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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사는 이야기] 코카서스 기행 ‘조지아의 트빌리시는 문전성시’ (2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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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부쩍 뜨고 있다는 조지아(Georgia: 370만 명 남짓, 면적 69,700.0㎢, 9천 달러) 역시 코카서스산맥을 끼고 사는 나라. 국경 마을에서 북적대는 아침 전통시장을 구경하고 어렵사리 국경을 통과한 뒤 곧바로 눈에 들어온 강줄기는 탁한 화산재가 뒤섞인 흙탕물이었다. 그런데 수풀에 둘러싸인 허름한 농가에 가느다란 철제 파이프를 볼품없이 연결해 놓았는데, 그 정체를 물으니 가스관이란다. 굳이 지상으로 돌출 시공한 까닭은 해박한 전문 가이드마저 공사비밖에는 시원한 답을 주지 못했다. 그렇게 얼마간 산길을 내달린 끝에 일행이 멈춘 곳은 조지아 와인의 시발지. 의아한 건 큼지막한 항아리들을 시멘트 바닥에 파묻은 모습이었다. 반만년을 공들여 발효한 전통 비법치고는 갸우뚱한 장면? 아니나 다를까, 카헤티에서의 경험치는 이내 식탁으로 옮아온 듯 포도주를 시음한 아내 말마따나 음식이 별로였다. 물론 평소 주류 자체를 입에 대지 않는 게 주요인이로되 그대로 입맛에도 영향을 주더라는 가벼운 경험칙이랄까. 이를 단박에 상쇄한 반전이 있었으니 싱그런 포도밭을 벗 삼아 피어난 보랏빛 라벤더였다.
사랑의 도시로 알려진 시그나기(피난처라는 뜻) 성벽(1975년 역사지구로 지정) 답사는 니코 피로스마니 박물관에서 시작했다. 해설을 들으니 이곳이 바로 백만송이 장미 노래의 배경지. 한 국민화가의 못다 이룬 러브스토리를 가사에 담았다는 얘긴데, 카케티 지역이 러시아와 가깝다 보니 심수봉이 번안 가요로 선보일 때부터 여러 설이 돌았으나 원곡은 라트비아 민요라는 게 정설이다. 하지만 나는 박물관의 전시물보다는 아슬아슬한 성곽길에 관심이 갔고, 허접한 성벽 위보다는 2차대전 메모리얼 기념공원에 방점을 찍었다. 여태껏 아물지 않은 전쟁의 깊숙한 상흔. 쇠사슬에 묶인 채 개죽음을 당한 11~15세 소년들의 피 울음이 귓전을 때리는 가운데 이렇게나마 어린 영혼을 기리는 숨은 고리에 끊임없이 반복하는 죄악의 생물성은 어쩌랴. 그래서일까, 잠시로되 다들 꺼리는 국내 정치의 어수선한 막장을 뼈아프게 되짚었다. 인류의 흑역사를 훑어보면 난제의 진앙은 늘 꼭대기에 있었다. 리더십을 바로 세우면 조직은 살아나는 법이니까. 놀라운 일은 피로스마니의 16개 작품이 피카소에게 영향을 끼쳤다는 말이다.
▲ 조지아 트빌리시의 삼위일체 교회
수도인 트빌리시로 들어와 가장 궁금한 바는 기독교 국가의 색다른 면모였다. 4세기경 고유문자 창제와 더불어 그리스도교를 받아들여 국민의 84%가량이 조지아정교 신자인 사회의 예배당은 어떤 모습일까? 일정상에도 응당 러시아정교회에 필적할 만한 성삼위일체 사메바교회는 들어있었다. 더구나 이만한 대역사를 국민 성금으로 이룩했다면 그 의미는 남다를 터. 아닌 게 아니라 아름답고 장엄한 자태를 대하자마자 깊은 내공이 느껴지는 조지아 건축의 백미라 고평가한들 전연 과하지 않을 듯했다. 한마디로 우아미를 갖춘 조형미의 총화. 조지아인들에게 이곳은 신앙적 차원에서 뿐만이 아니라 역사적 정체성과 문화적 자긍심을 고취하는 국가 상징물임이 틀림없었다. 이어서 찾은 메테히교회는 실시간 통행량이 많은 도로 건너편 절벽 위에 있어 바라보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는데, 5세기경 왕궁 보호를 위해 축성한 이래 시대별 변천사에 따라 교도소, 미술품 보관소, 극장으로 사용하다가 다시금 본연의 임무로 돌아왔다는 설명을 들으니 날렵한 기마상이야말로 군중을 이끄는 기수역을 너끈히 수행해내는 형상이었다.
거의 반반씩 나뉘어 쿠라강 뱃놀이와 강변 산책을 즐기는 시간이 주어졌다. 정갈하게 다듬은 조경수도 그렇고 미끈하고 튼튼한 평화의 다리도 그랬고 정성껏 꾸민 정원이 보기에 좋았다. 그러나 분수대 옆 거대한 유리관처럼 지은 건물은 끝내 자금난을 견디지 못하고 얼마 전 부도를 맞은 상태. 외관이 워낙 근사해 인수자가 나타날 때까지 마냥 기다리고 있다는데 호기심을 발동해 그 언저리를 엿보는 것도 내심 조심스러웠다. 아무튼 수도 한가운데 이만한 쉼터가 있다는 건 시민들의 홍복. 이윽고 약속한 시각이 되어 삼삼오오 케이블카를 타고 조지아 어머니상이 보이는 언덕배기로 올라갔다. 꿈속에 예수를 양육한 마리아에게서 모종의 언질을 받은 니노라는 여인이 그 장본인이라는데, 몇 번을 올려다봐도 아직 남자를 가까이하지 않은 동정녀에 가깝다는 게 중론. 제단 왼쪽에 심은 포도나무 십자가에 머리카락을 묶었다는 전설이 사실이건 아니건 시오니성당에 얽힌 스토리라고들 믿으니 연일 구름 같은 인파가 몰려드는 거 아니겠나? 위 내용은 ‘계시 및 성모’라는 용어를 복음의 시각으로 서술했다는 점을 밝힌다.
■ 프로필
- 고교생에게 국어와 문학을 가르치며 ‘수필집·시조집·기행집’ 등을 펴냈습니다.
- 퇴임 후 기고활동을 이어가면서 기독교 철학박사(Ph.D.) 학위를 받았습니다.
- 블로그 “조하식의 즐거운 집” http://blog.naver.com/johash을 운영합니다.
- 정론지 <평택자치신문>에 “세상사는 이야기”를 15년째 연재하는 중입니다.
※ 다음호(746호)에는 ‘코카서스 기행 - 조지아의 자산가치는 자연환경’이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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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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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사는 이야기] 코카서스 기행 ‘아제르바이잔의 과거와 현주소’ (1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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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도 생소한 아제르바이잔(Azerbaijan: 1천만 남짓, 86,600㎢, 8천 달러)은 서남아시아에 속하는 국가로 이른바 코카서스(Caucasus, 흑해와 카스피해 사이)라고 불리는 지역에 위치해 있다. 30불의 비자피를 물고 당도한 미지의 나라는 첫눈에 지난날 명성에 애써 부응하려는 듯한 모양새. 마치 용트림하듯 치솟은 타원형 알로브 타워(일명 불꽃빌딩)나 비록 자칭이긴 하되 정복 불가능한 성역의 뜻으로 명명한 메이든 타워를 마주하면 그 절절한 심정을 충분히 헤아릴성싶다. 아쉽게도 초소형 미니북 박물관이며 흘러간 제왕의 청동상은 있어도 빈약한 보관자료를 두고 메이든 타워와 함께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한 구시가지의 쉬르반샤 궁전의 고전미까지 가벼이 여기는 건 자칫 편견이거나 단견일 수 있다. 지상에 갖가지 중세문화재를 그대로 간직할 줄 아는 소양이나 오래된 가게를 영업 중 명소로 개방한 당국의 조치를 통해 개념 있는 행정적 체계를 확인한 터였다. 다만 헤이다르알리예프센터처럼 선뜻 동대문디자인센터를 떠올리게 하거나 어설피 시드니 오페라하우스를 본뜬 표절작은 볼썽사납다고밖에 할 수 없다.
스탈린의 흔적이 서린 자유광장을 거쳐 정부청사가 모여있는 아제르바이잔의 과거 속 현재는 옛 영화의 궤적을 추적하면 얼마큼씩 숨은 그림이 드러나기 마련이다. 바쿠(240만여 명 거주)라는 묵직한 중심지와 흙먼지 날리는 외곽지의 현주소가 바로 그것. 필자의 경우 다소 번잡한 시가지로 들어서자마자 여기는 가능한 한 거창한 규모의 건조물을 지향한다는 인상이 짙었다. 뜻한 바를 이루지 못하고 유러피안게임의 주경기장으로 사용한 올림픽 스타디움(약 7만 명 수용, 희림종합건축사사무소 설계)을 비롯해 아제르바이잔의 랜드마크로써 밤마다 현란한 조명쇼를 선보이는 곡선형 플레임 타워는 제법 유명세를 치른다는데, 과거완료와 현재 진행형이 뒤섞인 도심을 벗어나면 곳곳에서 작업 중인 유전을 만나게 된다. 메마른 대지를 보면 그나마 원유라도 묻혀있으니 천만다행인 국면이랄까, 단순히 사막이나 광야보다는 좀 낫다고 보면 된다. 창밖이 시종 흐릿한 건 희뿌연 대기질 때문인데, 문제는 기창을 통해 발견한 카스피해 기름띠였다. 연신 석유를 파내면서도 뒤처리가 미흡해 내륙에 갇힌 호수로 흘러든 탓이다.
▲ 아제르바이잔의 수도 바쿠의 위용
휘어지고 깡마른 초목들 사이로 이따금 지나가는 녹슨 화물 열차를 보며 한 시간 반쯤을 달려가 고부스탄 KASSA 박물관에 이어 암각화를 감상할 때는 카스피해에서 불어오는 거센 마파람을 맞아야 했다. 여섯 개 원형 단층 건물에 배치한 대표적 전시물은 선사시대인들의 생활상과 각종 장신구들. 관련 기록에는 1947년 이후 전문가 디자파르사드가 발굴을 본격화한 뒤로 1965년부터 청동기 구조물이 나왔다고 한다. 일각의 의견이로되 기우제를 지낼 때 바위 구멍에 가축의 피를 넣어 소원을 빌었다는데, 천여 개 암석에 6천 점 이상의 그림과 고대 상형문자로 새긴 삶의 모습은 원시적 수렵과 사냥, 토템사상 등 유무형의 기록을 읽어낼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단다. 야외에 설치한 고대 주거 형태나 석조물에서 보는 바처럼 유물유적을 통해 대단한 고고학적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을망정 귀한 시간과 비용을 들여 문명 세계에 잘 알려지지 않은 이역만리의 국립공원을 답사하는 일은 매번 보람찬 여정으로 꼽는다. 척박한 산기슭에 놓인 바위를 두드려 청아한 소리가 난다면 나름 기암괴석이라 인정해도 되리라.
한글을 독학으로 익힌 현지 가이드가 해설을 곁들인 칸의 여름 궁전은 웅대한 프레스코와 섬세한 스테인드글라스로 장식한 이네들의 자부심. 그에 덧붙여 실크로드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카라반사라이(숙소)도 옛 정취를 되살려내고 있었다. 지금은 사람들이 기거하고 있어 내부를 들여다볼 수는 없었고, 알바니안 교회, 큼지막한 모스크(무슬림 93%)와 기도처들을 돌아본 일은 덤이었다. 흥미로운 지점은 이곳이 불의 나라답게 조로아스터교의 발상지라는 사실. 하지만 그에 딸린 동네는 유명 관광지인데도 바닥이 고르지 않아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불편을 감수해야 했다. 게다가 계단은 왜 그리 높고 높낮이마저 일정치가 않으니 행여 넘어지지나 않을까 불안했다. 아직 풀리지 않은 의문은 이란에 산다는 무려 3천만 아제르바이잔인들의 행방이다. 끝으로 원유 수출에 주력하는 건 수긍하되 소금기를 먹고 자라는 염생식물도 미래자원이라고 귀띔해주고 싶다. 어쨌거나 출입국 절차에 시달려선지 토종 꽃처럼 살갑게 “살람(안녕)”이란 인사를 건네며 “사고올(감사)”이라고 후일을 기약하긴 힘든 곳으로 기억될 것 같다.
■ 프로필
- 고교생에게 국어와 문학을 가르치며 ‘수필집·시조집·기행집’ 등을 펴냈습니다.
- 퇴임 후 기고활동을 이어가면서 기독교 철학박사(Ph.D.) 학위를 받았습니다.
- 블로그 “조하식의 즐거운 집” http://blog.naver.com/johash을 운영합니다.
- 정론지 <평택자치신문>에 “세상사는 이야기”를 15년째 연재하는 중입니다.
※ 다음호(745호)에는 ‘코카서스 기행 - 조지아의 트빌리시는 문전성시’가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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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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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사는 이야기] 고통받는 인간의 한계 ‘고통의 과녁을 향한 화살’ (5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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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고통으로 인해 종교가 생겨났다는 주장이 그것입니다. 그러나 프로이트의 말처럼 사람들이 윤리적 본분을 다한다고 해서 종교의 존재 이유가 사라진다는 논리에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인간은 육적, 정신적, 영적 영역이 동시에 작동하는 유기체이기 때문입니다. 엥겔스의 주장대로 기독교는 원래 억압받던 사람들의 사회운동이었다는 말에도 수긍할 수 없습니다. 인간이란 어떤 일을 성취함으로써 만족하는 피조물이 아니니까요. 가령 고통을 가장 심각하게 취급하는 종교는 불교입니다. 세상을 고해(苦海)라고 규정한 건 그래서입니다. 그들이 수립한 고집멸도(苦集滅道)의 교리만 해도 생로병사를 거쳐 결국은 인생무상으로 끝내버리지 않습니까? 그러나 이는 윤회설과 극락이 대치하는 국면입니다. 반면에 기독교의 고통관은 모호한 데가 있습니다. 복음을 온전히 깨닫기 전까지는 충분히 이해할 수 없는 범주이거니와 창조신앙에 근거해 거듭나지 않고서는 절대 범접하지 못하는 영적 영역이라고 봅니다. 그러므로 고통의 기원은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 저지른 원죄로 옮겨갈 수밖에 없습니다.
