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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세상사는 이야기] 지혜문학과 떠난 자유여행 ‘슬기로운 자의 행보’ (1회)
    창조주께서 인간들에게 주신 은혜 가운데 가장 큰 것은 지혜(智惠)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기 때문이다. 태초에 삼위의 하나님은 사람들을 슬기롭게 지으셨다. 지혜는 지식(知識)과는 다르다. 지식의 범주가 이론에 있다면 지혜는 실천의 영역이다. 사전적 의미에서의 지식은 교육이나 경험, 또는 연구를 통해 얻은 체계화된 인식의 총체를 말하고, 지혜는 사물의 이치나 상황을 제대로 깨닫고 그것에 현명하게 대처할 방도를 생각해 내는 정신적 능력을 가리킨다. 지식이 다소 현학적(衒學的)이라면 지혜는 다분히 호학적(好學的)이다. 지식이 자신의 박학다식(博學多識)을 늘어놓는 데 비해 지혜는 다방면의 해박한 정보가 없어도 어려운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을 말한다. 그렇다고 지혜가 어떤 처세술 따위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지혜는 실용적 중용(中庸)보다는 철학적 원리원칙을 중시한다. 지혜자의 언행이 일치하는 바는 당위(當爲)다. 따라서 지혜로운 사람은 아름다운 세계관을 갖기 마련이다. 성삼위 하나님을 향한 순전한 믿음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지혜자는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축복을 시시때때로 누리며 살아간다. 창조주께서 주신 말씀을 사모하며 살아가는 것이 슬기다. 지혜가 충만한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충실히 따른다. 그 말씀을 일상생활에 적용함으로써 경건한 삶을 살아낸다. 성경 말씀 안에는 온갖 지혜와 보화가 들어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지혜 있는 자는 말과 행동을 삼갈 줄 안다. 지혜자는 매사 절제되고 품격있는 언행을 견지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지혜의 세계를 알고 즐긴다. 어떤 경우에도 겸손함을 잃지 않는다. 그러한 사람일수록 유한한 슬기에 머물지 않는다. 자신이 가진 기술에 전적으로 의지하지 않는다. 지혜자는 무의식적인 상태에서도 결코 그릇된 길을 택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지혜로운 사람을 좋아하신다. 창조주를 사모하는 자들이 받는 지혜를 축복이라고 부르는 근거다. 삼위의 하나님께서 당신의 형상을 따라 생령(生靈)을 지으신 원천이 바로 지혜다. 그 영역을 벗어나 슬기롭게 살아갈 존재는 세상에 없다. 영적 존재인 사탄마저 끝내 하나님을 대적하는 까닭이다. 슬기로움과 어리석음의 갈림길은 결국 축복과 저주로 드러난다. 말씀을 믿고 붙드는 자에게는 영원한 생명선을 주시니 감읍한 일이고, 말씀을 거부한 채 곁길로 빠지는 자에게는 기도가 절실한 참이다. 그 종착역에 영생의 비밀이 숨어 있다. 지혜의 목적이 정반대로 나타난 결과는 오롯이 사람들의 몫이다. 천사도 부러워할 만한 자유의지를 인간에게 허락하셨기 때문이다. 무슨 일이든 자유롭게 결정할 권리를 주신 결단은 실로 은혜다. 심지어는 스스로 계시는 하나님을 반드시 각자의 자유의지로써 믿도록 설계하셨다. 엄연히 살아계시는 하나님을 믿어도 되고 믿지 않아도 되는 자유까지 허락하신 것이다. 다만 그 책임은 전적으로 본인에게 돌아간다. 한 사람 한 사람을 로봇으로 만들지 않으신 까닭이다. 미처 창조주 하나님의 존재 자체를 모르거나 거부하는 영혼들까지 참고 기다려주신다는 결정적 증거다. 하지만 기회는 목숨이 붙어있을 때가 유효기간이다. 모든 사람이 천국 백성이 되기를 애타게 바라시되 그마저 결정권은 각자에게 위임하신 터다. 문제의 근원은 “잠언과 비유와 지혜 있는 자의 말과 그 오묘한 말을 깨달으리라.”(잠언 1:6)라는 말씀을 수용하지 못한 연고에 있다. 태초에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신 뒤 인간을 지혜롭게 만드셨다. 이른바 모세 오경을 통해 친히 모든 지혜를 일러주셨다. 즉 하나님께서 주신 십계명이 지혜의 총합이다. 십계명을 목숨처럼 지키는 자에게는 지혜가 있고, 힘써 지키지 않는 자는 어리석었다. 요셉과 다니엘이 받은 축복 가운데 으뜸이 바로 지혜였다. 모세와 다윗 또한 지혜로운 자의 전형이었다. 그들은 탐욕으로 빚어진 분쟁을 잠재우고 갈팡질팡하는 무리를 올바른 길로 이끌었다. 다만 연약한 인간이었기에 지혜롭지 않은 행실을 죄다 물리치지는 못했다. 그들마저 자유의지를 선용하지 못한 결과였다. 역사상 위대한 사람들일수록 자유의지를 선용했다. 자유로이 즐기는 권리는 그에 상응한 의무를 수반한다. 창조주께서 부여하신 엄청난 권한이기에 책임이 따른다. 기실 그 권세를 엉뚱한 데 쓴 최초의 인간은 아담과 하와였다. 그 부부가 저지른 우매함으로 인해 죽음을 불러들이고 말았다. 죄의 속성이 자자손손 유전되는 것은 정해진 수순이었다. 하나님께서 정녕 그와 같이 예고하셨기 때문이다. 지혜롭지 못한 인간의 면면을 들여다보면 대부분 창조주 하나님을 경홀히 여긴다. 그런 뜻에서 교만의 반대는 겸손이 아니라 불신이다. 불신앙이 인간들을 하나님과 철저히 분리해버렸다. 구세주 예수님께 전심으로 구할 때 얻을 수 있는 것이 지혜인 줄 모른다. 창조주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지 않는 한 문제는 풀리지 않는다. 삼위의 하나님께서 당신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영혼을 지으신 까닭이다. 그러나 세계관을 바꾸는 일은 성령의 인도하심을 구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애타게 찾는 자들에게 양문을 여시기 때문이다. 모든 문제의 발단은 인간들이 하나님을 멀리하는 데 기인한다. 자신 안에 감춰져 있는 지혜를 모르는 건 당연하다. 지혜를 찾아내려는 노력이 태부족한 것도 한 원인이다. 우리 안에 지혜가 이미 주어졌음에도 저마다 꺼내서 사용하기를 주저한다. 아예 지혜 자체를 거부하는 사람들까지 있다. 각자에게 허락하신 슬기를 찾아내라고 주신 성경 말씀이 바로 지혜문학인 것이다. ■ 프로필 - 고교생에게 국어와 문학을 가르치며 수필집·시조집·기행집 등을 펴냈습니다. - 평택에서 기고 활동과 기독교 철학박사(Ph.D.) 과정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 블로그 “조하식의 즐거운 집” http://blog.naver.com/johash 꾸립니다. - <평택자치신문>에 “세상사는 이야기”를 13년째 연재하는 중입니다. ※ 다음호(623호)에는 ‘지혜문학과 떠난 자유여행 - 잠언은 일용할 양식’이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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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하식의 이야기
    2022-02-24
  • [세상사는 이야기] ‘죽향재(竹向在)’의 주인의식 ‘신령한 처소를 찾아’ (5회)
    그로부터 칠 년 후, 드디어 독립된 서재가 있는 집으로 이사했다. 잘 나가는 가게처럼 신장개업한 서가는 명실공히 나의 지식을 쌓고 다듬는 공간으로 터를 잡았다. 주거환경으로서는 목이 좋다는 곳으로 이주한 뒤 한없는 감사로 젖어 있던 그때 에벤에셀의 주님께서는 나로 하여금 신학을 공부하도록 인도하셨다. 책장이 두둑해지며 영적 허기를 느끼기 시작한 지점이었다. 때가 차매 여호와이레의 하나님께서 부족한 부분을 돌아보게 하셨다. 막상 신학의 문에 들어서니 거대한 학문의 성채였다. 세상의 어떤 학문도 신학 앞에서는 한없이 왜소해질 수밖에 없을 만큼 드높아 보였다. 학기에 학기를 더하며 위를 올려다보니 바라볼수록 높다란 장벽을 실감해야 했다. 그래서 아덴의 고대 철인 중에는 철학을 일컬어 ‘신학의 시녀’라고까지 고백하지 않았던가. 세기의 석학들이 제아무리 인문학을 거론하며 이른바 문사철(文史哲)을 들먹여도 신구약 성경을 능가하지 못한다. 아니 인간적으로 탁월할수록 감히 범접하지 못할 창조 사역의 비밀이 녹아있기에 그렇다. 유한한 사람의 지혜로는 알 수 없는 계시(啓示)의 기원을 전지전능한 신께서 몸소 열어주신 참이다. 신학의 길은 멀고 험했다. 아직은 일천한 배경지식 탓에 제대로 된 신학 논문 한 편을 완벽히 소화해내는 데도 남모를 시련이 따랐지만, 바지런히 이 책 저 책을 들추며 기웃거려보는 특유의 버릇만은 여전했다. 춘부장의 서가를 정리하는 동료 교사에게서 관련 서적을 트렁크에 가득 실어온 적도 있었다. 이러구러 첫해와 이듬해 수집한 신학 서적이 기대치를 넘어 칠백여 권에 달했으니, 모두가 예수님의 놀라운 은총이 아니면 무엇이랴. 이 또한 남들이 보기에는 책에 대한 과욕으로 비칠 수 있는 대목이라서 퍽 조심스럽기는 해도 뒤돌아보면 나는 세간에서 평가하는 책 수집상은 될지 몰라도 훌륭한 장서가의 자격은 갖추지 못한 게 확실하다. 여하튼 대강 정돈하여 세어본 총 장서 수는 어림잡아도 삼천오백 권을 훌쩍 넘긴 듯했다. 웬만한 동네 서점에 온 것 같다고 호들갑을 떠는 제자들을 보낸 뒤 사뭇 흐뭇해하던 연초의 기억이 뇌리에 생생하다. 나의 서재에 꽂힌 책들은 그렇게 긁어모은 거였다. 얼마 전에는 새로운 장서수집의 대원칙도 수립했다. 앞으로 몇 년간은 더 이상 숫자를 늘리지 않고 불필요하다고 확신하는 책들과 신간들이라도 과감히 정리해 나갈 결심을 굳힌 것이다. 어떻게 모은 책들인데 단 한 권인들 집 밖으로 내치듯 떠나보내느냐고 반문할 수 있겠으나 신중히 솎아낸 책들은 그냥 내다 버리는 게 아니라 필요한 곳을 찾아갈 것이므로 안심해도 된다. 이윽고 눈에 비친 나의 서가는 내심 새로운 모습으로 정화를 바라고 있다는 걸 스스로 눈치챈 소이(所以)였다. 그 원칙에 따라 여태껏 수거한 책들이 줄잡아 오백여 권은 족히 되지 싶다. 그간 서재 한쪽에서 밀려난 책들은 다른 방으로 배치했음에도 불구하고 차츰 방바닥까지 잠식해 오는 걸 본 다음에는 결정을 더는 미루기 어려웠다. 향후에는 더 엄선해서 살 책을 고르고 손에 쥔 책은 반드시 읽고 소화하는 데 집중할 요량이다. 두고두고 참고할 게 아니면 곁에 남겨두는 데 치중하지 않고 남들에게 선물하든지 기부하는 일에도 눈을 돌릴 생각이다. 이제 남은 과제는 서재에 걸맞은 이름을 짓는 일이다. 길게 고심할 것도 없이 나의 아호처럼 대나무를 닮겠다는 뜻에서 <죽향재>(竹向在)라고 붙였다. 대쪽 같은 성품을 본받는 존재로 우뚝 서고 싶어서다. 내 깜냥은 모자랄지언정 자신을 비운 채 하늘로 곧게 뻗어 올라간 자태를 지향할 참이다. 지난날을 돌이켜보니 처음 이사 와서 우리 네 식구는 오붓이 서재에 둘러앉아 예배를 드렸다. 그런데 어언 아들딸이 장성해서 가정을 이루고부터는 아내와 단둘이 식탁에서 경배를 드리게 되었다. 서재가 다시금 신령한 처소로서 의미를 되찾는 일이 중요하다는 걸 감지해낸 터였다. 총 삼천여 권의 책들 가운데 채 삼 할도 안 되는 구백여 권만을 겨우 읽어낸 참기 어려운 지성적 가벼움을 영적으로 숙성시켜 나갈 계획을 세운 것이다. 서재를 번듯하게 겉으로 꾸미고 가꾸는 데서 벗어나 마냥 책을 향한 사모의 정만을 앞세우지는 않으리라. 그리하여 허기진 육신을 요기하는 서고가 아니라 영혼 구원에 필수적인 믿음의 양식을 공급하리라. 그렇게 영적 내실을 다질 때 참 신앙의 풍요를 누리며 내게 주어진 지복(至福)을 향유할 수 있으리라. ■ 프로필 - 고교생에게 국어와 문학을 가르치며 수필집·시조집·기행집 등을 펴냈습니다. - 평택에서 기고 활동과 기독교 철학박사(Ph.D.) 과정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 블로그 “조하식의 즐거운 집” http://blog.naver.com/johash 꾸립니다. - <평택자치신문>에 “세상사는 이야기”를 13년째 연재하는 중입니다. ※ 다음호(622호)에는 ‘지혜문학과 떠난 자유여행 - 슬기로운 자의 행보’가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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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하식의 이야기
