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28(일)
 
조하식(한광고 교사,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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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유럽 기행, 수수한 벨기에 민낯
 
정갈한 호텔 방에서 맞은 서유럽의 주일 아침. 아내와 예배를 드리고 가벼이 호텔식을 마쳤다. 차에 올라 밑지는 셈치고 물어본 게 있었다. 어젯밤 제대로 구경 못한 ‘아돌프다리’를 다시 보고 갈 수는 없느냐고. 돌아온 건 진행하는 장소와 반대쪽이어서 안 된다는 것. 이렇듯 가이드의 대처는 심히 불충분한 반면 운전기사는 매우 든든했다. 시종 안정된 자세로 차를 몰아 일행을 안심시켰으니 그 공로가 크다. 목초지 한가운데 호텔을 떠나 ‘브뤼헤’로 가는 길. 여기서는 고속도로든 이면도로든 여간해서 규정 속도를 어기는 법이 없다. 첫째는 무거운 벌금이 무서워서요, 둘째는 평소 몸에 밴 질서의식 때문이다. 자본주의에 기초한 민주주의 체제서도 돈의 가치는 효율적이다. 산에는 야생버섯이 웃자라고 땅에는 민들레가 빼곡한 나라. 상큼한 산딸기를 비롯해 체리는 기본이고 나물류가 남아돈다는 말에 내심 의외라고 여겼다. 갓길에서 벌꿀을 판매하는 모양새도 색다른 풍경.
 
 천박하게 호객을 일삼고 바가지를 씌우는 게 아니라 자국 문화를 넌지시 소개하는 양상을 띠었다. 유채기름을 식용과 농기계기름으로 동시에 쓰는 게 특장점. 산토끼가 흔해 각종 요리법이 발달했는데 산맥을 따라가노라면 족제비와 너구리 서식처를 심심찮게 발견한단다. 여하튼 손길이 자주 가는 채소보다는 기계화농을 선호한다는 말에 확실한 방점이 찍혔다. 굴곡진 도로변을 수놓은 솔가지들. 대부분은 추운 지방에서 자생하는 리기다 수종이로되 어딘가 우리네 적송을 닮았다. 어느새 차는 벨기에 땅으로 접어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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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뤼헤(Bruges)>는 벨기에 제2의 도시. 북서부 플랑드르주의 주도로써 인구라야 12만 명 정도여서 한산했다. 남아 있는 건축물들이 아직 중세 분위기를 더해주는데 가장 많이 알려진 행사로는 그리스도의 승천일에 행해지는 성혈 행렬기도를 들었다. 즉 부활하신 예수님이 40일 만에 구름을 타고 승천하신 날을 기념하는 축제. 이처럼 공휴일일수록 체증이 없단다. 서둘러 찾은 데는 지붕 없는 미술관이라고 불리는 <마르크트 광장(Grote Markt)>. 때마침 벼룩시장이 한창이었다. 각자 쓰다가 내온 잡동사니 천지. 물물교환도 이루어진다니 무척이나 실용적이다. 야외에 전시한 그림들이 있었다. 한 바퀴 반경을 좁혀 둘러본 동네는 수더분했다. 이 고장 영웅인 암브레트 동상마저……. 미켈란젤로의 성모자상에 식상한 건 더 이상 성당은 지루해서다. 오래된 출입문을 그냥 지나쳐 잔잔한 물길을 따라 ‘그랑 플라스(Grand Place)’를 대하니 유럽 최고의 응접실로 치켜세운 빅토르위고의 찬사가 허사가 아니었다. 수면에 비친 그림 같은 경관. 늘어선 중세풍의 건축물을 보니 고개가 절로 끄덕여졌다.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는 감탄사. 족히 인간의 손길이 만들어낸 경연장 같은 느낌이랄까. 당장 영화를 찍은들 환상적일 거라는 데 동의하지 않고는 못 배길 만치. 시청사의 고딕양식과 길드조합의 바로크양식에 가미한 르네상스양식 등 각양각색의 수려한 건축물들이 실컷 조화를 이룬 나머지 커다란 옥외극장을 방불케 했다. 단 하나 길손의 발길을 훼방하는 건 바람을 타고 흩뿌리는 빗줄기뿐이었다. 가히 인위적이면서도 절제된 자연미를 거지반 간직한 채.
 
곧바로 향한 <브뤼셀(Brussels)>. 행정구역상 거주인구는 20만 명이 채 안 되지만 도시권역을 포함할 경우 100만 명을 헤아린다는 설명이다. 대번 높은 인구밀도를 감지하는 발걸음. 번잡한 느낌을 부여안고 브뤼셀의 중심부이자 도시의 시작점에 내려선 터였다. 항간에서 즐기는 홍합 감자튀김 와플로 유명한 곳. 실상 유럽에 살면서도 와 보기가 만만치 않은 데가 베네룩스란다. 한두 달 휴가를 즐기기 위해 일 년을 열나게 일한다지만 여유는 늘 부지런한 자의 몫이다. 중심 잡힌 자유. 각자 놀이를 향유할 근거가 충만할 때라야 휴식의 가치를 누릴 수 있다는 말이다. 현란한 장식과 우아함의 극치로 대변되는 시청사.
 
