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3-02(토)
 

가호마다 부과했던 공납 토지 면적에 따라 부과… 일반 농민 부담 줄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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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동균역만세불망비 

 

◆ 1608년 이원익 건의로 경기도에서 시범 실시 후 1708년 전국적으로 실시


호서지역에 대동법을 시행한 김육(金堉, 1580~1658)의 공로를 잊지 않기 위해 그가 사망한 이듬해인 1659년에 건립됐다. 비의 높이는 175cm, 폭은 84cm, 두께는 23cm다. 비석의 글은 이수광의 아들이면서 홍문관 부제학을 지낸 당대의 명문장가 이민구(李敏求)가 짓고, 글씨는 조정의 길사나 흉사의 책문을 많이 썼던 의정부 우참찬 오준(吳竣)이 썼다. 


김육은 기묘명현(己卯名賢)의 한사람인 김식의 증손자 김흥우와 조광조의 증손녀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의 초년(初年)은 매우 불행했다. 13세에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피난길에 올랐고 15세에 부친이 사망한 것을 시작으로 조모와 모친을 차례로 잃은 뒤 서울 고모 댁에 의탁해 지냈다. 26세에 사마시(司馬試) 합격으로 진사가 돼 성균관에 들어갔으나 광해군 때 실세인 정인홍을 유적(儒籍)에서 삭제한 사건이 문제가 돼 34세에 경기도 가평의 잠곡(潛谷)으로 이주했다. 


44세인 1623년 인조반정 후 다시 관직에 진출할 때까지 꼬박 10년 동안 농사와 숯장사 등으로 생계를 유지했다. 김육은 관직 생활 내내 안민(安民) 정책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 지방관으로 처음 발령받은 음성현감 시절부터 ‘민(民)을 안정시키는 것이 국가 안정의 근본’임을 피력하기 시작한 후 ‘민생의 안정’이 관직 생활 내내 그의 활동에서 중요한 명분이 됐다. 인조반정 이후에 여러 관직을 두루 거쳤으며 효종 때에 우의정에 발탁됐고 영의정까지 올랐다. 


대동법은 가호(家戶)마다 부과했던 공납을 토지 면적에 따라 부과함으로써 일반 농민들의 부담은 줄어드는 대신 양반지주들의 부담이 늘어나는 세금제도다. 1608년(광해군 즉위년) 이원익의 건의로 경기도에서 시범 실시해 1708년 전국적으로 실시되기까지 100년이 걸렸다. 그만큼 양반 지주들의 반대가 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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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육이 병자호란 후인 1638년 충청도관찰사로 재임했을 때 백성들의 생활고가 극에 달했음을 살피고 상소한 내용의 핵심이 대동법 시행이었다. 여기서 ‘(대동법을 시행하면) 면포 1필과 쌀 2말 이외에 다시 징수하는 명목도 없을 것이니’라고 해 대동법 시행으로 어용상인 등 모리배들의 사욕을 채우는 것을 차단할 수 있음을 지적했다. 그러나 이 같은 김육의 노력은 비변사의 반대로 무산됐다.


효종 즉위(1649년)와 더불어 우의정으로 발탁된 김육은 본격적으로 경제정책에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그해 11월 대동법 시행에 대해 강력하게 건의하고 별도의 글을 올렸다. 김육은 ‘대동법은 가난한 백성들에게만 이익이 되는 것이 아니라 국가 재정도 튼튼해지는 방도가 되지만, 모리배들이 방해할 것’을 염려했다. 그해 12월 좌의정 조익이 “왕정(王政) 가운데 대동법보다 큰 것이 없는데 어찌 한 두 가지 일이 불편하다 해 행하지 않겠습니까?”라고 하자, 김육은 “대동법은 지금 모든 조례(條例)를 올렸으니 전하께서 옳다고 여기시면 행하시고 불가하면 신을 죄주소서”라며 깊은 소신을 밝혔다. 민생안정을 통해 국가의 기강을 바로잡을 수 있다는 소신을 펼수록 반대파들의 도전도 거셌지만 왕의 신뢰를 바탕으로 1651년(효종 2)에 영의정에 오르고 드디어 충청도에 대동법을 시행할 수 있었다.


충청도에서의 대동법은 성공을 거두었다. 그 성과에 힘입어 1657년부터 대동법을 호남지역으로 확대했으며 사망하던 해(1658년)에 전라도 연해 지역 농민들이 혜택을 봤다. 김육은 자신의 죽음으로 전라도 대동법이 중도에 폐지될까 걱정해 경세의 재주가 있는 서필원을 전라도 감사로 천거해 완수를 의뢰했다. 1662년에는 전라도 산간 지역에, 1678년에는 경상도 지역에 순차적으로 대동법의 시행이 확산됐다.


김육이 사망하자 충청도 사람들이 마치 부모상을 당한 것처럼 애통해 했다. 이는 일반인들에게 대동법 혜택이 얼마나 컸는지를 대변한다. 이들은 제문(祭文)을 지어 추도하고 부의를 모아 조문했다. 하지만 상가(喪家)에서 부의를 받지 않자 이들은 김육의 공덕을 기리는 비를 충청도로 들어오는 큰길가에 세웠다. 원래는 원소사 마을의 소사원(素砂院) 자리에 있던 것을 지금의 고갯마루로 옮긴 것이다. 비신(碑身)의 높이 175cm, 넓이 84cm, 두께 23cm이며 귀부와 이수가 잘 갖추어져 있다. <참고문헌: 평택시사(평택시사편찬위원회 펴냄)> 


※ 다음호(684호)에서는 ‘유적과 유물 - 충의각(忠義閣)-조광조·오달제 유허비’가 이어집니다.


김지영 기자 ptlnew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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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택시史로 보는 ‘대동균역만세불망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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