    2022-02-17
  • [세상사는 이야기] ‘죽향재(竹向在)’의 주인의식 ‘지적 탐색기에 들어’ (3회)
    그러나 쌓인 책의 무게로 인생의 부채가 탕감되는 건 아니었다. 연달아 실패한 대학입시를 지레 포기할 수도 없었다. 가정 형편상 학원에 등록하지 못하고 책상 앞에 앉았으나 어디서부터 손을 댈지 막막하기 짝이 없었다. 아까운 시간은 흘러가는데 막상 만회하라는 공부는 등한히 한 채 목표로 잡은 건 교과서가 아니었다. 장르별 문학 서적을 위시해 사회를 심층 분석한 시론(時論)에다 동서양의 철학서까지 알량한 독서목록에 등재해 놓았다. 무슨 대단한 독파력을 지닌 것은 아니었지만 그간 지병처럼 앓던 내용 공포증을 얼마큼 떨쳐낸 게 소득이라면 소득이었다. 그중에 이해가 쉽잖은 사상서를 통해 사고의 깊이를 더했다. 그해 일기를 자주 챙겼던 덕분에 공영방송에 보낸 독후감이 채택되어 인기작가였던 최인호로부터 저자 서명이 담긴 두 권의 책을 받아들고 기뻐했던 기억이 난다. 게다가 입시정보를 캔답시고 <진학>이라는 월간지에 나온 대학들의 면면을 훑어보느라 정작 본고사는커녕 예비고사 대비도 게을리했으니 여전히 나의 장래는 안갯속이었다. 대학의 관문 통과에 매진할 시간에 그토록 한눈을 팔다니, 돌이켜보면 창조주를 잊고 나댔던 나의 과거 행적은 한심한 투기적 노름이나 다름없었다. 가까스로 지방의 한 유서 깊은 대학에 들어서자마자 영장이 날아들었다. 오백 여권의 책을 뒤로하고 입산한 병영의 시계는 실로 끔찍한 체험의 연속극이었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 갇혀 한 치 앞을 분간하기조차 힘겨웠던 지난날들을 떠올리면 지금도 멘탈(mental)에 붕괴가 올 것 같다. 그도 그럴 것이 길바닥이나 도랑에서 주운 흙 묻은 신문지[舊聞]를 몰래 주머니에 구겨 넣어 재래식 화장실에서 쭈그린 채 읽기를 시도할 만치 엄혹했다. 부당한 구타와 대접 등 말하지 못할 우여곡절은 겪었지만 동해안 경비를 맡은 말단 소대(소초)에서 최고 사령부의 본부대까지 치고 올라가며 복무하는 동안 작전참모부에 차려진 군사도서관을 떠맡았으나 그렇다고 차분히 앉아 독서에 임하는 일은 감히 엄두조차 내기 어려웠다. 하루하루 생존하기에 급급한 인간 군상의 이기심들로 인해 허덕이듯 절망하며 바싹 움츠러들었던 시기였다. 그렇게 제대 날짜만을 손꼽아 기다리던 한 병사의 소망은 주님의 은혜로 무사히 이뤄지고, 차가운 겨울을 집에서 따뜻하게 보낸 복학생은 베드로 광장이 정갈한 독일식 기독교대학 캠퍼스로 귀환했다. 북적이는 대학 강의를 섭렵하는 데는 전연 무리가 없었다. 첫 학기 성적이 좋아 중앙도서관의 지정석까지 얻어 장학금을 타내던 참에 여기저기 낙후된 공공도서관 시설에 눈길이 갔다. 주로 대도시에 산재한 대학도서관을 제외하고는 후진국형 열람실들이 시야에 들어왔다. 도서관학(요즘은 문헌정보학으로 개칭)이라는 전공을 택할 때만 해도 남달리 학구열이 불타올랐는데 지금 와서 반추해보니 교정 안에서의 책 모으기는 생각만큼 진척이 없었다. 그래도 만만찮은 생활비를 쥐어짠 끝에 150권짜리 문고본을 장만했고, 몇 개 시리즈물과 전공 서적 수십 권 정도만 서가에 꽂을 수 있었다. 역시나 문제는 취업난이었다. 전두환이 발호하던 1980년대 전후 유가 폭등으로 몸살을 앓던 경제가 해마다 곤두박질을 쳤기에 쉬이 따놓은 줄 알았던 남자 사서직마저 기약이 요원했다. 게다가 학점은 좋으나 평소 관계 형성에 소홀한 이력에 점수를 깎아 먹는 바람에 빈자리는 어느새 예뻐 보인 자들의 몫으로 돌아갔다. 다행히 서울의 미션스쿨에 자리가 났다는 통보를 받은 건 춘삼월 막바지였다. 하지만 지역사회의 지식안내자를 자임하려던 나의 포부가 무모했다는 걸 깨닫는 데는 불과 얼마 걸리지 않았다. 아직 운영 전반의 체계화를 이루지 못한 곳에서 내가 할 수는 일은 제한적이었다. 일단은 따분한 일상을 타파하기로 계획했다. 서둘러 지금의 아내를 만나 결혼하고 두 아이를 낳아 길러도 한편으론 아직 봇짐을 정리하지 못한 어정쩡한 상태 그대로였다. 일간신문을 펼치니 한 대학도서관의 사서직 공채 시험 공고가 눈에 띄었다. 치열한 경쟁을 뚫고 합격 통지를 받은 뒤 연봉 협상에 미심쩍은 데가 있어 허락을 받고 하루 출근해보니 내가 반평생을 걸만한 곳은 아니었다. 타개책은 공부를 계속하는 길이었다. 졸업 후 학교도서관에 심기로 약속한 이름 없는 사서 선생의 소명감은 훨씬 열악한 악조건들 앞에서 송두리째 무너져버렸다. 깊은 고민 없이 거꾸로 주독야경의 터널을 빠져나오기로 결심했다. 나는 애당초 구상했던 국어교사의 길을 향해 늦깎이 편입을 결행했다. ■ 프로필 - 고교생에게 국어와 문학을 가르치며 수필집·시조집·기행집 등을 펴냈습니다. - 평택에서 기고 활동과 기독교 철학박사(Ph.D.) 과정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 블로그 “조하식의 즐거운 집” http://blog.naver.com/johash 꾸립니다. - <평택자치신문>에 “세상사는 이야기”를 12년째 연재하는 중입니다. ※ 다음호(620호)에는 ‘죽향재(竹向在)의 주인의식 - 영적 감지기를 맞아’가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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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하식의 이야기
    2022-02-11
  • [세상사는 이야기] ‘죽향재(竹向在)’의 주인의식 ‘영적 감지기를 맞아’ (4회)
    천여 권의 책을 짊어진 채 시동한 국어국문학이란 학문은 생각보다는 수월했다. 오후 네 시에 시작해 밤 11시에 끝나는 직장 일을 병행하고서도 나는 높은 학점을 받았다. 적성에 들어맞는 학업의 진전은 괄목할만한 지적 성과로 나타났다. 하지만 턱없이 모자란 수면의 질량으로 급격히 시력이 나빠져 안경을 써야 했다. 나는 전공과 관련한 책들을 모으는 재미로 종로서적과 교보문고의 재고 코너와 할인매장을 내 집처럼 드나들었다. 주머니 사정이 허락하는 한 줄기차게 발품을 팔다 보니 가뜩이나 비좁은 전세방이 미어터질 지경이었다. 남들의 눈에는 제집 장만도 못한 주제에 참으로 유별난 취미를 가졌다며 수군댔을지도 모른다. 고마운 분의 도움이 아니었다면 치열한 관문을 뚫고 곧바로 교육대학원생이 되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추동력은 평온한 가정이었다. 아내의 내조에 힘입어 졸업논문을 쓰는 일에 집중했다. 세 명의 동기 가운데 홀로 석사학위를 마무리한 것은 주님의 은혜였다. 어렵사리 시작한 나머지 대학 2년과 야간대학원 2년 반까지 그야말로 일사천리였다. 수학 연한이 남들보다 뒤로 밀리기는 했어도 얻어낸 열매가 결코 작지 않았다. 허송한 세월을 따라잡아 보았고 맞이할 미래를 앞당겨 다져보았다. 그해 겨울 나는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새로운 직장을 얻었다. 전세에서 새집으로 옮긴 환희는 기대 이상이었다. 서울을 떠난 책의 숫자만도 이미 나 혼자서는 짊어지기 어려운 천 권을 넘어섰다. 난생처음 마련한 내 집의 구석방에 바라던 서재를 꾸미기로 했다. 농부 겸 목수 일을 하시는 아버지의 손을 빌려 칸칸이 번듯한 서가를 세웠다. 누가 봐도 멋들어진 새 책방을 번듯하게 마련한 터였다. 얼마나 고대하던 나만의 서재였던가. 고대 때는 지금이다 싶어 잽싸게 고향 집 구석방에 쟁여놨던 서책들을 공수했다. 한 달에 걸쳐 책 정리를 마치고 나니 남부럽지 않은 서재가 위용을 드러냈다. 제법 주제별 배치까지 고려한 듯 쳐다볼수록 흡족하기만 했다. 책에서 나는 냄새가 옛날 가마솥 누룽지처럼 구수했다. 한 칸 한 칸 서가를 채워가는 재미가 이토록 쏠쏠한지 미처 몰랐다. 내 명의라야 달랑 집 한 채가 다였지만 농부가 땅뙈기를 늘려가는 기분이 흡사 이럴 거 같았다. 솔직히 빈 서가를 메우는 마음만치 책장을 넘기는 보람을 느꼈는지를 되돌아본 계기였다. 그런데 왠지 가슴 한쪽이 허전했다. 바야흐로 영적 감지기에 접어든 참이었다. 본격적으로 뿌리를 내릴 예배당을 찾은 건 그때였다. 이 교회 저 교회를 전전하다시피 주위를 샅샅이 살폈다. 반경을 한껏 넓혀 오산에서 천안까지 훑고 다녔다. 아침저녁으로 가정예배는 드렸지만 영안이 열리기 전이어서 목회자들이 극구 감추는 데까지 훤히 꿰뚫기는 어려웠다. 쏟아지는 교재 연구에 가르치기 바쁘다는 핑계로 신앙 서적 읽기를 늦춘 것은 영적 침체를 불렀다. 그중 직장 내 신우회 모임을 통해 어느 정도 도움은 받았으나 그뿐이었다. 자연스럽게 성경 주석서를 접할 수 있는 호기(好機)였는데 성과 없이 끊겨버린 것이 아쉬움을 남겼다. 그나저나 장서 이천 권이 되려면 지혜와 지식을 녹여 만든 세월의 지층이 좀 더 켜켜이 쌓여야 했다. 그 틈에 어렵사리 마친 아내의 방송대 수학 덕분에 가정학에 관련된 책자가 백여 권 늘어난 것은 흐뭇한 지점이었다. 그렇게 몇 년간은 유의미한 장서 확보에 소강상태를 보였다. 요즘 들어 뼈저리게 느끼는 건 지속 가능한 일이라야 주목할 만한 성취감을 담보한다는 원리다. 그때마다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에 전념했기 때문이라며 변명 아닌 설명을 애써 해대고는 있지만 실은 뭔가 지적 허기를 느꼈던 건 사실이다. 확실한 주제 없이 살아온 열기로 인해 태부족한 소일(消日)이 그 까닭이었다. 한사코 털어놓기를 주저한 터여서 여태 분출하지 못한 지성적 에너지원이 거르지 않은 잉여물처럼 심연에서 들끓고 있었다. 그래도 그 시절 산책과 등산의 그윽한 묘미를 알아차린 건 천만다행이다. 물론 방이 하나 더 있는 큰집을 마련하기 위한 초 긴축가계운영도 책꽂이가 제자리걸음을 하는 데 한몫을 담당했다. 그렇다고 해서 그 고답적인 취향이 멀리 달아나 버린 건 아니었다. 꼭 필요하다고 분별한 책들은 시와 때를 따라 곤궁을 면할 만큼은 사서 읽은 편이어서 굳이 수집 형태만 놓고 본다면 도리어 바람직한 형태로 바뀐 측면도 없지는 않았다. 기실 유능한 장서가들을 보노라면 다 읽은 책이나 더는 묵히기 아까운 책들을 흔쾌히 기증하고 있으니 말이다. ■ 프로필 - 고교생에게 국어와 문학을 가르치며 수필집·시조집·기행집 등을 펴냈습니다. - 평택에서 기고 활동과 기독교 철학박사(Ph.D.) 과정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 블로그 “조하식의 즐거운 집” http://blog.naver.com/johash 꾸립니다. - <평택자치신문>에 “세상사는 이야기”를 12년째 연재하는 중입니다. ※ 다음호(621호)에는 ‘죽향재(竹向在)의 주인의식 - 신령한 처소를 찾아’가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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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하식의 이야기
    2022-02-10
  • [세상사는 이야기] ‘죽향재(竹向在)’의 주인의식 ‘손에 들어온 전집류’ (2회)
