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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택시사(平澤市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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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시간 평택시사(平澤市史) 기사

  • 평택시史로 보는 ‘평택시 유천동’ 지명 유래
    조선후기 진위현 지역... 냇가에 버드나무 많아 ‘버드내’라고 불러 ▲ 유천2동 본유천(2010) ◆ 유천동(柳川洞) 조선후기 진위현 병파면과 양성현 영통면 지역이었다. 1914년 상유천리·하유천리·양성군 구룡면 소사리·동역리 일부를 통합해 병남면 유천리라고 했다. 유천리라는 지명은 냇가에 버드나무가 많아 ‘버드내’라고 했던 것을 한자로 표기한 것이다. 1. 양성버드내: 유천1동의 자연마을. 1914년 이전에는 양성군에 속해 유래됐다. 삼남대로가 지나는 길목이었다. 일제강점기에는 안성천 변에서 사금을 많이 채취해 ‘사그막 동네’라고도 불렀다. 2. 진위버드내: 유천2동의 자연마을. 진위현에 속해 유래됐다. ‘본유천’ 또는 ‘버드내’라고도 부른다. 3. 직산말: 유천3동의 자연마을. 조선후기 직산현에 속해 유래됐다. 4. 새말: 유천3동에서 가장 큰 마을. 5. 황룡동: 유천3동의 자연마을. 6. 유천교: 국도 1호선 유천동 부근 안성천을 건너는 콘크리트 다리. ‘흰다리’라고도 불렀다. 7. 안터: 유천1동과 2동 사이에 있었던 마을. 버드나무가 100여 그루 있었지만 화재가 빈번하면서 폐동됐다. 8. 앞뜨미·뜨뜨미: 유천1동의 자연마을 이름. 9. 십한구덩이: 유천1동 동쪽 400m 지점에 있는 물웅덩이. 10. 새마답: 유천1동 하천 변의 지명. 풀과 갈대가 많아서 쇠풀을 뜯기가 좋았다. 11. 사천배기: 유천1동에서 2동으로 넘어 가는 굴다리 부근 지명. 커다란 말 무덤이 있었다. 청일전쟁 때 전사한 일본군 4천 1백 명의 무덤 또는 옛날 말을 타고 싸우다가 전사한 장군의 무덤이라는 전설이 전해온다. <참고문헌: 평택시사(평택시사편찬위원회 펴냄)> ※ 다음호(649호)에서는 ‘평택지역 육로교통 유적’이 이어집니다. 김지영 기자 ptlnews@hanmail.net
    • 평택시사(平澤市史)
    2022-09-23
  • 평택시史로 보는 ‘평택시 월곡동’ 지명 유래
    조선후기 양성현 반곡면 지역... 1914년 원구리에 관동 통합해 ▲ 망월대가 있었던 월곡1동 월구리(2012) ◆ 월곡동(月谷洞) 조선후기 양성현 반곡면 지역. 1914년 원구리에 관동을 통합해 안성군 원곡면 월곡리라고 했다. 월곡1동 뒤에 망월대(望月臺)가 있어 유래됐다. 1. 달곡: 월곡동의 우리말 이름. ‘달구리’라고도 한다. 2. 관동(官洞): 월곡2동의 자연마을. 옛날 관아가 있어 관동, 귀한 사람들이 살았다고 해서 ‘귀골’, ‘구골’이라고도 불렀다. 마을 안에 골밭·향교동·옥터골 등의 지명이 남아 있다. 3. 새터말: 새로 형성된 마을. 4. 망우재: 월곡1동 뒷산으로 망월대가 있어 ‘망운대’ 또는 ‘망우재’라고 했다. 5. 백운산: 월곡동과 안성시 양성면 반제리 사이에 있는 산으로 ‘큰산고개’라고도 한다. 정월 초하루에 월곡1동 마을에서 해돋이 행사를 한다. 6. 전의 이씨 효부 정문: 월곡1동 월구리와 2동 관동 사이에 있는 조한기의 처 전의 이씨 효부 정문. 1705년에 정려됐다. 7. 아래골: 월곡2동 마을 앞의 골짜기. 8. 요골: 월곡2동에 있는 골짜기로 옛날에 그릇을 굽는 가마가 있었다. <참고문헌: 평택시사(평택시사편찬위원회 펴냄)> ※ 다음호(648호)에서는 ‘평택시 청룡동(靑龍洞)’ 지명 유래가 이어집니다. 김지영 기자 ptlnews@hanmail.net
    • 평택시사(平澤市史)
    2022-09-16
  • 평택시史로 보는 ‘평택시 죽백동’ 지명 유래
    조선후기 양성현 반곡면...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침교리·내촌 통합 ▲ 죽백1동 방아다리(2010) ◆ 죽백동(竹柏洞) 조선후기 양성현 반곡면 지역이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침교리, 내촌을 통합해 안성군 원곡면 죽백리라 했다. 1983년 평택시로 편입됐다. 죽백3동이 삼남대로가 지나가는 고개여서 ‘재빼기’라고 했다가 음이 비슷한 한자로 표기하는 과정에서 유래됐다. 1. 방아다리: 죽백1동의 마을이름으로 ‘침교砧橋’라고도 쓴다. 마을 앞 청룡천에 방아공이로 다리를 놓았다 해서 유래됐다. 2. 내촌: 방아다리의 안쪽에 형성된 마을로 ‘안골’이라고도 부른다. 3. 재빼기: 죽백3동의 마을. 삼남대로가 지나가는 고갯마루에 해당돼 ‘재빼기’ 또는 ‘북백’이라고 했다. ▲ 죽백1동 배과수원(2012) 4. 대문재: 재빼기 입구에 해당한다. 옛날에는 하마비가 있어서 말에서 내려 걸어서 넘어갔다고 한다. 5. 산장너머: 방아다리 서쪽 마을로 산장모퉁이라고도 한다. 일제강점기 일본인 산장이 있었다. 6. 속뜸: 방아다리 안쪽마을로 ‘속두모퉁이’라고도 한다. 7. 강당말: 죽백초등학교 주변 마을. 글을 가르치는 서당이 있었다. 8. 수여지: 강당말 앞쪽의 논. 모를 심고도 물이 남아서 유래됐다. 9. 꽃밭재: 강당말에서 용이동 신흥마을로 넘어가는 낮은 고개. 10. 골품고개: 내촌에서 재빼기로 넘어가는 고개. 11. 삼태봉: 내촌 뒷산으로 모양이 삼태기처럼 생겼다. 12. 가내: 삼남대로가 지나는 길목으로 통복천 냇가에 위치해 ‘가내’라고 했다. 근대 전후에는 가내주막이 있었다. <참고문헌: 평택시사(평택시사편찬위원회 펴냄)> ※ 다음호(647호)에서는 ‘평택시 월곡동(月谷洞)’ 지명 유래가 이어집니다. 김지영 기자 ptlnews@hanmail.net
