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20(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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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하식 문인, 철학박사

이 글은 널리 알려진 C. S. 루이스의 기독교 교리에 관한 변론입니다. 물론 필자의 견해나 해석으로 가감하기도 할 것입니다. 지금 그리스도인들을 갈라놓은 문제들은 지극히 신학적이거나 교회사적인 논쟁점이어서 참 전문가가 아니면 섣불리 다룰 일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논쟁거리들을 놓고 토론을 벌인다고 한들 불신자를 교회 울타리 안으로 이끌어오는 데도 전혀 도움이 안 될 겁니다. 교파 분열에 대한 토론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 앞에서만 해야 합니다. 저는 ‘순전한’ 기독교(‘mere’ Christianity)를 전하는 일에 다른 작가들보다 오히려 역량이 모자랍니다. 그리스도의 탄생에 관해 말할 때를 빼고는 마리아에 대해 얘기한 적도 없습니다. 로마 가톨릭교회의 신념은 너무 강해 삼위일체 하나님에 관한 신앙을 재단합니다. 창조주와 피조물의 경계를 건드리면 그건 다신론과 다름없습니다. 동정녀를 성모로 추앙하는 문제는 기독교를 망칠 만한 주제니까요. 공개된 장소에서 여러 민감한 논쟁거리에 대하여 일부러 침묵하는 건 그래서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원저자는 다소 도발적인 주장을 펼치겠다고 선언합니다. 정작 중요한 본질은 신구약 성경에 모두 담겨 있습니다. 제가 공동기도서를 각 교파에 보내 자문을 구했습니다. 최대공약수를 추출하는 노력이 필요했습니다. 최소한 신학자들의 증오심을 부추기지는 않습니다. 저는 모든 죄의 유혹을 죄다 받는 이는 극히 드물다고 보았습니다. 사람들은 흔히들 따지듯 묻곤 합니다. “대체 당신이 뭐라고, 누구는 그리스도인이고 누구는 아니라고 함부로 말하는 것인가?”라고 말입니다. 어떤 교리를 믿지 않더라도 참된 그리스도인들의 정신에 훨씬 가깝게 사는 이들도 있습니다만 예수 그리스도를 유일한 나의 구주로 영접하지 않는다면 결코 그리스도인의 영을 가졌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그럴수록 참된 그리스도인들은 그분들을 위하여 성의껏 기도해야 합니다. 설령 적그리스도의 영을 가진 원수라고 해도 말입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명하셨으며, 예수님 외에는 구원을 받는 다른 길이 없기에 그렇습니다. 그것이 심오한 뜻에서 제가 쉬이 입을 열지 않는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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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락산 일대에서 만난 풍경화

 

먼저 옳고 그름, 우주의 의미를 푸는 실마리부터 풀어보려고 합니다. 목하 인간 본성의 원리에 접근하는 중입니다. 뿌리 깊은 죄성에 의해 움직이는 원초적 심성은 사실 만유인력의 법칙과 다르지 않습니다. 인간도 하나의 유기체로서 다양한 생물학적 법칙의 지배를 받기 때문입니다. 물론 고유한 영혼을 가진 인간의 경우에도 자연법을 거스르지는 못합니다. 지금 제가 하고픈 말은 올바른 행동에 대한 인식을 분명히 하자는 것입니다. 단순히 어떤 사안에 대해 시시비비를 가리자는 게 아닙니다. 기실 자연법을 그대로 지키는 사람은 아무도 없거니와 국가 간에 체결한 조약마저 나중에라도 불공정하다는 이유로 파기해버리니 말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잘못에 대한 병명이거나 남에게 책임을 전가하려는 시도여서는 안 됩니다. 그 하나는 인간은 누구나 일정한 방식으로 행동해야 한다는 일종의 강박관념 내지는 기묘한 생각을 갖고 있으며, 다른 하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사한 방식으로는 행동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다들 자연법을 익히 알고 있으니까요.


응당 몇 가지 반론이 가능합니다. 가령 도덕률이란 것도 집단 본능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 역시 사회적 통념에 따라 일정한 방식으로 행동하고자 하는 강렬한 바람이나 욕구를 느낀다는 뜻입니다. 사람이란 어떤 경우에도 자기보존본능을 뛰어넘기 어렵습니다. 어느 편을 들어야 하느냐의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약자 편을 드는 것보다 앞서는 가치는 정의에 속하는 영역입니다. 도덕률이 단순한 본능 중 하나가 아닌 까닭입니다. 하지만 엄밀한 의미에서 충동이 원래부터 좋거나 나쁜 것이 아니었다는 말에는 부분적으로 동의할 수 있습니다. 아담이 타락하기 전까지는 그러했으되 적어도 원죄가 유전되면서부터는 그렇지 않았으니까요. 물론 여기에 사물을 적용하는 문제는 다른 사안입니다. 준법정신을 강조하는 일은 현실적으로 꼭 필요하다는 입장입니다. 적어도 도덕적 진보가 작동하기 위해서는 말입니다. 결론적으로 어느 사회든지 일정한 행동법칙은 존재해야 한다고 봅니다. 공동체를 위한 도덕률마저 무너져버리면 어떠한 사회적 체제라 할지라도 지속성을 유지하기 어렵습니다.

 

■ 프로필


- 고교생에게 국어와 문학을 가르치며 ‘수필집·시조집·기행집’ 등을 펴냈습니다.

- 퇴임 후 기고활동을 이어가면서 기독교 철학박사(Ph.D.) 학위를 받았습니다.

- 블로그 “조하식의 즐거운 집” http://blog.naver.com/johash을 운영합니다.

- <평택자치신문>에 “세상사는 이야기”를 14년째 연재하는 중입니다.


※ 다음호(668호)에는 ‘기독교를 위한 변증 - 영혼구원의 법칙을 논함’이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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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사는 이야기] 기독교를 위한 변증 ‘순전한 기독교를 변론함’ (1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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