칸트는 『순수이성비판』을 통해 인간의 관심사를 세 가지로 정리했습니다. “나는 무엇을 알 수 하는가(인식론)”,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윤리학)”, “나는 무엇을 소망할 수 있는가?(종교)”였습니다. 저자가 쓴 『인간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답변이기도 합니다. 소크라테스가 지식의 궁극적 목적을 자신을 아는 것이라고 일갈한 까닭입니다. 하지만 그 어떤 이론을 앞세워도 창조주와 피조물을 전제하지 않는 한 궁극은 요원합니다. 응당 이론적 인간 이해의 약점일 수 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제시한 인간에 대한 수식어는 죄다 동물에 견준 겉핥기에 불과합니다. 반 퍼슨이 분류한 대로 그만한 이해도를 가지고는 존재론적 단계에 머물 수밖에 없으니까요. 그래서 세네카는 인간은 죽기 위해 태어났기에 다행히 길지 않다는 것에 위안을 느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 지점에서는 인간의 고통이 차지하는 비중이 현저히 떨어질뿐더러 본질에도 접근할 수 없다는 데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 수생식물의 동굴 안 수분 공급원
고통받는 인간의 고통은 그의 구체적인 인격과 결부될 때 그 본색이 드러납니다. 그만큼 당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고통의 크기를 저주로 느낄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여북하면 예수님마저 십자가 형틀에 매달리기 전 하나님을 향해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고통을 내게서 지나가게 해달라고 탄원한 데 이어, 나의 하나님을 연거푸 부르며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느냐고 부르짖었을까요? 그만치 고통은 누구나 피하고 싶은 극심한 통증일 따름입니다. 고통받는 얼굴과 윤리적 의무는 다른 문제입니다. 내가 가하지 않는 타인의 고통에 대해 의분과 죄의식을 느끼며 남다른 윤리적 의무감을 갖는다고 해서 고통 자체가 사라지지는 않으니까요. 그것은 어쩌면 윤리적 당위성이라기보다는 윤리적 상대주의에 기인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역설적으로 현대인들은 고통을 별반 심각하지 않게 다루는 데는 성공했습니다. 그만큼 익숙해지기도 했거니와 각종 의약품의 발달로 인해 여건이 나아진 덕분입니다. 문제는 개개인뿐만 아니라 지역별로 편차가 심해질뿐더러 갈수록 환경오염에 의한 재앙의 빈도가 늘어난다는 데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현대인들을 피상적이고 비인간적으로 만들어가는 요인입니다.
마무리하면 자고이래 인류사는 고통을 회피하기 위한 노정이었습니다. 이래저래 당한 고통으로 인해 단 한 번이라도 후회하지 않은 사람이 과연 있을까요? 자신의 어리석음이나 시행착오로 당하는 고통이 있기 마련이고, 지구촌에서 전방위적으로 일어나는 사건 사고로 인한 불가항력적인 고통이 시시각각 몰려들기 때문입니다. 물론 경우에 따라서는 개개인에게 고통이 필요할 수도 있다는 데는 동의합니다. 끝으로 인간의 고통에 관한 수많은 이론을 모으고 집대성한 저자의 노고에 대해서 심심한 사의를 표합니다. 다만 앞에서 간간이 언급한 바와 같이 성경을 주교재로 삼지 않은 데서 발생한 공백에 대해서는 향후 보완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고통은 시시각각 죽음보다 무서운 인류의 공적으로 군림하고 있으니까요. 함께 슬픔을 나누면 잘게 부서져 버리고 서로들 기쁨을 나누면 점점 커진다는 상식이 통하는 세상을 만들어야 합니다. 바로 저자가 ‘고통의 역설’이라는 논제를 제시한 까닭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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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교생에게 국어와 문학을 가르치며 ‘수필집·시조집·기행집’ 등을 펴냈습니다.
- 퇴임 후 기고활동을 이어가면서 기독교 철학박사(Ph.D.) 학위를 받았습니다.
- 블로그 “조하식의 즐거운 집” http://blog.naver.com/johash을 운영합니다.
- 정론지 <평택자치신문>에 “세상사는 이야기”를 15년째 연재하는 중입니다.
※ 다음호(744호)에는 ‘코카서스 기행 - 아제르바이잔의 과거와 현주소’가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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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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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사는 이야기] 고통받는 인간의 한계 ‘고통과 죽음에 깃든 함수’ (4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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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인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대목은 자신의 잘못과 상관없이 당하는 고통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쉘러는 고통을 희생의 개념으로 설명하려고 합니다. 그는 모든 고통을 가리켜 전체를 위한 부분의 희생이라고 풀이했습니다. 이는 생태계가 유기적 관계를 유지한다는 점에서 보면 적절한 지적입니다. 전체의 압력에 대해 무력한 개체가 느끼는 고상한 고통이 있는가 하면, 강력한 전체에 의해 생기는 평범한 고통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쉘러의 고통관은 다분히 숙명론적입니다. 도덕적 질서를 유지하는 윤리이론은 인간관계의 핵심적 위치를 점유하니 말입니다. 제아무리 유용한 이론적 근거라 하더라도 실천을 담보하지 않는다면 지적 유희에 불과하니까요. 인간의 윤리적 행위에 대해 철학적으로 성찰하는 것을 메타윤리라고 부르는 이유입니다. 여기서는 윤리적 당위성, 자유의지와 책무성, 가치나 상대주의 문제 등을 다룹니다. 윤리를 고통의 경험에서 설명하고 정립하는 것은 이론적으로도 정당할뿐더러 윤리이론의 실천적 목적을 달성하는 일에도 도움을 줄 것입니다.
선악의 문제는 윤리적 당위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여기에는 그에 따른 전제와 설명을 요구합니다. 하나는 고통을 광의적으로 이해해야 하고, 다른 하나는 모든 악이 윤리적 문제가 되는 건 아니라는 데 초점을 맞춰야 합니다. 그에 따라 악과 고통을 형이상학적으로 취급하는 관점에서는 고통을 윤리와 연결하지 못하는 맹점이 발생합니다. 이는 인간의 자유의지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불교의 고통관과 맥을 같이합니다. 남에게 고통을 가하면서도 죄책감을 느끼지 못한다면 전인격체로서의 가치를 상실할 테니까요. 그렇다면 최소 수혜자에게 최대 이익이 돌아가야 한다는 ‘최소 고통론’에 동조할 수밖에 없습니다. 불완전한 인간이 추구하는 가치체계에서는 롤즈가 제시한 차등의 원칙이 설득력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이제 필요한 일은 자범죄에는 그에 상응한 벌이 따른다는 원칙입니다. 사후에라도 반드시 심판이 있다는 계율이 유용한 건 그래서입니다. 문제는 갖가지 범죄를 추상같이 다스린다고 해서 악의 뿌리가 쉽사리 뽑히지 않는다는 데 있습니다.
▲ 나무 데크와 철제 창틀의 조화미
그러한 측면에서 독일 대학의 입시에 등장한 다음과 같은 논제는 한국 사회에 묵직한 시사점을 던져줍니다. “만일 사람이 고통을 당할 가능성이 없다면 인간관계는 어떻게 되겠는가?”아마도 세상은 무법천지가 되고 말 것입니다. 중요한 지점은 나의 편익을 위해서 남에게 해악을 끼치면 안 된다는 점입니다. 주어진 자유에는 무한책임이 따르고 지구촌의 생태계를 보존하는 데 기꺼이 손해를 감수하는 체계적 교육이 절실합니다. 일반적으로 비인격적인 세력들이 가져다줄 수 있는 고통은 인격체들이 감당하기에는 역부족이니까요. 역사를 살펴보아도 독재자에 의해 저질러지는 구조악들이 사회를 파괴하는 사례들은 많았습니다. 인간의 이기심은 통제받지 않으면 일탈을 일삼게 되어 있습니다. 비록 선출된 권력이라고 할지라도 법치에 의한 견제와 균형이 무너지면 오래가지 못합니다. 이상적 정의를 실현하기 위한 투쟁은 늘 점진적 개혁보다는 급진적 혁명을 꿈꾸기 마련입니다.
고통으로 인해 생기는 부정적인 인식은 사유의 차원에 머물러 있을 뿐 사물에 대한 경이로움을 불러일으키지 못합니다. 정반대로 쾌락은 왜 이다지 좋은가에 대한 질문을 필요로 하지도 않습니다. 그저 고통을 벗어나려는 인간의 몸부림은 본능에 가까운 일일 뿐입니다. 그중에 하나가 극단적 자살입니다. 물론 여기서 생존본능이야말로 극심한 고통보다 더 기본적인 욕망이라고 변론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현실에서 아무런 의미를 찾지 못한 채 미래를 향한 소망마저 사라진다면 그 이상 삶의 의미는 지속하기 어려운 짐에 불과합니다. 따라서 자살을 두고 이른바 문화창조를 운운하는 처사는 일부 호사가들이 떠벌리는 말장난에 불과합니다. 기독교적 가치를 도입하면 생명은 개개인의 소유가 아니라 신의 선물입니다. 진통제를 이용해 고통의 정도를 누그러뜨리거나 극단적 시도를 영적으로 방지하는 역할이 필요한 이유입니다. 그 어떤 경우에도 자살을 미화할 수는 없습니다. 만약 죽음으로써 문제가 해결된다면 세상의 모든 상담은 종국엔 자살을 권유하는 것으로 마무리되어야 할 것입니다. 인간은 육신의 죽음을 맞은 뒤에는 예외 없이 심판이 따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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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퇴임 후 기고활동을 이어가면서 기독교 철학박사(Ph.D.) 학위를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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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음호(743호)에는 ‘고통받는 인간의 한계 - 고통의 과녁을 향한 화살’이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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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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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사는 이야기] 고통받는 인간의 한계 ‘고통의 역사가 주는 함의’ (3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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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당하는 고통은 다른 어떤 느낌이나 경험보다 그것이 지닌 의미에 대하여 관심을 갖도록 유도합니다, 일단 누구에게나 고통이 다가오면 무시하거나 지나칠 수는 없으니까요. 고통이 주는 부산물은 긍정적인 것보다는 부정적인 경우가 더 절실할 수밖에 없으니 말입니다. 문제는 고통의 의미가 아무에게나 죄다 명쾌하지는 않다는 데 있습니다. 니체가 일갈한 만약 고통의 목적이 분명히 드러난다면 나는 고통을 바랄뿐더러 심지어는 추구할 것이라는 독설(?)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렇다면 고통은 신이 인류를 향해 던진 저주일까요? 이에 관한 해답은 고통의 의미와 역사의 합리성에서 찾아야 합니다. 고통의 의미는 필연적으로 역사의 합리성과 연결되기 때문입니다. 반성적 역사의 물음에 대해서는 특별히 고통의 경험이 작용하기도 합니다. 곧 고통이 역사의 해석을 요구하는 것은 현재 당하는 고통이 미래에 대한 목적이 될 수 있으며, 과거사에서 어떤 인과관계를 갖는가에 대한 성찰이기도 합니다. 도덕적 공정은 보응과 보상으로 이어지는 교두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고통에 대한 역사철학적 이해는 허무주의와 비극의 주인공들의 몫입니다. 고통은 우연적이며 이유도 목적도 없다는 주장은 극단적입니다. 고대 그리스 비극들이 그런 노래에 속합니다. 그러나 세상의 슬픈 이야기들이 악의를 가진 비인격적인 운명의 장난에 당하기만 하는 고통일까요? 니체의 초인마저도 비극의 영웅처럼 주어진 운명을 받아들였다는 데 주목해야 합니다. 일종의 운명을 향한 사랑으로 보아도 무방하다는 말입니다. 그저 사람들이 당하는 고통 중에서 허무주의를 극복하는 기제일 뿐입니다. 이에 대한 견해는 라이프니츠의 변신론(theodicy)이나 로크의 이신론(deism)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피조물의 불완전성이란 고통의 불가피한 원인과 관계가 있다는 주장입니다. 어떤 이는 가히 숙명적이라고 대변하는 중입니다. 전자는 전능한 신이 더 큰 선을 위하여 악을 허락했다는 논리를 펼치기도 합니다. 물론 이러한 방법으로 고통을 정당화하려는 시도는 지나치게 이론적이어서 피상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의인인 욥이 세 친구에게서 당한 위로 따위가 그것입니다. 고통이란 당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고통스러운 비밀일뿐더러 한없이 깊은 시름을 견디고 있을 따름입니다.
▲ 온실에서 자라는 열대과수 모습
고통의 합리성이 역사철학적 의미를 획득하기 위해서는 부정적인 고통을 극복함으로써 획득한 긍정적 결과가 헤겔이 찾은 시간계 안에서 이뤄져야 합니다. 그는 역사의 발전이 이루어지려면 통시적으로 정신의 개념과 일치한다고 말합니다. 그것이 이른바 변증법적 역사철학입니다. 곧바로 고통의 부정적인 것이 긍정적인 것을 전제하기도 전에 어떻게 그것을 부정적으로 인식할 수 있느냐는 문제 제기입니다. 이를테면 정반합의 원리를 주장하는 변증법은 부정을 이유 있는 부정으로 만들자는 논리를 갖춘 셈입니다. 헤겔에 의하면 역사는 절대정신 또는 이성의 자기완성 과정이자 발전의 수단에 해당합니다. 마르크스가 주장한 사상도 비슷한 줄기를 형성하고 있다는 게 저자의 견해입니다. 그가 세계사에서 가장 고귀하고 아름다운 것들은 제물로 바쳐진다는 말을 남긴 건 그래서입니다. 마르크스가 동조한 대로 개개인이 당하는 고통에 그대로 머물러 있을 수 없다는 주장입니다. 언제 어디서나 인과응보의 법칙이 작동한다고 믿을 수 있는 건 다행입니다.
고통의 문제는 도덕적 차원이 아닌 삶 전체와 연계하여 그 의미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고통은 구체적이고 비정상적인 상황을 인식하게 하는 기능을 갖고 있다는 견해입니다. 사람이 어떤 부위에 통증을 느낀다는 것은 재빨리 정상적인 상태로 회복하라는 신호일 테니까요. 이는 육체적인 병뿐만이 아니라 정신적인 병이나 사회적인 병도 마찬가지입니다. 반면에 흄은 쾌락과 함께 고통이 따라야 한다는 논리를 펼쳤습니다. 그의 입장에 반대한 이는 힉이었습니다. 고통과 쾌락은 상대적이기 때문에 고통이 없는 쾌락은 있을 수 없다는 반론이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고통은 변증법적인 성격을 지녔다고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의학자 르리쉬의 말처럼 세상에 호의적인 고통이 없다는 점은 명백합니다. 인간들이 당하는 고통의 중요한 특징은 그것이 사회성을 지녔다는 점입니다. 공동체 생활에는 필연적으로 생물학적인 본능을 초월하는 의식과 자유의 요소가 개입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 프로필
- 고교생에게 국어와 문학을 가르치며 ‘수필집·시조집·기행집’ 등을 펴냈습니다.
- 퇴임 후 기고활동을 이어가면서 기독교 철학박사(Ph.D.) 학위를 받았습니다.
- 블로그 “조하식의 즐거운 집” http://blog.naver.com/johash을 운영합니다.
- 정론지 <평택자치신문>에 “세상사는 이야기”를 15년째 연재하는 중입니다.
