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30(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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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하식(한광고 교사, 수필가)
 
 
고속도로(공로)변에서 만난 상성명도(常城名都)’라는 팻말. 나름 성곽을 품은 명품 도시라는 뜻으로 해석했다. 파남(巴南) 톨게이트를 벗어나 중간에 들른 식당은 길손을 한껏 배려하는 곳. 잔뜩 신경을 쓴 반찬 가운데 배추볶음이 입에 맞아 끼니에 갈음했다. 눈에 들어온 건 절개지에 붙인 공룡 모형. 곳곳에서 진행하는 토목공사를 보면 위험천만하기 짝이 없다. 안전한 차량 통행보다는 절제된 절개문화의 절대 우위를 절감하는 땅. 아무튼 환경보존에 대한 개념은 우리를 훨씬 앞지른다. 산비탈마다 빼곡한 옥수수 경작지. 험준한 산악지대를 무색케 했다. 더불어 키 작은 보리를 키웠다. 그런데 경작하자면 가파른 등산을 겸할 터인데 어쩐담? 직접 올라가 수확하는 현장을 보고 싶었다. 일대에서 전체 옥수수 생산량의 70%를 점하고 있다는 말이 실감난다. 목하 내리쬐는 뙈약볕은 온 산하에 불이 붙을 지경. 섭씨 40도를 넘기면 출근하지 않는 규정으로 인해 거짓말을 기정사실화하다보니 공식 발표로는 섭씨 39.5도를 넘기는 법은 없단다. 해발고도 1,000m마다 6.5도씩 내려간다는 온도계(가이드는 4도씩이라고 말했음). 그래서인지 막상 해발 1,500m에서 맞는 여름은 제법 서늘했다. 중간에 들른 화장실. 무척이나 불결한 만큼 악취가 코를 찔렀다. 아무데나 침을 뱉는 건 기본이고 마구 쓰레기를 버리는 습성 또한 몸에 뱄다. 가슴에 첩첩산중을 껴안고 내닫는 기분이랄까. 그때였다. 일행 중 한 분이 혼잣말처럼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상은 볼수록 오묘하다며 포효했다. 어렴풋이 신의식(神意識)은 투영했으되 그저 아쉬운 탄성일 뿐 구원의 메시지는 없었다. 능선을 타고 화학공장의 이동로가 대략 10km를 이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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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절을 달려 당도한 귀양(貴陽). 우스개로 귀양을 가서 귀양이 아니라 볕이 귀해 귀양이라더니 살갗에 와 닿는 바람결이 선선했다. 하긴 연평균 기온이 섭씨 15도 안팎이어서 대표적 피서지란다. 상주인구는 약 400만 정도. 도심에서 2km 남짓 떨어진 곳에 <갑수루(甲秀樓>가 있었다. 근래 보기 드문 풍경. 눈앞에 펼쳐진 그림을 보고는 이번 여행을 못내 내켜하지 않던 아내마저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행여 여행에 빠졌더라면 후회할 뻔했다는 고백까지 곁들이며. 아치형 다리인 부옥교(浮玉橋). 1598년 명나라 귀주의 지방대신 강동지(江東之)가 남명하(南明河) 기슭에 누각을 짓고 장원급제의 의미로 갑수루(일명 제일 학사루’)라 명명했단다. 그 뒤 귀주에서 세 사람씩이나 장원 급제자가 나왔으니 방방곡곡에서 수험생들이 찾아와 기원하는 바도 무리는 아니다. 이곳 소수민족의 특색을 담아 올린 20m 높이의 푸른 누각(3)은 날아갈 듯 걸터앉았고, 다리를 길게 뻗은 자태에는 고운 품위가 서려있다. 날렵하게 동서를 가르며 남북을 지르는 형태. 맑은 물이 굽이돌아 저리 담소(淡沼)를 형성했을까? 해가 질 때면 누각이며 교각이 물빛에 비껴 언뜻 선경을 방불케 한다는데 늘 촉박한 시간이 문제로다. 시야에 쉐라톤호텔, 귀양방송국, 월마트가 보이는 풍치. 내친김에 갑수교를 건너 호수를 따라 좀 더 거닐고 싶었지만 가이드의 세찬 주문에 밀려 주위를 맴돌고 말았다. 눈길을 끌다 못해 동자를 사로잡는 건물의 조형미. 휘휘 늘어진 능수버들에 고풍스런 누정(樓亭)도 그렇거니와 주위 고층 빌딩이야말로 세계 어느 도시에 내놔도 손색이 없을 만치 훌륭하다. 하나하나 예술미를 갖춘 건조물. 거슬러 올라 오래 전부터 토목기술을 연마한 내공이 이들의 현재를 만든 참이다. 그 틈을 비집고 따가운 소리가 귓전을 때렸다. 팽이장수의 재밌고 재빠른 몸놀림. 허가를 받은 양 당당하게 가지가지 팽이를 팔고 있었다. 모처럼의 휴식을 시샘하는 천변에서 사진을 남기고 찾아든 숙소. 절강호텔은 수준급이었다. 불편한 수도꼭지를 빼고는 별반 불편을 느끼지 못했다. 셋이서 감사예배를 드린 뒤 서둘러 단잠을 청했다.
 
