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27(토)
 

조하식(한광고 교사, 수필가)

  파리의 아침은 청량했다. 하지만 달랑 빵 두 개로 빈속을 채우라는 건 아무래도 너무했다. 오늘의 주제는 <루브르박물관(Musee du Louvre)>. 대형차 주차장에서 내려 해자를 지날 때는 느낌이 묘했다. 8년 반 전에 밟았던 땅. 비록 수박겉핥기였을망정 비너스 석고상을 다시 보는 감회는 남달랐다. 헬레니즘에 기여한 문화. 하지만 벽면에 잔뜩 걸린 그림들이 왠지 거추장스레 다가왔다. 제아무리 물량공세를 편다한들 모나리자 하나를 감당할까 싶다. 출처는 대충 이러했다. 당대 이민을 받아들일 때 이마가 넓고 눈썹 없는 여인을 선호했다는 것. 그러나 나는 솔직히 모나리자가 예쁜 줄 모르겠다. 그 옆에 서서 미소 짓는 아내가 모나리자보다 훨씬 낫다. 서기 1911년 8월 23일 도난당한 것을 1년 뒤 이태리 피렌체에서 되찾았다니 천만다행이다. 그밖에 조각상을 중심으로 몇 군데 에둘러 봤으나 별다른 감흥은 없었다. 아들이 애 딸린 6세 연상의 여인을 좋아하는 통에 불만을 가졌던 나폴레옹의 모친이 대관식에 불참했음에도 굳이 유명화가를 불러 어머니를 그려 넣은 일 말고는 딱히 기억나는 게 없다. 아무튼 박물관은 해박한 해설을 일삼아 들으며 탐구하는 자세를 취하지 않으면 이해하기 곤란한 영역. 그렇게 두어 시간을 관람한 뒤 유리관 피라미드 앞에서 추억을 남기고 달팽이 맛을 보았다. 프랑스의 전통요리. 연간 1억 마리 이상을 소비한다는 말에 다들 놀란 눈치지만 풀잎에서 서식하는 숫자만 6억 마리라니 결코 멸종될 리는 없겠다. 가이드는 달팽이는 본시 양식 자체가 불가능하고 했다.

  리무진이 달리는 곳은 오를리공항이 뵈는 파리의 남녘. 길가는 온통 낙서투성이였다. 글씨나 그림을 보면 단번에 끼적이기는 벅찬 수준급. 군데군데 빈틈을 비집고 저토록 빼곡히 채우는 심사는 뭘까? 미처 단속의 손길이 미치지 못한다는 말에도 쉬이 동의하기 어렵다. 생각건대 예술성을 갖춘 행위를 당국이 짐짓 방조한다는 느낌이다. 반면에 보행자 위주의 자전거 전용도로며 갓길 주차장은 인상적이다. 곁들여 하나같이 덩치가 작은 승용차들이 서로 범퍼를 툭툭 건드리며 주차하는 건 성숙한 실용주의다. 이런 곳이 중세까지는 주위에 인분이 지천이어서 하이힐을 신고 향수를 뿌렸다는데, 그러고 보니 길가에 버려진 쓰레기들이 심심찮게 눈에 밟혔다. 차창에 비친 대통령궁. 전혀 요란하지 않았다. 골치는 이민 2세들의 잇따른 탈선이란다. 부모세대와는 달리 배울 만큼 배운데다 부당한 처사에 당당히 맞서는 풍토가 급속도로 확산되면서 커다란 사회문제로 비화하는 사례가 비일비재하다는 것. 콩코드광장이 대변하는 피의 혁명은 연신 화합, 단결, 평화를 주문하는 데도 말이다. 이네들이 자랑하는 오벨리스크. 하지만 이는 이집트의 룩소르에서 훔쳐온 장물에 불과하다. 오랜 기간 쐐기문자를 해독 못한 대가치고는 가혹하다. 부질없으되 샹폴리옹 같은 대학자만 앞서 나타났더라도 이와 같은 수모는 미연에 막아냈을 터였다. 저만치 허름한 건물은 로마시대의 욕탕이었던 터전. 13세기에 태동한 소르본대학의 위용에는 언뜻 범접하기 어려운 품위가 서렸다. 파리에 세계적인 명문 런던대학교의 분교를 연 참도 특장점이다.


  갸우뚱한 건 1920년대 파리인구가 최고점(290만 정도)이었다는 사실. 가이드는 1850년대라고 했으나 당시 상주인구는 100만이었다. 그때 세계 인구를 감안한다면 거대도시 규모였다. 동서길이가 12km, 남북이 9km에 불과한 파리의 현재 인구는 220만 가량. 인근을 통틀어도 경기도에 못 미치는 1,180만 여명이다. 물가는 세계 최고여서 웬만한 수입으로는 지탱하기 버겁단다. 부자동네는 16구역. 아랍문화소를 부설한 파리 6, 7대학을 지나니 오페라하우스가 차창에 들어왔다. 곧바로 수백 년간 아베마리아를 외치는 노트르담(Notre Dame) 사원. 알고 보니 몰려드는 신도를 감당 못해 큼지막하게 짓다가 지레 포기한 사례라니 실로 격세지감이랄 밖에. 관영한 타락상을 다시 보는 듯. 창문이 작다란 건 추위나 열기를 차단할뿐더러 전쟁이 잦아서랬다. 센 강변에 떠있는 수상가옥은 어엿한 주거지. 납세의무를 지고 저마다 꾸려가는 생활인들은 당당했다. 보아하니 강물을 벗 삼아 번영한 도시형태. 내로라하는 외국공관들마저 전망이 트인 데를 선호한단다. 고속도로에 오토바이를 허용한 조치도 우리와 다른 점. 만연한 과속을 뿌리째 뽑아버린다면 가능한 풍경이렷다. 고민은 딴 데 있었다. 근자에 이슬람이 기승을 부리는 통에 각종 규제를 강화했지만 여의치가 않단다. 난민을 받아들이며 날로 사회불안이 증폭되는 상황이어서 아예 흑인과 아랍인의 거주구역을 제한한 것. 우습게도 그 유명한 몽마르트언덕이 빈민가라는 사실도 특기할 만한 사항이다. 파리 시내에 유독 크고 작은 호텔이 즐비한 건 이곳을 찾는 연인원만 이미 3,000만 명 선을 넘어선 까닭이다. <홈페이지 http://johs.wo.to/>

※ 다음호(318호)에는 서유럽 기행 네번째 이야기, '랭스로 가는 길목' 편이 이어집니다. 시민, 독자 여러분들의 많은 관심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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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사는 이야기] 서유럽 기행 - 달리 보인 루브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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