※ 다음호(742호)에는 ‘고통받는 인간의 한계 - 고통과 죽음에 깃든 함수’가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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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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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사는 이야기] 고통받는 인간의 한계 ‘고통의 의식을 추적한 촉’ (2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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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초적인 경험으로서의 고통은 의심할 수 없는 영역입니다. 자고로 고통은 사람 곁을 떠난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실제 모든 지식과 감각을 의심할 수는 있어도 고통만은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현실적으로 고통을 당함으로 인식되는 자신은 생각을 통해 확인하는 자신보다 훨씬 더 의심 없이 다가오는 건 사실입니다. 가장 원초적인 고통의 경험은 인간에게 가장 기본적인 경험 가운데 하나입니다. 사람이란 존재는 쾌락을 더 좋아하긴 하지만 그것은 끝없는 반복의 느낌을 요구합니다. 반면에 고통으로부터 벗어났을 때 맛보는 해방감은 기쁨을 배가합니다. 그러나 행복은 다른 것들과는 달리 지속적으로 이어지는 동안 더는 행복하다고 느끼지 못하기도 합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오늘날 전방위적으로 갖가지 고통을 줄이기 위한 범정부적인 노력은 유의미합니다. 다만 공리주의처럼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선으로 여기고, 대다수의 고통을 부추기는 결사체를 악의 요소로 취급합니다. 따라서 고통의 유무에 따라 선악을 판별하는 기준선을 설정한다는 것은 나름대로 설득력을 지닌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부정의 근원으로서의 고통은 무엇일까요? 죽음이 인간의 한계를 객관적으로 설정하기에 고통은 우리로 하여금 그것을 인식하게 만듭니다. 누구든지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고통 앞에서는 더욱 저항적인 행동으로 사람을 만드는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물론 앉아서 당하는 무기력함을 목도하는 경우가 없지는 않지만 대체로 혈기가 남아있는 한 지금의 상태로 가만두지는 않습니다. 고통을 피하기 위한 행동일수록 조건반사적이고 즉각적이며 때로는 반성적이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사람들에게 고통이 없다면 영원히 사유 활동을 시작하지 않을 수도 있을 겁니다. 그렇다면 고통을 문제거리의 뿌리요, 모든 부정의 핵이라고 단정할 수 있을까요? 그런 선입견은 오히려 극심한 고통을 통해서 부정이 생겨나고 깊은 늪으로 빠져든다는 데 동의합니다. 그러나 모든 평가는 주관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헣다고 선악을 구별하는 객관적이고 최종적인 기준이 불필요하다는 건 아닙니다. 문제는 대단히 지성적이고 가치 중립적인 태도를 취한다고 해서 쉽게 해결되지 않는다는 데 있습니다.
▲ 튼실히 열린 과일은 땀흘린 보람
주관적 경험으로서의 고통을 두고 항간에서 남의 암덩어리가 내 종기보다 못하다고들 합니다. 은밀히 개인적으로 당하는 고통일수록 쉬이 갈음하기 어렵다는 비유입니다. 사회적으로 공유하지 못하는 고통을 마냥 방치하면 안 되는 이유입니다. 아픈 사람 옆에 가면 무조건 그의 말을 들어주며 가만히 머물다가 돌어오는 게 상책입니다. 그러나 후설은 지향성의 특징을 가리켜 지각하는 행위와 상상의 날개로 설명합니다. 사랑과 미움에는 무엇이 그렇게 만들며, 욕구는 무엇이 욕구가 되냐는 반문입니다. 실제 자연인은 무엇을 의식할 때 의식하는 행위를 동반합니다. 사랑이나 욕망보다 한 걸음 더 나간 게 고통이라는 주장입니다. 고통은 특이하게도 지향적이기도, 지향적이 아닐 수도 있다는 논리입니다. 전자의 경우 물리적인 현상이므로 고통을 유발하는 계기나 상황이 곧 고통 그 자체일 수는 없으며, 후자는 그저 지향을 지향하려는 심리현상에 불과하다는 부연입니다. 그렇다면 후설의 지향적 의식은 주체의 능동적인 행위의 결과라는 결론에 다다릅니다. 다만 레비나스는 고통도 의식 속에 주어진 것이므로 어떤 심리적인 내용을 가질 수 있습니다.
나를 의식하게 하는 고통은 다른 것은 인식하게 하는 데 중요하게 기능합니다. 미드는 나를 가능하게 하는 타인의 역할을 비교적 긍정하는 데 비해, 사르트르는 다소 적대적인 태도를 취하곤 합니다. 상식적으로 다른 사람들을 심판함으로써 자신을 합리화하는 경향이 있다는 진단입니다. 고통은 하나님 앞에 선 아담과 하와처럼 불행히도 애써 부인하고 그것을 느끼지 않으려 몸부림칠수록 피할 수 없는 특징을 지녔습니다. 그래서 헤겔은 사람은 아픔을 통해 자신의 주체성을 느낀다고 말합니다. 즉 공개적이 되려는 사적인 고통은 지극히 주관적이므로 더 공개적이 되려는 충동을 가진다는 설명입니다. 가장 내면적인 것일수록 가장 외면적이 되려는 욕구를 분출할 수 있다는 의견입니다. 그것에 가장 효과적이고 유용한 수단이 언어입니다. 언어를 전제하지 않는 의식은 불가능하니까요. 그런 의미에서 고통과 언어는 긴밀한 내면적 관계를 갖는다고 할 수 있습니다.
■ 프로필
- 고교생에게 국어와 문학을 가르치며 ‘수필집·시조집·기행집’ 등을 펴냈습니다.
- 퇴임 후 기고활동을 이어가면서 기독교 철학박사(Ph.D.) 학위를 받았습니다.
- 블로그 “조하식의 즐거운 집” http://blog.naver.com/johash을 운영합니다.
- 정론지 <평택자치신문>에 “세상사는 이야기”를 15년째 연재하는 중입니다.
※ 다음호(741호)에는 ‘고통받는 인간의 한계 - 고통의 역사가 주는 함의’가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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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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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사는 이야기] 고통받는 인간의 한계 ‘고통에 대한 철학적 성찰’ (1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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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봉호 교수의 『고통받는 인간』은 연약한 사람이 겪는 고통의 문제에 대한 철학적 성찰을 다룬 내용입니다. 저자는 책을 쓴 이유에 대해 철학자가 철학에 관한 책을 쉽게 쓰려고 노력하지 않는 것은 무책임한 일이라고 스스로에게 규정합니다. 그러고 보면 이 책은 자신에 대한 사회 이론적 정당화의 일환으로도 볼 수 있겠습니다. 유수의 철인이자 독실한 신앙인으로 알려진 그가 생애 후반기에 와서야 사회의 약자들을 돕는 일이 정의라는 사실을 발견한 것은 흥미로운 지점입니다. 이를 계기로 사랑이 삶의 가장 고상한 가치라는 기독교의 가르침을 재음미하며 일관성 있게 행동하려고 애쓴다는 그의 말에 상당 부분 공감합니다. 하지만 또 다른 신앙적 측면까지 동의하지는 않습니다. 요즘 들어 그가 보이는 성적 소수자에 대한 태도를 보면 모호한 측면이 있습니다. 그밖에 성경적 세계관에 들어가서도 이견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앞으로 전개되는 논리를 통해서도 일정 부분 문제 제기는 있을 것입니다. 적극적으로 필자의 의견을 개진하는 일에도 주저하지 않겠습니다.
굳이 언급할 필요도 없이 모든 인간은 일생을 통해 크고 작은 고통을 당하며 살아갑니다. 문제는 인간들이 오욕칠정을 느끼는 가운데 본능적으로 즐거움보다는 괴로움의 무게가 심신을 짓누른다는 데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영혼에 관심이 있다면 고통의 근원을 절대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고통이 지닌 다양한 모습과 의의를 철학적 안목으로 관찰하고 성찰하는 일이 중요한 이유입니다. 이 책에서는 넓은 의미의 현상학적 방법으로 인간의 고통에 접근하고 있습니다. 저자가 시도한 ‘인간들의 구체적인 경험들에 주목하여 만약 사람에게 고통이 없다면 어떻게 될까’를 가정한 상황을 상상해보는 사유실험에 주목하고 있습니다. 곧 철학적 사고의 특징과 고통: 철학자의 연구 대상과 방법론은 있는 것에 대한 존재론적 접근입니다. 이는 자연에 대하여 두려움을 가진 고대인들에게는 요원한 일이었습니다. 다만 그들에게는 대자연에 대한 경외심이 있었습니다. 역설적으로 오늘날과 같은 재앙을 전혀 예견하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어느 쪽이 그나마 인간의 고통을 덜어주는 행위일까요?
▲ 물향기수목원에서 일하는 농부상
고통에 무관심한 철학이 대내외적으로 위기를 맞고 있는 현상은 인간의 고통에 대하여 별다른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의학마저 이 분야에서 개척 단계에 있다는 것은 놀랍기 그지없습니다. 인문학을 이끄는 철학계에서 사람의 본질에 대한 연구를 게을리함으로써 고통의 중요성을 소홀히 한 처사야말로 매우 유감스럽습니다. 이를 핑계의 그물로 이용한 현상학자 후설은 갈릴레오로부터 시작된 과학주의가 바로 그런 오류에 빠졌다고 말합니다. 반면에 칸트 같은 철학자는 얼마큼 자체모순을 감수하면서도 물자체(物自體)의 존재와 그것의 의의를 인정했습니다. 설득력 있는 논리는 경험과 함께 인류를 움직일 수 있는 중요한 힘이니까요. 고통과 철학의 자체변혁이 고통의 문제들과 철학자들이 씨름해야 하는 까닭입니다. 고통은 본질상 인간 형성에 필요한 마음의 질서 영역에 해당하므로 이제 철학의 임무는 인간들이 당하는 고통에 대해 수긍할 만한 이유를 찾아내고 긍정적인 반응을 얻어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정확한 정의를 거부하는 고통은 또 다른 문제입니다. 국제고통학회에서 내린 고통(pain)의 정의는 ‘(신체적) 조직의 실제적 혹은 그러한 파손이란 표현을 사용하여 서술되는 불쾌한 감각적·정서적 경험’이므로 신경물리학이나 의학이 철학보다 유리한 입장에 있지 않습니다. 즉 다른 경험과 구별되는 특징은 그 경험을 일으키는 원인으로부터 도피하도록 행동을 유발하거나 그것이 가능하게 해주기를 호소하는 것입니다. 고통이란 개념은 과학적으로 연구할 때만큼은 행동주의 심리학의 유혹이 큽니다. 일반적으로 아픔은 육체적인 것이고, 괴로움은 정신적인 것입니다. 동일한 자극이라도 개인적인 차이에 따라 그 반응은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다만 후자는 의식작용과 정신능력을 가진 인격체에 국한되어 있습니다. 한자어를 보아도 괴로움[苦]과 아픔[痛]의 합성이니까요. 우리말에서도 고통이란 낱말은 양자를 다 포함합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아픔과 괴로움을 구별하는 것은 몸과 마음을 엄격히 구별하는 생각과 관련이 있습니다. 육체적인 요소를 뺀 괴로움이 있을 수 있느냐는 반론이 가능한 지점입니다.
■ 프로필
- 고교생에게 국어와 문학을 가르치며 ‘수필집·시조집·기행집’ 등을 펴냈습니다.
- 퇴임 후 기고활동을 이어가면서 기독교 철학박사(Ph.D.) 학위를 받았습니다.
- 블로그 “조하식의 즐거운 집” http://blog.naver.com/johash을 운영합니다.
- 정론지 <평택자치신문>에 “세상사는 이야기”를 15년째 연재하는 중입니다.
※ 다음호(740호)에는 ‘고통받는 인간의 한계 - 고통의 의식을 추적한 촉’이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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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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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사는 이야기] 서유럽 견문기 ‘바티칸: 강고한 교황의 아성’ (8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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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고한 장벽을 두고 스스로 인내심을 시험해보는 것도 이번이 두 번째. 추상같이 캐묻건대, “누가 감히 한 인간에게 ‘교회의 황제’라는 칭호를 부여했는가?” 길게 늘어선 구경꾼에 섞여 새삼 필자가 떠올려본 의문문이다. 꼬박 두 시간을 기다려 들어간 로마교황청(The Holy See)은 바티칸시국(State of the Vatican City)이라고 부르는 엄연한 국가로써, 불과 0.44㎢의 면적에 800명 내외(추정치)가 상주하며 공식적으로 4개어(라틴어, 이탈리아어, 프랑스어, 영어)를 사용하고 있거니와 전 세계 가톨릭교회의 유일한 대변자로서, 그 중심에 교황(현재 266대 프란치스코)이 자리하고 있다. 하지만 성육신하신 예수그리스도의 강림사건 이후 십자가상의 대속하심을 부활로 입증하시며 오순절을 기해 마가의 다락방에서 성령을 체험한 결과는 교회공동체의 태동이었다. 성경의 계시는 게바라 하는 베드로를 가리켜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라고 명하셨지(마태복음 16:18), 천국 열쇠의 주인이 바로 너라고 말씀하신 적이 없다(마태복음 16:19)는 사실을 부디 상기하기 바란다. 그날따라 몸수색은 지루했고 소지품 검색은 지체됐다.
들어가자마자 내가 다시 걸어 보기를 원한 곳은 실은 원형 계단이었다. 그런데 동선 자체를 바꿔버렸다고 인지하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단단한 백향목을 가공해 만든 목제 통로에 대한 환상이 산통 깨지는 순간이었다. 아니 그 기대감이 송두리째 깨졌다기보다는 여태껏 뫼비우스 띠를 닮은 난간에 대롱대롱 매달려 빙글빙글 맴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은근히 거들먹거리는 용병들의 몰골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고압적인 검색원의 표정까지 감수하려면 자유의지가 중요하다. 이와 같은 정서를 전연 감지하지 못했다면 그건 개인차일 수 있다. 지나치게 예리하거나 민감한 감각이 오감에 들지는 않으니까. 여하튼 뻘쭘한 석고상이나 보자고 내공을 쌓아 여길 입성한 건 아닌데 구경거리가 영 시원찮다. 일부 드물게 만나는 지역지도에 딸린 그림이야 눈에 익은 천장화처럼 진부할 테니 희귀한 보석은 몰라도 진귀한 골동품마저 죄다 골방으로 이동시킨 게 명확하다면 여봐란듯이 대체물품으로 채워놓아야 하지 않느냐는 성토. 다만 바닥을 장식한 대리석의 문양만은 밀라노에서 봤던 그걸 수렴하는 작품인 거 같다.
▲ 바티칸 회랑 창가에서 쳐다본 바깥 뜰
게다가 시스티나 대성당이 아니고 소성당으로 가라는 연유는 또 뭔지 따지고 싶다. 높고 낮은 계단을 오르락내리락하며 무려 56개의 관문을 통과하기까지 갖은 고초를 감내하라며 한껏 생색을 내더니만 이젠 그마저 귀찮아졌는지 그냥 선선히 풀어주는 느낌이어서 그다지 기분이 좋지 않았다. 탁한 공기를 피해 냉큼 바깥으로 나온 건 그래서다. 커다란 십자가 형상을 기반으로 조성한 구도를 현 위치에 대입한다면 이해가 훨씬 빠를 터. 솔방울 상징물을 쳐다보며 종신직 교황의 선출을 알아내느냐는 부수적이다. 김대건 신부를 찾아뵙거나 피에타 앞에 가서 피눈물을 봤다고 우기는 게 신앙과 무슨 상관인지. 다행히 전에는 차단되었던 베드로 대성당의 위용을 감상하려고 그곳으로 발길을 옮기니 천사들이 거드는 세면대를 지나쳐 고해성사를 받겠다고 차린 상자를 보는 순간 본질하고는 더 거리가 멀어진다. 우리 부부는 잠시 미사를 드리는 좌석에 앉았다. 아직 깨닫지 못한 영혼들을 놓고 드리는 간절한 기도. 내 가정의 영적 평화와 나아가 나라와 겨레의 안위를 위해 고개를 숙이고 나니 무거운 짐이 한결 가벼워졌다.