    재밌는 것은 뜻하지 않게 생긴 횡재(?)에 고마움을 느낀 대상이 결단을 내린 모친보다는 돈을 번 그 아저씨로 뒤바뀐 국면이었다. 비록 내게 수시로 분풀이를 해대던 탓에 인격적인 야속함이야 있었을망정 오늘날 나의 서재를 형성해준 일등공신이 일벌레 어머니라는 데는 별 이의가 없다. 생계를 위해 발이 부르트도록 들판을 돌아다니며 농부들에게 책을 소개하던 그 책 장수를 두고 ‘책 보급 왕’으로 뽑아도 손색이 없겠다는 뜬금없는 발상을 하며 이따금 빙그레 웃곤 한다. 이는 책다운 책이 내 옆에 둥지를 튼 첫 번째 사건이었기에 이렇게 길게 서술이 늘어진 것이다. 하지만 그 책 오십 권은 이후 실상 내 손을 많이 타지도 않았다. 그로 인해 부모님께 실컷 받은 지청구도 한몫 했지만 책들을 만지느라 도통 교과서하고는 사귈 생각을 하지 않는 데 있었다. 촌뜨기의 좁아터진 시야에 비해 거창한 독서계획을 세운 것까지는 퍽 가상한 일이었으나 관심 없는 난해한 내용에는 좀처럼 흥미를 느끼지 못한 것이 지적 성장의 화근으로 작용했던 참이다. 먼 훗날 뒤늦게 철이 들어 그때 정황을 곰곰이 헤아려보니 세계문집으로 인하여 나는 일종의 ‘접근 장애성 내용 공포증’(필자의 명명)을 앓게 되었던 것 같다. 내가 그토록 읽어내고자 공을 들였던 책자 중에는 괴테의 명작 <파우스트>가 있었다. 아직 변변히 한국문학에도 딱지를 떼지 못한 주제에 그런 대작을 펼쳤으니 기껏 더딘 판독에 의미 파악인들 무슨 진척이 있었겠는가마는 그때 내게 생긴 난삽(難澁)한 책자에 대한 두려움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차츰 딱지가 지고 떨어져 고맙게도 고무라기처럼 아물었다. 알고 보면 그 증세는 머리를 싸맬 게 아니라 대충 넘어가도 상관없는 사안에 불과했다. 그 뒤로는 내용이 필요 이상 어렵고 산만하다 싶으면 잠간 어떻게 껄끄러운 부위를 고쳐볼까 들여다보다가 이내 눈앞에서 치워버린다. 이는 자칫 잘못하면 청소년들에게 지식에 대한 고질적 내성으로 악화할 소지가 있으므로 각별히 주의를 요한다는 말을 덧붙이고 싶다. 사실 나는 어릴 적부터 타의 추종을 불허할 만치 참을성이 있었다. 또래에 비해 내구력이 있었기에 자식 칭찬에 극히 인색했던 우리 집에서까지 나의 인내심만은 인정하는 편이었다. 자칫 심각한 문제로 키워 일을 그르치는 어리석음은 범하지 말라는 조언이다. 오죽하면 신경질적인 어머니까지 “쟤는 죽은 다음 무슨 말을 하려나?”라고 핀잔을 주었을까. 박토에서 책을 통해 사색에 빠져든 것은 어쩌면 불가해한 경사였다. 문제는 마냥 손을 놓고 현실성 없이 펼치는 상상력에 있었다. 미지의 세계를 향해 공상에 젖어 든 일상이 가져다주는 유익은 무엇일까? 잘못 박힌 세 살 적 버릇이 여든까지 간다는 격언의 경고를 무작정 불러들인 격이어서 되짚는 말이다. 이런 나의 증세는 중2가 되면서 엉뚱한 곳으로 번져갔다. 제대로 읽지도 않을 책을 마구잡이 수집하기로 작정한 터였다. 대관절 무엇에 쓰려는 심산이었는지는 몰라도 여하튼 나는 책이라고 생긴 것이면 다치는 대로 긁어 들이기를 즐겼다. 이런 취미의 최대 걸림돌은 응당 금전이었다. 그러나 어머니는 웬일로 책만 사겠다고 조르면 의외로 후하셨다. 열 권을 사면 고작 한두 권을 읽어내는 판국임에도 사들이는 것만으로도 마냥 좋아하던 그 심사에 대해서는 참으로 아리송하다. 지적 허기를 달래기 위한 일말의 몸부림이었다면 그나마 다행이겠다. 이러구러 고등학교를 졸업할 무렵 내 곁에는 약 삼백여 권의 책이 쌓였다. 월부책 사건 이후 자그마치 2주일에 세 권씩은 꼬박꼬박 책꽂이에 꽂아 왔던 셈이다. 푼돈을 모아 사들인 책치고는 어지간히 눈에 띄게 불어났던 참이다. 나는 그 시기를 ‘지적 탐색기’로 부르기로 했다. 떠오르는 대로 어렴풋이나마 세계문학전집을 기쩍이면 다음과 같다. 스탕달의 <적과 흙>을 비롯해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 오스틴의 <오만과 편견>, 세계단편문학선>,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 사르트르의 <구토>, 톨스토이의 <부활>과 <전쟁과 평화>, 서머싯 몸의 <달과 6펜스>, 마가렛 미첼의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 레마르크의 <개선문>, 에밀리 브론테의 <제인 에어>, 릴케의 <말테의 수기>,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 호메로스의 <일리아드>와 <오디세이>, <세계희곡선> 등이 맨 꼭대기 서가에 그대로 꽂혀있다. 깨알 같은 글씨가 누렇게 바래 고개를 쳐들고 읽어낼 만치 낡았지만 하나같이 소중한 추억의 서책들이다. ■ 프로필 - 고교생에게 국어와 문학을 가르치며 수필집·시조집·기행집 등을 펴냈습니다. - 평택에서 기고 활동과 기독교 철학박사(Ph.D.) 과정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 블로그 “조하식의 즐거운 집” http://blog.naver.com/johash 꾸립니다. - <평택자치신문>에 “세상사는 이야기”를 12년째 연재하는 중입니다. ※ 다음호(619호)에는 ‘죽향재(竹向在)의 주인의식 - 지적 탐색기에 들어’가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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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하식의 이야기
    2022-01-20
  • [세상사는 이야기] ‘죽향재(竹向在)’의 주인의식 ‘수줍게 들춰낸 편력’ (1회)
    척박한 가정에서 자란 소년에게도 꿈은 있었다. 어중간한 시골구석에서 태어난 탓에 세련된 문화적 혜택은커녕 문명의 이기라고는 아예 구경조차 못한 채 자라났어도 유난히 책 모으는 욕심 하나만큼은 남다른 데가 있어 가당찮게 나의 서재를 갖고 싶었다. 아늑하고 조촐한 나만의 공간을 꿈꾼 터였다. 그렇다고 해서 나를 키운 가문이 대대로 서책을 쌓아놓고 사는 뼈대 있는 선비 집안이라거나 동양화 같은 산천경개의 가시권에서 뛰어놀다가 자연스레 생긴 고상한 취향은 더욱 아니었다. 그저 책같이 생긴 물건이면 옆에 두기를 좋아했고, 책장을 넘길 때 풍기는 탕내가 싫지 않아 생겨난 취미였다. 어린 마음에도 책들을 책꽂이에 꽂아 놓기만 하면 꽤 아는 게 많아질 것 같은 주제넘은 생각이 자주 들곤 해서였다. 그러니까 고매한 지적 대물림이랄 것까지는 아니로되 윗대로부터 물려받은 심리적 영향권이라면 그리 크지 않은 동네에 서당을 열어 간신히 호구(糊口)하시던 할아버지의 가르침과 맞닿아있던 것만은 분명하다. 그로 인해 한자 글씨체가 훌륭하고 평생 성경책을 가까이하신 아버지 밑에서 보고 배운 점이 이어받은 삶의 여건이라고 할 수는 있겠다. 부친은 이웃들로부터 가방끈에 비해 한자 실력이 있다는 평을 들으셨다. 고된 들일을 마치면 안방 벽이나 마루 기둥에 비스듬히 기대앉아 손가락과 발을 움직여 늘 글씨 쓰는 연습을 즐겨 하셨다. 그 모습을 접할 때마다 나는 ‘아버지가 우리 중학교 한문 선생님이라면 얼마나 좋을까’하는 생각을 여러 차례 되풀이하곤 했다. 어쨌든 그럭저럭 선대로부터 대물림한 크고 작은 옥편이며, 굵은 실로 엮어 만든 누런 서책 수십 권이 내가 꿈꾸던 서재의 시초였다. 거기에 해마다 몇 권씩 보태는 거라고 해봐야 교실에서 사용한 교과서에다 가물에 콩 나듯 사보는 책들 몇 권이 거지반이었고, 교회에서 단체로 구입한 낡은 성경책이랑 어린이 찬송가 두어 권이 내가 소유한 책자의 전부였다. 보시다시피 서책을 사서 모으기에는 참으로 미약한 출발이었거니와 뜻하지 않은 곳이나 친인척에게 선물 받은 책을 집으로 가져올 때는 나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가 기분 좋은 눈총을 심심찮게 받곤 했다. 오로지 마음속에 간직한 서가를 향한 한 가닥 소망만이 내가 지닌 환경적 불완전 요소의 돌파구라고 해도 결코 지나친 말은 아니었다. 소작농의 맏이로 태어나 엄격한 기독교 율법으로 양육되고, 방과 후면 농사일 거들기에 바빴던 나의 어린 시절은 꼭 하고 싶은 말조차 입 밖에 꺼내지 못하고 살았기에 침울하기 그지없었다. 도심과 떨어진 읍내의 변두리 초등학교를 우등으로 졸업한 뒤 중학교에 입학한 나는 수업을 마치면 어김없이 호미를 들고 밭으로 향해야 했다. 집에서 학교까지 십리 길을 오가는 것도 무척 고단했지만, 마치 숙명처럼 받아들인 밭일은 언제나 피하기 어려운 과업이었다. 차츰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귀가하는 시간을 늦추는 바람에 심하게 혼쭐이 나기는 했어도 여전히 밤늦도록 거드는 일손만은 내게는 중요한 일과 중의 하나였다. 문제는 하루가 다르게 어려워지는 각 과목 교과서들의 내용이었다. 그 진도를 따라가기도 벅찬 마당에 갈수록 노동의 강도마저 세지다 보니 도저히 감당해내기 어려웠다. 본격적인 공부의 맛을 미처 들이기도 전에 찾아온 때 이른 사춘기는 지레 지친 나의 심신을 사정없이 엄습해버린 터였다. 온갖 사물에 대한 호기심만으로도 가슴과 뇌리는 충만했건만 나만의 시간과 자유를 달라고 애원할 용기도 없이 무성한 풀 섶에서 풀이 죽어지내던 나날이었다. 그렇게 잔뜩 주눅이 들어 지내던 어느 날, 나는 당시로서는 흔치 않던 월부책 장수를 김매던 중에 마주쳤다. 서산에 해가 반쯤 걸린 밭이랑 사이에서 어머니에게 말을 건네던 사람이 있었다. 삼십대 중반쯤으로 뵈는 호리호리한 남자의 장광설을 엿들어본즉, 자녀를 위해서 '세계문학전집'을 꼭 사줘야 한다는 아주 애절하고 집요한 판촉이었다. 나는 매일같이 밭 한가운데 엎드려 있는 게 왠지 창피스럽게 느껴져 고개를 푹 수그리고 개미처럼 일만 하고 있었는데 순간적으로 불쑥 모기 만한 소리로, “야, 저것 좀 사봤으면 좋겠다!”라며 전에 없던 속내를 드러냈다. 아,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그냥 별로 기대하지 않은 채 지나가는 말처럼 던져본 말에 어머니는 대뜸, “그거 얼마래요?”라고 하시며, 무려 50권이나 되는 책 상자 3개를 선뜻 인수하는 것이었다. 이게 정말 꿈은 아니겠지? 나는 그때의 놀람과 설렘을 아직도 고스란히 가슴에 담고 있다. ■ 프로필 - 고교생에게 국어와 문학을 가르치며 수필집·시조집·기행집 등을 펴냈습니다. - 평택에서 기고 활동과 기독교 철학박사(Ph.D.) 과정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 블로그 “조하식의 즐거운 집” http://blog.naver.com/johash 꾸립니다. - <평택자치신문>에 “세상사는 이야기”를 12년째 연재하는 중입니다. ※ 다음호(618호)에는 ‘죽향재(竹向在)의 주인의식 - 손에 들어온 전집류’가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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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하식의 이야기
    2022-01-13
  • [세상사는 이야기] 크리스천한테 건넨 소식 ‘영혼 구원의 섭리’ (4회)
