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3-29(금)
 

삽교포, 신대동에 있었던 포구... 배 타면 지제동까지 올라가

곤지진, 삼국시대에는 배 타고 현덕면 신흥포로 건너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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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삽교포 포구마을 신대동 삽교(2010) 

 

◆ 안성천의 나루와 포구


1. 삽교포(揷橋浦, 위치: 신대동 삽교)


신대동 삽교마을 신대교 아래에 있었던 포구다. 안성천과 도일천이 합쳐지는 지점인데다 바닷물이 유입돼 하천이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주민들은 하천에 섶다리를 놓고 건너다녔는데 이것이 마을 이름이 됐다. 옛날 이곳에서 배를 타면 지제동까지 올라갈 수 있었으며, 고덕면이나 팽성읍과도 통했다고 한다. 삽교포는 1922년 신대교 가설과 주변 지역의 간척으로 역할이 줄어들다가 1974년 이후 폐지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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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곤지진이 있었던 옛 대추리 곤지머리(2005)

 

2. 곤지진(昆地津, 위치: 팽성읍 (구)대추리)


지금은 미군기지 확장공사로 편입된 팽성읍 구 대추리에 있었다. 대추리 지역은 해방 전후 도두리벌이 간척되기 전까지는 포구였다. 삼국시대에는 경주에서 청주와 진천 또는 천안을 거쳐 북상하면 곤지진에서 배를 타고 현덕면 신흥포나 계두진으로 건넜다. 18세기 초에 편찬된 사찬(私撰) 『팽성지』에 의하면 ‘이곳은 수원으로 왕래하는 나루이다. 밀물 때는 배를 타고 건너지만 썰물에는 옷을 걷고 건널 수 있다. 고깃배 새우젓배들이 나루에 매어져 있다. 이 나루의 위쪽에 기우단(祈雨壇)이 있다’는 기록이 있다.


김정호의 『대동지지』에도 ‘수원부와 소북면으로 통한다’고 했다(여기에서 수원은 서평택지역의 오성면과 현덕면을 말한다). 크게 번성했던 곤지진은 1899년 『평택현읍지』가 편찬될 때쯤에는 포구로서의 기능을 거의 상실했다. ‘토사가 많이 쌓여 배가 들어올 수 없다’는 기록이 있어 오랜 시간 토사가 쌓여 나루로서의 기능을 거의 상실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52년 K-6 미군기지가 주둔할 때까지만 해도 소금배나 고깃배가 드나들었으며, 뱃터에는 주막집이 세 집이나 있었다고 한다. <참고문헌: 평택시사(평택시사편찬위원회 펴냄)> 


※ 다음호(660호)에서는 ‘안성천의 나루와 포구 - 신흥포(新興浦)’가 이어집니다.


김지영 기자 ptlnew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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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택시史로 보는 ‘평택지역의 나루·포구유적’ 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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