테베르 강변에서 똬리를 튼 바티칸의 내부를 대충이나마 돌아보니 지나간 날들이 주마등처럼 우뇌를 스친다. 313년 콘스탄티누스의 밀라노칙령 이후 기독교는 지속적으로 영향력을 확장하다가 십자군전쟁이란 명분으로 8차에 걸쳐 전무후무한 살인극을 벌였다. 한국과의 접촉양상도 1660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우리나라 교회와 교황청이 정식관계를 맺은 때는 1831년이로되, 당시 문헌을 보면 교황 알렉산더 7세는 중국 교회에 대해 특별한 관심을 보였고, 그해 남경대목구를 설정하면서 1702년 들어 조선이 북경 주교의 관하에 들어간 터였다. 그러나 1866년 병인박해를 시작으로 어떠한 일들이 일어났는가? 1054년 동서교회 분열을 필두로 끊임없는 배교사와는 별도로 제사를 거부한다며 2만 명에 가까운 순교자를 양산했거늘, 어찌 오늘날 다원주의를 표방할 수 있는지 뼈아플 따름이다. 기독교에 복음이 빠지면 존재 이유는 사라진다. 끝으로 아내의 경우 여간해서는 세계여행에 대한 찬사에 인색한데, 주다영 인솔자의 세심한 배려와 현지 해설자들의 전문성 덕분에 최고의 여정이었다는 말씀을 꼭 전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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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음호(739호)에는 ‘고통받는 인간의 한계 - 고통에 대한 철학적 성찰’이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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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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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사는 이야기] 서유럽 견문기 ‘이태리: 걸어서 둘러본 로마’ (7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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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이 고운 날, 다인승 벤츠 대신 걸어서 로마 시내를 둘러본 기회는 행운이었다. 기실 어젯밤 입소문만 무성한 나폴리(세계 3대 미항?)를 벗어날 때만 해도 줄기찬 빗소리 때문에 통 잠을 이루지 못했으니 말이다. 첫 목적지는 로마의 랜드마크인 콜로세움. 1층은 투스카니아식, 2층은 이오니아식, 3층은 코린토스식 기둥으로 꾸며져 있든 말든 한눈에 들어온 건축미는 그야말로 시신경에 경련을 일으킬 지경. 그런데 왜 첫 탐방 때는 그토록 후줄근하게 보였는지 도무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물론 현재 진행형인 보강공사로 인해 황금색으로 거듭났다는 전제를 깔고서도 예술미에 정교함을 더한 자태를 설명해낼 자신이 없을 정도. 하긴 그때만 해도 사방에서 뿜어대는 매연에 의해 부식되어가는 모습을 안타까이 여겼던 기억이 생생하다. 이러한 세계유산을 베드로 대성당을 지으며 채석장으로 이용했다니 참으로 통탄할 수밖에. 아직 확인하지 못한 내부는 타원형 평면의 장변과 단변이 가장 조화롭게 1.618 대 1의 황금 비율로 건조했다는 얘기는 널리 알려진 사실. 바로 곁에 세운 콘스탄티누스개선문은 균형추였다.
일행과 떨어져 팔라티노 언덕에서 바라본 콜로세움의 위용은 더욱 장관이었다. 아쉽지만 다음을 기약한 채 발걸음을 돌리니 온통 내가 좋아하는 갈색 톤. 포로 로마노의 입구를 기준으로 훑어보자면 티투스 개선문을 시작으로 베스타 신전과 무녀의 집을 지나 율리아 공회당과 원로원 건물 옆으로 아우구스투스 및 세베루스 개선문과 마주한 몇 개의 신전들이 눈앞에 가로놓여있다. 거기에다가 당시 백화점이었던 건물에서 풍기는 색조의 조화로움도 오묘한 분위기를 자아내기에 충분한데, 유감스럽게도 유물의 훼손을 방지하기 위해 상당히 넓은 구역을 전면적으로 통제하고 있었다. 통행 금지 대신 망원경을 설치했으나 토큰을 집어넣으라 하니 귀찮을뿐더러 관광객으로서는 직접 걸어서 로마의 심장부를 관통했을 때 느끼는 짜릿함을 무기한 유예하라는 통첩이나 다름없어, 차라리 당대 모습을 그래픽으로 복원한 영상물이 더 낫지 싶지만, 이토록 쾌적한 날씨에 고대 로마의 민주정치가 행해지고 법을 집행하며 상업활동의 중심지였던 땅을 이곳 지리에 밝은 안내자와 함께 오붓이 돌아본다는 것에 감사할 뿐이다.
▲ 통일기념관 옥상에서 본 포로로마노
이번 이탈리아 여행에서 건진 번외 수확은 거대한 통일기념관의 발견. 로마의 과거와 현재가 교차하는 장소일뿐더러 로마시가지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단계별 전망대가 있었기 때문이다. 발품을 팔아 옥상으로 올라가니 방금 전 지나온 거리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눈길을 돌려 시내를 가로지르는 비아 델 코르소를 따라가면 로마 북쪽의 포폴로 광장까지 시원스럽게 뚫려있는데, 당연히 콜로세움은 물론 포로 로마노의 전경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다. 왜 굳이 혈세를 들여 이만한 석조건물을 지어야 했을까? 앞서 살펴봤듯이 이탈리아는 서기 476년 서로마 멸망 이후 각각 도시국가로 분열되어 무려 1400년 동안이나 하나로 통합할 엄두를 내지 못했는데 대차게 빅토리오 엠마누엘레 2세가 갈라졌던 도시들을 하나로 통일한 것이다. 1878년 그가 세상을 떠난 뒤 1935년 이탈리아 정부는 초대 국왕을 기리는 통일기념관을 건설하였고, 신고전주의를 재해석했다는 평가를 받는 가운데 중앙 계단 위로는 코린트식 열주 기둥, 꼭대기 좌우에는 사두마차를 모는 그리스신화의 니케 및 청동 기마상을 탄 자가 그 주인공이다.
영화 로마의 휴일에 나오는 스페인 광장을 저만치 두고 트레비 분수를 어찌 그냥 지나치랴. 그런데 아뿔싸, 분수에 물이 바짝 말라붙다니 이런 낭패가 또 있을까? 그렇다고 해서 오래전에는 여럿이 주머니 눈치가 보여 그냥 지나쳤으나 고가의 아이스크림도 두 개나 사서 먹어주는(3.5유로X2=원화로 만 원대가 넘는 가격) 등, 이전과는 확연히 결이 다른 접근을 시도해보기로 했겠다. 다름 아닌 세 갈래 길이 만나는 처소에 담긴 의미를 되새겨보리라는 다짐이거늘, 제아무리 요리 보고 조리 봐도 도무지 자연과 예술의 결합이라는 속뜻을 도통 헤아리지 못하겠으니 어쩐담. 그도 그럴 게 빼곡한 건물들에 둘러싸여 자투리 동전을 어깨너머로 던지며 재방문을 약속할 일은 전부터 관심 밖이었고, 주어진 시간에는 여유가 있으니 반경을 넓혀 주변을 걸어보기로 한 건 그래서다. 문제는 늘 소매치기를 당할 위험부담을 경계해야 한다는 삭막함. 어쨌든 바로크식 외관을 자랑하는 산 빈첸초 에드 아나스타지오 교회나, 그 뒤 교황의 정궁으로 사용했다는 팔라초 퀴리날레를 찾아본들 출출한 뱃속을 달래줄 맛있는 요리에 비할까?
■ 프로필
- 고교생에게 국어와 문학을 가르치며 ‘수필집·시조집·기행집’ 등을 펴냈습니다.
- 퇴임 후 기고활동을 이어가면서 기독교 철학박사(Ph.D.) 학위를 받았습니다.
- 블로그 “조하식의 즐거운 집” http://blog.naver.com/johash을 운영합니다.
- 정론지 <평택자치신문>에 “세상사는 이야기”를 15년째 연재하는 중입니다.
※ 다음호(738호)에는 ‘바티칸: 강고한 교황의 아성’이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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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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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사는 이야기] 서유럽 견문기 ‘이태리: 폼페이 건너 카프리’ (6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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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치 넘치는 아르노 강변을 따라 로마로 향하는 길. 나머지 사흘을 한 숙소에 머물기만 해도 일단 피로감은 반감된다. 내일 아침 일찍 서둘러 폼페이를 간다고 해도 감수할 만하니까. 필자의 경우는 온종일은 아니더라도 이동 거리가 좀 섞여 있는 걸 선호한다. 그래서 눈동자를 밖으로 돌리니 워낙에 비옥한 토양이어선지 비닐하우스 농사를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차창에 비친 산야만 해도 특이하리만치 선명히 구분된 모양새. 마냥 산자락을 길게 늘어뜨린 채 야산들이 버티고 앉아있는 풍광도 이채롭다. 산은 산들끼리 모여 산맥을 형성하고, 들과 들은 서로를 맞대고 사이좋은 이웃처럼 논밭을 이루고 있다. 유독 눈자위에 박히는 장면들은 남한의 세 곱이나 되는 대자연을 품은 이탈리아인들의 생태계. 무엇보다 곳곳에 물이 풍부하고 오염원이 없어 보여 부럽다. 자연스레 모래톱을 만들어가는 하천을 보자니 물가는 물론 섬처럼 뵈는 중간지대에 수풀이 무성하다. 우리네 농촌과 비슷한 풍경이라면 나란히 늘어선 미루나무 행렬이나 줄지어 박혀 있는 양배추 포기들. 한국은 이제 백두대간이라도 반드시 지켜내야 할 텐데!
그간 말로만 듣던 폼페이의 잔해를 마주한 느낌이야말로 만감이 교차하더라는 표현이 어울릴 법하다. 상상을 가미한 영화처럼 잘 나가던 인간들이 맞이한 최후의 날을 체감하진 못할지라도 참혹한 과거사를 돌이켜본 것만으로도 재앙은 늘 미래형이다. 설마설마하던 일이 벌어진 화산 폭발 현장에서 화려한 도시는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극치를 치닫던 애정행각은 설화가 되어버렸다. 말초적 감도를 높이려는 영상물이야 애써 부모의 복수와 자신의 연인을 지켜내기 위해 생목숨을 건다지만 결투 중 도주할 틈새도 없이 쏟아지는 용암과 화산재에 나름 힘깨나 쓴다는 군상마저 속수무책일 수밖에는 별도리가 있었으랴. AD 79년 로마의 도시를 자처하던 식민지는 그렇게 속절없이 잔혹사에 묻히고 말았으니, 잘 닦은 도로를 따라 도시계획에 의한 상하수도시설까지 갖추고도 온갖 죄악상의 제물로써 오늘날 길손들 앞에 그 일부를 드러낸 참이다. 가장 놀라운 실물은 수세식 화장실. 현재 공개된 실상만 갖고도 방탕한 생활상을 속속들이 짐작할 수 있거늘 계속 발굴 중이라니 범죄사의 종착역은 어딜지 솔직히 두렵기까지 하다.
▲ 화산재에 파묻혀 있던 폼페이의 잔해
간이역에서 기차를 타고 이탈리아의 남부지방을 구경하는 재미 또한 쏠쏠했다. 급격히 떨어진 북부와의 수준차. 외진 곳에 위치한 공동주택에는 허름한 옷가지들이 내걸렸고, 허술한 역사에는 잡초들로 빽빽한 데다가 미처 손을 쓰지 못한 듯 길모퉁이에는 비닐로 덮은 흙더미들이 수북했다. 간간이 움푹 파인 노면까지 눈에 띈다 했더니 어느새 해안선을 끼고 발달한 소렌토 진입. 채 2만이 안 되는 곳치고는 멀끔하다. 얼룩진 깃발이 펄럭이는 로터리를 뒤로하고 고샅길을 걸으며 길가 상점에 진열된 일상용품에 눈길을 주었으나 마지못해 지갑을 열 수는 없었는데,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이란 게 거기서 거기여서 슬그머니 열린 쪽문 곁에 놓인 상자는 무얼까 기웃거린 일 외에는 딱히 기록장에 남길 일조차 마뜩잖다. 곧장 가파른 계단을 내디디며 내려다본 장면은 카프리로 건너가는 부둣가. 아말피 항을 떠나며 절벽강산을 바라보니 소득 격차로 인한 지역감정이란 게 여기서는 아예 나라를 나누자는 목소리로 들릴 수는 있겠지만, 우리네처럼 정치권에서 진영논리에 따라 조장한 측면은 아니어서 그나마 다행이었다.
풍랑이 제법 일렁이는 듯 선창에 물기가 잔뜩 서린 가운데 당도한 카프리는 예로부터 유럽 귀족들의 휴양지로 알려진 작은 섬. 이곳 특유의 풍경과 낭만적인 분위기로 이름이 났다는데 섬 전체가 대자연 보호구역이어서 그 자체가 네이플스만의 작은 보석으로 여겨진단다. 셔틀버스에 오르면 비좁은 비탈길에서 차체를 스치듯 아슬아슬한 운전기술을 맛볼 수 있다. 곧바로 가이드를 따라나선 골목길 산책. 조용히 사는 주택가라서 어찌 명품점이 없을쏘냐. 장사꾼이 진을 치건 말건 섬에서 가장 뛰어난 아나카프리 전망대에서 인증샷을 남기자니 저 너머 유명인사들의 별장보다는 차라리 벤치가 있는 바로 옆 소정원이 훨씬 정겹게 느껴진다. 어느 섬인들 이만치 아침저녁 노을이며 해돋이나 해맞이를 실컷 감상할 수 없을까마는, 여기까지 온 김에 가게 앞에 선보인 향수를 맡아본 뒤 반경을 좁혀 자유시간에 돌아본 윗동네에는 가정집 회당이 있었고, 축구의 나라답게 국제규모의 경기장도 숨어있었다. 사람에 따라 취향은 다를지언정 여생을 마칠 만큼은 아니었기에, 역설적으로 “돌아오라 소렌토로”라는 노래가 나온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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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교생에게 국어와 문학을 가르치며 ‘수필집·시조집·기행집’ 등을 펴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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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론지 <평택자치신문>에 “세상사는 이야기”를 15년째 연재하는 중입니다.
