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27(토)
 

백 교수 “지역사회 진로 모색하는 협치 공간의 전통 살려야”

 

평택향교 강연.jpeg

 

평택향교를 관할하는 경기도향교재단이 향교 책임자인 A전교 측을 고소한 가운데, 시민사회에서 평택향교의 역사를 살핌으로써 정상화 방안을 모색하는 자리가 열렸다.


금요포럼은 8월 19일 백승종 서강대 전교수(역사학자)를 초청하여 평택향교의 과거를 살피는 한편 바람직한 미래상에 대한 의견을 들었다.


이날 백 교수는 현재 조선시대의 향교가 현재의 초중등학교 격으로 알려져 있지만, 이는 잘못된 인식으로 서원이 사립 고등교육 기관이라면 향교는 국공립 지방대 격이라고 설명했다.


백 교수는 “역대 평택향교는 현대의 철학박사 격에 해당하는 생원 13명, 문학박사 격에 해당하는 진사 5명, 고시 합격자에 해당하는 문과 급제자 4명을 배출했으며, 1690년생 진주 강씨 강호보의 경우에는 전체 수석(여러 이유로 차석으로 조정됨)의 성적을 냈다”고 설명했다. 


이어 “평택향교의 전성기는 17세기인데, 이 당시 부임한 평택현감들이 향교의 시설을 보강하는 한편 향교의 운영 규칙과 유적(儒籍: 선비 명부. 또는 ‘유안’, ‘청금안’이라고도 함)을 작성하고 향교의 노비를 나라에서 지급받는 등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고 말했다. 


아울러 평택을 다룬 최초의 향토지인 ‘팽성지’를 편찬한 신식이라는 선비도 강연에서 조명됐다. 


백 교수는 “생원과 합격자이기도 한 그는 현대의 족집게 강사 격이어서, 그의 지도로 한 마을에서 대여섯 명이 한꺼번에 초시(현대의 박사학위시험 격)에 합격하는 성과로 초야의 재백(벼슬하지 않은 고위 관리)이라고 불렸다”며 “당대의 정승급 관리가 인근인 아산에 귀양을 오면서 자식의 교육을 특별히 신식에게 부탁할 정도였다”고 설명했다. 


이어 “18세기 말은 향전(鄕戰)의 시대로서, 신흥 양반과 기성 양반 사이의 주도권 쟁탈전이 발생했다”며 “이때는 유적의 작성이 중단되고 향교 운영도 파행으로 흐르는 등 향교 본연의 기능이 약해지고 과거시험 합격자도 거의 사라지게 됐다”고 밝혔다. 


백 교수는 “향교가 있었기에 지역의 유지(有志)나 조정의 관리 등을 배출하는 한편, 선비들이 향교에 모여 지역 공론 형성 및 공정한 지방행정 등 지역발전에 기여했다”며 “평택향교는 사유화하는 장소가 되어서는 안 되며, 지역사회와 국가의 진로를 모색하는 협치 공간으로서의 전통을 살려야 한다”고 강조했다. 


특히 “팽성 지역의 구성원이기도 한 주한미군과 다문화가정이 한국 문화를 익히는 공간이 되어야 되어야 하고, 그들과 사회 및 문화 통합으로 이끄는 견인차여야 한다”면서 “시민들에게는 정서적 안정감과 문화적 자존감을 선사하는 공간이자 장차 100만 평택시민의 사랑 받는 공간이 돼야 한다”고 특강을 마무리했다. 


이날 특강에는 금요포럼 김종기, 김훈 공동대표, 박만복 성균관유도회 평택지부 부회장, 차화열 평택명품도시위원회 회장, 윤호섭 사진작가, 정국진 전 평택청년네트워크 회장, 최홍성 평택시문화관광해설사 등 10여 명이 참석했다. 

 

김지영 기자 ptlnew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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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포럼, 백승종 교수 초청 평택향교 강연 성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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