    이번에는 지난날 제가 겪었던 시행착오들을 털어놓을까 합니다. 자연스레 ‘하인리히 법칙’을 들먹이지 않을 수 없습니다. 큰 재앙을 당하기 전에 작은 사고와 조짐들이 먼저 일어난다는 주장입니다. 1명의 사상자가 나올 경우, 그 전에 경상자가 29명 발생한 다음 비슷한 문제로 다칠 뻔한 사람이 300명이나 존재한다는 사실입니다. 그 비율을 그대로 적용해 ‘1:29:300 법칙’으로 부르기도 합니다. 1931년 당시 미국 여행보험사의 손실통제 부서에 근무하던 하인리히(H. W. Heinrich)는 산업 재해 사례들을 분석하던 중 일정한 흐름을 발견했다는군요. 그가 쓴 <산업 재해 예방: 과학적 접근>을 통해 처음 알려졌는데요, 어떤 재해든지 우연히 생기는 게 아니라 반드시 이전에 여러 번에 걸쳐 사람들 앞에 경고등이 켜진다는 사실을 실증적으로 밝혀냈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매우 크다고 하겠습니다. 제 경우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역사를 주관하시는 분이 개인사 역시 섭리하시기 때문이죠. 알고 보면 우리가 겪는 일은 죄다 개개인의 자유의지로 빚어낸 결과물이니까요. 크고 작은 일들이 죄다 나의 철없는 소행이었거든요. 제아무리 핑계를 끌어온들 언제나 내 소견대로 행하였고 끝내 고집을 피우며 되먹지 않은 결정을 내렸으니까요. 설령 어떤 손해에 누군가가 개입한 흔적이 있다손 치더라도 그건 늘 쓴 충고를 안 받아들인 어리석음이 끼어들었다는 걸 부인할 수 없습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 태초부터 베푸신 은혜를 선용하지 못한 까닭이었죠. 따지고 보면 선악과를 악용한 하와를 탓할 까닭이 궁색해진 참입니다. 악한 의도인 줄 알고 따라간 아담 이후 자범죄의 대가로 치르는 형벌이니 말입니다. 죄인의 피를 물려받은 원죄 때문에 그 속성이 고스란히 유전되었거든요. 비록 중생했을지언정 평생 성화를 지속하는 이유입니다. 심히 부끄러우나 저의 나쁜 운전 습관을 고백합니다. 성격이 급한 탓에 막히는 걸 참기 어려워하는 편이거든요. 길이 훤히 열렸을 때 나도 모르게 과속을 하곤 합니다. 오래전 딱지까지 몇 차례 끊은 적이 있으니까요. 떠올려보면 정말 창피한 일들입니다. 내비게이션을 단 뒤로는 각별히 조심한다고 다짐해도 타고난 성정을 단박에 죽이기는 쉽지 않습디다. 이런 게 바로 죄성이로구나, 매번 추슬러봐도 뿌리 깊이 박혀있는 속성을 무리 없이 다스리는 건 여전히 저의 숙제입니다. 자그만 단체의 책임을 맡고 있을 때였어요. 왜 투명한 회계 처리로 구성원들에게 신뢰감을 주지 못한 채 적당히 얼버무렸는지 후회가 막급입니다. 차마 입에 올리지 못할 만큼 수치스러운 일도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소유를 내 것인 양 제쳐둔 일입니다. 나중에 정확히 계산하셨습니다. 소스라칠 만큼 감사한 일이었어요. 주님의 자녀이기에 중간결산할 수 있었으니까요. 유독 반복을 싫어하는 학습 태도로 인해 실패를 거듭한 과거사는 가슴 아픈 기억입니다. 다행히 퇴임하자마자 이어가고 있는 박사과정에서 그 취약점을 보완하느라 애쓰지만 여전히 쉽지 않은 일입니다. 도달 가능한 목표를 정하고 꾸준히 정진하다 보면 실시간 역사하시는 분은 성령 하나님이시라는 은혜를 깨닫는 게 요체입니다. 교단에 머물며 다소 따분한 느낌이 들었을 때 앞뒤 안 재고 착수한 신학대학원 졸업을 바탕으로 침체에 빠질 틈새를 없애버린 결단은 퍽 잘한 일이었어요. 제 경험칙상 주저 없이 권면할 수 있습니다. 늦은 나이에 쏟아부을 만한 일거리를 찾으십시오. 출퇴근의 수고를 면제받은 덕분에 더욱 몰두할 수 있는 여력이 생기더라고요. 백세시대에 새로운 영역을 구축하는 즐거움이 제법 쏠쏠합니다. 자신을 사랑할 열정이 남아있는 한 소망은 결코 말라붙지 않으니까요. 돌이켜보매 모두가 예수님을 제대로 섬기지 못해 벌어진 일이었습니다. 질풍노도와 같은 청소년기에는 주어진 시간을 잘 활용하지 못했고, 난산 끝에 출발한 대학 시절에는 곧 닥쳐올 미래를 대비하지 못한 잘못이 있었어요. 지나고 보니 어렵사리 교단에 섰으나 최선을 다하지 않은 적도 있었고, 가르치는 태도의 오만함이나 내용상의 오류에서도 결코 자유로울 수 없으니까요. 가장 후회막급한 지점은 끝내 풀지 못한 인간관계입니다. 흔쾌히 양보하고 듬뿍 손해를 보는 데 한참 인색했거든요. 왜 그리 미안하다는 말문이 더뎠는지 모르겠어요. 한마디로 복음의 비밀을 깊이 깨닫기 전 맞닥뜨린 갖가지 사안에 대한 판단력의 문제였습니다. 모쪼록 살면서 걸림돌에 걸리거든 우선순위를 정해 슬기롭게 넘어가되 그때마다 열쇠를 쥐고 계시는 주님께 지혜를 구하시기 바랍니다. 굳건한 신앙은 시련이 닥칠 때 오히려 빛을 발하는 법입니다. ■ 프로필 - 고교생에게 국어와 문학을 가르치며 수필집·시조집·기행집 등을 펴냈습니다. - 평택에서 기고 활동과 기독교 철학박사(Ph.D.) 과정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 블로그 “조하식의 즐거운 집” http://blog.naver.com/johash 꾸립니다. - <평택자치신문>에 “세상사는 이야기”를 12년째 연재하는 중입니다. ※ 다음호(617호)에는 ‘죽향재(竹向在)의 주인의식 - 수줍게 들춰낸 편력’이 이어집니다.
    • 시민광장
    • 조하식의 이야기
    2022-01-06
  • [세상사는 이야기] 크리스천한테 건넨 소식 ‘영혼 구원의 사역’ (3회)
    오늘도 어김없이 맞이하는 새날입니다. 하지만 어언 이태째 코로나바이러스 확산으로 인해 그야말로 전 세계가 전쟁 중입니다. 평소 청결을 유지하며 몸에 나쁜 음식이나 기호품을 멀리하며 건전한 생활을 영위한다지만 경제가 큰일입니다. 열악한 환경에서 고군분투하시는 분들께 격려와 위로의 말씀을 드립니다. 중요한 건 여건이 어려울수록 창조주의 무한하신 긍휼을 전심으로 구해야 합니다. 추운 날씨에서 기승을 부린다는 코로나19의 확산이 인간의 잘못이나 부주의로 벌어진 재앙이기에 그렇습니다. 안타깝게도 인체가 가장 스트레스를 받는 일교차나 갖가지 질병이 태초 에덴동산에서는 전혀 없었다는 사실입니다. 생로병사로 이어지는 죽음 자체가 아담과 하와의 자범죄로 말미암아 자자손손에게 유전되고 말았기 때문입니다. 위에서 알려드린 비밀 가운데 첫째는 계절을 연출하시는 창조주 하나님의 사역입니다. 전지전능하신 분께서 몸소 우주 만물을 지으신 터입니다. 그 모두는 우리 인간을 위한 대전제였죠. 일일이 나열할 필요도 없이 땅의 기초를 놓으시고 하늘을 펴신 일을 성경은 백 차례 이상 증언하니까요. 저는 매번 기독교 신앙고백의 핵심이 바로 창조 사역에 숨어 있다고 역설하곤 합니다. 자전과 공전을 거듭하는 지구촌을 두고 우연에 의한 빅뱅(대폭발)이나 기원이 없는 진화론에 기댈 만큼 허무맹랑한 주장이 없으니까요. 가치 없는 가설마저 마치 사실인 양 학교에서 가르치는 거야말로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는 자들이 얼마나 우매해질 수 있느냐를 보여주는 실례입니다. 창조가 믿어지면 성육신, 부활, 재림이 진실로 골수에 박힐 수밖에 없습니다. 심판주로 오실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성령님이 내주하심으로 언행 심사를 분별할 수 있습니다. 둘째는 영육 간에 강건함을 유지하기 위한 각자의 노력입니다. 차제에 술과 담배가 인체에 극도로 해로운 까닭을 짚어보려고 합니다. 통념상 큰 오해 가운데 하나는 흡연의 폐해에 대해서는 비교적 쉽사리 공감하는 데에 비해 음주의 해독에 관해서는 잘 모르고 있다는 점입니다. 약 500여 년 전 해괴한 냄새로부터 시작된 담배는 인류의 기호품 중 최악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마약은 경중에 따라 각국이 눈을 부릅뜨고 단속하기를 멈추지 않으면서도 주류는 풀어져 있기 때문이지요. 그 때문에 알코올 중독에 빠지는 이들이 해마다 늘어나는 겁니다. 주초(酒草)는 피로를 풀어주기는커녕 노화를 촉진합니다. 둘 다 뇌세포의 기능을 둔화하여 잠시 골치 아픈 일을 잊은 것처럼 느낄 뿐, 실제로는 기억력을 감퇴시켜 이해력을 떨어뜨린답니다. 해결책과는 거리가 멀지요. 술자리는 온갖 범죄의 온상이라는 뉴스를 자주 접하고 있잖아요. 셋째는 왜 인간이 아담과 이브가 저지른 원죄를 짊어지느냐입니다. 이른바 선악과에 대한 해묵은 논쟁이죠. 이 문제에 대해 정리한 바를 다시금 밝히고자 합니다. 결론적으로 에덴동산에 심은 선악과는 저주가 아닌 축복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이르시기를 나는 창조주요 너는 피조물이라고 일깨우신 보호장치였죠. 사람은 애초 영생하도록 만드신 존재였으니까요. 인간은 단지 시공에 제약을 받을 뿐이었어요. 그런데 사탄의 유혹에 넘어감으로써 스스로 죽음을 불러들인 겁니다. 그 뒤 아담은 930세를 살면서 민족을 낳으며 살았거든요. 게다가 그는 지혜의 원조였어요. 모든 동물의 이름을 지어줄 정도였습니다. 어떤 학자도 흉내 낼 수 없는 업적이었죠. 어느 것 하나 부족할 게 없는 지상낙원에서 만물을 다스리다 보니 얼마든지 스스로 신으로 착각할 수 있어 최소한의 통제가 필요했던 겁니다. 그 사랑의 율법이 바로 선악과였습니다. 그렇다면 이토록 뒤숭숭한 때일수록 성삼위 하나님을 향해 차분히 기도하십시오. 평정심을 유지한 채 우리나라와 한겨레를 뛰어넘어 세계인을 위해 간구하는 기독교인들이 늘어나야 합니다. 다각적인 상황에 대처할 수 있도록 말씀으로 주신 영의 양식을 먹으며 아직 복음을 모르는 이들에게 선한 영향을 끼쳐야 마땅하지요. 흔히들 기도 응답에는 두 가지 전제가 있고, 그 유형은 세 가지입니다. 즉, 자신이 믿는 전능자를 의심 없이 믿어야 하며, 공동체를 위해 꼭 필요하지만 내 능력으로 안 되는 것을 욕심 없이 구하라는 게 그 전제조건입니다. 응답의 세 유형은 즉시, 보류, 부답(不答)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주기도문에 부합하면 곧장 들어주시고, 부합하지 않으면 무응답이요, 지금은 때가 아니니 기다리라는 사인을 알아차리는 몫은 본인에게 있다는 설명입니다. 하루빨리 주님의 뜻을 헤아리고 믿음으로 돌아오시길 기도합니다. ■ 프로필 - 고교생에게 국어와 문학을 가르치며 수필집·시조집·기행집 등을 펴냈습니다. - 평택에서 기고 활동과 기독교 철학박사(Ph.D.) 과정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 블로그 “조하식의 즐거운 집” http://blog.naver.com/johash 꾸립니다. - <평택자치신문>에 “세상사는 이야기”를 12년째 연재하는 중입니다. ※ 다음호(616호)에는 ‘크리스천한테 건넨 소식 - 영혼 구원의 섭리’가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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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12-30
  • [세상사는 이야기] 크리스천한테 건넨 소식 ‘영혼 구원의 간구’ (2회)
    조하식(수필가·시조시인) 창조주의 무한하신 권능을 체감하는 순간은 전심으로 기도할 때입니다. 주님께서 친히 기도문을 가르쳐주신 이유입니다. 기도야말로 성도의 호흡과도 같기 때문입니다. 들숨과 날숨이 막히면 어떤 생명인들 견딜 수 있겠습니까? 그런 의미에서 오늘은 주기도문에 담긴 신앙고백의 뜻을 되새겨보겠습니다. 곧바로 “하늘에 계신”이라고 수식한 것은 무소부재의 무한성을 뜻합니다. 삼위의 하나님께서는 스스로 우주를 품고 계시는 분이십니다. 영원부터 영원까지 불멸하시기에 불가능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두려울 만큼 지존하신 존엄성과 초월성을 지니셨으니까요. 우주를 창조, 운행, 섭리, 심판하실 수 있으십니다. 하나님의 일상은 곧 전지전능이십니다. “우리 아버지여”는 기도할 대상과 근원을 가리킵니다. 창조주 하나님을 향하지 않은 기도는 단순히 그렇게 되었으면 좋겠다는 독백이나 본능적 바람일 뿐입니다. 기도는 피조물인 천지신명이나 사람의 손으로 만든 우상단지가 아닌 성부, 성자, 성령님께 간구하는 것입니다. 성삼위 하나님이 아니면 단지 사탄이 조종하는 잡신에 불과합니다.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는 여호와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거나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이름에는 인격과 성품이 깃들어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은 우리가 복음을 선포할 때도 나타나십니다. 