    • 평택시사(平澤市史)
    2022-09-02
  • 평택시史로 보는 ‘평택시 용이동’ 지명 유래
    조선후기 양성현 구룡동면... 1914년 현촌, 양성군 도일면 신흥 통합 ▲ 택지개발로 사라진 용이동 현촌마을(2008) ◆ 용이동(龍耳洞) 조선후기 양성현 구룡동면 지역이었다. 백운산에서 뻗어 내린 산맥이 두 갈래로 나뉘는데 동쪽은 용머리 형상으로 안성군 공도면 용두리를 이루고, 서쪽은 용(龍)의 귀(耳) 언저리에 해당된다고 해서 용이(龍耳)라고 했다. 1914년 현촌과 양성군 도일면의 신흥을 통합해 용이리라고 했다. 1983년 평택군 평택읍에 편입됐다. 1. 구룡동(九龍洞): 백운산으로부터 산맥이 동남향으로 뻗어내려 느름골·배오개골·신선골·오른가리골·미나올골·옥골·소사물골·자바사리골 등 아홉 골짜기를 도는데 아홉 마리의 용이 용트림을 하는 형국이라 해서 유래됐다. 조선후기 양성현 구룡동면의 중심마을이다. 2. 현촌(玄村): 본래 달성 서씨가 거주해 서촌이라고 하다가 연주 현씨가 대성(大姓)을 이루면서 현촌으로 바뀌었다. 2012년 용죽지구 택지개발사업으로 폐동됐다. 3. 신흥(新興): 조선후기 양성현 도일면에 속했다. 본래는 마을 남동쪽 쑥밧갓(평안교회 일대)에 마을이 있었지만 도둑이 많아 지금의 위치로 옮겼다 한다. 4. 왕자봉(방): 구룡동 뒤쪽의 산봉우리. 옛날 왕이 지나가다가 쉬어갔다고 해서 유래됐다. 5. 신흥리고개: 고룽동에서 신흥마을로 넘어가는 고개. 6. 오룡굴: 현촌 동쪽의 골짜기. 오룡가리라고도 했다. 7. 선가자리: 배다리저수지 위쪽으로 옛날 배가 들어왔던 나루터. 8. 배오개: 신흥마을 서북쪽에 길게 형성된 골짜기. <참고문헌: 평택시사(평택시사편찬위원회 펴냄)> ※ 다음호(646호)에서는 ‘평택시 죽백동(竹柏洞)’ 지명 유래가 이어집니다. 김지영 기자 ptlnews@hanmail.net
    • 평택시사(平澤市史)
    2022-08-26
  • 평택시史로 보는 ‘평택시 소사동’ 지명 유래
    조선후기 양성현 구룡동면 지역... 1983년 평택군 평택읍에 편입 ▲ 삼남대로 소사원이 있었던 소사1동 원소사마을(2013) ◆ 소사동(素沙洞) 조선후기 양성현 구룡동면 지역이었다. 1914년 행정구역개편 때 소사리에 송전·자기촌·동역리·서재곡을 통합해 안성군 공도면 소사리(동)라 했다. 1983년 평택군 평택읍에 편입됐다. 소사素沙라는 지명은 소사벌이 흰모래밭이었기 때문에 유래됐다. 1. 원소사: 소사1동의 자연마을. 경기도의 관문이었던 소사원이 있었고, 소사동대동법시행기념비와 소사장이 있었다. 2. 서재곡: 소사2동의 자연마을. ‘서지골’ 또는 ‘쇠죽골’이라고도 부른다. 양성현의 사창육고 가운데 하나로 조선시대 세곡을 싣고 합정동 창말의 조창으로 가던 도중에 소에게 여물을 먹였던 데서 유래됐다. 3. 동역말: 소사동의 옛마을. 현재는 마을 터만 남았다. 4. 송전: 소사3동의 자연마을. 소나무가 우거져 ‘솔밭말’이라고도 한다. 동방학교가 있다. 5. 자기촌: 솔밭말 옆 마을. 6. 소사벌: 소사동 남쪽 소사천에서 안성천 사이의 벌판 이름. 평택평야의 곡창지대이면서 들판 가운데로 삼남대로가 지나갔다. 7. 소사벌대첩: 조선 1597년(선조 30) 9월 5일에 소사벌에서 있었던 명나라 군대와 왜군 사이의 전투. 정유재란으로 재침한 왜군이 진주성과 남원성을 함락하고 삼남대로를 따라 북상하다가 해생·우백영牛伯英·양등산楊登山·파귀頗貴가 이끄는 명나라 기병에게 대패한 전투. 8. 소사원: 조선시대 삼남대로가 지나가는 소사1동에 설치한 국영 주막. 조선후기에 폐원됐다. 9. 소사천: 안성천의 지류로 소사동 남쪽을 흘러가는 하천. 10. 대동법시행기념비: 조선 효종 때 호서지방에 대동법을 실시한 김육金堉(1580-1658)의 공덕을 기려 충청도 백성들이 세운 시혜비. 본래 소사원 옆에 있던 것을 1970년 현재의 위치로 이전했다. 11. 당산: 소사1동 뒷산. 할아버지 당목과 할머니당인 미륵당이 있다. 12. 북내리고개: 소사1동 위쪽으로 넘어가는 고개. 13. 소사동미륵: 소사1동 옛 소사원 옆에 있는 마을미륵. 14. 소사장(터): 조선후기에 형성된 장시. 매월 5일과 10일에 개시開市하다가 평택장과 개시일이 겹치면서 1920년대 폐장됐다. <참고문헌: 평택시사(평택시사편찬위원회 펴냄)> ※ 다음호(645호)에서는 ‘평택시 용이동(龍耳洞)’ 지명 유래가 이어집니다. 김지영 기자 ptlnews@hanmail.net
    • 평택시사(平澤市史)
    2022-08-19
  • 평택시史로 보는 ‘평택시 신대동’ 지명 유래
    조선시대 진위현 성남면 지역... 안성천 갯가에 형성되어 ‘신대’로 표기 ▲ 평택시 신대2동 새터마을(2012) ◆ 신대동(新垈洞) 조선시대 진위현 성남면 지역이었다. 안성천 갯가에 새로 형성된 마을이어서 ‘새터’라고 했던 것을 ‘신대(新垈)’로 표기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성남면 고잔리, 신대리, 오타면 삽교리를 통합해 신대리(동)라고 했다. 1. 새터(말): 신대리의 중심마을. 조선후기 안성천 갯가에 새로 마을이 형성돼 유래됐다. 원신대라고도 한다. 2. 삽교: 신대교를 가설하기 전에는 섶다리를 놓고 도일천을 건너다녀서 유래됐다. 옛날에 포구가 있었다. 3. 고잔: 바닷물이 드나들었던 시절 곶(串)이 형성된 곳에 포구와 마을이 형성돼 유래됐다. 마을에 고잔포가 있었다. 4. 고잔교: 고잔마을 입구에 1958년에 가설한 다리. 5. 서바탱이: 번개들 서쪽 끝에 새로 형성된 마을. ‘신설촌(新設村)’ 또는 ‘석바랑’이라고도 부른다. 평택상공회의소 등이 있다. 6. 신대레포츠공원: 2002년 개장한 35,000㎡ 넓이의 레포츠공원. 축구장·야구장·테니스장·궁도장·어린이놀이터 등이 갖춰져 있다. <참고문헌: 평택시사(평택시사편찬위원회 펴냄)> ※ 다음호(644호)에서는 ‘평택시 소사동(素沙洞)’ 지명 유래가 이어집니다. 김지영 기자 ptlnews@hanmail.net
