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5-20(월)
 
“소리는 저의 천직이고, 제 인생이자 행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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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택지역은 높은 산이 없는 평야지대로서 예부터 중부지방의 곡창지대였다. 평택두레소리는 형식과 내용으로 볼 때 향토색이 짙고 가락이 무척 다양하여 흥겨우며, 절로 어깨춤이 춰질 정도로 신명난다. 하지만 재래식 논매기가 사라진 요즘, 논매는 소리는 더 이상 우리 곁에서 사라졌으며, 논을 매던 시절 선소리꾼들의 기억에만 그 노래들이 존재하게 되었다. 이렇듯이 전승이 단절된 위기에 처했지만, 민요보존회 어영애(魚永愛, 여, 59) 단장이 평택민요를 다시 복원하고 발굴하는 노력을 기울여 지난 2008년 평택민요는 무형문화재로서의 가치를 인정받아 경기도 무형문화재 제48호로 지정되었다. 이래서 사람이 희망이다. 11일 민요보존회 어영애 단장을 만나 그의 민요 인생, 평택민요 복원 및 발굴 과정, 평택민요의 농요·어업요·장례요, 향후계획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 어영애 단장의 ‘경기민요’, 그리고 ‘평택민요’
 
 평택민요보존회 어영애 단장은 1987년부터 경기도 무형문화재 제31호인 경기소리 인간문화재 임정란 선생으로부터 사사를 받기 시작하여, 1994년에 중요무형문화재 제57호인 경기민요 묵계월(본명: 이경옥 李瓊玉, 1921~2014) 선생으로부터 전수를 받아 지난 2000년에 경기민요 이수자가 되었다.
 
 이후 어영애 단장은 향토문화에 깊은 관심을 갖고 평택시 경기민요보존회 이사장으로 재임하면서 평택지역에 향토민요인 두레소리를 이민조 옹이 올 곧게 계승 보존하고 있는 것을 알게 되었고, 이후 이민조 옹의 문하(門下)에 들어가 두레소리 전체를 사사받았다.
 
  어영애 단장은 어려서부터 민요가 좋아서 경기민요 소리를 몇 번 들으면 가사를 외울 정도로 소리를 좋아했으며, 그녀의 부친 또한 시조창에 매우 능했다고 한다. 또한 민요를 아끼고 즐기면서 주위 사람들에게 민요를 가르칠 정도로 실력이 출중했다고 한다. 이후 사단법인 경기민요보존회를 설립하고 매년 소리극을 연출하면서 우리민요의 대중화에 앞장서고 있다.
 
  또한 지역에 있는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국제대학교 등 교육기관에서 우리의 전통을 이어갈 2세들을 가르치고, 평택시 각 동사무소, 노인대학, 여성회관,, 경기문화재단 등 사회교육기관에서도 활발하게 민요보급에 힘쓰는 등 이민조 옹으로부터 전수받은 평택두레소리 전수활동에 열과 성의를 다하고 있다.
 
■ 평택민요의 전승과 성과
 
 지난해 10월 서울특별시와 (사)서울아리랑페스티벌 조직위원회가 주최한 ‘제2회 전국아리랑경연대회’에 참가한 민요보존회는 우수상을 수상하며 평택민요의 우수성을 전국에 알렸다.
 
 또한 지난해 10월에는 어영애 단장이 전승한 평택시 안중읍에 소재한 경기물류고 학생 70여명이 ‘평택민요 어업요’로 제10회 경기도 청소년 민속예술제에 참가해 대상인 경기도지사상을 수상했다.
 
■ 평택민요보존회 바로알기
 
 현재 평택민요보존회는 어영애 단장을 비롯해 단원 45명(남 21명, 여 24명)으로 구성되어 있다. 지난 2004년~2006년 평택농요(농요, 어업요, 장례요) 발굴과 재현 준비 기간을 거쳐, 2007년 5월~7월 평택농요를 재현했다. 또한 지난 2008년부터 평택호 예술관 앞 광장에서 평택시민과 관광객들을 위한 상설공연(4월~10월 매주 토요일, 현재는 메르스 여파로 중단)을 통해 문화시민의 긍지를 높이는 동시에 더 나아가 문화 국민으로서의 자긍심을 일깨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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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평택 농요(農謠)
   
 평야가 많은 평택지역은 농업이 주산업이었으며, 밭농사보다는 논농사의 비중이 높은 지역이기에 두레가 매우 발달했다. 두레는 대부분의 마을에 하나씩은 있었고, 주로 김매기에 필요한 노동력의 효율적인 운용을 위하여 행해졌으며, 농사의 풍요와 관련이 있는 각종 제의와 민속놀이 등에도 쓰였다.
 