주님이 거룩하시기에 성도의 삶은 늘 예배여야 합니다. “나라이 임하옵시며”는 하나님께서 통치하시는 나라가 속히 오기를 기도하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며 너희는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는 분부이십니다. 그곳이 바로 천국입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으로 의와 평강과 희락이 충만한 새 하늘과 새 땅을 말합니다. ‘나라’에 주격조사인 ‘가’ 대신 ‘이’를 붙인 것은 당대 언어 관습이었습니다.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는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세상에 이뤄지기까지 순종하겠다는 다짐입니다. 의인은 하나도 없기에 감히 하나님의 보좌를 움직이거나 편들기를 꾀하는 걸 엄금합니다.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은 언제나 옳으시기에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이가 구원받기를 원하시지만 마냥 참지는 않으십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는 그날 먹을 만나에 족하라는 말씀입니다. 불필요할 만큼 쌓아두는 탐욕을 경계하십니다. 누구나 불과 내일 일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하늘을 나는 참새마저 굶기지 않으시거늘 당신의 형상대로 지으신 생명들에게 먹을거리를 주시지 않겠냐는 기도입니다. 양식을 가진 자들의 나눌 책무를 강조한 대목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는 참으로 무서운 질책입니다. 바로 나부터 남의 허물을 용서한 다음 주님께 용서를 구하라는 명령입니다. 죄의 결과는 영원한 죽음입니다. 영벌로 떨어질 절체절명의 결과를 떠올린다면 당장 실행에 옮길 현안이지요. 남을 용서하는 일이 최우선입니다. 너나없이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는 갈수록 악해지는 세상 속에서 갖가지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각별히 유의하라는 뜻입니다. 기도에 게으를 때 마귀는 그 틈새를 노립니다. 신앙생활의 활력을 유지하는 비결이 기도인 까닭입니다. 사탄이 가장 좋아하는 도구는 타락을 부추기는 문화입니다. 세상 정욕과 탐심을 물리치기 위해서는 수시로 엎드려야 합니다.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는 앞의 내용을 요약한 구절입니다. 잠시 악한 것에 한눈을 팔거나 걸려 넘어졌을지라도 그것으로 인해 천국과 멀어지지 않겠다는 간구입니다. 성도는 지옥행을 예약한 마귀의 세력과 영적으로 싸워 이겨야 합니다. 무시로 기도에 매진할 때 사탄의 궤계를 물리칠 수 있고, 사악한 올무에서 빠져나올 수 있습니다. “대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는 영존하시는 하나님만을 드높여 찬양하는 송영입니다. “대개”는 ‘대략 일반적으로’라기보다는 ‘원칙적으로 말하건대’로 해석하는 게 문맥상 자연스럽습니다. 오직 성삼위 하나님만이 모든 영광과 존귀를 받으시기에 합당하시기에 그렇습니다. 따라서 사람이 사람을 높이는 일은 지극히 조심해야 합니다. “아멘”은 잘 아시다시피 그렇게 되기를 원한다는 고백입니다. 히브리말로써 그 안에 확실성, 진정성, 충실성, 신뢰성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아멘’이라고 말하는 순간 앞에 기도한 내용을 전적으로 수용한다는 시인입니다. ‘진실로’ 동의하고 확신한다는 보증입니다. 모쪼록 주위에서 주님이 가르쳐주신 기도를 나눌 만한 이들을 만나시기 바랍니다. ■ 프로필 - 고교생에게 국어와 문학을 가르치며 수필집·시조집·기행집 등을 펴냈습니다. - 평택에서 기고 활동과 기독교 철학박사(Ph.D.) 과정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 블로그 “조하식의 즐거운 집” http://blog.naver.com/johash 꾸립니다. - <평택자치신문>에 “세상사는 이야기”를 12년째 연재하는 중입니다. ※ 다음호(615호)에는 ‘크리스천한테 건넨 소식 - 영혼 구원의 사역’이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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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하식의 이야기
    2021-12-23
  • [세상사는 이야기] 크리스천한테 건넨 소식 ‘영혼 구원의 고백’ (1회)
    오늘따라 하늘이 유난히 높고 눈이 시리도록 푸르군요. 역시 창조주 하나님께서 지으신 우주 만물은 아름답기 그지없습니다. 이번 편지에서는 “사도신경”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사도신경(使徒信經)’ 또는 ‘사도신조’는 기독교에서 사용하는 신앙고백입니다. 흔히들 12 사도가 만든 걸로 알고 있지만 사실관계는 이렇습니다. 주후 325년 니케아 종교회의를 필두로(고로 사도신경을 ‘니케아 신경’으로 부르기도 함) 381년 콘스탄티노플 회의와 431년 에베소 회의를 거쳐 451년 칼케돈 회의에서 확정되었습니다. 그중 일부는 빼버렸고 여태껏 논란이 있는 구절도 있습니다. 어쨌든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마16:16)라는 고백을 근거한 것으로 보아 무리가 없습니다. 가장 큰 성과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정체성을 공고히 한 부분입니다. 부끄럽지만 저의 신대원 시절 소논문, ‘사도신경의 의의와 실태 분석’을 들춰보았습니다. 사도신경은 성도들이 믿는 신앙의 실체를 구체화하였습니다. 먼저 성부, 성자, 성령에 관해 규정하면서 예수님을 6개 항목에 걸쳐 언급한 대목이 눈에 띕니다. 예수그리스도야말로 세상 사람들에게 남아있는 신의식을 분별해주는 핵심이었습니다. 즉, 예수님의 출생, 고난, 돌아가심, 부활, 승천, 재림이 그것입니다. 그 가운데 단 하나라도 믿지 않으면 결코 거듭난 신앙인이 아닙니다. 오늘날 언행일치와 거리가 먼 교회 지도자들과 명목상 출석자들로 인해 복음 전파 자체가 가로막혀 있는 현실이 이를 증명합니다. 믿음과 행함이 하나 되지 않으면 아직 그리스도인이라고 볼 수 없으니까요. 죽어가는 영혼을 살리는 복음은 늘 살아 움직입니다. 진정한 회개를 통한 묵상이 절실한 때입니다. 사도신경의 내용은 신구약 성경 전체를 아우르고 있습니다. 성부에 대한 고백은 구약, 성자에 대한 고백은 공관복음서, 성령에 대한 고백은 요한복음과 사도행전, 교회와 성도에 대한 고백은 서신서, 영생에 대한 고백은 요한계시록에 기초를 두었습니다. 맨 처음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는 창조주에 대한 고백으로 구약 전체를 대표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영원부터 영원까지 스스로 계신 전능자이십니다. 성도는 만물의 근원이 되시는 신을 믿고 나의 주인으로 고백한 사람들입니다. 그분이 전지전능하시기에 전적으로 믿어 의심치 않는 것입니다. 믿음은 순전할 때라야 의미와 가치가 있으니까요. 어디 한군데 부족한 사람을 대하듯 슬그머니 한 자락 깔고 한번 믿어볼까 해서는 능력이 절대 나타나지 않습니다. 따라서 한 점 의심 없이 믿고 욕심 없이 구하는 자에게 시와 때를 따라 응답이 주어집니다. 다음 예수님에 관한 항목이 펼쳐집니다.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 이는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장사한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며, 하늘에 오르사,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저리로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는 복음서에 나온 진술입니다. 글자 그대로 예수님은 성령으로 잉태하셨습니다. 깨끗한 처녀인 마리아의 자궁을 사용하십니다. 원죄 없이 태어나셔야 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낳으신 터입니다. 인간을 사랑하셨기에 창조주께서 피조물이 되셨고, 죄인들을 구원하시려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습니다. 우리가 죄에서 해방된 참입니다. 그리고 돌아가신 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우리도 똑같이 부활할 것입니다. 구름 타고 올라가신 예수님은 심판주로 재림하십니다. 이 말씀을 오롯이 믿는 자에게만 영생이 임할 것입니다. “성령을 믿사오며, 거룩한 공회와,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과”는 교회의 탄생과 발전을 기록한 사도행전에 해당합니다. 성삼위의 한 분인 성령님이 내주하시며 말할 수 없는 간구로 성도를 돕고 계십니다. 공회는 교회를 말합니다. 성도는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신 말씀을 지켜야만 합니다. 다만 서로 교통하는 성도가 누구냐에 대해서는 해석이 갈립니다. 가톨릭에서는 이를 죽은 성자와 복자로 봅니다만 단언컨대 일종의 미신에 속하는 사견입니다. “죄를 사하여 주시는 것과, 몸이 다시 사는 것과”는 성도의 구원에 관한 것으로 신약의 21개 서신서 내용과 일치합니다. 마지막 “영원히 사는 것을 믿사옵나이다.”는 새 하늘과 새 땅에서의 영원한 삶을 예언한 요한계시록의 내용입니다. 부디 성도로서 사도신경을 고백함으로써 천국 백성의 대열에 합류하시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 프로필 - 고교생에게 국어와 문학을 가르치며 수필집·시조집·기행집 등을 펴냈습니다. - 평택에서 기고 활동과 기독교 철학박사(Ph.D.) 과정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 블로그 “조하식의 즐거운 집” http://blog.naver.com/johash 꾸립니다. - <평택자치신문>에 “세상사는 이야기”를 12년째 연재하는 중입니다. ※ 다음호(614호)에는 ‘크리스천한테 건넨 소식 - 영혼 구원의 간구’가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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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하식의 이야기
    2021-12-16
  • [세상사는 이야기] “원효길과 괴태곶에 묻힌 기억들” 토론장을 달군 질문들 (하)