※ 다음호(737호)에는 ‘이태리: 걸어서 둘러본 로마’가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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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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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사는 이야기] 서유럽 견문기 ‘이태리: 피렌체 앞 토스카나’ (5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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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의 도시 피렌체로 가는 길은 멀었다. 그러나 자칫 지루할 수도 있는 시공을 종횡무진 넘나든 이가 있었으니, 전반적인 박식함을 넘어 가히 전문적으로 해박한 경지에 오른 ‘정주애’ 현지 가이드였다. 그녀의 해학적 뜻풀이를 옮기면 이름부터 ‘술 주 · 사랑 애’라니 더 보탤 말이 없으렷다. 한마디로 유럽사를 관통하는 인문학적 소양에 관해서는 기독교 철학박사 학위를 가진 필자가 끼어들 만하다. 다만 조직신학 전공자이자 신앙인의 시각에서 짚어보면 신구약 성경 분야만큼은 상대적으로 취약할 수밖에 없다. 여하튼 제번하고 서양사의 맥을 짚는 지점에서 공시적 통찰은 몰라도 통시적 고찰에 관해서는 배우는 바가 있었다. 예컨대, 초장에 로마제국의 흥망사를 다루면서 BC 753년 건국한 뒤 (AD 395년 동서로 분열했다가) AD 476년 서로마가 멸망한 데 이어 1453년 동로마가 무너지면서 흔히들 말하는 중세로 접어들었다는 설명이 무척 일목요연하게 들리더란 말이다. 하지만 소괄호 부분이 빠진 데다가 1517년 루터의 종교개혁에 관해 논하려거든 반드시 1054년 동서교회분열의 원인을 파헤쳐야 매듭이 풀린다.
단, 본 기행의 경우 개략적 기록물을 지향하는 마당에 복잡한 교회사를 들춰내려는 의도는 아니로되, 유럽 여행에서 빠질 수 없는 장소가 기독교(개념적으로는 천주교, 개신교, 정교회, 성공회를 포함함)를 표방하는 예배당이므로 사실관계를 보완하면서 독자들의 이해를 돕자는 취지다. 다들 피렌체에만 들어서면 선뜻 떠올리는 르네상스란 화두가 통념적으로 그리 고상한지는 잘 모르겠으나, 이곳 출신이라는 핑계로 짐짓 재미 삼아 카사노바가 후리는 화술이나 세기적 음란성을 언급하기보다는, 응당 인본주의적 종교미술에 등장하는 도상학이며 정제된 메디치 가문의 자취를 입에 올리는 편이 정석일 것 같아 관련 내용을 간략히 정리하면, 연약한 사람에게는 예외 없이 공과가 있을 테니 경위야 어떻든 어두운 측면을 불문에 부친다면 상업자본을 매개로 300년 이상 정치 권력을 이어간 사례도 흔치는 않을 것이다. 우리 속담에 개처럼 벌어서 정승처럼 쓰랬지만 어디 그런 소문조차 듣기 어려울뿐더러, 목적에 부합한 수단이라야 정당성을 갖는 것이 인류사의 교훈일진대 지금 와서 벌떼처럼 따지고 들면 무슨 대수랴.
▲ 치유마을로 알려진 토스카나의 풍치
오랜 세월 세찬 물결에 휩쓸리지 않고 말없이 강물 곁을 지키고 있는 둑방이 보였다. 이는 어쩌면 옆에서 보기에는 꽤나 거북할지라도 영양가 있는 흙탕물처럼 피렌체를 일으킨 메디치 일가의 족적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지나쳐가는 창밖을 응시하던 중 시나브로 두 눈을 사로잡은 풍광이 나타났다. 바라보면 볼수록 목가적 풍치가 살아 숨 쉬는 대자연. 봄기운이 완연한 산기슭에 은은한 연녹색과 그윽한 갈색 톤이 어우러져 필자의 마음을 감싸듯 어루만졌다. 궁금증이 도져 실례를 무릅쓰고 물어보니 치유 마을로 알려진 토스카나의 전경. 이탈리아반도에 이만치 아름다운 고장이 있다는 게 샘 날 정도였다. 그래서인지 오면서 보니 그리 높지 않은 고원에 성처럼 모여 사는 동네도 있었다. 기후 위기가 전 지구를 강타하기 전에는 일교차 없는 지중해성 기온이 온화하게 느껴져 에어컨은커녕 선풍기마저 필요치 않았다는 전언이 결코 허사는 아닌 게다. 그 한복판에 내려 잠시나마 호사를 누리도록 이끈 이는 다비드상. 중턱에 조성한 미켈란젤로 광장에서 사방을 굽어보니 다채로운 색상 조화가 온몸에 푸근히 다가왔다.
비좁은 골목을 비집고 배불리 마친 현지식 점심. 이후 일정에 맞춰 단테 기념비를 만날 때까지는 비교적 진행이 순탄했다. 그런데 피렌체의 중심지였던 시뇨리아에 멈춰 산타크로체성당 앞에서 추억을 쌓으려는 참에 화창하던 일기가 돌변하면서 궂은비가 이내 옷깃을 적시기 시작했다. 역시나 관광 중에 날씨 운이 따르지 않으면 구경은 뒷전. 스냅사진 찍기는 물론이려니와 실시간 쏟아놓는 해설마저 도무지 귀에 들어오질 않는다. 애초부터 갈릴레오를 비롯한 사람들 무덤에는 무덤덤했고, 조토의 종탑은커녕 프레스코화니 네오고딕이니 하는 설명이 뇌리에서만 맴돌 뿐 앞서 필자가 거들었던 천국과 지옥에다 연옥을 추가한 신곡에 관해서도 고인 게 없어, 우산을 받치고 주위를 돌아보다가 아내와 난간에서 잠시 쉬어가려는데 먹구름 사이로 햇살이 비쳤다. 그래 이젠 메디치가의 행위를 두고 장마 끝에 반가운 햇빛이었다고 인정하면 어떨까? 막대한 부를 동원해 문화예술진흥과 고등학문증진에 기여했다면, 현실적으로 천민자본주의의 민낯을 감춘 차선책인 동시에 빈부의 양극화를 좁히려는 마중물이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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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음호(736호)에는 ‘서유럽 견문기 - 이태리: 폼페이 건너 카프리’가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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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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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사는 이야기] 서유럽 견문기 ‘이태리: 밀라노 거쳐 베니스’ (4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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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소 칙칙한 동선을 벗어나니 예측을 한참 빗나간 구상화. 각설하고 밀라노 밤거리는 화려했다. 현란한 문양으로 채색한 대리석 보도 위를 살며시 밟고 눈부시게 치장한 두오모 청동 문전에 서니 고색창연하기 그지없다. 순간 호화롭다 못해 자못 휘황찬란하다는 수사를 떠올릴 만큼 황홀해도 되겠다는 착각이 들 지경. 자주 필자의 글월을 읽는 이라면 이건 과장을 넘어 호들갑이 지나치다고 한들 대꾸할 말이 궁해질 정도였으니, 그윽한 달빛 아래 곱고도 다채로워 심히 아리땁다는 표현밖에는 딱히 들이밀 언사마저 동난 상태랄까. 여태껏 유럽 전역을 쏘다니며 수십 군데 회당을 회람했건만 이만치 우아한 자태를 대하기는 처음이다. 그러니 해설자 입술에서 자그마치 2천여 개의 조각품에 수많은 첨탑과 기둥으로 이뤄진 바로크, 신고딕, 네오클래식 양식을 조합한 결정체라며 쉴 새 없이 늘어놓을 만하다. 늘어선 아케이드형 상가는 물론 스칼라 극장이나 지하철 역사도 문화재급을 뛰어넘는 건축미를 갖췄으니 예능감 넘치는 세공술을 가리켜 다각형 안에 담아낸 함의를 능가한다는 고평가를 얼마든지 내릴 법하다.
그렇다면 그동안 내가 매긴 이탈리아에 대한 평점은 수정해야 마땅하리라. 기실 2005년 한여름에 다녀간 뒤로는 첫인상이 좋지 않아 별반 오고픈 생각이 없었던 게 사실이다. 그중 몇 가지만 나열해도 인종차별, 인프라 미비, 지저분한 거리, 가족 소매치기단 목격 등 그때 박힌 이미지로 인해 외화내빈의 실상을 적나라하게 후기에 썼던 기억이 생생하다. 이를테면 그러한 선입견에 일대 반전이 일어난 참인데, 바뀐 가이드 말마따나 아직은 반도의 북부권이어서 언뜻 부티가 날 수는 있겠으나 창밖에 비친 경치를 보노라면 영상으로 접하던 그림이나 진배없다. 기차가 힘차게 내달리는 아치형 다리를 보거나 오지마을에 지어놓은 농가를 봐도 단아한 멋이 있다. 그래서일까? 풀밭을 가로지르는 흙길마저 동심을 불러올 듯 정겹다. 워낙 바삐 살아온 탓에 아련한 향수에 젖을 틈이 없었는데, 이렇듯 이탈리아를 여행하며 잠자던 옛 추억을 더듬어갈 줄이야. 그나저나 줄줄이 이어지는 포도밭을 구경하자니 불현듯 소싯적 노동의 현장이 다가왔다. 다만 물찬 논배미나 가지런한 밭이랑도 심연의 그리움을 자극하긴 마찬가지다.
부슬비가 내리는 가운데 베네치아에서 만난 현지 가이드는 초장부터 길손을 휘어잡았다. 여기 역시 재방문이어서 색다른 경관이야 기대할 게 없었으나 설명하는 본새가 하도 재밌어서 시종 웃음소리가 끊이질 않는다. 게다가 얼굴이나 몸집은 영락없이 고 김정남이 환생한 듯한 모습. 때마침 삼일절이어서 느닷없이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친 횟수만 해도 줄잡아 열 번은 채운 듯한데, 어쨌든 자신이 택한 일을 즐기는 거야 퍽 바람직한 데다가, 지도를 편 채 전체구도를 알려주는 성의 또한 그의 특장점이로되, 천연 해자처럼 바다 한가운데 피난지를 조성해 겨우 살아남았다는 얘기는 이만 생략해버려도, 듣던 대로 밀물 때면 상승하는 수면을 막아내느라 대비책을 세웠다는 대목에서는 발군의 실력을 발휘했다고 할밖에. 그 실체는 섬과 섬을 잇는 개폐식 인공제방. 애초에 말뚝을 박고 자갈로 갯벌을 메워 지금과 같은 부촌을 만들었다면 과연 리알토 다리를 놓아 산마르코 광장에 줄을 세우는 카페를 차릴 만하다. 관건은 늘 돈벌이. 대항해시대 처절한 생업의 현장에서 베니스의 샤일록이 셰익스피어의 눈에 뜨인 참이다.
▲ 베네치아 수상택시로 돌아본 섬마을
수상택시를 타고 본섬을 빠져나오는 길. 118개 섬을 424개 다리로 연결한 물길이 한눈에 들어올까마는 혹여 개꾼의 문답이라도 끼어들세라 연신 침이 마르도록 주워 삼키는 해설의 핵심은 물가를 차지한 가옥의 현시세요, 곤돌라 기사의 연봉. 하지만 필자의 눈에 비친 수십 억대 가구주의 삶이나 뱃삯으로 고액을 챙기는 대물림이나 부질없는 단막극에 불과하다. 그것이 틈나는 대로 창조세계를 주유할지언정 피조물로서의 본분을 한시도 등한시하지 않는 까닭이렷다. 흐린 하늘이 누꿈한 사이 명품가방을 끼고 으스대며 운하를 누빈들 영적 공허감을 물질적으로 메울 수는 없으므로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저마다 갖가지 형상을 빚어놓고 이른바 종교현상이 이토록 기승을 부리는 중이다. 요컨대 다양한 노선의 철로를 개설해 지역경제를 뒷받침한 당국의 정책이야말로 6천만에 이르는 주권자의 소득원에 다초점을 맞춘 최선책. 너울거리는 해초가 부둣가를 맑히는 것도 G7 국가다운 환경보존책이다. 지구촌 관광 대국의 현실감이 이러하거늘 우리 정부는 뭘 고심하며 국민으로부터 위임받은 직무를 수행하는지 캐묻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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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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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사는 이야기] 서유럽 견문기 ‘스위스: 설산 위의 융프라우’ (3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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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해가 뉘엿뉘엿 저무는 가운데 두 시간 반 만에 안착한 스위스 벨포르역의 플래폼. 서른 명이 연달아 내리는 짐 가방들은 흡사 수화물을 취급하는 인부처럼 숨 가쁘게 돌아갔다. 아쉬운 건 어느새 어둠이 내려앉아 인터라켄으로 가는 내내 기대하던 바깥 구경을 거의 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가로등 하나 없는 산길에서 차량 불빛마저 어찌나 흐린지 산맥이나 호수는 고사하고 차창 가까이 보일 법한 초원조차 그림자처럼 어렴풋했는데, 그걸 일거에 보상해준 선물은 안락한 숙소. 운치가 있고 깨끗하고 좁지도 않아 기분 좋은 아침을 맞을 수 있었다. 상쾌한 공기를 즐길 새도 없이 이른 식사를 마치자마자 향한 간이역사는 벌써 만원. 오늘 케이블카에 오를 인파를 보아하니 융프라우의 인기는 여전한 터다. 눈앞에 시시각각 펼쳐지는 산수화. 늦겨울이어선지 특유의 푸르른 빛깔은 아니었으나 그래도 고도가 높아지는 만큼 응달에 쌓인 눈덩이가 눈에 띄었는데, 흰 융단을 두른 듯한 기다란 스키장이 인공눈이란 걸 알고 나니 여기라고 해서 지구 온난화를 피해갈 수야 있으랴마는 심란해지는 심사는 어쩔 수 없었다.
한국의 40% 남짓한 땅덩어리(1/4이 알프스산맥)에 채 900만 명도 안 되는 인구이므로 일찌감치 영세 중립국을 자처할 수밖에는 없었겠으나, 유럽연합(EU)에까지 가입하지 않은 이유는 다음 두 가지였다. 하나는 자칫 지금의 부요(1인당 GDP 약 10만 달러)를 지속적으로 담보하기 어렵고, 다른 하나는 오히려 운신의 폭이 좁아질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것. 즉, 자유 왕래가 가능한 셍겐조약의 비준만 갖고도 충분히 정치(10만 명이면 ‘국민 발의’ 가동), 경제적으로 안정적일 수 있으니 굳이 자국 화폐(프랑)가 아닌 유로를 쓰면서까지 불투명한 미래를 선택할 까닭이 없다는 게 찬반투표에서 3/4 이상이 반대한 논리였다. 그러고 보니 독일계, 프랑스계, 이탈리아계가 섞여 살며 로망슈어까지 공식어로 인정하는 상황에서도 양원제로 23개 주가 연방을 이루고 있다는 건 놀라운 합집합. 간간이 나타나는 주황색 지붕이나 축사처럼 뵈는 허름한 헛간도 서로들 간격을 유지한 채 드문드문 흩어져 있다. 그래서인지 산정에 다가갈수록 희뿌연 산안개가 아예 시야 자체를 가렸음에도 곧 말끔히 걷힐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 몽블랑 융프라우로 오르는 케이블카
아닌 게 아니라 차츰 날씨가 맑아지더니 이윽고 투박한 기암괴석들이 하나둘 정체를 드러냈다.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상태에서 깎아지른 천애 절벽을 바로 코앞에 둔 느낌은 말로는 형용하기 어려울 지경. 직접 마주하지 않고는 어떠한 낱말로도 전달이 쉽지 않다는 게 시인의 토로다. 필설로는 표현할 수 없는 천 길 낭떠러지. 그러니 몽블랑을 보기 위해 수많은 객들이 적잖은 금전과 공력을 투입하는 거 아닌가. 그렇게 얼마큼을 오른 뒤 다시 산악열차로 갈아타는 거야 예고한 대로였으되, 이처럼 거대한 산세를 관통하면서까지 융프라우로 가는 길을 단축한 조치에 대해서는 선뜻 동의할 수 없었다. 천혜의 대자연을 훼손한 작위에 감탄이 아닌 한숨이 먼저 흘러나온 참이다. 필자의 경우 그 지난한 대역사를 두고 단순히 토목공사라는 시각으로 사안을 규정할 순 없었지만, 어쨌거나 돋보이는 지점은 설산과 얼음동굴을 살린 정교한 설계도. 다만 나도 모르게 엄습한 고산병에도 불구하고 그냥 예전대로 톱니바퀴 열차를 타고 느리게 오르거나 곤돌라를 이용해도 괜찮았겠다는 아쉬움을 좀체 떨쳐내기 어려웠다.