 이렇게 성행하던 두레는 이르면 일제 말기부터 늦게 잡아도 60년대쯤에 사라진 것으로 확인된다.
 
특히 60년대에 산업화가 진행되면서 인구의 도시 유입으로 인한 농촌사회의 공동화 및 노령화, 이에 따른 농기계의 발달과 김매기를 대신하게 된 제초제의 사용 등으로 급속하게 사라져 버렸다.
     
 두레란 주로 논농사 지역에서 한 마을의 성인 남자들이 힘을 합쳐 농사를 짓기 위해, 또는 부녀자들이 서로 도우면서 길쌈을 하기 위해 만든 공동 노동조직이다. 그러나 두레 굿을 친다고 할 때의 두레란 전자의 두레노동을 가리킨다. 두레에 의한 공동 노동은 모내기에서 시작하여 가을걷이에 이르기까지 사실상 논농사의 전 과정과 함께 했지만, 특히 짧은 기간에 많은 품을 들여야 하는 모내기와 김매기에는 반드시 두레노동이 행해졌다.
 
  두레소리는 이러한 두레노동을 할 때 협동심을 북돋우고 힘든 노동을 보다 쉽게 할 수 있도록 힘을 내게 하는 역할을 한다. 평택지역의 두레소리는 대부분 김을 맬 때, 애벌매기에서 세벌 김매기가 끝나는 날까지 행해졌다. 또한 두레풍물은, 마을에서 출발하여 논으로 향할 때, 논에서 논으로 이동할 때, 하루 일을 끝내고 마을로 돌아올 때 행해졌다.
 
2. 어로요(漁撈謠) 보존의 필요성
 
 한남정맥(漢南正脈)에서 발원하는 황구지천(수원, 오산을 거침), 진위천(용인 남사, 이동면에서 발원), 한남정맥, 금북정맥에서 발원하는 안성천 등 중소규모의 하천이 최종적으로 평택호에서 합쳐져 서해바다로 빠져나가면서 민물과 바닷물이 교차되어 신왕리는 예로부터 거물치, 강다리 등 수많은 어종(魚種)이 풍부하여 어업이 발달하였다.이에 따라 고기잡이를 하면서 노동의 피로를 잊기 위해 불렀던 어로요(漁撈謠)가 있었다.
 
 아산만에서 잡히던 어종은 다양하고 풍부했지만 주로 강다리, 거물치, 숭어, 뱅어, 준치, 새우젓, 참게, 황새기, 조기 등이었다. 하지만 신영나루의 화려했던 영화(榮華)도 1973년 아산만 방조제 공사로 바닷길이 막히면서 차츰 사라지기 시작하였고, 지금은 몇몇 나이 드신 분들만이 신영나루의 옛 영화(榮華)를 기억할 뿐이다.
       
 현재 어로요를 재현하신 어르신들도 1973년 아산만 방조제 공사 이후에는 어업에 종사하지 않아서 당시 불렀던 어업요(어로요)를 발굴, 재현하는데 어려움이 많았고 고령으로 인하여 어업요(어로요)의 보존이 시급한 실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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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장례요(葬禮謠) 보존의 필요성
 
 1960~70년대만 해도 어느 마을에서든 마을 어귀에는 상여를 두는 곳집(상여집)이 있어서 마을 공동 단위로 사용하는 상여가 있었다. 그 당시에는 사람이 죽으면 꽃상여로 망자의 집에서 장지까지 가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었는데 근세에 내려오면서 장례절차가 간소화 되고 편리함을 추구하다 보니 의식요(장례요)가 거의 사라져 가는 실정이다.
 
 근래에 와서는 장례절차만을 전문으로 하는 기업(企業)도 부지기수로 생겨나고 있고, 기독교식에 의한 장례절차로 인해 제사의식이 없어지고 다만 기도와 찬송으로 대신하므로 장례절차가 매우 간단하다. 국토를 보존한다는 측면에서는 바람직스러운 불교식 화장(火葬) 문화도 상여소리나 회닫이소리를 사라져 가게 하는 한 요인이다. 이와 더불어 시대의 변천에 따라 여러 가지 사회적인 여건의 변화로 인하여 우리나라 전통 소리 장례요(葬禮謠)는 사라지는 추세이고, 상가(喪家)에서도 상여소리나 회닫이소리를 보기가 어려우므로 지금 이 시점에서 상여소리, 회닫이소리를 길이 보존하지 않으면 대가 끊기어 사라질 위기에 처해 있기 때문에 잘 보존하여 후손에게 전승되어야 할 것이다. <참고 문헌: 평택시사-평택시사편찬위원회 2014,06.30 출판>
 
■ 인터뷰, 평택민요보존회 어영애 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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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택민요가 경기도 무형문화재에 언제 지정됐는지.
 
