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19(금)
 

백현원, 진위현 읍치에서 10리 지점 소재... 여행자들이 쉬어 갔던 곳

갈원, 진위현 읍치에서 20리 거리 설치... 삼남대로 평택 구간 대표적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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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남대로 백현원이 있었던 송북동 염봉(2002)

 

◆ 원(院)


1. 백현원(白峴院, 위치: 송북동 동막마을 서북쪽 염봉재 중턱)


백현원은 삼남대로 소백치 중턱에 있었다. 이곳은 진위현의 읍치에서 10리 지점이었다. 백현원은 소백치와 대백치 사이에 있어서 여행자들이 쉬어 갔던 원이었다. 백현원에는 조선 세종 때의 명재상이었던 맹사성의 ‘공당문답’ 고사가 전해온다. 맹사성의 집은 아산시 배방면이어서 한양을 오가려면 충청수영로를 따라 올라오다가 소사원이나 갈원에서 삼남대로와 만나 백현원을 지나가야 했기 때문이다. 백현원은 19세기 이전에 폐원됐고, 대신 동막마을 입구 사거리에 우곡점이 개점돼 역할을 대신했다. 현재 백현원 터는 소백치(염봉재) 중턱에 있으며, 2002년 건설한 삼남로 확장공사에서도 비껴나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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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남대로 평택구간의 큰주막 칠원1동 갈원(2013)

 

2. 갈원(葛院, 위치: 칠원1동 주막거리) 


갈원은 삼남대로 평택 구간의 가장 대표적인 원(院)이었다. 이곳은 대백치 너머에 있었고, 진위현의 읍치에서 20리 거리여서 원이 설치됐다. 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길목이라 역사적 사건에 연루되거나 전해오는 이야기도 많다. 유적으로는 이괄의 난 때 관군에게 패한 이괄이 숨어 있었다는 ‘이괄의 절터’가 있고 공주로 피난 가던 임금이 물맛에 감탄해 옥관자를 내렸다는 ‘옥관자정’이 있다. 


1728년(영조 4)에 발생한 ‘무신 난’에는 갈원의 토호 김정현과 박영동이 주민들을 동원해 난에 참여하려다가 실패한 일도 있었다. 1970년대에는 새마을운동의 중심이어서 옥관자정 옆에 칠원1동 새마을운동공적비가 남아있고, 진위현령 이혜주의 송덕비도 함께 있다. 갈원은 19세기 전후 원(院)으로서의 기능을 상실했지만 민간 점막(店幕)들이 들어서면서 역할을 대신했다. 점막들은 1970년대 새마을운동을 거치며 하나둘씩 사라졌고 현재는 상가건물이 들어섰다. <참고문헌: 평택시사(평택시사편찬위원회 펴냄)> 


※ 다음호(652호)에서는 ‘평택지역 육로교통 유적 - 소사원(素沙院)’이 이어집니다.


김지영 기자 ptlnew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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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택시史로 보는 ‘평택지역 육로교통 유적’ 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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