눈을 뜨니 광복절(68주년)이었다. 일제치하 막바지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중경에 머문 시절이 있었다. 마지막 날 방문할 참이나 참으로 지난(至難)했던 시기. 충칭을 떠나기 전 잠시 과거를 되짚었다. 역사적으로 살펴본 중경은 BC 11세기 주대(周代)에 파국(巴國)의 수도였던 자리. 전국시대 진나라 혜문왕(惠文王) (BC 337~311) 강주현(江州縣)의 현청소재지였으며, 삼국의 촉한(蜀漢) 때 지금의 위치로 현청을 옮겼다. 487년에는 남조 제()나라 파군(巴郡)의 군청소재지였고, 북주(北周) 때는 파현(巴縣)이었다가 수당시대 투주(渝州)의 주청소재지가 되었다. 송나라 이후 충칭 부()와 로()의 관공서가 들어섰는데 남송시대 광종(光宗) 조돈(趙惇)이 왕으로 책봉되고 제위에 오르는 겹경사를 맞아 <중경(重慶)>이라는 지명을 붙였다는 기록이다. 솔직히 나는 그제야 중경(中京)이 아닌 까닭을 알았다. 1876년 지부조약(芝罘條約)으로 개항했고, 1895년 시모노세키조약으로 통상항구가 되었다. 시로 승격한 때는 1927. 1938~1945년 사이 근대적 공업을 일으키면서 교역과 교통의 중심지로 발돋움했으나 제2차 세계대전 중 대부분의 도로가 파괴되고 만다. 전후 수십 년간 대대적으로 벌인 복구사업에 크게 기여한 이가 바로 보시라이. 그는 특히 조직폭력배들을 소탕하는 과정에서 몰수한 비자금(한화 약 3조원으로 추정함)을 죄다 도시현대화사업에 투입시킨 공로가 크단다. 유난히 가파른 지역이 많아 안전상의 이유로 자전거 이용을 전면 금지한 조치도 특이점이다.
 
다음호에서는 '중국 탐방기' 3- 황과수 폭포수가 이어집니다. 독자, 시민 여러분들의 많은 관심 바랍니다.
 
조하식 수필가 프로필
 
<월간에세이>를 거쳐 <한맥문학>을 통해 수필가로 등단. 본보에 6년째 '세상사는 이야기'를 연재하고 있으며, 신앙산문집<주님과 동행한 오솔길>, <생각만큼 보이는 세상>을 펴냄. (홈페이지 http://johs.wo.to/, 이메일: johash@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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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사는 이야기] 중국 탐방기, 귀양의 갑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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