    • 평택시사(平澤市史)
    2022-08-15
  • 평택시史로 보는 ‘평택시 지제동’ 지명 유래
    조선후기 진위현 성남면... 1914년 지제리·울성리·영신리 일부 통합 ▲ 평택시 지제동에 위치한 평택지제역 ◆ 지제동(芝制洞) 조선후기 진위현 성남면이었다. 1914년 성남면 지제리·울성리, 오타면 울성리, 여방면 영신리 각 일부를 통합해 지제리라 했다. 고갯마루에 마을이 형성돼 ‘뒤재’라고 했던 것을 음이 변해 지제가 됐다고 한다. 1. 구대(舊垈): 지제동의 자연마을. 500여 년 전 단양 우씨가 터를 잡았고 나중에 연안 차씨가 입향해 마을을 이루었다. 2. 당현: 구대에서 여염리 방면으로 넘어가는 산마루에 서낭당이 있어 당고개라고 부르던 것을 한자로 당현이라고 함. 당재말이라고도 하며 지제동에서 가장 오래된 마을이다. 3. 우물말: 당현의 자연마을. 공동우물이 있다. 4. 북우물: 당현 북쪽의 우물가에 형성된 마을. 계곡 사이에서 건수가 나오는 우물이 있어 허드렛물로 사용했다. 5. 울성: 성종의 14남 웅천군파와 15남 양원군파가 개척한 전주 이씨 동족마을이다. 고덕면 방축리성과 태미산성의 울안에 마을이 형성돼 유래됐다. 6. 새터: 구대마을 북동쪽에 형성된 마을. 7. 태미산: 당현과 울성 사이에 있는 산. 도일천 방면으로 불룩하게 솟았고 고려시대에 산 성이 있었다고 한다. 8. 울성저수지 : 울성마을 뒤쪽에 있는 저수지. 옛 문헌에는 도일천 변에도 울성보가 있었 다고 한다. 9. 봉골저수지: 당현마을 북쪽 골짜기에 있는 저수지. 2013년 삼성전자 평택사업장 안에 포함됐다. 10. 지제역 : 2006년에 개통한 서울-천안(신창) 간 노선 전철역. <참고문헌: 평택시사(평택시사편찬위원회 펴냄)> ※ 다음호(643호)에서는 ‘평택시 신대동(新垈洞)’ 지명 유래가 이어집니다. 김지영 기자 ptlnews@hanmail.net
    • 평택시사(平澤市史)
    2022-08-02
  • 평택시史로 보는 ‘평택시 군문동’ 지명 유래
    갑오개혁 뒤 진위군에 속해... 1914년 간포리 합쳐 군문리라 불러 ▲ 군문포 포구마을 군문1동(2013) ◆ 군문동(軍門洞) 조선시대에는 충청도 평택현에 속했다가 갑오개혁 뒤 진위군에 속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간포리를 합쳐 군문리라 했다. 1. 군문포: 군문교 아래에 있었던 포구. 1894년 이전까지는 ‘군물포’라고 했다가 청일전쟁 때 청나라 군사가 주둔하면서 군문포가 됐다. 조선시대에는 충청도 평택현 군물진리였고, 갑오개혁 뒤 진위군 병파면에 속했다. 1914년 행정구역개편으로 진위군 병남면 군문동이 됐다. 근대전후에 경기도에서 충청도로 건너가는 안성천 나루였고, 근대 이후 평택역이 설치되면서 군문교가 놓이고 국도 45호선이 가설되면서 평택장과 아산만 일대의 소금과 해산물을 연결하는 통로가 됐다. 2. 간포: ‘샛개’라고도 한다. 군문1동에서 유천동으로 건너하는 지하차도 부근에 있던 포구마을인데 수해를 입어 주민들은 이동하고 마을은 폐동됐다. 3. 군문교: 일제강점기 초 국도 45호선이 가설되면서 목교(木橋)로 놓였다가 1930년 평택지역 최초의 콘크리트 다리로 바꿨다. 본래 평택교라고 했으며 해방 후 군문교로 바꿨다. 4. 망근다리: 안성천을 건너는 경부선 철교. 청일전쟁 때 청나라 군대의 망군대(망루)가 있던 곳에 철교가 놓이면서 ‘망군다리’라고 했던 것을 음이 변해 망근다리가 됐다. <참고문헌: 평택시사(평택시사편찬위원회 펴냄)> ※ 다음호(642호)에서는 ‘평택시 동삭동(東朔洞)’ 지명 유래가 이어집니다. 김지영 기자 ptlnews@hanmail.net
    • 평택시사(平澤市史)
    2022-07-22
  • 평택시史로 보는 ‘평택시 세교동’ 지명 유래
    진위군 병남면 지역... 통복천 건너는 작은 다리 있어 ‘세교’, ‘잔다리’ ▲ 전통마을과 아파트가 공존하는 세교동(2009) ◆ 세교동(細橋洞) 진위군 병남면 지역으로 통복천을 건너는 작은 다리가 있어 ‘세교’ 또는 ‘잔다리’라고 했다. 1914년 행정구역개편 때 은실리를 통합해 병남면 세교리라 했다. 1. 안잔다리: 잔다리의 중심마을. 잔다리에서도 안쪽에 위치해 안잔다리 또는 윗동네라고 불렀다. 2. 벌잔다리: 잔다리에서 동쪽 벌판 쪽으로 나앉은 마을. 아래잔다리 또는 아랫동네라고도 불렀다. 1990년대 초 세교지구 택지개발공사로 폐동됐다. 3. 새말: 통복시장에서 장사하는 사람, 막일하던 사람들이 모여들면서 형성한 마을. 1990년대 초 세교지구 택지개발로 폐동됐다. 4. 신촌: 경동보일러 건너편 마을. 일제강점기에는 뽕나무밭이었다가 한국전쟁 때 피난민정착사업소가 만들어지면서 마을이 형성됐다. 5. 은실: 중앙초등학교 일대 마을. 6. 큰은실: 은실마을에서 큰 마을. 7. 작은은실: 중앙초등학교 좌측 모퉁이 마을. 돌산 아래에 마을이 형성돼 ‘산아래’라고도 부른다. 은실에서 작은 마을이었다. 8. 은곡: 은실 안쪽 움푹 패인 계곡. ‘음곡’이라고도 한다. 금녕 김씨가 처음 입향한 곳이다. 9. 동산아래: ‘산밑창’이라고도 부른다. 상공회의소 뒤편에 있는 마을로 작은 구릉 아래에 마을이 형성됐다. 10. 봉학골: 1980년대 초 옹기굽던 정석헌 씨가 택지를 조성하고 주민들을 입주시키면서 형성된 마을. 11. 신흥: 봉학골 천주교 공동묘지에 자리 잡은 마을. 처음에는 천주교 교우촌으로 개발되다가 1990년대 초 낙촌지역이 택지개발 되면서 나머지 주민들이 이주해 형성한 마을. 12. 번개방죽: 안잔다리에 있었던 방죽. 모내기를 할 때 잔다리 일대에 물을 공급했다. 13. 당산: 은실마을 뒤쪽의 산. 은실마을 제당이 있으며 밭농사지대로 개발됐다. <참고문헌: 평택시사(평택시사편찬위원회 펴냄)> ※ 다음호(641호)에서는 ‘평택시 군문동(軍門洞)’ 지명 유래가 이어집니다. 김지영 기자 ptlnews@hanmail.net
    • 평택시사(平澤市史)
    2022-07-15
  • 평택시史로 보는 ‘평택시 합정동’ 지명 유래
