 겸하게 했다. 하양창은 고려 말 왜구의 침입으로 삼남의 해운이 끊기면서 역할이 중단됐고 조선조에는 폐지됐다. ▲ 진위현 해창이 있었던 고덕면 해창3리 창말(2007) ◆ 진위현의 해창(海倉) 해창포(위치: 고덕면 해창3리 창말) 해창3리 창말에 있던 진위현의 해창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해창포(海倉浦)는 현(懸) 남쪽 30리 지점에 있는데 소로(小路)가 수원과 평택 경계로 통한다’라는 기록이 있다. 진위현에서는 읍치(邑治) 봉남리에서 진위천-신장1동-당현리-좌교리를 거쳐 해창포에 이르는 소로를 개설해 세곡 운송을 하게 했다. 해창 뱃터는 일제강점 초기 간척사업으로 구동안들이 조성되면서 사라졌고, 조창이 있던 곳에 뱃줄을 매던 팽나무와 창말이라는 지명이 전해온다. <참고문헌: 평택시사(평택시사편찬위원회 펴냄)> ※ 다음호(655호)에서는 ‘직산현과 평택현의 해창(海倉) 경양포’가 이어집니다. 김지영 기자 ptlnews@hanmail.net
    • 평택시사(平澤市史)
    2022-11-04
  • 평택시史로 보는 ‘조선시대 수로 및 해로 교통유적’ ①
    고려시대에는 하양창 설치... 조선시대에는 고을에 따라 해창과 사창 운영 ▲ 진위천 궁안교 부근(2006) ◆ 조운(漕運) 및 조운유적 조운(漕運)제도는 고려와 조선시대 각 지방에서 국가에 수납하는 세곡(稅穀)을 배를 이용해 서울의 경창(京倉)까지 운송하는 제도다. 이를 위해서 바다와 가까운 강변이나 해안에 조창을 설치했다. 조창의 기능은 지방의 조세를 수취해 보관하거나 선적(船積)해 서울의 경창까지 운송하는 역할이었다. 중앙정부에서는 해운판관이나 수운판관을 파견해 관리했고, 세곡의 수납과 운송을 위해 향리·초공·수수·잡인 등도 조창이 있는 진촌에 거주시켰다. 조운제도가 시작된 것은 고려 초 충주의 덕흥창을 비롯해 전국에 12개의 조창(漕倉)을 설치하면서부터다. 조창은 문종 때 황해도 장연에 안란창이 설치되면서 13조창으로 정비됐다. 고려시대의 조운제도는 13세기말 왜구의 노략질이 심해 부실해졌다가 1376년 모든 세곡운송을 육운(陸運)으로 대체하면서 폐지됐다. 조선은 건국 후 과전법을 실시하면서 조운제도 복구에 노력했다. 15세기 초에는 황해도에서 남해안 섬진강 하구에 이르는 해안과 수로에 조창이 설치됐고 한양에는 경창이 세워졌다. 『경국대전』에 조선 초의 해운 및 수운창은 모두 9개였다. 서남해안에는 모두 4개의 조창이 설치됐다. 조운제도는 그 후 몇 차례의 변동을 겪으며 갑오개혁 때까지 유지됐다. 조세의 징수와 운송을 주관하는 관청은 호조, 주교사, 그리고 조선후기에는 선혜청이었고, 실무책임은 각 조창에 파견된 해운판관이 담당했다. 세곡의 운송 규정은 매우 엄격했다. 30척이 하나의 선단을 유지해야 하고, 역풍이 불어 휴박해야 할 때는 지방 수령은 관찰사와 호조에 보고한 뒤 임시감독관을 임명해 지켜야 했다. 또 선적량을 규정했는데 충청도와 전라도의 조운선은 800석, 경상도는 1,000석 이상을 싣지 못했고 이것을 어긴 경우 중벌을 받았다. 평택지역은 고려시대에는 하양창이 설치됐고, 조선시대는 경기도에 포함되면서 하양창이 폐지되고 고을에 따라 해창과 사창을 운영했다. 해창은 진위현의 해창이었던 해창포와 양성현의 해창이었던 옹포, 직산현과 평택현의 해창이었던 경양포가 있었다. 이밖에 수원부의 사창이었던 설창과 직산현의 사창이었던 안중창 등 각 고을의 사창이 있었다. <참고문헌: 평택시사(평택시사편찬위원회 펴냄)> ※ 다음호(654호)에서는 ‘고려 13조창 하양창’이 이어집니다. 김지영 기자 ptlnews@hanmail.net
    • 평택시사(平澤市史)
    2022-10-28
  • 평택시史로 보는 ‘평택지역 육로교통 유적’ ④
