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29(월)
 
조하식(한광고 교사,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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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국시대 말기에서 에도시대(江戶時代) 초기를 테마로 얹은 <에도지다이무라 공원>. 거기서 시대극을 보며 오이란쇼를 접하니 내용은 빤했으나 정성은 돋보였다. 쉰 목소리로 한중일은 물론 홍콩, 태국, 멀리 스페인까지 아우르는 인사말이 상큼했다. 점심식사는 담백한 닭백숙. 그러나 자본주의 생리가 지나쳐 찬거리마다 추가요금을 지불하라는 눈치는 씁쓸했다. 기본으로 나온 소스에 양배추를 버무려 우동에 두부며 양파를 섞어 비벼 먹으니 뒷맛은 개운했다. 일본의 잃어버린 20년은 두고두고 화젯거리. 자칫 중국과 한국 역시 답습할 가능성은 상존한다는 주의보였다. 갓 볶아낸 커피냄새에 얽힌 이효석의 허장성세도 단숨에 꼬집는다. 하긴 수필(隨筆)이란 장르는 서술자가 곧 작가 자신이 아닌가? 일제에 빌붙은 족속이 아니고서는 언감생심 흉내조차 힘든 호사라는 얘기였다. 세 끼 밥 먹듯 작품을 가르치고 접하면서도 이면까지는 미처 들여다보지 않았거늘 듣고 나니 새로운 시각이자 조명이다. 친일의 유형을 철저한 친일과 방관적 친일로 나누는 눈도 날카롭다. 동족을 전장으로 내몰며 거룩한 성전 운운했던 적잖은 지식인들이 뜨끔할 지적이렷다. 고로 ‘친일인명사전’이 자못 유용하다는 주장일뿐더러 무려 4,816명에 관한 객관적 사료이므로 반드시 읽어두라는 당부였다. 때가 이르러 교토에 갈라치면 꼭 동지사대학(同志社大學)에 들러 윤동주 추모비를 둘러보리라. 그나저나 이들의 저축정신은 유별나다. 소비를 진작시킬 요량으로 상품권을 나눠줬더니 반액도 좋다며 은행으로 달려간다니 말이다. 무단횡단하다 일어난 교통사고를 놓고는 원칙적으로 5:5의 과실을 적용한다니 합리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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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이드는 얼마 전 사회적 파장을 불러일으킨 포스코 이사의 기내 소동을 들춰냈다. 듣고 보니 절반은 날조극. 책으로 스튜어디스의 머리를 친 일도 없었고 소홀한 기내식과 불친절을 항변하다 발생한 감정싸움이라는 거였다. 억울한 건 이사직에서 물러난 당사자. 여론몰이를 감행한 대한항공의 저의가 몹시 의심스러운 이유다. 어디까지나 고객은 을이고 항공사는 갑이었다. 이는 공교롭게도 정반대 사태를 잉태하며 지난 연말을 뜨겁게 달궜다. 역사에 우연은 없다는 걸 재벌 이세 몸소 증명한 터. 어느새 <오타루(小樽)>. 궂은비를 맞으며 잠시 운하를 걸었다. 철지난 영화처럼 작다란 항구의 좁다란 언덕을 끼고. 하지만 로맨틱한 정취는커녕 마치 무슨 전개인지도 모른 채 빛바랜 러브레터의 추억을 반추했고 옛 러시아의 흔적을 더듬어야 했다. 그렇게 들른 오르골 전시장. 조잡한 만 여 점의 크리스탈 유리제품에는 별 감흥이 없었다. 메르헨 교차지점에서 보도를 따라 늘어선 상점들. 밤이면 63개의 가스등 아래 독특한 분위기를 분출한다지만 이마저 필자의 취향과는 거리가 멀다. 눈길을 끈 건 절개지를 떠받치고 있는 통나무들. 백 년 묵은 석조창고를 개조한 손길이며 낡았으나 세월을 머금은 외양이 길손의 호기심을 자아냈다. 한산한 퇴근길. 랜드마크라는 시계탑에 얼마큼 눈길이 갔고 함박눈이 쏟아지면 어떨까 조금은 궁금했다. 눈여겨 본 데는 도심에 흐르는 하수도 공원. 거리는 조용하고 평화로웠다. 잔뜩 기대했던 대게 요리의 진미. 허나 엄청 짠데다 신선도마저 떨어진 걸 내놨다. 잽싸게 일어나 번듯한 거리를 거닐기를 백 번 잘 했다. 숙소에 돌아와 컵라면과 진한 커피로 속을 달래고서야 장기에 생기가 돌았다.
 
  마지막 날 아침이다. 고소한 쌀죽에 빵이며 과일을 곁들여 포식했다. 북해도의 맑은 햇살은 강렬했다. <오도리공원>은 정사각형 도시의 한복판에 있었다. 190만 삿포로시민의 휴식처. 구 시청사를 끼고 동서로 1.5km에 이르는 녹지대를 조성한 품이 싱그럽다. 차창에 비친 오래된 시계탑을 두고 내렸다. 온갖 꽃들로 장식한 도시정원. 방화선으로 남겨뒀던 지역을 이만치 꾸미는 일이 어디 쉬웠으랴. 보면 볼수록 품위가 있고 아기자기했다. 흠이라면 필지를 너무 잘게 나눈 구도. 건널목이 잦아 죽 이어 걷지를 못하는 건 좀? 삿포로는 소세이가와 강줄기를 중심으로 발달한 도청소재지. 여기서 들은 선교사 클라크 총장의 “Boys be ambitious in Christ!”는 다소 의외였다. 그는 삿포로농대(지금은 종합대로 개편)를 설립한 장본인. 뒷얘기인즉슨 재정 부족에 시달려 월급이 밀린 채 하릴없이 본국으로 돌아가는 마당에 스승을 따르던 제자들을 향해 끝으로 남긴 한마디였다. 뒤에 붙은 영혼 구원의 핵심은 떼어버린 채. 대학을 청사로 재활용하거나 1881년을 간직한 시계탑을 기념물로 남겨둔 조치는 잘한 일이다. 아울러 내부에 역사자료관을 갖추고 해마다 사진전시회에 연주회를 열어 유지보수비를 충당하면서 시민들의 호응을 이끌어낸다니 슬기롭다. 일몰 후면 아름다운 조명이 현란하다는데 애서 보고픈 심사는 아니었다. 도심이든 사람이든 때로는 민낯을 대하는 편이 훨씬 자연스럽기에.
 
※ 다음호(337호)에서는 ‘홋카이도 기행’ 여섯 번째 이야기 ‘도청사에서 치토세까지’가 이어집니다. 독자, 시민 여러분들의 많은 관심 바랍니다.
 
■ 조하식 수필가 프로필
 
<월간에세이>를 거쳐 <한맥문학>을 통해 수필가로 등단. 본보에 6년째 ‘세상사는 이야기’를 연재하고 있으며, 신앙산문집<주님과 동행한 오솔길>, <생각만큼 보이는 세상>을 펴냄. (홈페이지
http://johs.wo.to/, 이메일: johash@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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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사는 이야기] 홋카이도 기행, 오타루에서 삿포로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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