    조선후기 진위현 병파면 지역... 1914년 합정리·조산리·야미리 통합 ▲ 합정주공아파트에서 바라 본 합정동 일대(2009) ◆ 합정동(蛤井洞) 조선후기 진위현 병파면 지역이었다. 1914년 합정리·조산리·야미리·양성군 구룡동면 창리·서제곡·야미리 각 일부를 통합해 합정리(동)라고 했다. 굿모닝병원·소사벌레포츠타운·청소년문화센터·롯데마트 평택점·평택고등학교 등이 있다. 1. 조개터: 합정동의 본래 이름. 소사천과 백랑천이 가까이 흘러 바닷물이 드나들 때는 말조개, 부전조개(재첩)를 잡았다고 해서 유래됐다. ‘합기(蛤基)’ 또는 ‘합정’이라고도 부른다. 2. 통미: 합정동 주공3단지아파트 북쪽 마을. 1905년 경부선철도 건설과 관련된 사람들이 자리를 잡았고 그 뒤 다양한 사람들이 정착하면서 마을이 형성됐다. 3. 배미: ‘야미(夜味)’라고도 부른다. 하천방향으로 돌출된 조산자락에 마을이 형성돼 유래된 것으로 추정된다. 나루가 있는 마을에서 유래됐다는 주장도 있다. 4. 됫박산: 합정동 주공3단지 안에 있었던 해발 10.2m 높이의 산. 됫박산 마을과 마을제당이 있었지만 1990년경 아파트공사로 사라졌다. 5. 창말: 롯데마트와 합정감리교회 자리에 있었던 마을. 조선후기 양성현의 사창육고 가운데 하나가 있었다. 6. 소금장고개: 조개터에서 조산을 넘어가는 고개. 소금장수들이 넘나들었다고 한다. 7. 조산: 소사벌레포츠타운과 배미 사이에 있는 산 8. 소사벌레포츠타운: 1978년 조개터와 배미 사이 평택종합운동장으로 신설된 스포츠타운. 종합운동장·축구장·농구장·수영장·인라인스케이트장 등을 갖추고 있다. <참고문헌: 평택시사(평택시사편찬위원회 펴냄)> ※ 다음호(640호)에서는 ‘평택시 세교동(細橋洞)’ 지명 유래가 이어집니다. 김지영 기자 ptlnews@hanmail.net
    • 평택시사(平澤市史)
    2022-07-08
  • 평택시史로 보는 ‘평택시 비전동’ 지명 유래
    조선 후기 큰길가에 비석이 있어 ‘비석거리’, ‘비전’이라 부르면서 유래 ▲ 동삭동 아파트 밀집지역(2021.10.01.) ◆ 비전동(碑前洞) 비전1동·동삭동·죽백동·청룡동·월곡동·동삭동 일부 지역과 비전2동 소사동·용이동을 관할하는 행정동이며, 비전1·2동을 관할하는 법정동이다. 조선시대 진위현 병파면 지역이었고, 1914년 병남면으로 통합됐다. 조선후기 큰길가에 비석이 있어 ‘비석거리’ 또는 ‘비전(碑前)’이라고 부르면서 유래됐다. 1914년 행정구역 통합 때 어인남리·산직촌·양성군 구룡동면 창리·서재곡의 일부를 병합해 병남면 비전리라 했다. 1986년 평택시로 승격되면서 비전동이 됐고, 도시 발전에 따라 비전1·2동으로 분할됐다. 1. 어인남리: 비전2동 관할의 자연마을. 덕동산 동쪽에 위치했으며 조선후기에는 ‘남리(南里)’라고 불렀고 지금은 ‘어인남리’ 또는 ‘어린내미’라고 부른다. 양성 이씨와 순흥 안씨가 많이 거주하며 일제강점기 계인조합이 조직돼 ‘계인’이라고도 부른다. 2. 자란(紫蘭): 비전1동 관할의 자연마을. 본래 원곡방면으로 넘어가는 고개가 있어서 ‘재랭이’, ‘당재’라고 부르다가 2000년 경 주민들의 요구에 따라 ‘자란’으로 고쳤다. 무속인들이 많이 거주해 ‘당골’이라고도 한다. 3. 은성(銀城): 자란마을 고갯마루의 이름. 평택천주교회 평택성당 뒤에 1,300년 된 은행나무가 있어 ‘은행정’ 또는 ‘은성’이라고 했다. 4. 산직촌(山直村): 소사벌택지지구 안에 있었던 자연마을. 주변지역에 일제강점기부터 일본인 과수농장을 중심으로 배 과수농업이 발달해 ‘이곡(梨谷)’ 또는 ‘배나무골’이라고도 불렀다. 2008년 전후 소사벌택지지구 조성으로 폐동됐다. 5. 문화촌(文化村): 한국 전쟁 뒤 피난민들이 정착해 피난민촌이라고 부르다가 문화촌으로 바꿔 불렀다. 문화촌 남동쪽 지역은 1960년대 전후 전라도사람들이 정착하면서 ‘전라도촌’이라고 구분해 불렀다. 6. 상신작로(上新作路): 평택여중사거리에서 한전 평택지사 사이 도로변에 형성된 마을. 옛국도 38호선 변 신작로에 마을이 형성돼 유래됐다. 7. 하신작로: 옛 국도 38호선 평택여중 사거리에서 성동초등학교 사이의 신작로에 형성된 마을. 8. 낙촌: 삼각산 뒤쪽에 형성된 마을. ‘낭떠러지기’라고도 부른다. 본래 천주교인들이 운영하는 옹기점이 있었고 마을이 형성되지 않았다가 1990년 택지개발에 따라 단독주택단지가 조성됐다. 9. 삼각산: 자란마을 뒷산. ‘자란산’ 또는 ‘재랭이산’으로도 부른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자란마을의 제당이 있었다. 10. 덕동산: 1978년 4월 충혼탑이 건립돼 ‘충혼산’ 또는 ‘탑산’이라고 부르다가 1986년 평택시 승격을 기념해 산 정상에 덕동루를 세우면서 ‘덕동산’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11. 매봉: 신한중고등학교 뒷산. ‘응봉산’이라고도 한다. 일제가 작성한 조선고적조사 자료에는 ‘용봉산’ 또는 ‘매봉산’이라고도 기록됐다. 기우단이 있어 신성하게 여겼다. 12. 배다리저수지: 소사벌택지지구 안에 있는 저수지. 13. 부처지골: 덕동산 동북쪽 골짜기. 전통사찰 명법사가 있다. <참고문헌: 평택시사(평택시사편찬위원회 펴냄)> ※ 다음호(639호)에서는 ‘평택시 합정동(蛤井洞)’ 지명 유래가 이어집니다. 김지영 기자 ptlnews@hanmail.net
    • 평택시사(平澤市史)
    2022-07-01
  • 평택시史로 보는 ‘평택시 평택동’ 지명 유래