    소사원, 삼남대로 구간의 마지막 원... 충청도에서 넘어오는 관문 역할 상원, 평택현 구간에 있었던 유일한 원... 안정리 서정자 마을로 추정 ▲ 삼남대로 소사원터(2012) ◆ 원(院) 1. 소사원(素沙院, 위치: 소사1동 원소사 마을) 소사동은 1914년 이전에는 양성군 (현) 구룡동면에 속했다. 삼남대로는 소사동 북쪽에서 당산을 넘어 소사원을 지나 소사교를 건넌 뒤 소사벌을 지나 곧장 남쪽으로 내려갔다. 소사원은 삼남대로 경기도 구간의 마지막 원이어서 충청도에서 넘어오는 관문(關門) 역할을 했고, 제8대로(충청수영로)의 분기점이기도 해서 원이 설치됐다. 조선후기에는 소사장이 개장됐고, 호서지방에 대동법을 실시한 김육의 공적을 기려 ‘대동법시행기념비’가 세워졌다. 소사원은 갑오개혁(1894) 때까지 존속됐다가 폐원된 것으로 보인다. 소사원이 폐원된 뒤에는 소사점이 운영됐으며, 소사장도 1920년대 초까지 유지됐다. 현재 소사원 터는 민가로 변했고 옆에는 소사동미륵이 있다. 2. 상원(上院, 위치: 팽성읍 안정리...추정) 조선시대 충청수영로 평택현 구간에 있었던 유일한 원(院)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현(縣) 서쪽 5리 지점에 있다’라 했지만, 18세기에 편찬된 사찬 ‘팽성지’에는 ‘관문 동쪽 5리 지점에 있는데 여지지에는 실려 있지만 현재는 없다’라 했다. 조선 중기까지는 운영되다가 18세기 초쯤 폐원된 것으로 보인다. 상원은 현재의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으며, 관문의 동쪽 5리 지점이라고 했으므로 안정리 서정자 마을(K-6미군기지 건설로 폐동됨) 쯤으로 추정된다. <참고문헌: 평택시사(평택시사편찬위원회 펴냄)> ※ 다음호(653호)에서는 ‘조선시대 수로 및 해로 교통유적’이 이어집니다. 김지영 기자 ptlnews@hanmail.net
    • 평택시사(平澤市史)
    2022-10-24
  • 평택시史로 보는 ‘평택지역 육로교통 유적’ ③
    백현원, 진위현 읍치에서 10리 지점 소재... 여행자들이 쉬어 갔던 곳 갈원, 진위현 읍치에서 20리 거리 설치... 삼남대로 평택 구간 대표적 원 ▲ 삼남대로 백현원이 있었던 송북동 염봉(2002) ◆ 원(院) 1. 백현원(白峴院, 위치: 송북동 동막마을 서북쪽 염봉재 중턱) 백현원은 삼남대로 소백치 중턱에 있었다. 이곳은 진위현의 읍치에서 10리 지점이었다. 백현원은 소백치와 대백치 사이에 있어서 여행자들이 쉬어 갔던 원이었다. 백현원에는 조선 세종 때의 명재상이었던 맹사성의 ‘공당문답’ 고사가 전해온다. 맹사성의 집은 아산시 배방면이어서 한양을 오가려면 충청수영로를 따라 올라오다가 소사원이나 갈원에서 삼남대로와 만나 백현원을 지나가야 했기 때문이다. 백현원은 19세기 이전에 폐원됐고, 대신 동막마을 입구 사거리에 우곡점이 개점돼 역할을 대신했다. 현재 백현원 터는 소백치(염봉재) 중턱에 있으며, 2002년 건설한 삼남로 확장공사에서도 비껴나 남아있다. ▲ 삼남대로 평택구간의 큰주막 칠원1동 갈원(2013) 2. 갈원(葛院, 위치: 칠원1동 주막거리) 갈원은 삼남대로 평택 구간의 가장 대표적인 원(院)이었다. 이곳은 대백치 너머에 있었고, 진위현의 읍치에서 20리 거리여서 원이 설치됐다. 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길목이라 역사적 사건에 연루되거나 전해오는 이야기도 많다. 유적으로는 이괄의 난 때 관군에게 패한 이괄이 숨어 있었다는 ‘이괄의 절터’가 있고 공주로 피난 가던 임금이 물맛에 감탄해 옥관자를 내렸다는 ‘옥관자정’이 있다. 1728년(영조 4)에 발생한 ‘무신 난’에는 갈원의 토호 김정현과 박영동이 주민들을 동원해 난에 참여하려다가 실패한 일도 있었다. 1970년대에는 새마을운동의 중심이어서 옥관자정 옆에 칠원1동 새마을운동공적비가 남아있고, 진위현령 이혜주의 송덕비도 함께 있다. 갈원은 19세기 전후 원(院)으로서의 기능을 상실했지만 민간 점막(店幕)들이 들어서면서 역할을 대신했다. 점막들은 1970년대 새마을운동을 거치며 하나둘씩 사라졌고 현재는 상가건물이 들어섰다. <참고문헌: 평택시사(평택시사편찬위원회 펴냄)> ※ 다음호(652호)에서는 ‘평택지역 육로교통 유적 - 소사원(素沙院)’이 이어집니다. 김지영 기자 ptlnews@hanmail.net
    • 평택시사(平澤市史)
    2022-10-14
  • 평택시史로 보는 ‘평택지역 육로교통 유적’ ②