    조하식(수필가·시조시인) 역시나 진지한 강의 내용을 은근히 데우는 역할은 번득이는 토론자들의 몫이다. 그 가운데 한 향토사학자의 견해를 중심으로 유의미한 것들만 간추리면 아래와 같다. 먼저 수도사의 창건 연대와 창건주에 대한 논의는 객관적으로 밝혀진 것이 없다. 전해오는 대로 신라 후기 가지산파의 1대 조사 도의의 제자였고 2대 조사였던 염거화상이 창건했다면 이에 대한 연구도 필요하다고 본다. 또 수도사의 위치도 LNG기지 터에 있었다는 설이 있고, 18~19세기 괴태산 중턱에 존재했던 수도암이라는 설도 있는데 학술조사가 필요하다. 또한 원효가 견성오도한 장소까지 이르는 교통로를 체험관에 걸어 놨는데 과연 객관적인가 하는 의문이 든다. 원효와 의상이 유학을 떠났던 시기가 661년이라고 판단하면 당시는 신라와 백제부흥운동 세력이 천안지역을 중심으로 대치하고 있었고, 영남대로도 조선시대와는 사뭇 달랐는데 연구자들 사이에서는 조선시대 개념으로 접근하려는 경향이 있다. 신라 때 육로교통로와 661년이라는 시대 상황을 고려한 연구가 필요하다고 본다. 고승전을 비롯한 문헌에서 말하는 원효의 견성오도 설화에 대한 객관성을 좀 더 입증할 필요를 느낀다. 또 의상은 진골이고 원효는 6두품이므로 둘 사이의 신분적, 혈연적 관계는 전혀 없다고 본다. 원효와 의상이 당나라 유학을 시도한 시기가 661년이라는 설이 정설처럼 전해지고 귀국한 것이 670년(문무왕 10)이라는 설도 정설처럼 전해진다. 그런데 2년만 머물렀다는 주장은 어디에 근거한 것인지 모르겠다. 의상이 중국에서 ‘화엄일승법계도’를 작성한 시기가 670년으로 밝혀져 670년 당나라의 침입을 신라에 알리려고 귀국했다는 주장은 타당한 것 같다. 아울러 의상이 깨달음을 얻은 곳이 고구려였다는 주장의 근거도 궁금하다. 종남산이 중국에 있다는 사실도 그렇지만 의상이 귀국한 670년은 고구려가 멸망했던 시기였기 때문이다. 조선시대 목장 안에 거주하던 주민들은 대부분 목자(牧子)로 일했다. 하지만 맡은 역이 힘들어 신량역천으로 생각했다. 조선 후기 목장 안에서도 감목관들이나 백성들의 주도로 간척이 이뤄지고 이것이 목장전으로 수용되었는데 갑오개혁 이후 목장이 폐지된 뒤에도 백성들에게 돌려주지 않고 궁내부 경리원에서 둔전으로 판단하고 수용하면서 분쟁이 발생한 사례는 매우 많다. 괴태곶 목장도 그와 같은 사례로 판단한다. 본인도 오류를 범했지만 평택지역에서는 포승읍 만호리의 ‘대진’을 삼국시대 이후 대중국 교통로 및 교역로로 비정하는데 객관적 사실인지 모르겠다. 근래 가장 중요한 근거자료로 제시하는 1872년 지방도 수원도호부의 대진(大津) 관련 내용도 충청도 면천군의 대진(한진) 관련 내용의 오기로 판단된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삼국시대 대진의 역할, 심지어 의상이 평택항을 통해 중국에 갔다는 주장은 근거가 미약해진다. 한국에는 220개의 봉수대가 있다. 1880년대 초 한국에 온 미국의 천문학자 퍼시벌 로웰은 서울 목멱산봉수대를 봉화들의 집결지로 언급하고 있다. “각 지방에서 올라오는 전갈들을 서울에 알리기 위해 약 15분 정도 타오르다가 다시 어둠 속으로 사라져 간다. 목멱산봉수대는 전국 방방곡곡에 뻗쳐 있는 봉화들의 집결지로서 소위 횃불 전신술의 마지막 지점이다.”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수원화성 안의 봉수대는 독특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대부분의 봉수대가 산봉우리에 있는데 비해 화성봉돈은 평지에 축조되어 있다. 이름도 봉수가 아닌 봉돈이다. 이는 유사시에 봉홧불만 피우는 게 아니라 돈대 기능도 겸했기 때문이다. 돈대란 성벽에 구멍을 내어 대포를 쏠 수 있는 구조물이다. 그렇다면 평택에는 유일하게 괴태곶 봉수대가 있다. 여기에서 일어난 역사적 주요사건 기록이나 괴태곶 봉수대만의 특징은 무엇인가? 좀 더 상세히 살펴보면, 봉수대는 근대 이전 외적의 침입을 불과 연기로 알리던 통신수단이었다. 조선시대에는 한양 목멱산 경봉수를 중심으로 전국에 5개의 봉수로가 있었다. 평택에는 전남 여수 돌산도의 방답진에서 한양 경봉수까지 연결된 제5 봉수로의 직봉이 지나갔다. 그밖에 평택시민의 기억에서 완전히 사라진 시내 매봉산 봉화대의 존재를 알린 데 이어 오늘 미군부대 봉수대 견학 계획이 무산된 데 대하여 유감을 표명했고, 인근 지역 국회의원이 몸소 찾아와 문화재 찾기운동에 힘을 보태는 미담이 있었다. 그는 잔뜩 고무된 지역사회 인사들에게 실질적인 방안으로 범시민운동단체를 결성하라고 권면하면서 화기애애한 모임은 막을 내렸다. ■ 프로필 - 고교생에게 국어와 문학을 가르치며 수필집·시조집·기행집 등을 펴냈습니다. - 평택에서 기고 활동과 기독교 철학박사(Ph.D.) 과정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 블로그 “조하식의 즐거운 집” http://blog.naver.com/johash 꾸립니다. - <평택자치신문>에 “세상사는 이야기”를 12년째 연재하는 중입니다. ※ 다음호(613호)에는 ‘크리스천한테 건넨 소식 - 영혼 구원의 고백’이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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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하식의 이야기
    2021-12-15
  • [세상사는 이야기] “원효길과 괴태곶에 묻힌 기억들” 괴태곶을 밝힌 봉수대 (중)
    맨 처음 풀이한 문장은 “북쪽으로 양성(陽城) 괴태길(槐台吉)에 응한다”였다. 그러니까 우리가 미처 몰랐던 괴태곶은 봉수대였다. 바닷가 마을 서쪽에 우뚝 솟은 괴태길산(槐台吉山)에 세워져 바다 쪽으로는 충청도 면천의 봉수대하고 가깝고, 동남쪽으로는 직산의 망해산(경양산) 봉수대와 연락이 닿았으며, 북쪽으로는 수원의 흥천산 봉수대에 호응하여 기능을 다했던 곳이거늘, 지금은 안타깝게도 주한미군 주둔부대에 갇혀 마음대로 마주할 수도 없는 처지에 놓여있다. 이후 16세기 들어 기강이 해이해지기는 했으나 아무튼 인근 주민으로 구성한 봉수군 50명이 10일마다 교대로 근무하거나 세분한 오거법(五炬法)을 통해 사방팔방으로 12시간 내에 서울의 남산(목멱산) 봉수대를 향해 위급한 상황을 알리던 시스템만은 대단한 응집력을 보일 만큼 괴태곶 봉수대는 충청도와 경기도를 이어주는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경국대전>에 적시한 규정을 보면 다음과 같다. 아무 일이 없으면 1거요, 적선이 바다에 나타나면 2거요, 점점 해안에 가까이 다가오면 3거요, 우리 병선과 접전을 벌이면 4거요, 적군이 우리 땅에 상륙하면 5거라는 대처법이 명시되어 있는 것이다. 그런데 실은 괴태곶이 고려 때는 국영목장이었단다. 목자(牧子) 4명이 한 조가 되어 암말 100필과 수말 15필을 길러 매년 망아지 85마리를 불려야 했다면 생산성 또한 괜찮은 편이렷다. 그토록 수원 홍원목장으로 암수 48마리와 사료용 풀을 6,000 묶음씩이나 꼬박꼬박 바쳤지만 자자손손 신량역천(身良役賤)의 굴레에 묶여 목마군(牧馬軍)의 신분을 대물림하면서 연례행사처럼 가렴주구(苛斂誅求)를 당했던 민초들의 일상사를 듣노라면 서글프기 짝이 없다. 출번(出番)과 퇴번(退番)의 편의를 고려해 인근 주민 가운데서 차출한 것까지야 십분 이해할 일이로되 사시사철 그 일에 매여 있었다면 얘기는 달라진다. 식솔의 생계를 위해 최소한의 먹을거리라도 제때 제공했느냐는 문제가 당연지사 현안이 될 수밖에 없었다고 생각한다. 조선시대에 작성한 목장통계표를 보고서도 선뜻 양성에서 유일한 목장이라는 글자가 눈에 들어오지 않은 건 그래서다. 세월이 흐른 뒤 성종 때 괴태곶 목장은 소 101마리를 키우는 작은 목장이 된단다. 조선팔도의 분포도를 보니 유난히 해안과 도서지방을 중심으로 경기, 전라 남부, 경상 남부, 제주도에 많이 있었다. 괴태곶 목장 안에 군사방어시설물인 진보(鎭堡)를 둔 조치는 어찌 보면 그럴 법하기도 하고 한편으론 부자연스럽기도 하다. 아니나 다를까 군량미를 충당한다는 명목하에 차츰 둔전(屯田)으로 둔갑하면서 16세기 이후 목장은 이름만 남게 된다. 성종 때 4만여 필에 이르던 말은 중종 때 절반으로 줄어들었고 그마저 쓸만한 말들은 없었다니 을씨년스런 풍경화가 저절로 그려진다. 하지만 여태 민가에 남아있을지도 모를 사료들을 샅샅이 찾아낸 다음 전문가의 철저한 검증을 거쳐 일대를 그 당시처럼 복원해낸다면 그야말로 대관령목장에 버금가는 장관이 될 거라는 확신이 든다.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에 징세를 둘러싸고 조정과 갈등이 심했던 것도 눈여겨볼 지점이다. 급기야 1900년 주민들의 집단 청원이 불거졌고, 이듬해 괴태곶 농민들과 봉세 관리 간에 충돌이 일어나고야 말았다. 무자비한 공권력 앞에 무력한 백성들의 삶이야 궁색한 입말을 보태 무엇하랴만, 다들 버겁고 궁핍했던 과거사를 소환하면 늘 먹먹한 가슴을 쓸어내릴 밖에는 뾰족한 수가 없다. 마지막으로 필자가 주목한 건 ‘곶(串)’이라는 글자의 어원이다. 언제인가 거기서 파생한 ’고잔‘이란 낱말을 유심히 살펴본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고잔은 바다 쪽으로 좁고 길게 돌출(사전적으로 ’곶‘이 ’곧‘에서 변화했다는 주장이 있음)한 육지의 끄트머리를 가리키는 ‘곶’의 ‘안’이라는 말(연음)로써 ‘평택섶길 중 소금뱃길’을 걸을 때 건너편에 보이는 땅이었다. 남양만과 아산만의 바닷물을 아울러 바라볼 수 있어 ‘광판대기’라고 부른다는 입말도 정겹거니와 인천과 안산의 ‘고잔동(古棧洞)’이라는 지명이 어쩌면 ‘옛날 마룻바닥’ 같은 모양새일 수 있겠다는 생각에서였다. 다음 백과의 지식을 빌리자면, 유독 서해안에 ‘곶’자가 들어간 지명이 많다고 하여 비교적 사용빈도가 높은 곳을 보니 갈곶(갈고지), 돌곶(돌고지), 배곶(배고지) 등이 있는데, 갈곶 또는 갈고지(갈구지)라 불리던 마을은 갈곶이(葛串里), 갈곶리(乫串里), 갈화리(葛花里) 등의 이름으로 그 흔적이 남아있단다. 언뜻 뇌리를 스치는 곳만 해도 ‘몽금포타령’에 나오는 ‘장산곶’은 아예 다가갈 수조차 없으니 하릴없다고 치더라도, 달처럼 생겼다는 시흥의 ‘월곶동(月串洞)’이나 해돋이로 이름난 포항의 ‘호미곶’에는 조만간 애틋한 추억을 쌓으며 사는 아내와 함께 가보고 싶다. ■ 프로필 - 고교생에게 국어와 문학을 가르치며 수필집·시조집·기행집 등을 펴냈습니다. - 평택에서 기고 활동과 기독교 철학박사(Ph.D.) 과정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 블로그 “조하식의 즐거운 집” http://blog.naver.com/johash 꾸립니다. - <평택자치신문>에 “세상사는 이야기”를 12년째 연재하는 중입니다. ※ 다음호(612호)에는 “원효길과 괴태곶에 묻힌 기억들 - 토론장을 달군 질문들”이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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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12-02
  • [세상사는 이야기] “원효길과 괴태곶에 묻힌 기억들” 원효를 둘러싼 이야기 (상)