    구 평택시 번화가로 평택역·상가·식당 밀집... 각종 관광 위락시설 집중돼 ▲ 평택역과 시가지 드론 촬영(2021.1.18) ◆ 평택동(平澤洞) 경부선 평택역 앞에 형성된 평택리가 시작이다. 평택리는 한국전쟁 이후 시가지 중심이 철로 동쪽으로 옮긴 뒤 중부출장소는 평택1·2·3리, 서부출장소는 4·5·6·7리를 관할하게 했다. 1986년 평택읍이 시로 승격하면서 1·2·3리는 평택동이 됐고, 4·5·6·7리는 서부동이 됐다. 평택동은 구 평택시의 번화가로 평택역과 공공기관, 상가와 식당들이 밀집했고, 각종 관광 위락시설이 집중돼 있었다. 1. 평택역: 1905년 1월 1일 경부선이 개통되면서 설치된 기차역. 한국전쟁 때 유엔군의 폭격으로 크게 파괴돼 종전 뒤 철로 동쪽(평택동)으로 옮겼다. 2009년 민자역사가 건축되고 역 구내에 AK플라자 평택점(애경백화점)이 입주했다. 2. 새시장: 평택읍 시절 평택1리 지역. 1963년 평택읍의 인구가 증가하면서 통복시장 이전을 추진하기 위해 새시장 조성공사를 시작했다가 중단한 마을이다. 지금은 식당들이 밀집하고 평택지역 대표음식인 폐계닭을 판매하는 식당들이 많아서 먹자골목 또는 폐계닭골목으로 부른다. 3. 명동골목: 평택읍시절 평택2리 지역. 1953년경 시가지의 중심이 철도 동쪽으로 옮긴 뒤 식당과 술집·상가들이 밀집한 최고의 번화가다. 4. JC공원: 평택이 한국청년회의소(한국JC)의 발상지임을 기념하기 위해 조성됐다. 한국JC는 주한미제5공군 정훈장교 메닝스포츠우드 중위에게 소개받은 평택지역 12명의 젊은이들이 서정빈을 중심으로 1951년 12월 23일 발기인 모임을 가졌다. 1952년 2월 ‘평택청년애향사업회’가 조직됐고 점차 확산이 돼 ‘한국청년회의소’가 설립됐다. <참고문헌: 평택시사(평택시사편찬위원회 펴냄)> ※ 다음호(638호)에서는 ‘평택시 비전동(碑前洞)’ 지명 유래가 이어집니다. 김지영 기자 ptlnews@hanmail.net
    • 평택시사(平澤市史)
    2022-06-24
  • 평택시史로 보는 ‘평택시 통복동’ 지명 유래
    조선시대 진위군 병파면... 통복천 갯가에 위치해 ‘통복개’라 불러 ▲ 통복동 시장 로터리(2013) <출처 = 평택시사> ◆ 통복동(通伏洞) 조선시대 진위군 병파면 지역이었다. 통복천 갯가에 위치해 ‘통복개’, 통복천에 보(洑)를 축조하고 주변에 마을이 형성돼 ‘통복보’라고도 불렀다. 한국전쟁 뒤 도시가 철도 동쪽으로 옮겨가면서 현재 통복시장 일대까지 확대됐다. 1. 원통복(元通伏): 통복동의 본 마을이다. 진위군 병파면에 속해 ‘상통복’ 또는 ‘윗마을’이라고도 했다. 2. 하통복(下通伏): 원통복의 아래쪽에 형성된 마을. 진위군 성남면에 속해 ‘아래통복’이라고도 했다. 3. 신덕리(新德里): 조선시대 충청도 평택현 지역으로 신덕포가 있던 포구마을. 원평동 제방 너머에 마을이 형성돼 ‘뚝너머’라고도 불렀다. 4. 고평(高坪): 통복 육교 서쪽에 위치한 마을. 지대가 높은 곳에 마을이 형성돼 ‘높은들’이라고 부르던 것을 한자로 ‘고평’이라고 했다. 5. 창월(倉越): 조선시대 순화군의 궁방전에서 거둬들인 곡식을 보관하던 창고 너머에 있던 마을. 안성천 제방공사로 폐동됐다. 6. 화촌(華村): 안성천변의 포구마을. 아산만 일대의 상선과 고깃배들이 드나들고 상거래가 이뤄지던 포구로 홰나무가 무성해 유래됐다. 7. 낙촌(樂村): 옛 통복시장 우시장에서 통복동 북동쪽까지 형성된 마을. 1960년대만 해도 옹기점이 있어 ‘점촌’이라고도 했다. 8. 통복시장: 한국전쟁 때 유엔군의 폭격을 받아 원평동과 평택장이 파괴되면서 1953년 삼거리 동북쪽에 새로 조성된 시장. 1950~60년대에는 싸전(미곡시장)과 우시장이 유명했으며 지금은 채소전·생선전 등을 중심으로 명성을 잇고 있다. 9. 동삼거리(東三巨里): 통복시장 동북쪽 옛 우시장 근처. 평택시가지가 동쪽으로 넘어오기 전 평택-안성 간 국도 38호선과 평택-원곡 간 신작로가 갈라지는 지점이었다. 통복시장 내 가축시장이 형성돼 속칭 ‘개전로터리’라고도 부른다. 10. 서삼거리(西三巨里): 일제강점기 경부선 평택역에 설치되고 국도1호선과 국도38호선이 건설되면서, 1호선과 38호선이 교차하는 삼거리가 형성돼 유래됐다. 일제강점기 삼거리 주막이 있었으며, 한국전쟁 뒤 평택장이 통복동으로 넘어온 뒤에는 시장로터리라고 부른다. 11. 통복지하도: 본래 철도건널목이 있던 자리라 ‘땡땡거리’라고 했지만 1980년대 초 지하차도가 건설됐다. 12. 통복천: 안성천의 지류. 천덕산에서 안성시 원곡면을 거쳐 통복동과 세교동 사이를 흐른다. <참고문헌: 평택시사(평택시사편찬위원회 펴냄)> ※ 다음호(637호)에서는 ‘평택시 평택동(平澤洞)’ 지명 유래가 이어집니다. 김지영 기자 ptlnews@hanmail.net
    • 평택시사(平澤市史)
    2022-06-17
  • 평택시史로 보는 ‘평택시 원평동’ 지명 유래
    1905년 경부선철도 개통으로 평택역 설치되면서 형성된 마을 ▲ 일제강점기 1등 도로(국도 1호선)와 원평동(2013) <출처 = 평택시사> ◆ 원평동(原平洞) 1905년 1월 1일 경부선철도 개통으로 평택역이 설치되면서 역 앞에 형성된 마을이다. 일제강점기에는 평택리라고 했다가 1986년 평택시 승격과 함께 서부동으로 편제됐다. 1992년 6월 원평동으로 고쳤다. 1. 본정통(本町通): 일제강점기 평택역 앞에 형성된 중심거리. 일본어로 ‘혼마찌’라고 하며 ‘한 도시의 중심이 되는 거리’라는 뜻으로 쓰인다. 주로 일본인들이 거주했으며 일본인 주택·상가·창고 등이 밀집했다. 2. 평택역광장: 원평동 옛 평택역 입구에 조성된 광장. 일제강점기에는 각종 집회와 운동회가 열렸다. 3. 평택장: 일제강점기 원평동에 형성된 조선인 시장. 평화병원에서 옛 군청 사이에 있었고 싸전거리가 유명했다. 4. 1등도로: 평택역 앞 동쪽에서 서쪽으로 연결된 옛 국도1호선. 도로 좌우에 상업은행 평택지점·금융조합·정거장·읍사무소 등이 있었다. 5. 용잔: 일제가 경부선 철도건설을 하고 남은 철도부지. 철로 옆에 있고 면적이 넓어서 일제강점기에는 각종 운동회가 열렸다. 6. 평택우시장: 일제강점기 평택초등학교 터에 있었던 소 매매시장. 한국전쟁 뒤 평택장이 통복동으로 옮겨가면서 우시장도 함께 이전했다. <참고문헌: 평택시사(평택시사편찬위원회 펴냄)> ※ 다음호(636호)에서는 ‘평택시 통복동(通伏洞)’ 지명 유래가 이어집니다. 김지영 기자 ptlnews@hanmail.net
