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28(일)
 

■ 자연과 인간

 나는 가끔 호손의 <큰 바위 얼굴>을 반추하며 인간에 있어 자연의 존재란 무엇인가를 생각하곤 한다. 문학 작품은 일단 발표되면 작자의 작의와는 상관없이 순전히 독자의 것이다. 읽은 작품을 어떻게 해석하는가는 독자에 맡길 수밖에 없다. 이 작품을 흔히 바람직한 인간형이란 어떤 사람인가를 제시한 것으로 보고 있으나, 나는 동양적 관점에서, 자연과 인간의 근본적인 관계를 묘사한 작품으로 파악하고 있다.

 주인공 어니스트는 거룩하고 신비해 보이는 큰 바위를 자신의 스승으로 삼고 성장하며 그것을 닮은 위인이 나타날 것이라는 전설을 믿고 고대한다. 어니스트는 마을에 차례로 나타나는 큰 바위를 닮았다는 사람들, 경제인, 장군, 정치인, 문화인 등을 면대하게 된다. 그러나 어니스트는 실망만 하게 된다. 그들은 자신이 그려왔던 큰 바위와 같은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다만 세속적인 욕망을 성취한 사람들이었을 뿐이다.

 이 작품의 결말에서 큰 바위의 얼굴과 같은 인물은 그것을 스승으로 삼고 자라온 어니스트 자신이었음이 세인들의 입을 통해 밝혀진다. 어떤 자연물을 바라보며 의미를 부여하고, 그것을 닮으려 노력한 사람이, 바로 전설의 주인공이라는 것이다. 인간은 자연에 대해 두 가지의 관점이 있었다. 하나는 소유로 생각하는 쪽이고, 다른 편은 존재로 파악하는 시점이었다.

 서양의 호손은 어니스트로 하여금 후자의 편에 서게 했다. 서양에서는 이례적인 경우라 생각된다. 왜냐하면 서양 사상의 중심을 이루는 기독교관에서는 자연은 인간을 위해 베푼 신의 은총으로 생각했다. 자연을 인간이 변형시켜 얼마든지 이용할 수 있는 대상으로 보았다. 때문에 자연을 망치고 훼손하게 되었던 것이다. 우리도 그것이 좋은 것인 줄만 알고 열심히 뒤를 따랐다. 삶의 편리는 가져왔지만 생태계 파괴와 환경오염 등으로 생존마저 위협받게 된 것이다. 신은 인간들에게 편리함을 준만큼 그 대가를 치르게 하였던 것이다.

 동양은 자연을 존재로 인식하여 인간과 동일시했다. 우리의 삼신사상이 그렇고, 불교의 윤회사상이 그렇고, 장자의 무위자연사상이 궤를 같이한다. 자연은 인간이고, 인간은 바로 자연이다. 그들은 서로 윤회하며 생멸을 계속하는 것으로 파악했던 것이다. 자연에 합일하여 자연과 함께 호흡하다 자연으로 돌아가는 것을 지고의 낙으로 삼았다.

 조물주는 인간에게 두 가지를 한꺼번에 다 베풀지 않는다. 신의 은총이란 한 손으로 뺨을 갈기고, 다른 손으로는 그곳을 어루만져주는, 그런 것이다. 다시 말해, 산업화 이면에 심각한 생존문제인 환경오염이 도사리고 있었던 것이다. 이 시점에서 우리는 한번쯤 돌려 생각해 볼 문제이다. 무분별한 공업화가 중요한가, 아니면 삶의 터전을 지키는 것이 중요한가. 자연은 이런 문제뿐만 아니라, 민족에게 여러 가지의 유형무형의 영향을 주는 것이기에 더욱 그러하다. 자연은 민족성에도 영향을 미친다. 광활한 대지와 척박한 땅을 소유한 민족은 개척정신을 배운다. 섬 민족은 생존을 위해서는 어떤 일도 불사한다는 치열한 생존의식을 갖는다. 우리의 마을은 산으로 둘러싸여 있다. 그리고 실개천이 휘돌아 가고 있다. 주위로는 수양버들이 하늘거리고 있다. 이런 자연풍광 속에서 자랐기에 인정이 많고 섬세한 민족성을 갖게 되었다. 자연이 민족성을 만드는 것이다. 자연을 지키는 것은 바로 민족을 지키는 것이다. 지금 우리 자연은 어떻게 변해가고 있는가.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이다.

 한반도를 금수강산이라고 했다. 맞는 말이다. 기실 그랜드 캐넌, 나이아가라 폭포, 히말리아 산맥, 아마존 강 등은 웅장하고 신비한 것이지 아름다운 것은 아니다. 아기자기하고 오밀조밀한 우리의 산하를 보고 있노라면 마음이 절로 차분해진다. 그리고 자연 속의 자신을 돌아보게 된다.

 허두에서 말한 작품은 서구에서 산업혁명이 본격적으로 진행되고 있을 때 발표된 작품이었다. 문학은 인간을 지키기 위해 존재한다. 산업화가 곧 인간의 행복과 직결될 것이라는 잘못된 생각이 팽배해 있을 때, 작가는 거기서 눈을 돌려 인간을 지키기 위해, 자연의 소중함을 일깨우려 한 것이다. 산업화는 환경의 오염을 낳고, 그것은 결국엔 인간을 기형으로 만들기 때문이다. 우리는 무분별한 산업화로만 치달을 게 아니라, 자연의 중요성에 대해 다시 한 번 눈떠야 할 시기이다. 우리 모두 맑은 계곡에 발을 담그고 조용히 반성하며 자연의 일부로 돌아가 겸허하고 진실했던 우리네의 민족성을 회복해야 할 것이다.

■ 방영주 소설가·시인 약력

 <월간문학> 소설 당선, 소설집 <거북과 통나무> <내사랑 바우덕이> <카지노 가는 길>, 장편소설 <무따래기>(상·하권) <우리들의 천국> <카론의 연가> <국화의 반란> <돌고지 연가> <대무신왕> 등, 한국소설가협회 중앙위원(연락처 ☎ 011-227-0874, 주소: 450-760 경기도 평택시 평남로 281 삼성(아) 105동 805호, 이메일: youngju-5@hanmail.net)

※ 방영주 소설가·시인의 세상을 바라보는 지혜, '소설가 방영주의 세상만사(世上萬事)'가 연재됩니다. 시민, 독자 여러분들의 많은 관심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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