하늘 끝에 맞닿은 스핑크스 전망대에서 바라본 알프스의 꼭짓점. 다행히 짙은 운무도 저만치 걷혀 만년설로 뒤덮인 몽블랑의 속살을 잠시나마 물끄러미 조망한 시공은 두고두고 잊지 못할 추억이 되리라. 모든 등정이 그러하듯 이제는 하산할 시간. 그것이 설령 얌체같이 문명의 이기를 활용했을 때는 자연이 아픈 만큼 힘이 덜 들어갈 뿐이다. 아내에게서 비싼 아이거익스프레스 표를 받아들고 위아래 차편을 오르내리는 동안 내 건강은 경고음을 냈고 배우자는 멀쩡하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거라면, 마지막 남은 중남미 여행의 복병은 바로 필자인 셈이어서 한편으론 씁쓸하면서도 40년 지기 짝꿍이 대견스러운 건 당연지사이렷다. 이어진 점심은 푸짐한 한식. 서둘러 출발한 리무진 앞에는 수십 개의 터널이 기다리고 있었다. 82개의 알프스 봉우리 가운데 스위스에 무려 48개나 있다니 지나갈 동굴이 얼마나 많으랴. 고마운 건 어젯밤 지나쳤던 풍광을 고스란히 감상할 수 있게 된 것. 이전에 봤던 루체른 호수며 험준한 능선에 걸터앉은 산당을 빼닮은 건물도 눈길을 끌었다. 이탈리아 국경은 단지 최소한의 경계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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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퇴임 후 기고활동을 이어가면서 기독교 철학박사(Ph.D.) 학위를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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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론지 <평택자치신문>에 “세상사는 이야기”를 15년째 연재하는 중입니다.
※ 다음호(734호)에는 ‘서유럽 견문기 - 이태리: 밀라노 거쳐 베니스’가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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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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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사는 이야기] 서유럽 견문기 ‘프랑스: 익숙한 느낌의 파리’ (2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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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식 도시락을 까먹고 올라탄 유로스타. 대강 두어 시간을 내달려 저녁나절에 내린 파리역사 주변은 고풍스러운 외양과는 달리 쓰레기 천지였다. 아닌 게 아니라 게슴츠레한 눈동자를 굴리며 담배를 꼬나문 노숙자들. 일행은 그들을 요리조리 피해가며 리무진이 기다리는 곳으로 걸음을 재촉했다. 현지 가이드의 일성은 역시나 소매치기를 각별히 조심하라는 것. 국제적 상생도 좋으나 6,500만 상주인구에 더해 난민을 과도하게 받아들여 사회 분위기가 숭숭해진 건 아닌지 의아해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신속히 짐을 싣고 출발한 버스 안에서 듣게 된 프랑스 내부의 속사정. 차분한 어조로 털어놓는 해설자의 입담은 이내 좌중을 사로잡았다. 한마디로 생활 여건이 녹록지 않다는 것, 즉 수입의 절반이 세금인 상황에서 살아남기조차 만만치 않다는 게 요지였다. 딴은 선입견이 있어 언뜻 듣기에는 와 닿지 않을 수 있겠으나 평소 프랑스 정치구조에 관심을 가진 필자로서는 단박에 이해되는 바가 있었다. 하긴 7~8월 열리는 하계올림픽 준비로 어수선한 마당에 방문 일자를 잡았으니 밑바닥 인심을 전하는 품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나저나 강행군으로 인해 다들 피곤할 테지만 센강 유람선 투어와 에펠탑 야간일정은 예정된 수순. 다만 우리 부부는 대기하던 승용차에 올라 호텔로 직행할 수 있었다. 이미 파리를 두세 번째 찾은 터여서 다행히도 재충전이 가능했다. 다음 날 오전 찾은 곳은 몽마르트 언덕. 일단 시야가 탁 트여 미로형 파리시가지가 한눈에 들어왔다. 흔히들 상주인구 200만 남짓한 도시로 알려졌으나 기준선을 광역권으로 넓히면 규모가 1,300만 명으로 늘어나 런던을 앞선단다. 그림 같은 풍경이 나오는 건 50년 이상 묵은 건물은 법적으로 철거할 수 없다는 게 비결이라면 비결. 문제는 볼펜을 들고 무슨 조사원인 척 대상을 물색하는 무리 탓에 실시간 눈치를 보며 사진을 찍느라 취하는 포즈가 편하지 않다는 점이다. 현지인들이 이용하는 푸니쿨라에 올라 예술인들이 생업에 열중인 고지 마을로 향하는 발걸음은 예상보다는 가벼웠다. 맨날 야외로 출퇴근하는 화가의 숫자는 어림잡아 열 명 남짓. 오래된 성당을 배경으로 사진을 남긴 뒤 가파른 비탈길을 신경을 곤두세운 채 내려와 마주친 벽 낙서의 의미는 죄다 사랑이었다.
▲ 몽마르뜨 언덕에서 바라본 파리 시내
보도 가운데 가로수를 심은 샹젤리제 거리를 스치듯 지나쳐 겨우 만나본 개선문. 주위가 온통 공사판이어서 무명용사의 불꽃에 접근하기는커녕 잠깐 머무는 일조차 단속 경관의 눈치를 살폈다. 루브르 역시 영국박물관을 방불한 전쟁터. 코로나 이후 관광 수요가 급증해 일어난 일치고는 되게 언짢은 경우여서 하릴없이 감수하면서도 뒷맛이 개운치 않기는 매한가지랄까. 게다가 탐방할 때마다 수박 겉핥기인지라 눈썹 없는 모나리자 여인밖에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게 중론인데, 시간을 한정해 외국단체 손님을 홀대하는 갑질도 모자라 부득불 규정을 어길 때는 공들여 따낸 현지 가이드의 자격까지 문제 삼겠다는 게 이들이 공표한 운영 세칙이란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눈을 부릅뜨고 해설자를 따랐건만 머리 없는 승리의 여인 니케상을 노려보다가 그만 일행을 놓쳐버렸으니 이런 낭패가 있으랴. 금세 흩어진 동지를 찾아 그를 따라 유일한 남자 미라를 확인한 뒤 약속 장소로 오기는 왔으되 막상 센강에 놓인 37개 다리 중 영상을 통해 자주 보는 124년 된 교각마저 건너지는 못한 채 서둘러 테제베에 탑승해야 했다.
차창에 비친 불란서 최고의 풍광은 드넓은 농지에 수평선이 보일 만큼의 초지. 명실공히 프랑스란 나라가 농업 대국임을 증명하는 광경이었다. 흠결은 열차의 창문이 지저분하다는 것. 오래전 탔을 적에는 의자나 탁자도 이보다 훨씬 깔끔했었다. 관리를 어떻게 하는지는 잘 모르겠으나 얼룩 때문에 아름다운 풍경화를 맘껏 즐기지 못하는 상황은 분명 유감스러운 노릇. 앞서 제시한 현지 가이드의 두 가지 전제는 이곳 역사에서 기독교 배경 지식을 빼고는 설명이 어렵다는 점과 부디 평등사상에 대한 오해는 풀어달라는 것. 필자로서는 일단 한국사회의 현안을 풀어가는 데 지장을 초래하는 지점과 묘한 일치를 보인다는 게 흥미로웠다. 곧 종교 얘기라면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는가 하면, 대체로 잘못된 동일시 현상과 맥을 같이하는 대목이어서다. 결론은 안락한 삶 못지않게 사후세계 역시 중시해야 한다는 당위와 함께 선거 때만 되면 지적인 논리를 무지한 옹고집으로 뒤덮으려는 시도의 폐해에 대한 지적이었다. 덧붙여 역대 프랑스 대통령들이 갖추고 있는 자질로는 추진력, 명석한 두뇌, 문화적 업적을 꼽았다.
■ 프로필
- 고교생에게 국어와 문학을 가르치며 ‘수필집·시조집·기행집’ 등을 펴냈습니다.
- 퇴임 후 기고활동을 이어가면서 기독교 철학박사(Ph.D.) 학위를 받았습니다.
- 블로그 “조하식의 즐거운 집” http://blog.naver.com/johash을 운영합니다.
- 정론지 <평택자치신문>에 “세상사는 이야기”를 15년째 연재하는 중입니다.
※ 다음호(733호)에는 ‘서유럽 견문기 - 스위스: 설산 위의 융프라우’가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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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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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사는 이야기] 서유럽 견문기 ‘영국: 런던의 청량한 하늘빛’ (1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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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다시 찾은 런던(필자는 2005년 여름방학에 학생들과 함께 배낭을 메고 옥스퍼드를 거쳐 스코틀랜드까지 훑어보았음)의 날씨는 의외라 싶게 청량했다. 그 덕분에 내내 특유의 대기질을 연상했던 우리 부부에게 이보다 더한 희소식은 없을 터여서 혼인 41년째를 여는 여정을 상큼하게 출발할 수 있었다. 하늘은 맑고 바람은 다소 서늘한 기후를 반색하는 가운데 나의 눈길이 머문 곳은 런던탑(Tower of London, 일명 런던성). 차분한 목소리로 풀어놓는 현지 가이드의 자세한 설명을 죄다 섭렵할 수는 없었으나 나름대로 정리한 지점은 그 당시 화이트 타워(높이 28m)야말로 영국 전역을 지배하던 노르만 군사 건축의 본보기로써 1066년 정복왕 윌리엄이 런던을 방어하고 자신의 권력을 과시하기 위한 목적으로 템스강 가까이 건설했다는 게 요지였다. 주위를 둘러보니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1988년)하기에 손색이 없는 자태.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위풍당당한 요새는 늘 강력한 왕권을 대변하는 상징물이었다. 런던을 방어하고 통제하던 경계용 표지였으되 인류 문화사적으로 보편타당한 가치를 인정받은 셈이다.
유럽사를 통틀어 주요 사건의 무대가 되었던 런던타워를 뒤로하고 따라나선 템스강변의 뱃길 투어. 타워 브리지를 배경으로 출발한 유람선이 누런 강물을 헤치며 물길을 가르는 동안 역사적 명소와 어우러진 현대적 건축물의 조화로움이 새로운 스카이라인을 만들어나가면서 자칫 기존의 인프라를 건드려 고풍스러운 옛 정취를 해치지는 않을까 저어되는 마음이 들었다. 어언 고희를 바라보는 나이 탓인지는 몰라도 걸핏하면 지난 시절이 떠올라 만감이 교차하는 경우가 늘더라는 모종의 노파심이랄까. 첫 탐방 때는 언뜻 이곳에서 옥스브리지의 조정경기가 열린다는 토막소식을 접했는데 아담한 뱃전에 비친 풍광 중 으뜸은 런던아이. 아무래도 자유여행 중에나 느긋이 기다렸다가 서서히 상공에 떠오를 기회가 있겠으나 배 안에서 올려다보는 눈요기만으로도 그 기분을 얼마큼은 가늠할 수 있을 성싶다. 조석간만의 차로 회생한 듯 축대에 끼어든 이끼류를 보면 대자연의 복원력은 놀랍다. 바로 옆 철제 다리는 실은 석제로 이루어진 정교한 조합 그 자체. 필자의 눈에 들어온 영국의 건축술은 높이보다는 초석이 뛰어나다.
▲ 템스강 선착장에서 보이는 런던아이
유럽에서 유일하게 상주인구 천만을 헤아리는 런던 시내에서 해설자가 이끄는 동선은 퍽 경제적이다. 빅벤을 품은 국회의사당을 마주한 채 웨스트민스터 사원은 변함없이 똬리를 틀고 있건만, 유난히 동상을 좋아하는 민족성인 듯 서 있는 위인 중 처칠, 간디, 호치민 등이 아닌 만델라가 가장 돋보인 건 왜일까? 극심한 흑백 갈등의 와중에서도 진실과 화해를 위한 대장정에 반대하는 아내와의 이별마저 불사했던 그의 거대한 행보를 새삼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는 없다. 거기서 버킹검궁전으로 향하는 길에 만나는 시민공원은 평소 산책을 즐기는 내게는 최적의 공간. 걷기 편한 흙길에 정갈한 초목들이 한껏 어우러진 풍치가 실시간 눈자위를 어루만졌을뿐더러 맘껏 자란 능수버들의 하늘거리는 실가지들이 척박한 유년 시절의 동심을 불러오기에 충분했으니까. 막상 차가운 인상의 근위병이 지키는 궁궐 모양새는 실제 화면임에도 무미건조하기 짝이 없다. 행여 그 옛날 불편한 마차길을 넓힌다는 명분을 빌미로 섣불리 대영제국 건축의 완숙미가 일부라도 흐트러진다면 안 되겠다는 조바심이 필자의 소박한 바람이다.
여기서는 세 가지가 빨갛다는 대목 또한 흥미롭다. 이따금 만나는 전화부스, 우체통, 이층버스가 그것인데 하나같이 우리나라에서는 찾기 쉽지 않거나 어려워지는 물건들. 그나저나 북적대는 영국박물관의 축소 지향적 운영은 실로 유감이다. 이전 중앙 홀에서 눈여겨봤던 원형 서가에 꽂힌 고서적과는 끝내 재회할 수 없었다. 그 나머지야 대동소이하다지만 관람 시간을 턱없이 줄여 서두르는 바람에 로제타석을 비롯한 희귀 미라 등 다수의 전시물이 제국시대가 낳은 장물인지라 더는 감흥이 없었다. 넬슨 제독이 버티고 있는 트라팔가 광장을 지나 유로스타에 탑승할 시각. 차창 밖을 응시하는 내내 봄빛이 완연한 들판을 딛고 초원을 누비는 소 떼며 하늘을 나는 새들을 바라보는 즐거움도 쏠쏠했다. 단 하룻밤 일정을 되새겨보니 고무적인 건 관광용 투어버스에 아직도 한국어 안내방송은 없을지언정 콧대 높은 섬나라에 불어닥친 한류 열풍이 예사롭지 않다는 사실. 단지 전현직 모자 국왕을 빼고는 전 국민이 손흥민의 발재간에 매료되어 대한민국 이미지 개선에 단단히 한 몫 거들고 있다는 게 일대 반전이자 방점이었다.
■ 프로필
- 고교생에게 국어와 문학을 가르치며 ‘수필집·시조집·기행집’ 등을 펴냈습니다.
