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19(금)
 

경양포, 팽성읍 서부·현덕면 신흥포 연결한 수로교통로

옹포, 포면세·대동미 담당... 취급량은 총 16,989석 내외

 

평택시사.png

▲ 양성현의 해창 청북면 삼계리 옹포(2008)

 

◆ 직산현과 평택현의 해창(海倉) 경양포(위치: 팽성읍 노양1리 뱃터)


조선 건국 후 한양으로 천도하면서 하양창은 폐지됐다. 태조 5년에 경양현도 폐현(廢縣)돼 직산현 경양면이 됐다. 직산현에 이속된 뒤 경양포에는 직산현의 해창으로 경양창이 설치됐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직산현 조에 “경양포(慶陽浦)는 경양현(慶陽縣)에 있는데 해포(海浦)이다”라고 했으나 경양창은 나중에 평택현의 세곡까지 관장하게 돼, 직산현과 평택현 두 고을의 해창이 됐다. 


경양포는 팽성읍 서부지역과 현덕면 신왕리 신흥포를 연결한 수로교통로이기도 하다. 나루에는 사공이 상주했으며, 근대 이후에는 서평택 주민들이 열차를 이용할 경우 배를 타고 경양포로 건너와 평택역으로 이동했다. 


◆ 양성현의 해창(海倉) 옹포(위치: 청북면 삼계2리 옹포)


옹포(瓮浦)는 고려시대 감미부곡이었고, 조선 초 양성현에 편입돼 감미동면으로 편제됐다. 19세기 전반 청구도(1834)에는 ‘저포’라고도 기록됐고, ‘독개’ 또는 ‘양성독개’라고도 불렀다. 옹포는 양성현의 해창이었다. ‘양성군읍지’에 따르면 옹포에서 담당하던 조세는 포면세(浦面稅)와 대동미(大同米)였고, 취급량은 총 16,989석 내외였다. 본래 이곳에 창고 4개가 있었다. 갑오개혁 뒤에 조세가 금납화되는 과정에서 2개로 줄었다. 


옹포에서는 세곡(稅穀)뿐 아니라 포구상업도 활발했다. 나루에는 객주와 여각이 있었고, 대한제국 시기에는 경우궁에서 포세(浦稅)와 선세(船稅)를 징수했다. 일제강점기에 옹포 앞으로 장둑이 축조되고 동척농장들이 간척되면서 옹포는 소작료나 공출미를 반출하는 포구가 됐다. 일제강점기만 해도 벼 2백 섬을 실은 배들이 인천 도정공장으로부터 들어와서 벼를 실어갔다. 해방 후 장둑 아래까지 간척되면서 포구로의 기능을 상실했다. <참고문헌: 평택시사(평택시사편찬위원회 펴냄)> 


※ 다음호(656호)에서는 ‘사창(司倉)’이 이어집니다.


김지영 기자 ptlnews@hanmail.net  


태그

BEST 뉴스

전체댓글 0

  • 84286
비밀번호 :
메일보내기닫기
기사제목
평택시史로 보는 ‘조선시대 수로 및 해로 교통유적’ ③
보내는 분 이메일
받는 분 이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