    • 평택시사(平澤市史)
    2022-06-10
  • 평택시史로 보는 ‘평택시 신장동’ 지명 유래
    조선후기 탄현면 지역... 1914년 신장리·제역동 통합돼 신장리로 불러 ▲ K-55 미공군기지 앞 신장쇼핑몰 ◆ 신장동(新場洞) 조선후기 탄현면 지역이었다. 1914년 신장리와 제역동이 통합돼 송탄면 신장리가 됐다. 조선후기 장시(場市)가 있어 ‘신장(新場)’ 또는 ‘새장터’라고 불렀다. 1. 구장터: 신장1동의 자연마을. 진위현의 읍치(邑治) 봉남리에서 진위현 해창이 있던 고덕면 해창리로 나아가는 육로교통과 진위천 수로교통이 만나는 지점에 위치해 장시(場市)가 열렸던 마을이다. K-55 미공군기지 비행기 이착륙에 따른 소음으로 기지지역으로 수용돼 2010년 송북동 동안마을로 집단 이주했다. 2. 새장터 거리: 옛 신장리의 우리말 이름. 3. 제역동(除役洞): ‘제골’, ‘지골’이라고도 부른다. 신사무옥(新巳誣獄) 때 모함을 받아 억울하게 죽은 기묘명현 최수성(崔壽城)을 영의정으로 추증하면서 무덤 주변 10리 안의 주민들에게 묘역의 정화에 힘쓰라고 부역을 면제해주었다는 데서 유래했다. 1952년 K-55 미공군기지가 주둔하면서 기지촌의 중심이 됐다. 현재 영천 관광호텔 일대다. 4. 남산터(南山)터: 신장1동의 자연마을. 남산 아래에 마을이 형성돼 남산터라 했다. 5. 목천(木川): 지산천에 떠내려 오는 나무를 건져 땔감으로 사용했다 하여 ‘나무내’라고 했던 것을 한자로 ‘목천’이라 했다. 6. 밀월동(密月洞): 1952년 K-55 미공군기지가 주둔한 뒤 형성된 마을. 수풀이 우거진 곳에 나무 사이로 비치는 달빛이 아름답다고 해서 유래됐다. 7. 송월동(松月洞): 1952년 K-55 미공군기지가 주둔한 뒤 형성된 마을. 소나무 숲 사이로 비치는 달이 아름답다고 해서 유래됐다. <참고문헌: 평택시사(평택시사편찬위원회 펴냄)> ※ 다음호(635호)에서는 ‘평택시 원평동(原平洞)’ 지명 유래가 이어집니다. 김지영 기자 ptlnews@hanmail.net
    • 평택시사(平澤市史)
    2022-06-03
  • 평택시史로 보는 ‘평택시 송북동’ 지명 유래
    1981년 송탄시로 승격되면서 형성된 행정동... 송탄지역 가장 북쪽에 위치 ▲ 송북동의 중심마을 우곡 ◆ 송북동(松北洞) 1981년 송탄시로 승격되면서 형성된 행정동이다. 송탄지역의 가장 북쪽에 위치해 유래됐고 송천·건지미·신흥·우곡·오좌동·오리골·동막을 관할하고 있다. 1. 송천(松泉): 1970년경 탄현(炭峴)에서 분리되면서 정해진 명칭. 지산천 옆에 마을이 형성돼 유래된 것으로 보인다. 2. 건지미(乾芝): 조선후기 건지산리로 통상 윗건지미만을 의미. 잔디의 떼가 마를 정도로 건조한 지역이었다는 뜻에서 유래했다. 3. 양달말: 건지미의 동북쪽 마을. 햇볕이 잘 드는 곳 마을이 형성돼 유래했다. 4. 응달말: 건지미 서남쪽 지명. 응달진 곳이어서 유래했다. 5. 북어울: 양달말의 뒷산의 마을. 큰북어울과 작은북어울이 있다. 명태를 말려 북어를 만든 일이 있다하여 유래했다. 6. 신흥(新興): 아래건지미라고도 한다. 7. 우곡(牛谷): 고려 말부터 진주 소씨가 집성촌을 이뤄 ‘소골’이라 부르다 한자로 ‘우곡牛谷’으로 쓰게 됐다. 8. 양지편: 우곡마을 농협창고 뒤쪽의 마을. 양지바른 곳에 마을이 있다. 9. 가운데말: 우곡의 중심마을. 마을회관 일대의 마을이다. 10. 시루터: 우곡마을 서쪽 등성이 너머 마을. 11. 풀무골: 우곡마을 뒤쪽 골짜기. 진주 소씨의 멸문지화에 관련된 풀무골 전설이 전해진다. 12. 동막(東幕): 마을이 태봉산에 막혀 있어 유래됐다. 13. 아랫뜸·동뜸·서뜸: 동막의 자연마을. 14. 염봉재: 동막에서 진위면 마산리 수촌으로 넘어 가는 고개. 작은흰치고개라고도 한다. 15. 백현원: 조선시대 염봉재 중턱에 있었던 국영주막. 맹사성의 공당문답 고사가 전해진다. 16. 오좌동(梧佐洞): 법정동으로 독곡동에 속한 마을로 ‘오좌월’, ‘오좌울’이라고도 한다. 오동나무에 봉황이 앉는 형국에서 유래됐다고 전한다. 17. 동실봉: 오좌동 뒷산 이름. 18. 모산: 오좌동 서쪽 입구에 있는 봉우리. 조선 전기 용성군 최자반이 모정을 짓고 남산터 원정의 최수성 등 사림들과 교유했던 곳이다. 19. 오리곡(五里谷): 오릿골이라고도 한다. 독곡동의 자연마을로 단양 우씨들이 많이 거주한다. 마을 앞에 큰 개천이 흐르고 오리가 많이 날아들어 유래됐다는 설과, 버드나무가 많아서 오류곡이라고 했던 것이 음이 변했다는 설, 진위현 관아로부터 5리 거리에 위치했다는 설이 있다. <참고문헌: 평택시사(평택시사편찬위원회 펴냄)> ※ 다음호(634호)에서는 ‘평택시 신장동(新場洞)’ 지명 유래가 이어집니다. 김지영 기자 ptlnews@hanmail.net
    • 평택시사(平澤市史)
    2022-05-23
  • 평택시史로 보는 ‘평택시 서정동·지산동’ 지명 유래
    서정동, 1981년 복창동·점촌·사거리·원적봉·지장동 관할로 두면서 유래 지산동, 조선후기 진위현... 1914년 동막리·일탄면 우곡리·좌동 일부 통합 ▲ 서정동을 관할로 둔 송탄시가지 전경(2003년) ◆ 서정동(西井洞) 행정동으로 서정동을 말한다. 조선시대 진위현 탄현면이었고, 남쪽 일부는 양성현 소고니면이었다. 1981년 송탄시가 승격되는 과정에서 복창동·점촌·사거리·원적봉·지장동을 서정동 관할로 두면서 유래됐다. 서정동의 유래는 서두물이다. 서두물(서정동)은 중앙동의 자연마을이다. 1. 점촌(店村): 우리말로 ‘점말’이다. 1920년대 초 황금석이라는 사람이 옹기점을 운영하면서 유래됐다. 1980년대 초까지도 옹기가마가 남아있었다. 2. 지장동(地莊洞): 지장사(地藏寺)라는 절 아래에 형성된 사하촌에서 유래됐다. 3. 복창동(福昌洞): K-55 미공군기지가 주둔하면서 청소용역을 맡은 복창공사(福昌公社)에 다니던 사람들이 모여 사는 동네라고 해서 유래됐다. 4. 신창동: 1950년대 중반 사거리 아래에 형성된 마을. 황해도 피난민들이 집단 이주해 정착했다고 해서 ‘황해도촌’이라고도 한다. 5. 