    이방원·장호원·백현원·갈원·소사원과 충청대로에 상원 등 6개 원 설치돼 ▲ 장호원이 설치됐던 진위면 신리(2006) ◆ 평택지역 육로교통 유적 근대 이전의 육로교통로에는 역(驛)과 원(院), 사설 주막 등의 시설이 있었다. 우물이나 대로와 관련된 구전설화 유적들도 중요하다. 조선 전기 평택지역에는 6개의 원과 2개의 역이 있었다. 6개의 원은 이방원·장호원·백현원·갈원·소사원 그리고 충청대로에 있었던 상원이며, 역은 청호역과 화천역이었다. ◆ 원(院) 1. 이방원(李方院, 위치: 진위면 갈곶리) 진위면 갈곶2리와 청호리 아랫청호마을 사이에 있었던 원(院)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진위현의 읍치(邑治)였던 봉남리에서 10리 거리에 있었다고 기록됐다. 1843년 ‘진위현읍지’에는 ‘승람에는 실려 있으나 없어진 지 오래돼 터만 남았다’고 해 19세기 이전에 폐원(閉院)된 것으로 보인다. 2. 장호원(長湖院, 위치: 진위면 신리) 진위면 신리에 있었던 원(院)으로 진위현의 읍치에서 2리 지점에 있었다. 조선 전기 삼남대로는 진위면 갈곶리 산직촌에서 봉남리를 거쳐 신리로 연결됐는데, 장호원은 진위천 건너 첫 번째 원이었다. 주민들의 증언을 토대로 추정할 때 신리 동쪽 원터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조선 전기 장호원 옆에 ‘인침담’이라는 연못이 있었는데, 온양을 다녀오는 맹사성을 문안하려다 실수한 진위·양성·평택고을 수령들이 관인(官印)을 연못에 빠뜨렸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장호원은 19세기 이전 폐원된 것으로 보이며, 인침담은 19세기 후반 개간사업으로 사라졌다. <참고문헌: 평택시사(평택시사편찬위원회 펴냄)> ※ 다음호(651호)에서는 ‘평택지역 육로교통 유적 - 백현원(白峴院)’이 이어집니다. 김지영 기자 ptlnews@hanmail.net
    • 평택시사(平澤市史)
    2022-10-07
  • 평택시史로 보는 ‘평택지역 육로교통 유적’ ①
    조선전기 6개의 원과 2개의 역... 육로교통로에는 사설 주막 등 시설 ▲ 팽성읍 추팔1리 역말(2008) ◆ 평택지역 육로교통 유적 근대 이전의 육로교통로에는 역(驛)과 원(院), 사설 주막 등의 시설이 있었다. 우물이나 대로와 관련된 구전설화 유적들도 중요하다. 조선전기 평택지역에는 6개의 원과 2개의 역이 있었다. 6개의 원은 이방원·장호원·백현원·갈원·소사원 그리고 충청대로에 있었던 상원이며, 역은 청호역과 화천역이었다. ◆ 역(驛) 1. 청호역(위치: 오산시 원동 역말) 수원부 동화도에 속했다가 세조 때 경기좌도 찰방(察訪)에 속한 역(驛)이 됐다. 행정구역으로는 본래 수원부에 속했지만 1424년(세종 6)에 진위현으로 이속했다. 하지만 진위현은 민호(民戶)가 적은 고을인데 청호역을 떼어 맡아 사신접대의 비용과 폐해가 크다고 해서 세종 20년 수원부에 다시 이속했다. 조선후기의 고지도에는 청호주막이라고 기록돼 역의 기능이 약화되고 점막으로서 역할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2. 화천역(위치: 팽성읍 추팔1리 역말) 화천역은 충청수영로의 첫 번째 역(驛)이었다. 1462년(세조실록 8)의 기록에는 화천역은 금정역 등과 함께 시흥역승의 관할을 받았다가 성환찰방으로 옮겼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평택현의 읍치(邑治)에서 동쪽으로 5리에 있었고 조선후기에 편찬된 『여지도서』와 『팽성지』에도 같은 내용이 있다. 역의 위치는 팽성읍 추팔1리 동쪽으로 비정되며, 마을 안에는 마장(馬場) 터로 추정되는 곳과 우물 2개가 남아 있다. <참고문헌: 평택시사(평택시사편찬위원회 펴냄)> ※ 다음호(650호)에서는 ‘평택지역 육로교통 유적 - 원(院)’이 이어집니다. 김지영 기자 ptlnews@hanmail.net
    • 평택시사(平澤市史)
    2022-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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