    연일 소논문의 각주를 채우느라 뜨거워진 머리도 식힐 겸 오랜만에 찾은 아산만은 주말치고는 한산했다. 지긋지긋한 코로나바이러스의 심술을 탓해야 할지 짓궂은 팬데믹의 손장난을 나무라야 할지 우리 사회는 아직 갈피를 못 잡는 거 같아 안쓰럽고 안타까웠다. 게다가 살인적인 고물가 때문인지 바지락 칼국수마저 내심 바라던 맛이 아니었다. 서둘러 도착한 주차장에서 미리 훑어본 자료집. “평택 역사 특강”에 붙은 두 가지 제목을 보니, 본 토론자 역시 ‘원효대사’에 관한 호기심과 더불어 그간 궁금했던 ‘괴태곶’에 얽힌 지난날의 궤적이 어렴풋이나마 떠오르는 듯하다. 아주 먼 옛날이니 삼국시대는 건너뛰더라도 높고 고운 나라 고려(高麗)로 거슬러 올라가 평택지역을 관할했다는 양성현이 수원에 속했다가 조선조에 들어서는 충청도에서 경기도로 이관했다는 사료보다는, 18세기 수도암(修道庵)이 괴태곶 봉수대 아래 있었다는 고서의 풀이가 먼저 한눈에 들어온 이유다. 그로부터 한 세기가 흐른 19세기 양성읍지에도 수도사(修道寺)는 그대로 있었고, 보시다시피 하루해가 멀다 하고 격변하는 오늘날에도 이같이 건재하다. 원효대사에 대한 현대인들의 상식선에서 돋보이는 대목은 화쟁사상(和諍思想)이다. 바야흐로 대선 정국을 맞이한 대한민국이 앞다퉈 본받을 만한 덕목이 아닌가 한다. 다만 네 번째 항목에는 깊이 들여다볼 지점이 보인다. 물론 여말 이승휴의 <帝王韻紀>나 선초 고서경과 김지의 <大明律直解> 등의 기록을 간과한 바는 아니로되 설총이 이두(吏讀)를 만들었다는 설에는 약간의 이견이 있다. 해독이 어려운 한문에 문장의 순서까지 영어를 빼닮아 우리말 어순이 절실하던 참에 평민들이 쉽게 다가갈 수 있는 수단을 마련했다는 점에서 그렇고, 이두라는 뒷말의 독음을 보아도 신라 때보다 훨씬 전부터 쓰이던 구결(口訣)의 토(吐)와 같은 어원인 ‘讀(두)’을 차용한 것으로 보아 주로 품외 서리(胥吏)들이 쓰던 글자이므로, 설총은 이두의 창안자라기보다는 난분분하던 표기 체계를 집대성한 자로 보는 편이 보다 합리적이라는 의견이다. 이는 고구려 광개토대왕 비문(한국어 요소를 담은 변체한문)을 비롯한 최근 발견되는 고고학적 목간(木簡)을 참고하더라도 설총의 시대에 비해 6세기 정도 앞당겨진 시점으로 추정하는 견해가 만만치 않다. 흥미로운 대목은 조선말까지도 밝혀지지 않은 원효와 의상의 관계다. 백승종 교수가 제시한 <분류 오주연문장전산고 경사편 5>에는 당시 이규경이 쓴 ‘원효와 의상에 대한 변증설’이 실릴 정도였다는데, 내막인즉슨 ‘의상은 원효의 아들로서 익히 알려진 설총의 아우’란다. 따라서 무학대사가 지은 청구비결(讖謠, 일종의 예언으로 ‘정감록’에 있음)에 나오는 대로 의상이 원효의 제자라는 말은 착오가 된다. 신기한 건 그 형인 설총은 동방의 儒宗이 되고 동생인 의상은 동토의 僧祖가 되었다는 기술보다는, 여태껏 학자들은 왜 원효와 의상을 부자로 인정하지 않느냐에 있다. 꼭 이규경의 점잖은 문제 제기가 아니더라도 호사가들은 이른바 ‘씨나 배’의 문제로 상상의 나래를 펴지 않았을까? 이수광의 <芝峯類說>을 펼치면 항간에 혹여 요석공주 말고 다른 연인이 있었다는 추측성 소문이 가능할뿐더러, 김걸이 지은 <海東文獻錄>의 釋家類에 동조하여 의상의 속성이 김(金) 씨라면 만의 하나 아버지가 다른 분일 수도 있지 않나 해서다. 어쨌거나 어느 날 불쑥 나타날지 모를 고문서에서 두 분에 대한 인상착의가 단 한 줄이라도 숨어있으면 좋겠다는 기대감에서 나온 개인적 바람일지언정 불경스럽거나 지나친 억측인 걸 모를 리 없다는 점을 차제에 밝혀둔다. 매우 조심스럽게 짚어볼 대목은 의상과 원효가 택한 길이 달라진 것이야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일이로되, 원효 큰스님이 오밤중에 해골물을 마시고 깨우침을 얻었다는 설이야말로 역사성이나 사실성이 현저히 떨어지는 일이 아닐 수 없다. 다만 세인들의 귀를 솔깃하게 이끄는 일은 색다른 접근법이 필요하다는 데 부분적으로 동의한다. 그럴듯한 스토리텔링을 만들고 살을 붙여 가꾸는 협업을 두고 하는 말이다. 경주 분황사에 원효의 진상을 안치했다는 설총의 효심은 당대 미라를 만드는 기술이 있었다면 어느 쪽을 택했을까? 일본인들이 원효를 위시해 퇴계 이황에 이르기까지 우리네 조상을 흠모한 연유는 무지몽매한 그들에게 백제의 선진적인 문화에다 유학을 전파한 아직기와 왕인 박사의 공이 크다고 봐야 한다. 그렇게 천자문뿐만 아니라 논어 등 경전까지 배운 왜인들이었건만 어제오늘 경제 좀 일궜다고 저토록 최소한의 은혜조차 모른 채 매사 오만방자한 행태를 보노라면 왠지 스승이 제자를 잘못 가르친 것 같아 이제껏 걸어온 길을 새삼 되돌아보지 않을 수 없다. ■ 프로필 - 고교생에게 국어와 문학을 가르치며 수필집·시조집·기행집 등을 펴냈습니다. - 평택에서 기고 활동과 기독교 철학박사(Ph.D.) 과정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 블로그 “조하식의 즐거운 집” http://blog.naver.com/johash 꾸립니다. - <평택자치신문>에 “세상사는 이야기”를 12년째 연재하는 중입니다. ※ 다음호(611호)에는 “원효길과 괴태곶에 묻힌 기억들 - 괴태곶을 밝힌 봉수대”가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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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11-25
  • [세상사는 이야기] “큰스님들이 걸었던 옛길” 학술토론을 환기함 (하)
    늘 남편을 위해 기도하는 아내의 배웅을 받으며 서둘러 집을 나섰다. 토요일인지라 목적지로 향하는 길은 다소 붐비는 편. 다행히 심하게 밀리지는 않아 여유롭게 행사장에 도착할 수 있었다. 잠시 자동차 안에서 대기하다가 간단한 요기와 볼일을 마친 뒤 ’원효대사깨달음체험관‘에 입장. 학술대회가 갖는 비중에 걸맞게 상당히 북적였다. 물론 코로나 사태의 엄중함에 따라 방역수칙은 지키려고 애썼으나 예상을 웃도는 참가자들로 인해 걱정스러운 것도 사실. 식전 행사에서 선보인 우아한 춤사위를 뒤로하고 개회식이 끝나자마자 네 분의 발제가 진중하게 이어졌다. 그런데 오늘 학술대회의 격을 한 단계 끌어올린 건 지정 토론이었다. 열심히 준비한 만큼 풍성한 문답들이 오갔기 때문이다. 보기에 따라서는 자못 집요했을뿐더러 비록 자체 내 중간 평가라고는 하더라도 대내외에 널리 알려진 여느 학술대회 못지않을 만큼 알차게 진행된 점에 대해서는 뿌듯한 자부심을 느껴도 좋을 듯하다. 특별히 멀리 강원도 속초에서 달려와 종합토론에 적극적으로 임해주신 열렬 참여자가 있었는데 워낙 학문의 깊이가 돋보여 뭇 시선을 끌었다는 점을 밝힌다. 아울러 오랫동안 대회 준비와 뒷받침에 혼신의 힘을 쏟아부은 손길들에게 이 지면을 통해서나마 감사 인사를 전하고 싶다. 더불어 날카로운 질문들과 깊이 있는 탐구에 대한 진심 어린 치하와 치열한 질정이 있었고, 아직 시원한 해답은 얻지 못한 지점에 관해서는 후속 연구물을 통해 수정하고 보완하기로 다짐한 일도 묵직한 소득이다. 참고로 질의에 나선 지정 토론자가 일부에 집중된 현상을 감안해 개별 사안에 따른 실명은 생략하기로 한다. 그중 유의미한 문답을 골라보면, 안성천과 진위천까지 소금뱃길이 있었다는 점에서 당은포를 평택항 근처로 비정(比定)하는 근거는? 세기의 장사꾼 오페르트가 평택항에 출몰했다는 설과 1980년대 평택제철 무산에 대한 견해는? 큰스님들과 학구열은 정비례하는가? 열반경, 유마경, 금강경, 라마다경 등 불경들의 차이점은? 전반부를 망실한 왕오천축국전에 쓰인 어휘들과 혜초의 바닷길을 논구한 치적에 비추어 진위행궁의 행방을 연구할 의향은? 원형 설화의 구조 탐색에 관한 의미 부여는? 석조비로나자불의 출현과 교학적 해석을 연계한 불교 작품들이 보이는 인생무상의 주제의식은? 길에 대한 상징적 의미 설정과 문화와 경관독해의 개념을 특정한 의도는? 서양의 형태이론과 장소이론의 상하위 관계는? 지역사회의 이면을 해부하고 가감 없는 실태 파악을 위한 특단의 해법은 없는가? 원효길 조성의 발상 전환과 옛길을 재현하려는 필요충분조건은? 명목뿐인 평택섶길의 현실적인 활성화 방안은? 당은포는 유라시아의 길목으로서 문명사적으로 어떤 문화를 수용하고 전파했으며, 그 유적들과 유물들은 있는가? 당나라는 탈라스(Talas)전투에서 진 뒤 <육상실크로드>가 막힌 것을 동아시아의 비약이라고 했는데 논리적인 연결고리는? 소무덤과 아까운 내 인생 되돌아보기라는 프로그램이 어떻게 연결될 수 있나? 현각스님이 혜민을 향해 ‘도둑놈, 지옥으로 가는 기생’이라고 한 비난은 어찌 보며, 한국 불교계에 대한 생각은? 명성과 진실이 부딪칠 때 원효의 가르침은? 다수의 한국인들은 자기만 생각하는 개인들인데 역사를 공부하면 시민의식이 고취되는가? 사유지에 속한 돌미륵입상이 문화유산의 가치가 있다면 어떻게 처리해야 하나? 오도성지와 대진포구에 대한 명확한 정황들을 적시하면서 혜초의 왕오천축국전 상권이 해인사판 고려대장경 속에 명확히 찍혀 있는 것으로 보아 돈황 막고굴에서 처음 빛을 본 게 아니었다는 사실과 일본 종교학자 오타니 고즈이가 신라인 혜초의 것이라고 밝혔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물론 대부분의 질의와 응답은 논문 안에 녹아있었다. 그밖에 원효의 해골물에 얽힌 역사적 사실 여부 등 미처 제기하지 못한 질문거리도 여럿 있거니와 차마 입을 떼지 못한 사항도 다수 있었음을 상기해 둔다. 다시금 모두(冒頭)를 소환하면, 정해진 순서를 기다리면서 체험관 내부를 둘러보니 원효스님의 일대기를 정갈하게 정리해 놓았다. 막간을 이용해 다녀온 화장실의 민낯도 그만하면 합격점. 그윽한 차를 마시는 동안 만난 반가운 얼굴들과 나눈 눈인사는 가벼웠으나 저녁 잔치 자리를 메운 화제들은 평소 흘러넘치는 나의 관심사만큼이나 퍽 흥미롭고 다채로웠다. 모쪼록 평택 불교사암연합회에서 주관한 첫 학술대회 토론에 참여한 일원으로서 앞으로 더욱 뜻깊은 연중행사로 발전해 나가기를 두 손 모아 간절히 바라마지 않는다. ■ 프로필 - 고교생에게 국어와 문학을 가르치며 수필집·시조집·기행집 등을 펴냈습니다. - 평택에서 기고 활동과 기독교 철학박사(Ph.D.) 과정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 블로그 “조하식의 즐거운 집” http://blog.naver.com/johash 꾸립니다. - <평택자치신문>에 “세상사는 이야기”를 12년째 연재하는 중입니다. ※ 다음호(610호)에는 “원효길과 괴태곶에 묻힌 기억들 - 원효를 둘러싼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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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11-23
  • [세상사는 이야기] “큰스님들이 걸었던 옛길” 평택섶길을 소환함 (중)
    박재용 동국대 겸임교수의 “심복사와 비로자나불 - 부처가 바다에서 나온 까닭은?”은 비교적 친숙한 제목이었다. ‘평택섶길 명상길’을 돌 때 둘러보았기 때문이다. 거기에 얽힌 설화를 정리해 기고한 ‘평택시민신문’(2020.12.30.)을 들쳐 보니 ‘절 입구에 세운 우보살 공덕찬은 광덕산 심복사(深福寺) 사부대중들이 우직한 일꾼으로 살다 죽어간 검은 소들의 넋을 기리는 송가였다. 사찰건립 당시 목재를 운반했던 소들을 보살처럼 깍듯이 묻어주고 심우총(尋牛塚) 앞에서 해마다 성묘를 지낸다니 줄곧 절터를 지켰을 석조비로자나불좌상(보물 제565호)은 뭐라 염불할지 자못 궁금증이 일었다. 물론 지역에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로되 나름 짚고 넘어갈 구석은 있어 뵌다. 요즘 개고기를 금하자는 마당에 공헌도로 치면야 우공(牛公)들을 보니 살점을 부위별로 발라낸 뒤 뼈다귀까지 고아 먹는 것도 모자라 발톱에 터럭마저 장식품이나 붓으로 쓰는 걸 보노라면 저리 떠받들 구실은 갖춘 셈이다.’라고 적혀있었다. 발표자의 관심은 구비문학의 사실성이나 완결성이 아닌 특이한 서사구조에 있었다. 메신저보다는 메시지의 재해석에 따른 실생활과의 연계 여부랄까. 켜켜이 쌓인 적층문학의 핵심을 제대로 간파한 참이다. 유달리 종요로운 곳은 그 시절 사찰의 야외에서 펼친 설법 강좌[野壇法席]처럼 ‘평택은 그 지정학적 특수성으로 인해 원효·의상·혜초로 대비되는 구법승들의 엇갈린 행보가 공존했던 곳’이라는 문장으로 가히 이번 학술대회의 주제와 성격을 단칼에 응축한 표현이었다. 2017년 과거의 시공을 재현한 ‘빛따라 한발디딤’이라는 지역축제가 열린 일도 이번에 알았다. 심혈을 기울인 연구물을 읽는 동안 기억에 남은 건 ‘심복사는 언제 어떻게 세워졌는지 정확히 알 수 없다는 것과 불상은 고려 초기에 조성된 걸로 추정한다’는 내용이었다. 운율에 맞는 <화엄경>의 번역문이나 현란한 불교 용어를 비롯해 부처가 깨달음을 주기 위해 사람들 앞에 나타난다는 ‘나투다’라는 낱말도 호기심 많은 나를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김학범 한경대 명예교수의 “원효길의 역사문화적 상징과 의미”는 그나마 익숙하게 읽을 수 있는 논제였다. 발표자가 내린 정의처럼 길은 기점과 종점을 연결하는 하나의 행로다. 인생길 역시 출발이 있고 마침이 있을 것이다. 