- 퇴임 후 기고활동을 이어가면서 기독교 철학박사(Ph.D.) 학위를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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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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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사는 이야기] 좋은 글쓰기를 위한 조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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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고성환, 이상진 공저인 『글쓰기』 내용 가운데 ‘좋은 글의 요건’이라는 소단원을 요약한 것이다. 좋은 글은 무엇보다 글을 쓰는 목적을 분명히 알고 독자의 수준을 충분히 고려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사전에 자신이 왜 이 글을 쓰는지에 대한 동기가 확실해야 하며, 예상 독자의 요구를 적절히 반영할 필요가 있다. 읽는 사람의 여건에 따라 글의 양식과 문체는 물론 글을 쓰는 과정이 달라질뿐더러 글의 갈래도 설명문, 논설문, 안내문, 감상문, 문예문 등으로 나눌 수 있으므로 글의 문체를 독서물을 접하는 대상의 수준과 다양한 요구에 최대한 맞춰 써야 하기 때문이다. 즉 독자의 연령대와 교육 정도에 따른 문해력과 독서력, 독자의 관심사와 독서 이유 및 문화적 배경과 이념적 성향 등을 십분 감안해야 한다. 주목할 지점은 독자의 입장에 서서 자문자답하며 역지사지하는 자세에 있다. ‘과연 나라면 이 글을 끝까지 읽어낼 수 있을까’, ‘이 글을 읽는 사람들은 행간을 통해 어떤 생각을 떠올릴까’ 등 필자의 주변과 연계한 제반 사회환경을 글 속에 넉넉히 투영한다면 훨씬 더 바람직한 글을 쓸 수 있을 것이다.
다음으로 글을 쓸 때는 표현하고자 하는 의미에 걸맞은 적절한 단어 선택이 중요하다. 명확한 정보를 제시하는 글은 개념어의 사용에 각별히 유의할 필요가 있다. 특히 일반적으로 통용되지 않는 전문용어는 반드시 분명한 개념을 정의한 다음 독자들에게 오해를 불러일으키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다의어의 경우에는 문맥적 의미의 확보를 위해 한자나 영어를 병기함으로써 그 뜻을 명확히 규정해야 한다. 신중히 선택한 어휘는 적절한 위치에 배치하고 동어반복 회피의 원리에 따라 가능한 한 되풀이하여 사용하지 않는 것이 좋다. 무의미한 표현이나 잉여적인 부분은 과감히 삭제해야 하며 상투적이거나 진부한 표현도 최대한 피해야 한다. 그에 따라 문장의 길이는 전달 내용이 명료하게 드러나도록 조절해야 한다. 문장이 무조건 짧다고 좋은 것은 아니며, 길어지는 것에 분명한 까닭이 있다면 짧은 것이 오히려 어색할 수 있다. 곧 문장에 담긴 내용의 모호성 자체가 문제시되는 것이다. 어떠한 문장이든지 다 읽고 난 뒤 해석상의 명확성만 확보된다면 문장의 길이는 선택지의 하나다. 바로 쉼표의 적절한 활용이 그에 대한 적절한 처방일 수 있다. 그러나 창조적 표현을 위한 글쓰기에서는 의도적으로 다의적인 낱말을 선택함으로써 다중적인 해석이 가능하도록 문장과 단락을 배치하기도 한다. 내용상 난해한 글과 부적절한 표현으로 해석을 힘들게 하는 글은 명백히 다른 경우다.
▲ 삼봉 정도전 기념관의 전경
이어서 좋은 글에는 부분과 전체를 아우르는 내용의 통일성과 형식의 짜임새가 있어야 한다. 통일성은 각 부분의 내용이 전체 주제와 유기적인 연관성을 가지고 있는 특성을 말한다. 각 문장은 단락의 소주제를 잘 나타내는 긴밀성을 지녀야 하고, 각 단락은 전체 주제를 형성하기 위하여 긴밀성을 유지해야 한다. 원래의 표현 의도에 맞게 글을 구성하는 것도 중요하다. 곧 시간 순서에 따른 전개, 개념의 나열과 범주화에 따른 전개, 비교를 위한 배치, 인과관계를 중심으로 한 전개, 주장과 논거의 논리적 연계 등에서 가장 효과적인 방법을 골라야 한다. 필자의 관점이 글의 형식을 통해 일관성을 유지하는 것이 관건이다. 좋은 글은 충분한 정보를 담되 의문의 여지를 남기지 않고 전체적으로 완결성을 갖춰야 한다.
위에서 언급한 좋은 글의 요건을 확실히 담보하는 것은 글의 내용이 충실하고 정확해야 한다는 점이다. 사실관계에 어긋나지 않는 글이라야 뭇 인간과 세계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혀줄 수 있거니와 실시간 삶에 필요한 깨달음과 감동을 안겨줄 수 있어서다. 확실한 사실에 기초하지 않은 글은 해석 과정에서 얼마든지 곡해될 수 있으며 내용이 부실한 글일수록 대중에게 신뢰를 얻기가 어렵다. 글의 생명력은 화려한 수사로 치장하는 데 있지 않고 내용의 정확성과 적절성에 달려있다. 실용문에 속하는 글은 장소, 일시, 통계수치 등이 정확할 때 자료의 근거를 확보할 수 있다. 특히 연구논문과 같이 설득력을 요구하는 글의 경우에는 해당 분야의 권위자나 학계 전문가의 검증된 견해를 적절히 인용함으로써 글의 신뢰성과 윤리성을 담보해야 한다. 글을 쓰는 사람의 기본자세는 자신이 발표한 글에 대하여 마땅히 책임을 지는 일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글을 쓰는 사람의 마음가짐은 자신이 공표한 글을 두고 제기되는 문제나 의문에 대하여 성실히 답변하겠다는 태도를 견지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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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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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사는 이야기] 효과적 독서의 요건 ‘도서관 이용법 안내서’ (15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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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를 촉진하는 도서관 이용법은 과연 존재할까? 이용훈 저자는 있다고 말한다. 도서관을 잘 이용하면 할수록 경제적 부가가치를 얻는다고 말이다. 2020년을 기준으로 국립중앙도서관에서는 일반도서 13만여 권과 4만 책에 가까운 공공간행물을 수서할 계획을 발표했다. 한국만 해도 한 해 출간 예정인 책이 총 17만여 권에다가 판매를 목적으로 유통되는 책이 5만여 종에 달하는 것으로 보아 그 일부가 도서관에 들어온다고 보면 된다. 물론 해당 도서관의 설립 목적이나 이용자들의 요구 등을 면밀히 검토·분석한 후에 연간 입수하는 도서류가 정해지겠으나 이른바 장서개발, 즉 구입의 우선순위, 소장 도서의 평가와 관리, 폐기할 장서를 미리 선정하는 등 활용하는 도서의 유용성을 높이는 작업은 필수적이다. 이용 빈도가 높은 대학도서관의 경우는 각 학문 분야에서 발표하는 논문이나 국내외 학술 저널 등 연구학습에 필요한 자료를 신속·정확하게 입수함으로써 교·강사나 학생들에게 시의적절한 도움을 주어야 한다. 이용자들은 실시간 인터넷을 통하거나 수시로 발품을 팔아 신착 도서의 동향을 파악할 필요가 있다.
독서를 즐기는 개인 집에서도 늘어나는 책들을 서가에 아무렇게나 꽂아놓으면 찾기가 만만찮은데 하물며 도서관은 오죽하겠는가? 「문헌정보학용어사전」에서는 ‘분류’를, “사물이나 현상, 개념 등을 유사한 것은 모으고, 상이한 것은 구분하여 체계화하는 것”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세상에는 여러 종류의 분류법이 존재하는데 우리나라 도서관에서는 통상 ‘한국십진분류표(KDC)’를 기준으로 삼는다. 예컨대 모든 주제와 관련된 종합물은 총류: 000, 철학: 100, 종교: 200, 사회과학: 300, 자연과학: 400, 기술과학: 500, 예술: 600, 언어(어학): 700, 문학: 800, 역사: 900으로 나누는데, 우리가 참고한 것은 듀이십진분류표이며, 그 외에 국제십진분류표, 미국의회십진분류표, 콜론분류표 등이 있다. 특이점은 멜빌 듀이는 언어를 400에 배치한 데 비해 한국은 문학과 인접하도록 700번을 부여했다는 점에서 보다 합리적이라고 볼 수 있다. 필자 역시 문헌정보학 전공자로서 덧붙일 말인즉 일본십진분류표의 경우 한국을 분류표상 9번(기타)에 유배(?)했지만, 우리는 대범하게 한중일이라는 관행에 맞춰 3번을 부여했다는 점이다.
▲ 평택시 중앙동 일대에 피어난 다알리아 꽃무리
정해진 절차에 따라 분류한 책들은 고유한 청구기호를 갖게 된다. 부수적으로 저자기호, 별치기호, 권차기호, 복본기호 등이 붙지만 요즘은 카드목록(저자, 제목, 출판사, 출판년, 쪽수, 목차, 약식 소개)을 찾기보다는 대부분 인터넷 검색을 이용하고 있다. 주요한 지점은 사서와의 만남이다. 사서는 도서관 경영이나 관리를 책임지고 자료를 수집·정리하고 이용자에게 정보 서비스를 제공하는 전문가다. 필자 또한 학교도서관에서 업무를 본 세월이 8년에 가까운 사람으로서 국어로 학과목을 돌리기까지, 아니 이후 도서관장 역을 수행한 6년 동안 과연 그 일에 충실했는지는 솔직히 의문이로되, 한시도 1급 정사서 자격증 소지자로서의 정신자세는 흐트러진 적이 없었고 ‘도서관인’이라는 정체성으로 충만해 있다. 다만 법적으로 명시된 사서직의 정원조차 채우지 않은 채 운영되는 도서관의 현실 앞에서 고언마저 가슴에 묻어둘 수는 없었다. 사서라는 직종이 책이나 나르고 서가를 정리하는 직업인 정도로 인식되던 시절에 운신의 폭이 좁아지기도 했으나 감히 지식의 총체적 안내자라는 자긍심만은 바래지 않았다는 회고담이다.
그럼 어떻게 하면 능숙하게 각종 도서관을 이용할 수 있을까? 국립중앙도서관을 비롯한 국회도서관, 도립이나 시립도서관을 직접 찾아가는 방법도 있으나 컴퓨터 앞에 앉아 국가자료종합목록(KORIS-NET)에 들어가면 전국 1,600여 개소 공공도서관과 전문도서관은 물론 정부 부처 자료실의 통합목록 데이터베이스를 이용할 수 있다. 특히 국립중앙도서관 디지털컬렉션에서는 국내외 희귀본을 디지털 형태로 제공하는 중이다. 이에 한국방송통신대학교에서는 『쉽게 따라 배우는 학술정보 활용법』을 내려받아 이용하기를 권장하고 있다. 누구나 한국교육학술정보원에 접속해 요긴한 서비스를 받을 수도 있는데, RISS라는 곳에서는 이용자 활용도에 따른 항목별 분석결과, 연구주제 동향 분석결과 등 이용이 가능한 자료의 현황을 연도별 통계로 제시해주거니와 DBpia, KISS, 북코스모스에서도 편리한 서비스를 받을 수 있다. 자, 이제 지구본을 띄운 정보의 홍수에 떠밀려 내려가지 않기 위해서는 우주를 유영한다는 기분으로 수영을 배우는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다. 이런 정보에도 어두운 채 어찌 Ph.D.를 마쳤는지 모르겠다.
■ 프로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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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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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사는 이야기] 효과적 독서의 요건 ‘새로운 도서관의 미래’ (14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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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도서관 시대는 언제쯤 도래할 수 있을까? 이용훈 저자에 따르면, 도서관들은 늘 그 시대 상황에 따른 요구 등에 대해 능동적으로 대응하면서 변화해 왔다. 그러한 의견을 피력하는 근거는 무엇인가? 저자는 급변하는 현대사회를 대표하는 키워드로 4차산업혁명에 따른 초연결과 초지능을 들고 있다. 그렇다고 첨단 과학기술에 의한 출판과정이며 유통 환경이 획기적으로 좋아지는 것은 아니다. 나날이 발전하는 전자책이나 디지털 자원을 시시각각 따라가기조차 녹록지 않다는 것이 현재 도서관들이 맞닥뜨린 서비스 양상이어서다. 게다가 한편으로는 인구절벽으로 인한 이용자 감소 현상에 직면하여 재정축소 등의 현실적 압박이 도서관의 앞날을 불투명하게 몰아가고 있다. 당면한 이 위기국면을 어떻게 극복해 나갈 참인가? 이럴수록 도서관에서는 책정된 예산 내에서 시대적 변화요인에 대해 적극적으로 대응할 필요가 있다. 새로운 지식정보를 요구하는 이용자들을 위해 도서관들이 선제적으로 변화를 주도할 책임을 짊어진 터다. 다행히 역대 정부에서도 다양한 도서관 정책들을 통해 활성화를 도모하고 있다.
이에 대한 관건은 인간이 쥐고 있다. 도서관 서비스의 주역은 사서의 수준에 달려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사람의 요인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는 점이다. 탈무드를 소환하면 “과거는 해석에 따라 바뀌고, 미래는 선택에 따라 바뀌며, 현재는 행동하기에 따라 바뀐다.”라고 했다. 벌써 10년 전에 나온 관련 보고서에도 저출산·초고령 사회, 불평등 문제, 미래세대 삶의 불안정성은 물론 고용불안, 저성장에 따른 성장전략 전환, 국간 간 환경 영향 증대, 기후변화와 자연재해, 남북문제 등을 중요한 이슈로 거론하며, 세계적으로도 전 지구적 위기 심화, 교육방식에 따른 기존 학교제도의 변화, 산업화 시대의 종결에 관해 언급한 바 있다. 이러한 혁명의 핵심은 인공지능, 로봇공학, 사물인터넷, 무인 운송수단, 3차원 인쇄, 나노기술의 6대 분야에 더해 요즘은 챗 GPT까지 선보인 마당이니 이제는 스스로 변화하지 않고서는 삶을 영위하기 곤란한 지경이 된 셈이다. 이를 두고 새로운 인류의 출현, 즉 ‘포노 사피엔스(Phono Sapiens)’라고 지칭하는데, 현재 도서관에서 미래의 초연결 시대를 이끄는 변화의 바람을 피해갈 수 있겠는가?