절골: 신창동 앞의 마을로 약수암(藥水庵)이라는 절이 있어 유래됐다. 6. 사거리(四巨里): 신장동·적봉리·장등리·서정리로 통하는 네거리가 있어 유래했다. 7. 원적봉(原赤峰): K-55 미공군기지가 주둔하고 마을이 폐동되면서 주민들이 집단 이주해 형성한 마을. 초기에는 기지 정문이 있어 외지인들이 들어와 정착했다. ◆ 지산동(芝山洞) 조선후기 진위현 일탄면과 마산면 지역이었다. 1914년 동막리·일탄면 우곡리(牛谷里)·좌동·지산리 일부를 통합해 송탄면 지산리라고 했다. 지산(芝山)이라는 지명은 땅이 메말라서 ‘건지뫼’라고 했던 것을 한자로 표기한 것이다. 1. 좌동(佐洞): 지산동의 자연마을. ‘좌월’, ‘좌울’이라고도 하며 숯고개 아래에 형성된 마을이다. 2. 탄현(炭峴): 점촌에서 송북시장으로 넘어가는 고개 이름. 신장동·적봉리 일대의 숯이 유통되는 통로여서 ‘숯고개’라고 했던 것을 한자로 ‘탄현(炭峴)’이라고 했다. 1911년 간행된 ‘조선지지자료’에 지현(芝峴, 쑥고개) 주막이라는 지명이 있는 것으로 보아 1900년 전후에는 ‘쑥고개’로도 불렸던 것 같다. 쑥고개는 숯고개의 변음으로 1970년 이전까지 송탄을 지칭하는 지명으로 사용되다가 ‘지명 바로 부르기 운동(1972년 송탄JC 주관으로 ’쑥고개가 아닙니다. 송탄이라 부르세요‘라는 구호를 앞세워 ‘지명 바로 부르기 운동’을 했다)’으로 소멸됐다. <참고문헌: 평택시사(평택시사편찬위원회 펴냄)> ※ 다음호(633호)에서는 ‘평택시 신장동(新場洞)’ 지명 유래가 이어집니다. 김지영 기자 ptlnews@hanmail.net
    • 평택시사(平澤市史)
    2022-05-13
  • 평택시史로 보는 ‘평택시 칠괴동·칠원동’ 지명 유래
    칠괴동, 1914년 송탄면 칠괴정리를 나중에 칠괴동으로 불러 칠원동, 조선후기 진위군 여방면... 1914년 칠원·수촌·신리 통합 ▲ 칠구쟁이 마을로 친숙한 칠괴동(2011) ◆ 칠괴동(七槐洞) 조선시대 진위군 여방면 지역이었다. 1914년 송탄면 칠괴정리라고 했던 것을 나중에 칠괴동이라고 했다. 마을 앞 우물가에 고목 일곱 그루가 있어 ‘칠괴정’ 또는 ‘칠구쟁이’라고 했던 것을 한자로 표기한 것이다. 1. 용산절: 서북쪽에 있는 지명으로 옛 절터. 2. 장구탱이: 원칠원으로 넘어 가는 옛길. 쌍용자동차 평택공장 건설로 없어졌다. 3. 장자골: 칠괴동에서 원칠원으로 올라가는 계곡으로 진주 소씨의 묘가 있다. 4. 원고개: 모산골을 거쳐 안성방면으로 넘어 가던 고개. 5. 상나무배미·노랑개들·돌밋들·시밋들: 마을 앞 들판. 6. 쌍용자동차 평택공장: 1979년 동아자동차가 설립됐다가 1986년 쌍용자동차에 매각됐다. ▲ 방아거리로 불렸던 칠원3동 수촌(2009) ◆ 칠원동(七院洞) 조선시대 제6대로(삼남대로)의 갈원(葛院)이 있던 마을이다. 조선후기 진위군 여방면 칠원(七院)으로 바뀌었다. 1914년 칠원·수촌·신리를 통합해 칠원리라고 했으며 ‘갈왕골’이라고도 한다. 1. 원칠원: 칠원1동의 마을 이름. 2. 윗거리·아랫거리: 칠원1동의 자연마을. 3. 신촌: 칠원2동의 자연지명으로 ‘새말’이라고 한다. 4. 수촌(水村): 칠원3동으로 통복천의 지류에 물레방아를 설치해 ‘물방아거리마을’이라고도 부른다. 5. 쇠물뿌리: 칠원3동의 자연마을. 마을의 지세가 와우형(臥牛形)인데 소의 뿔에 해당되는 곳에 마을이 형성됐다. 6. 옥관자정: 칠원1동 갈원에 있는 우물. 본래 ‘옥수정’이었는데 조선시대 임금이 남쪽으로 내려가다가 물맛을 보고 감탄해 옥관자를 내리면서 유래됐다. 7. 소유우물: 쇠물뿌리 마을의 공동우물. 소의 젖에 해당되는 곳에 우물이 있다. 8. 이산매산: 칠원2동의 뒷산. 새말에 거주하던 명창 이동백이 산을 오르며 노래를 짓고 산위에 올라 노래를 불렀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9. 산지봉: 칠원1동 뒷산. 산신당이 있어 음력 10월에 산신제를 지냈다. 10. 옥녀봉: 옛 도원동사무소 뒷산. 이괄의 절터가 있다. 11. 쇠마름방죽: 칠원2동 서쪽 입구 주말촌 식당 옆 방죽. 옛날 마을에 사는 큰 부자가 쇠말뚝을 박아 만들었다고 한다. 12. 장자울: 칠원2동 서쪽 구릉지대. 옛날 큰 부자가 기와집을 짓고 살던 곳이다. 13. 고분야: 칠원2동 새말 앞의 들판. 14. 개구리봉: 칠원2동 앞의 작은 봉우리. 개구리봉 꼭대기는 장사추와형의 명당이라고 알려졌다. 15. 건넌들·보아지들·가내들: 칠원3동 주변 들판. 16. 수촌마을 용신제: 칠원 3동 수촌마을에서 정월에 통복천에 지내는 용신제. <참고문헌: 평택시사(평택시사편찬위원회 펴냄)> ※ 다음호(632호)에서는 ‘평택시 서정동(西井洞)’ 지명 유래가 이어집니다. 김지영 기자 ptlnews@hanmail.net
    • 평택시사(平澤市史)
    2022-05-06
  • 평택시史로 보는 ‘도일동’ 지명 유래
    조선시대 진위군 여방면 지역... 1914년 원당면 의곡·여동·신촌·심곡 통합 ▲ 도일동 하리 여의실 마을(2012) ◆ 도일동(道日洞) 조선시대 진위군 여방면 지역이었다. 1914년 여방면의 도일리·내리·상리·양성현 원당면 의곡·여동·신촌·심곡을 통합해 도일리(동)라 했다. 도일이라는 지명은 ‘원도일’에서 왔다. 1. 원도일: 양성현의 경계여서 도일, 되일이라고 하던 것을 도일(道日)로 표기했다. 2. 상리(上里): 진위현 여방면 지역으로 가장 위쪽에 위치해 유래됐다. 3. 내리(內里): 진위현 여방면으로 안쪽에 형성돼 유래됐다. 4. 하리(下里): 양성현 원당면 지역으로 아래쪽의 마을이라고 해서 유래됐다. 5. 여좌울: 조선후기 상리 도일천을 경계로 좌측(덕암산 쪽)의 마을에 대한 통칭. 6. 여우동: 조선후기 상리 도일천을 경계로 우측(팔룡산 쪽)에 대한 통칭. 7. 사창이: 도일동 상리의 자연마을. 조선시대 진위현의 사창이 있었다. 8. 뱃터: 조선시대 사창이 있을 때 도일천에 있었던 나루터. 뱃줄을 매어 두었다는 느티나무와 향나무 비보림이 있다. 9. 