맨 처음 가는 사람이 길을 뚫었기에 인류는 교류했으며 갖가지 문화를 만들어냈다. 그 중심에 종교들이 똬리를 틀더니 여러 순례길이 생겼다. 국내만 해도 1980년대부터 정부 주관 하에 전국 옛길을 찾아 조성한 ‘조국순례 자연보도’를 필두로 2021.8.6. 현재 한국관광공사에 538개의 트레일이 등록돼 있다고 한다. 스페인의 ‘산티아고순례길’이 세계적으로 유명해졌고 어느새 그곳을 벤치마킹한 ‘제주올레’가 세인들의 뜨거운 사랑을 받고 있다. 우리 평택에는 총 16개 코스의 오백리 섶길이 시민의 발길을 기다리고 있다. 그중에 ‘원효길’이 갖는 역사·문화적 상징성은 깊고도 넓다. 인간은 길에서 태어나고 뛰어놀다가 묻히기 때문이다. 길이 지닌 문화경관으로서의 의미는 지속 가능한 가치다. 문화와 경관은 매우 밀접한 어휘여서다. 삶의 총체적 양식이 문화이므로 경관은 자연스레 종교 경관, 민속 경관, 언어 경관, 농촌 경관, 도시 경관 등으로 분류할 수 있다는 게 논자의 혜안이다. 이제 경관을 읽고[讀] 해석[解]한다는 이른바 ‘경관독해’의 개념은 문해력(literacy)에 속한다. 적시한 말마따나 ‘과거의 경관을 이해하려면 그것이 형성될 당시 사람들의 사고방식이나 그들의 사회조건, 자연조건 등의 문화적 맥락을 염두에 둬야 하는 때‘가 눈앞에 도래한 참이다. 한 인간의 정체성은 기억과 정서적 경험을 공유함으로써 생태환경은 물론 사투리, 역사유적, 옛 마을, 건축물, 예술품, 음식물, 나아가 종교를 통한 자아를 만나고서야 자긍심을 키우며 미래를 열어가는 법이다. 그런 측면에서 발표자가 소개한 서양의 형태이론은 효율적인 지침이다. 모든 장소는 그 모양에 의해 그 쓰임이 결정된다(Form follows function or Function follows form). 굳이 양자의 불가분성을 강조하지 않더라도 정치한 설계와 정교한 시공이야말로 늘 유효한 이유이리라. 눈과 입이 즐겁고 맘과 발이 편한 곳이라야 사람들이 꼬일 테니 말이다. 남은 과제는 ’원효길‘의 재현이요 복원이다. 지난 2009년 문화관광부에서 발표한 원효대사의 구도행로를 추적한 순례길은 항간에 잘 알려지지도 않았다. 발표자는 시종착점에 원효대사비의 건립부터 추진하자고 제안한다. 그래야만이 원효를 상징하는 길이 된다는 주문이다. 아울러 평택항의 상징성을 부각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제대로 인프라를 갖추고 상응한 의미체계를 갖추면 사람들은 수소문 끝에라도 찾아오기 마련이다. ■ 프로필 - 고교생에게 국어와 문학을 가르치며 수필집·시조집·기행집 등을 펴냈습니다. - 평택에서 기고 활동과 기독교 철학박사(Ph.D.) 과정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 블로그 “조하식의 즐거운 집” http://blog.naver.com/johash 꾸립니다. - <평택자치신문>에 “세상사는 이야기”를 12년째 연재하는 중입니다. ※ 다음호(609호)에는 “큰스님들이 걸었던 옛길 - 학술토론을 환기함”이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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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하식의 이야기
    2021-11-23
  • [세상사는 이야기] “큰스님들이 걸었던 옛길” 원효대사를 회고함 (상)
    기독교 철학박사 과정을 밟고 있는 자로서 ‘제1회 평택 역사문화로드 학술대회’에 토론자로 초청을 받은 감회는 남다르다. 수도사 주지 스님의 전화를 받고 잠시 망설였으나 아니 벌써 교회 장로와 더불어 신구약성경을 통독했다는 말씀에 놀라며 아주 좋은 기회라 여기고 흔쾌히 토론에 임하기로 했다. 순서지를 보니 가장 먼저 삼귀의례(三歸儀禮)와 사홍서원(四弘誓願)이란 사자성어가 낯설게 다가왔다. 그러나 오히려 난생처음 접하게 될 장엄한 불교의식이 기다려지며 얼마 남지 않은 원고 마감일을 지키기 위해 냉큼 토론 자료들을 훑어보기 시작했다. 김경집 진각대 교수의 “원효의 구법행로에 대한 연구”는 고대불교에 대한 배경지식이 필요하거늘 오래된 역사마저 가물가물하니 신라 구법승들의 행로 또한 생소한 느낌이지만 이내 출발지였던 당항진의 개칭(改稱)과 위치에 대한 정보에 눈길이 갔다. 각주를 보니 학부에서 국문학을 전공한 나로서는 삼국유사는 읽어보았어도 삼국사기는 제목만 들어온 처지인지라 상식적인 고대역사의 범주에서 맴돌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눈에 들어온 대목은 신라가 당항진을 두어 대당해로(對唐海路)를 확보하게 되었다는 지점이었다. 발 빠르게 남북왕조에 사신을 보낸 진흥왕의 외교술이 돋보이는 장면이었거니와 이어진 중국 왕조와의 교류에 힘입어 불교는 융성했고, 원광을 비롯한 안함(安含), 자장(慈藏) 등 적잖은 구법승들이 등장했음은 물론이다. 원효와 의상대사의 두 번에 걸친 구법행로는 1차(650)에 험난한 육로를 택한다. 까닭인즉슨 당대 유명세를 타던 평양 반룡사의 보덕화상에게서 열반경과 유마경(維摩經)을 배우려는 학구열이었다니 존경스럽다. 하지만 고구려에서 첩자로 몰리는 바람에 금세 돌아오고 만다. 2차(661) 구법행로 역시 보장왕이 취한 ‘숭도억불(崇道抑佛)’ 정책에 따라 거처를 완산주로 옮긴 보덕화상을 찾아 계획했던 배움의 허기를 채운 뒤에야 ‘당은포’로 이름을 바꾼 당항진으로 가는 길을 택했다. 관심이 가는 지점은 당시 당은포의 위치가 평택 포승읍 지역으로 유추한다는 설명이었다. 하지만 내가 평택섶길을 걸으며 엿들은 얘기로는 오래전에는 안성천이나 진위 오산천까지 소금배가 들락거렸다니 내륙의 송탄동인들 아예 관련이 없다고만 할 수 있을까? 김규현 한국티베트문화연구소장의 “慧超 <往五天丑國傳>의 海路說”을 통해 국내 최초로 논구한 혜초의 바닷길을 살펴본 성과는 크다. 교직 생활 틈틈이 해외 40여 개국을 나다닌 가운데 인도가 그 첫 여행지였기에 그렇고, 해상실크로드가 아시아하이웨이를 따라 펼쳐질 때를 학수고대하는 시대적 요구에 부응하여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새삼 주목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신중국의 一帶一路에 섣불리 동행했다가는 공정치 못한 동북공정을 추인하는 꼴이 되지 않을까 저어되는 형국은 막아야겠기에 내심 노심초사하지 않을 수 없다. 어쨌거나 요즘 한창 중국몽에 젖어있는 그들의 ‘海上紗綢之路’를 보며 발표자가 제안한 를 맞이할 준비만큼은 박차를 가해야 한다는 고견에는 하등의 이론이 있을 수 없다. 이름도 정겨운 ‘당나루’의 초점은 군사요충지로서의 기능에 모아져 있다. 만약 당항성 아래 현 남양만 어딘가에 ‘당은포’가 있었다면, 입국절차를 거치는 ‘海門’이란 관청이 있어야 한다는 게 논자의 추정이다. 지금의 평택당진항을 대상지 중 하나로 꼽는 건 그래서다. 전거는 기호지방의 옛 지도 중 1862년에 제작된 <水原府地圖>에 ‘大津’이란 지명이 표시돼 있고 그 하단을 보니 ‘대진에 백제의 수군 창고가 있었으며 ‘稤館(수관)’이라는 관청까지 있었다는 기록이다. 이는 <수원부지도>를 비롯하여 <동국지도>, <해동여지도>, <경기도>, <대동여지도>에도 나와 있어 설득력을 더한다. 한도숙에 따르면 평택항은 19세기 중반 세기의 장사꾼 오페르트가 기웃거릴 만치 수심이 깊고 보면 적어도 아산만을 벗어나지 않는다는 설에 무게가 실린다. 눈길을 끈 내용은 고구려 유리왕이 지은 최초의 시가 黃鳥歌에 나오는 ‘翩翩’이란 표현에 있지 않거니와 당시 신라가 중국을 거치지 않고 무슬림 상인들과 교역했다는 史實이다. 이는 아라비아 박씨 성을 가진 학생을 가르쳤다는 지인 교사의 전언이나 8구체 향가인 處容歌의 시대적 배경을 보아도 알 수 있다. 더구나 신라를 현대 중국어 발음인 ‘sinlo’나 ‘sinla’로 통한 게 아니라 ‘sila’나 ‘shila’로 불렀다는 대목이다. 720년의 <日本書紀>나 <崇神記>에도 나온다고 하니 더 수긍이 간다. 난해한 문제를 공들여 풀어헤친 연구자께 경의를 표한다. ■ 프로필 - 고교생에게 국어와 문학을 가르치며 수필집·시조집·기행집 등을 펴냈습니다. - 평택에서 기고 활동과 기독교 철학박사(Ph.D.) 과정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 블로그 “조하식의 즐거운 집” http://blog.naver.com/johash 꾸립니다. - <평택자치신문>에 “세상사는 이야기”를 12년째 연재하는 중입니다. ※ 다음호(608호)에는 “큰스님들이 걸었던 옛길 - 평택섶길을 소환함”이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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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11-23
  • [동호회를 찾아서] 7인조 여성으로 구성된 ‘평택 라온밴드’
    지난해 11월 구성된 ‘평택 라온밴드(리더 김현주)’는 음악을 즐길 줄 아는 7인조 여성밴드로, 지역사회에서 봉사와 재능기부를 통해 사랑 나눔을 실천하고 있으며, 음악을 통해 자신들의 삶을 향기롭게 발전시켜나가고 있다. 지난 20일 합정동 소재 ‘라온밴드’ 연습실에서 멤버들을 만나 추구하는 음악, 활동 계획, 앞으로의 목표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를 들었다. <편집자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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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9-28
  • [동호회를 찾아서] 평택예향팬플룻 앙상블
    2014년 평택시 학습관에서 팬플룻 강좌가 열리면서부터 평택 지역의 팬플룻 동호회 활동이 활발해졌다. ‘평택예향팬플룻 앙상블’은 2014년 8월 1일 평택시 비전동에 거주하는 초대단장인 이장수 단장의 노력으로 15명의 팬플룻 앙상블 멤버가 구성되면서 창단됐다. 창단 후 이장수 단장의 열정과 노력으로 참여 단원이 늘어가기 시작했지만 모임과 연습 장소가 마련되지 않아 어려움이 많았다. 이러한 소식을 들은 평택동산교회에서는 ‘평택예향팬플룻 앙상블’의 연습장으로 교회 교육관을 흔쾌히 내주면서 이장수 단장과 회원들은 1주일에 한 번 모여 배움과 연습을 이어왔으며, 음악 안에서 소통하고 행복을 나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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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하식의 이야기
    2021-09-28
  • [평택시 동호회] 중증 시각장애인 “평택슈퍼볼링동호회”
    “열개의 핀이 동시에 쓰러지면서 내는 파열음은 볼링만의 큰 매력이며, 직장생활과 일상생활에서 받는 수많은 스트레스를 한 번에 날려버리기에 부족함이 없다.” 평택슈퍼볼링동호회(회장 정운국)는 지난 1994년부터 활동한 평택시의 가장 오래된 볼링 클럽이다. 이전에는 개인별로 활동했지만 회원들이 뜻을 모아 2014년부터는 ‘평택슈퍼볼링동호회’를 창단해 현재 정운국 회장을 비롯해 박기원, 양순자, 김만철, 김태형, 김정임, 김종화, 박숙희, 변보우, 손명자, 오용환, 양영조, 정민원, 홍성민 회원 등 시각장애 1급~2급 15명의 회원들이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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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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