▲ 평택시 중앙동 일대에 피어난 만수국 꽃무리
그렇다면 굳이 구글 북스 라이브러리 프로젝트를 소개할 필요도 없이 지구촌의 모든 도서관이 하나로 통합되어가는 시스템이 결코 상상의 세계가 아닌 형국이다. 2016년 미연방 대법원이 공정이용에 관한 입장을 확인했고, 2018년 연세대학교 중앙도서관은 구글과 파트너십을 맺더니, 아마존에서도 ‘아마존 킨들 언리미티드’ 서비스를 이끌고 있다. 오죽하면 미국의 한 경제학자가 세금 절약을 위해 아마존이 지역 도서관을 대체해야 한다는 글을 「포브스」지에 올렸다가 집중포화를 맞았겠는가? 국민독서율의 지속적 감소에 따른 저조한 독서 활동이 문해력 저하로 이어지면서 세계적 추세와는 정반대 현상을 보이고 있다면, 이를 해결할 대안으로 20대를 중심으로 나타난 ‘리딩테인먼트’, 곧 읽기와 노는 것을 결합한 형태를 고려해봄 직하다. 도서관의 입지조건도 사람들이 붐비는 곳이 최적지라는 조언이다. 국가상호대차시스템인 ‘책바다’, 회원증 공동이용서비스인 ‘책이음’, ‘사서에게 물어보세요’ 또한 바람직한 제도다. 나아가 무크(MOOCs)라는 이름으로 제공되는 온라인 공개강의(K-무크 포함)도 더욱 확대되어야 한다.
2017년 지구촌의 도서관 관련 전문가 77명은 향후 똑똑한 도서관, 개인화 도서관, 경계 없는 도서관의 방향을 발표한 바 있다. 서울대학교 관정도서관은 ‘전자지원 중심의 이용자 맞춤형 서비스 공간’을 표방하고 있고, 충북대학교 중앙도서관은 지역사회와 함께 관내 유휴시설을 복합문화공간으로 만들었으며, 연세대학교 언더우드기념도서관은 다양한 유형의 열람환경을 조성하는 등 전국의 대학교들이 앞다퉈 인포메이션 커먼스를 도입하는 일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나아가 2020년 2월 현재 995개 도서관의 장서 약 1억 권, 14억 건의 대출 데이터, 2,770만여 명의 도서관 회원 데이터를 활용하여 여러 유형의 분석결과를 제공하고 있다. 우리 삶에 밀착된 도서관은 사람을 보듬고, 공간을 혁신하며, 정보의 민주성을 추구한다. 결국 미래를 여는 도서관은 본질적으로 개개인의 가능성을 발견함으로써 공동체의 역량을 키워 사회적 포용을 실천하는 곳이어야 한다. 문제는 늘 시대정신을 도외시하는 데서 발생한다. 사람의 정당한 요구에 민감하라. 새로운 도서관의 미래는 이용자와 사서가 함께 만들어나가는 것이므로.
■ 프로필
- 고교생에게 국어와 문학을 가르치며 ‘수필집·시조집·기행집’ 등을 펴냈습니다.
- 퇴임 후 기고활동을 이어가면서 기독교 철학박사(Ph.D.) 학위를 받았습니다.
- 블로그 “조하식의 즐거운 집” http://blog.naver.com/johash을 운영합니다.
- 정론지 <평택자치신문>에 “세상사는 이야기”를 15년째 연재하는 중입니다.
※ 다음호(729호)에는 ‘효과적 독서의 요건 - 도서관 이용법 안내서’가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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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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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사는 이야기] 효과적 독서의 요건 ‘철학이 있는 독서문화’ (13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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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에 담긴 도서관의 철학 역시 무겁게 느껴지기는 매한가지다. 송승섭 교수에 의하면, 독서문화란 “문자를 사용하여 표현된 것을 읽고 쓰는 활동을 중심으로 하여 이루어지는 정신적인 문화 활동과 그 문화적 소산”을 말한다. 역사상 손쉽게 책을 구해서 읽을 수 있었던 시기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16~19세기까지 서구의 독서 관행과 도서관문화는 그 지역사의 변천에 따라 다르게 발전해 왔기 때문이다. 그에 힘입어 18세기 후반부터는 계몽사상이 널리 퍼졌고, 가히 독서혁명이라고 부를 만큼 새로운 부류의 독자와 출판 시장이 형성되었으며, 19세기에 들어서는 많은 사람이 문맹을 벗어나 도서관의 이용자가 될 수 있었다. 그런데 도서관은 사회적 기관으로써 문헌정보학이라는 이론과 현장을 동시에 두고 있다. 이는 개개인의 지적 활동을 돕고 사회적으로는 인류의 지적 재산을 계승하여 문화창달에 기여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만약 교양 있는 시민을 양성하는 도서관문화가 없었다면 과연 민주주의 제도의 정착이 가능했을지 의문이 드는 대목이다. 도서관은 문해력을 높여 지적인 자유를 가져온 공론장이었다.
독서의 역사와 도서관은 궤를 같이한다. 책을 만드는 데 사용한 서사 재료는 점토판, 죽간목독, 파피루스, 양피지, 종이 등을 거쳐 오늘에 이르렀지만, 독서행위 자체는 변한 게 없기 때문이다. 독서자료의 법적 개념은 “문자를 사용하여 표현된 도서·연속간행물 등 인쇄자료, 시청각 자료, 전자자료 및 장애인을 위한 특수자료 등 독서에 필요한 자료”를 말한다. 조선 전기만 해도 사대부들이 책을 파는 서점의 설치를 극구 반대하여 일반 백성은 물론 과거시험을 준비하는 유학생조차 책 구입에 애를 먹었다는 대목에서 새삼 한글 창제의 위대함을 되새기는 가운데서도, 조선 후기에 와서야 겨우 서점이 만들어졌다니 뒷맛이 씁쓸한 건 어쩔 수 없다. 이는 기실 책 읽기 자체가 통치를 방해하는 요소로 인식한 지배층의 고루한 사고에 기인한 것이었다. 성인의 말씀을 기록한 책이야말로 매매의 대상이 아닐뿐더러 문자 또한 한자를 쓰면 된다는 발상이었다. 이윽고 19세기 들어 형성된 폭넓은 독자층은 지배층에게는 불안의 원천이었으나, 그 기저에는 샤르티에의 지적처럼 양질의 독서가 국가적으로 중요함을 시사하고 있다.
▲ 평택시 중앙동 일대에 피어난 데이지 꽃무리
사회적 기관으로서의 도서관이 지닌 함의는 다분히 철학적이다. 독서실이 아닌 독서문화라는 관점에서 접근하면 철학을 내포한 이론적 배경을 확보할 수 있어서다. 종래의 도서관학에서 문헌정보학으로 학과명을 변경한 연유가 바로 그것이다. 곧 문헌이란 정보 매체에 기록된 정보의 총칭이며, 도서관학은 정보센터로서의 업무 진작에 관련된 지식의 응용이라고 볼 수 있어, 정보학이란 정보에 관련한 본질과 성질을 규명하고 그 사항의 사회적 적용 가능성을 추구하는 학문이라는 것이다. 말하자면 도서관학과 정보학이 융합되어 새롭게 문헌정보학이 태어난 셈이다. 최근 들어 여기에 컴퓨터를 접목한 업무의 효율성을 가미함으로써 사회인식론에 지식사회학의 개념을 포함시킨 조치는 적절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문헌정보학의 이론적 기초는 학문적 과학성에서 찾을 수 있되 그 실천성은 철학적 배경을 가질 때라야 완성도를 높일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도서관의 소관 부처가 교육부가 아닌 문화 담당 부서인 점은 정책적으로 모호한 측면이 남아있어 국민의 평생학습권 보장이라는 시책에서도 시정할 여지는 있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근대적 도서관이 지닌 공공성은 영미로부터 전 세계로 전파되었다. 미국은 독립전쟁(1775~1783)을 통해 민주주의 기초를 튼튼히 했고, 그 기운으로 영국은 차티스트운동(1838~1848)을 벌일 수 있었다. 정보의 자유로운 접근이 민주주의의 초석을 다진 결과였다. 공공도서관으로 인해 대중교육과 도덕함양의 발판을 마련함으로써, 사회 전반의 지속적인 발전이 가능했던 참이다. 그 효시는 미국에서 1833년에 세운 피터버러 공공도서관이었다. 이는 비록 일부지만 시민이 낸 세금으로 예산을 집행한 최초 사례였다. 이후 1850년 영국 맨체스터 공공도서관이 생기면서 1854년 보스턴에 시립도서관 설립으로 연결되었고, 19세기에 들어와 ‘지식과 정보 접근의 보편화’라는 명제를 달성하면서 역사에 이바지했다. 그 첫째는 첫째 공교육을 통해 무상 기초교육을 실현한 점이고, 둘째는 시민들에게 무료도서관을 제도화한 조치다. 이제는 사서직에 관리자 정신을 요구하게 되었는데, 그것이 바로 인도 랑가나단의 도서관 5법칙이다. 인류 문명사에서 장서, 사서, 시설은 독자를 위한 유기체로 기억될 주제다.
■ 프로필
- 고교생에게 국어와 문학을 가르치며 ‘수필집·시조집·기행집’ 등을 펴냈습니다.
- 퇴임 후 기고활동을 이어가면서 기독교 철학박사(Ph.D.) 학위를 받았습니다.
- 블로그 “조하식의 즐거운 집” http://blog.naver.com/johash을 운영합니다.
- 정론지 <평택자치신문>에 “세상사는 이야기”를 15년째 연재하는 중입니다.
※ 다음호(728호)에는 ‘효과적 독서의 요건 - 새로운 도서관의 미래’가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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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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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사는 이야기] 효과적 독서의 요건 ‘도서관 역사와 변화상’ (12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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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읽기 장소로서의 도서관 역사와 공간변화에 대한 제목은 묵직한 감을 안겨준다. 송승섭 교수에 따르면, 도서관은 일상생활 가운데 편리하게 원하는 책이나 각종 자료를 볼 수 있는 곳이라야 한다. 그 어원을 보면 라틴어의 ‘liber’에서 온 낱말로 나무껍질의 안쪽을 가리키는데, 그 연원은 기원전 4,000년을 전후해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생겨났다. 관련 역사를 추적하면 고대 그리스·로마 시대 이후 서점과 출판사는 물론 카페 공간 등에서 다른 성격의 사회적 매체들과 경쟁하면서 발전해 오던 중 17세기 후반부터 18세기에 이르러 신문과 잡지의 출현을 기반으로 영국에서 번창한 커피하우스를 중심으로 공론장으로서의 도서관 기능을 수행하며 장차 민주시민을 양성하는 발판을 마련했다. 이는 도서관이란 장소가 특권층의 전유물에서 벗어나 일반 대중과의 관계를 정립했다는 의미가 된다. 자연스레 영미를 포함한 유럽 등지에서 근대 도서관의 파급효과를 불러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나라 도서관의 역사는 인쇄술의 발달과 함께 고려시대로 거슬러 올라가 조선조의 규장각을 비롯한 왕실도서관에서 꽃을 피웠다.
도서관의 본질적인 역할은 무엇일까? 요즘은 단순히 책뿐만이 아니라 전자자료, 즉 영화관람이나 음악감상 등 이미 문화시설로서의 공공성을 확보한 지 오래되었다. 21세기 도서관의 면모는 과거 단순히 인쇄물을 취합하는 기능성에서 탈피해 최첨단의 정보기술을 융합한 공간으로서의 위상을 확립해가는 참이다. 그런데 실상 도서관이라는 용어를 본격적으로 사용한 기점은 서양 문물이 유입되기 시작한 1906년 ‘대한도서관’ 설립을 위한 발기회에서였다는 것이 학계의 정설이다. 흥미로운 사실은 앞서 제시한 도서관의 어원과 같이 책이란 단어 역시 앵글로색슨어인 ‘boc’에서 나왔는데 그 뜻이 나무껍질이라는 점이다. 이는 종이(paper)가 파피루스(papyrus)에서 오고, 이를 그리스어로 비블로스(byblos)라고 하는데 ‘책 중의 책인 성경(Bible)’의 어원이 되었으며, 서지학(bibliography)과 독서치료법(bibliotheraphy)이란 낱말이 파생되었다는 교집합이 있다. 이는 “자료를 수집·정리·분석·보존하여 공중에게 제공함으로써 정보이용·조사·연구·학습·교양·평생교육 등에 이바지하는 시설”이라는 도서관의 법적 정의를 만들어냈다.
▲ 평택시 중앙동 일대에 피어난 풍차국화 꽃무리
칼 세이건의 말처럼 도서관은 바야흐로 기억의 거대한 물류창고가 된 셈이다. 돌이켜보면 도서관이란 장소는 인류의 진전된 삶을 위한 협력방식이었고, 개인과 사회가 정보와 지식에 접근하는 효율적 의사소통의 기제였다. 세계 최초의 도서관은 기원전 667~628년경 이집트 아슈르바니팔 왕의 대형 문고였던 것으로 알려졌다. 거기서 발견한 설형문자를 새긴 수많은 점토판의 존재로 인해 국왕의 교서, 역사, 군사 기록, 서간, 종교서의 원전 등을 밝혀낸 것이다. 니네베 유적에서 “길가메시 서사시”를 접한 이들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이어 BC 18세기 바빌로니아 왕 함무라비 법전이나 BC 1,300년경 람세스 2세는 ‘영혼의 요양소’라는 도서관을 지었으며, 고대 그리스에는 알렉산드리아도서관을 세워 무려 70만 권에 가까운 장서를 수집하여 서지학자 칼리마코스에 의해 120만 권에 달하는 『피나케스』 목록을 만들었다는 말이다. 게다가 BC 1세기 무렵에는 수준 높은 교양을 위해 로마 전역에 개인 문고들이 유행했으며, 28개 공공도서관도 모자라 기원전 2세기부터는 목욕탕에까지 문고를 두었다는 기록은 놀랄 만하다.
중세의 도서관은 로만가톨릭 문화, 그리스정교회의 비잔틴 문화, 중동과 아프리카의 이슬람 문화의 영역으로 나눌 수 있다. 11세기 유럽에서는 성당에서 출발한 대학도서관이 14세기 말에 75개 이상으로 늘어났고, 16세기 초반에는 책의 유통과 활용의 중심지로 발전했다. 반면에 한반도는 정조 이후 왕실도서관의 기반마저 무너져 내렸으나 오늘날에는 선진국에 진입하면서 계층이나 신분에 상관없이 지식정보의 혜택을 누리며 21세기의 도서관문화를 공유하고 있다. 관련 통계에 의하면 전국에 산재한 공공도서관, 대학도서관, 학교도서관, 전문도서관, 특수도서관이 총 천 개소를 넘어섰고, 편의성뿐만 아니라 심미적 감각을 자랑하는 명소로 자리를 잡았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아직도 일부 지자체에서는 창의적 발상을 저해하는 정책으로 퇴행하는 듯한 움직임을 보여 깊은 우려를 낳고 있다. 그렇다면 2017년 5월 코엑스몰에 개관한 ‘별마당도서관’이야말로 저차원의 장소적 개념이 아닌 3차원적 공간으로 대중에게 다가서야 한다는 명제에서 벤치마킹하길 권유한다. 비로소 도서관의 공간적 전환은 특화된 문화 담론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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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교생에게 국어와 문학을 가르치며 ‘수필집·시조집·기행집’ 등을 펴냈습니다.
- 퇴임 후 기고활동을 이어가면서 기독교 철학박사(Ph.D.) 학위를 받았습니다.
- 블로그 “조하식의 즐거운 집” http://blog.naver.com/johash을 운영합니다.
- 정론지 <평택자치신문>에 “세상사는 이야기”를 15년째 연재하는 중입니다.
※ 다음호(727호)에는 ‘효과적 독서의 요건 - 철학이 있는 독서문화’가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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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6-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