 지난 2008년 경기도 무형문화재 48호 평택민요로 지정되었습니다. 2000년 초반까지만 해도 개인적으로 신청이 가능했지만 지금은 경기도 조례가 바뀌어서 지자체를 통해서만 신청할 수 있습니다.
 
 저희는 처음에 어떤 무형문화재를 만들고자 했던 것은 아닙니다. 당시 단원 모두가 하나가 되어 3개월간 어떤 보수도 없이 땀 흘린 보람으로 2007년 경기도 민속예술 경연대회에 참가해 우수상을 수상했습니다. 아마 평택을 사랑하지 않고 예술의 끼가 없었다면 그렇게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우리의 사라져가는 문화를 발굴하고 재현을 해서 보존을 한다는 것은 중요한 일이며, 또 보존까지는 되었지만 우리가 후손들에게 전승하는 것도 저희의 몫이라고 생각합니다.
 
- 남들보다 늦게 국악을 시작하신 이유는.
 
 고등학교에 다닐 때부터 민요만 들으면 너무 좋았고, 무언가에 처음으로 몰입해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서울에서 직장을 다니면서 소리가 배우고 싶었지만 밤에 가르치는 곳도 없고, 당시에는 ‘소리를 기생들이나 배우는 것’이라며 사회 분위기는 무척 보수적이었습니다. 그래서 집에서도 당연히 반대했습니다.
 
 이후 결혼을 하고나서 우리 아이들을 위해 수지침을 배우러 다녔는데 마침 수지침을 배우러 다니던 곳의 문화센터에 경기민요반이 있는 것을 알게 되어서 소리를 배우게 됐습니다. 또한 소리를 가르치시던 선생님께서 소질이 있다며 선생님 연습실로 찾아오라고 해서 뒤늦게 본격적으로 소리공부를 시작하게 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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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택민요를 평택시민들에게 알리실 계획이신지.
 
 저희는 지난 2008년부터 매년 4월부터 10월까지 평택호 예술관에서 무료 상설공연을 열고 있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평택민요를 알릴 수가 없다는 생각이었고, 시민들과 평택민요로 소통하는 부분은 너무 소중하고 중요한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 민요보존회 활동을 하면서 어려운 점과 보람을 느끼실 때는.
 
 사라져가던 평택민요를 복원하고 발굴해 널리 알릴 수 있었던 점은 저를 포함한 단원 모두의 기쁨이며 보람이고 자부심이기도 합니다. 또한 공연장에서 많은 시민 여러분, 관람객들과 평택민요로 소통하면서 그분들의 얼굴이 밝아질 때, 평택민요를 복원하고 발굴할 때의 고생했던 많은 부분들이 위로 받기도 합니다.
 
 힘든 점은 단원 분들이 많다보니 다 못 챙겨주는 부분도 미안하고, 저희가 시민 분들에게 어떻게 다가가야 할 것인지도 과제인 것 같습니다. 아무리 열심히 노력해도 시민들이 호응하지 않고 외면한다면 아무 소용이 없을 것입니다. 저희 단체는 어떻게 하면 시민들과 어우러질 수 있고 함께 참여할 수 있는가에 대해 고민하고 있고, 그를 위해 열심히 공부하고 있습니다.
 
- 어영애 단장에게 있어 평택민요는 무엇이신지.
 
 우리말과 같고 우리생활의 희노애락을 그대로 담은 노래이기에 더욱 애착이 가며, 저의 천직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짧게 표현한다면 평택민요와 소리는 제 인생이며, 동시에 진리라고 생각합니다.
 
 더 많은 시간이 흘러 제가 백발의 할머니가 되더라도 시민 여러분들과 평택민요로 소통하고 싶고, 후학들에게 제대로 된 평택민요를 전승하는 것이 저의 큰 목표이기도 합니다.
 
- 앞으로 활동계획과 목표가 있다면 무엇이신지.
 
 저희가 도문화재로 지정이 되었기 때문에 좀 더 노력을 해서 국가문화재 심사를 신청했을 때 국가 문화재로 인정받았으면 하는 것이 꿈입니다.
 
 또 더 나아가서 평택민요를 체험할 수 있는 평택민요보존회 전수관도 건립하고 싶습니다. 향후에 평택민요 전수관이 건립된다면, 전국 각지의 관람객들이 우리 평택의 소리와 문화를 체험할 수 있게 다양한 프로그램을 준비할 생각입니다. 이를 통해 평택의 소리가 평택의 문화브랜드가 되어 국내는 물론이고, 세계의 문화유산으로 향유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시민여러분들의 평택민요에 대한 많은 관심과 사랑을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안연영 기자 ptlnew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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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평택시 민요보존회, 어영애 단장 “평택민요의 산증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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