산막골: 상리의 자연지명으로 산막이 있었다. 10. 요골: 상리의 자연지명으로 그릇을 굽던 가마가 있었다. 11. 배낭골: 상리의 자연마을. 배나무골이 변해 유래됐으며 이성부 충절정문이 있다. 12. 황성말: 황새울에서 비롯된 지명으로 큰길가에 위치했다. 13. 샛골: 상리에 자연마을로 원주 원씨가 처음 자리 잡은 마을. 14. 안골: 상리 가운데서도 덕암산의 안쪽에 형성돼 유래. 양세충효정문이 있다. 15. 정골: 안골 위쪽의 골짜기며 1728년 이인좌의 난에 호응했던 원만주가 용광로를 설치하고 농기구와 병장기를 만들었다고 한다. 16. 빈터: 안골에 있는 골짜기. 임진왜란 때 상리의 부인들이 피신했던 곳이다. 17.빈터고개: 빈터를 지나 은산리로 넘어가는 고개로 정상부에 서낭당이 있다. 18. 가농골: 황성말 서쪽의 자연마을. 19. 응골: 도일천 건너편의 자연마을. 20. 갈월: 도일천 건너편의 자연마을로 약천사가 있다. 21. 양성말: 도일천 건너편의 자연마을로 조선후기 양성현 지역이었다. 22. 여의실: 하리의 자연마을로 양성현 원당면 여동과 의곡리가 통합하면서 유래됐고, 큰여의실과 작은여의실로 구분된다. 23. 대마거리: 내리의 자연마을. 말을 기다리던 곳에서 유래됐다. 24. 운터말: 내리의 자연마을. 25. 울음밭: 원균 장군의 집터가 있던 곳으로 장군의 유품을 물고 천리를 달려온 애마가 유품을 내려놓고 울음을 운 뒤 죽었다는 곳. 26. 갓골: 원릉군 원균의 묘가 있는 마을. 27. 능골: 원릉군 원균의 묘 뒤쪽 마을. 조선 전기의 화가 최경의 묘가 있다. 28. 암말: 내리에서 덕암산 안쪽에 형성된 마을. 전원주택단지가 조성됐다. 29. 왕뒤: 암말 서쪽의 자연지명. 원릉군 원균의 선무1등교서를 가지고 왕의 사신이 넘어온 길에서 유래됐다. 30. 덕암산: 도일동과 진위면 은산리 일대에 걸쳐 있는 산. 예로부터 ‘석씨 천 년, 소씨 천년, 원씨 천년’이라는 말이 전해오며 ‘아흔 아홉 골짜기가 있고 아흔 아홉 마을이 있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31. 흰치고개: 삼남대로 평택 구간의 가장 험한 구간. 산봉우리가 희게 보여 대백치라고도 불렀다. <참고문헌: 평택시사(평택시사편찬위원회 펴냄)> ※ 다음호(630호)에서는 ‘평택시 모곡동(茅谷洞)’ 지명 유래가 이어집니다. 김지영 기자 ptlnews@hanmail.net
    • 평택시사(平澤市史)
    2022-04-22
  • 평택시史로 보는 ‘장당동·가재동’ 지명 유래
    장당동, 조선시대 양성현 지역... 1914년 광천리와 장당리 통합 가재동, 조선후기 진위군... 1914년 가재동·시동·방혜동·중리 통합 ▲ 삼성전자 평택사업장 건설로 폐동된 장당동 광천마을(2011) ◆ 장당동(獐堂洞) 조선시대 양성현 소고니면 지역이었다. 1914년 광천리와 장당리를 통합해 장당리(동)라 했다. 장당이라는 지명은 ‘노루댕이’에서 왔다. 지형이 노루의 목처럼 잘록하게 들어간 곳을 ‘노루목’ 또는 ‘노루댕이’라 하는데 이것을 노루 장(獐)을 써서 ‘장당(獐堂)’이라 했다. 고덕국제신도시 및 삼성전자 평택사업장 건설로 자연마을은 폐동됐다. 1. 원장당(元獐堂): ‘노루댕이’, ‘노루쟁이’라고도 부른다. 2. 방아다리: 원장당과 효명고등학교 사이 마을로 물레방아가 있어 유래한다. 3. 광천(廣川): ‘너부내’라고도 부른다. 마을 앞으로 서정천이 흐르고 있어 넓은 내라고 했던 것을 음이 변하면서 너부내라 부르게 됐다. 2013년 고덕국제신도시 개발로 폐동됐다. 4. 두집매: 노루댕이의 다른 이름. 광주 김씨 두 집이 처음 이사 와서 정착해 유래했다. 5. 광귀: ‘도툼안골’이라고 부르는 지역으로 외집매였는데 1960년대 서울지역 이주민들의 귀농정착사업이 시작되면서 ‘광귀’라고 부르게 됐다. 귀농민들은 정착에 실패해 대부분 떠났다. 6. 장좌울: 광천 옆에 형성된 마을. 중국 화교출신의 도씨네 한 집뿐이다가 1960년대 전라도 이주민들이 옮겨오면서 마을이 커졌다. 7. 감나무골: 감나무가 많이 자라는 데서 유래했다. 8. 한뉴목장: 1967년 한국과 뉴질랜드가 합작하며 만든 목장으로 나중에 매일유업시범목장이 됐다가 2013년 삼성전자 평택사업장 건설지역에 포함됐다. ◆ 가재동(佳材洞) 행정동인 송탄동의 법정동 명칭이다. 조선후기 진위군 송장면·여방면·양성현 소고미면에 속했다가 1914년 가재동·시동·방혜동·중리·사당재리·막곡리를 통합해 가재리(동)라 했다. 1. 가재울: 가재리의 자연지명. ‘가좌울’이라고도 한다. 산의 모양이 가재와 같다는 설과, 냇가에 가재가 많이 잡혔기 때문이라는 설이 있다. 2. 상가재: 가재리의 윗마을. 재개발사업으로 2013년 현재 폐동을 앞두고 있다. 3. 하가재: 가재리의 아랫마을. 재개발사업으로 2013년 현재 폐동을 앞두고 있다. 4. 막곡(幕谷): 가재동의 자연마을. 군막(軍幕)이 있어 유래했다는 설이 있다. 송탄초등학교와 송탄동사무소가 있다. 5. 중리(中里): 막곡과 방혜동 사이에 있어 ‘가운데말’이라고 한 것을 한자로 ‘중리’라 했다. 6. 방혜동(芳惠洞): 본래 방효리(芳孝里)·뱅여울·방혜울이었는데 옛날에 마을을 지나가던 스님이 천마산의 산세가 꽃과 같아 복을 받을 것이라 해 꽃방(芳) 자를 써서 방혜동이라 했다는 전설이 있다. 7. 시동(枾洞): ‘감나무골’이라고도 한다. 송탄공단 뒤쪽에 있다가 폐동된 마을로 감나무가 많았다. 8. 사당리(祠堂里): 사당재리라고도 한다. 가재감리교회 아래에 있었으며 한국전쟁 뒤 폐동됐다. <참고문헌: 평택시사(평택시사편찬위원회 펴냄)> ※ 다음호(629호)에서는 ‘평택시 도일동(道日洞)’ 지명 유래가 이어집니다. 김지영 기자 ptlnews@hanmail.net
    • 평택시사(平澤市史)
    2022-0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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