 비록 이름값에는 못 미쳤을망정 관공서에 예술성을 가미한 점은 높이 살만하다. 아시다시피 허접함의 으뜸은 <오줌싸개동상>. 비좁은 골목은 인파로 북적였다. 몇 차례 소매치기에 대한 경고를 들은 뒤 가게에 들러 초콜릿을 시식했다. 별로였다. 외지 손님을 끌어들이면서 꽤나 변질됐다는 게 중론(아내 포함)인데, 그러고 보니 공짜 화장실을 제공하며 물건을 파는 상술이 대단했다. 겨울비에 젖은 밤거리. 걷다가 싸구려상가에 들렀다. 하지만 물건이라야 온통 중국산. 게다가 아랍인 장사꾼들의 따가운 시선이 부담스러워 고대 나오고 말았다. 어딜 가나 ‘자라(ZARA)’ 상호가 빠진 거리는 없다. 간신히 비 피할 데를 찾아 진열대를 카메라에 담으면서 그럭저럭 시간을 꿰맞출 수 있었다. 평일도 저녁 6~7시면 가게 문을 닫을 만치 출퇴근 개념이 자리를 잡았지만 필자의 눈에 비친 벨기에의 인상은 무릇 후줄근한 이미지였다.
 
■ 서유럽 기행, 네덜란드 운하투어 <8회, 최종회>
 
  고막을 찢는 공사장 파열음에 기계 진동을 수반한 암스테르담의 한복판. 대자연과의 투쟁사를 통해 역사를 이어온 그들답게 인위의 축적이 남다르다. 암스텔(Amstel) 강에 댐(dam)을 쌓아 만든 도시. 오죽하면 신은 천지를 조성했으나 네덜란드는 화란인이 만들었다고 포효했으랴. 말도 안 되는 불경스런 언사로되 이네들의 투혼을 살라치면 착각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선뜻 눈에 찬 건물은 없었다. 어딘가 짜깁기한 듯 어설픈데다 균형감마저 태부족했기에. 간판에 호텔학교가 보였다. 상호는 ‘HOTEL SCHOOL’ 새삼 화란인의 발 빠른 대처에 시선이 멈췄다. 바보같이 뒷북치기에만 바쁜 한국인의 자화상을 떠올리며. 광장을 돌다가 한 성당에 들어갔다. 허나 정안수에 촛불이라니 쯧쯧, 마지못해 고해소에 들어가 자신의 자범죄를 신부에게 자복한들 중보자는 예수님 한 분이시다. 거기 남긴 방명록. “Born Again Christian Joe Har-Shig & Han Eun-Shug, From South Korea, Shallom! 27. February 2014.” 내친김에 암스테르담 중앙역사를 구경했다. 내심 궁금하기도 했고 공짜로 화장실을 이용할 속셈이었으나 이마저 유료여서 0.5유로를 아껴뒀다. 복잡한 역전 주변. 코앞에 여행안내소가 있었지만 짧은 영어조차 안 통하는 바람에 소득 없이 나와야 했다. 트램 길은 얽히고설킨 형국. 좌우를 잘 살피고 건너지 않으면 큰 낭패를 보기 십상이다. 그나저나 흔하디흔한 건 자전거 보관소. 어마어마한 숫자도 숫자려니와 가지런히 주차된 모습을 대하노라면 깨인 질서의식이 돋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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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점심은 저염으로 만든 중국식 요리. 그러고 보니 베네룩스 3국의 중국 음식을 비교할 기회를 얻은 셈이다. 품평하자면 네덜란드가 제일이었다. 맛난 기내식에는 내공이 있었나보다. 기다리던 <운하투어(Gray line canal cruises)>. 강줄기인데도 바다보다 6m나 낮다는 사실이 신기했다. 알아듣기 쉬운 한국어 방송. 가끔씩 이해가 안 가는 대목이 나오긴 하지만 대체로 알아들을 만했다. 수중에 설치한 장대를 지나 물오리 몇 마리와 갈매기 떼가 길손을 반긴다. 국토가 좁다란 탓에 건물마다 규격이 정해져 있고 어길 경우 예외 없이 과징금을 부과한단다. 물가에 정박한 하우스보트만도 무려 2,500여 채. 도합 6,000여 명이 거주하는 공간으로 높은 인구밀도만큼 살아가는 지혜도 남다르다. 총 70여 개 섬을 500여 개의 다리로 연결한 물길이 암스테르담 구석구석을 안내했다. 특별히 선박 모양을 본떠 만든 네모(NEMO) 사이언스 센터. 시야를 꽉 메운 ‘해운하우스’나 특히 ‘BIMHAUS’라는 재즈공연장은 한껏 이채로웠다. 멀리 첨탑이 뵈는 옛집이 안네 프랑크가 살던 그 집이란다. 히틀러의 잔학한 통치를 피해 비밀통로를 오가며 숨어사는 동안 얼마나 마음 졸였을까? 다닥다닥 맞닿은 수상가옥을 끝으로 한 시간 남짓 재밌는 운하투어를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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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제 남은 건 <잔세스칸스(Zaanse Schans) 풍차마을>. 세찬 바람결이 묵중한 풍차를 돌리고 있었다. 회칠한 듯 천지가 우중충한 하늘빛. 우리는 흩뿌리는 빗발에 쫓겨 잰 발걸음을 옮겼다. 아담한 정원을 끼고 들어앉은 판잣집. 그러나 상상만큼 아기자기하지는 않아서 동화속의 정경을 떠올리기엔 무리였다. 전적으로 관광객을 겨냥해 꾸민 장소. 한때는 여기서 700여 기의 풍차(windmill)를 돌렸다는데 지금은 달랑 넷만이 오가는 길손을 맞았다. 온 나라를 채웠던 1,100여 개 가운데 겨우 12기만이 남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됐다는 설명을 들으니 그 내부가 궁금했으나 유감스럽게도 연자맷돌을 확인할 수는 없었다. 흡사 고요한 호숫가 마을처럼 흠뻑 물속에 둘러싸인 풍경. 때마침 제방을 따라 하교하는 애들이 보였다. 오후 두세 시면 일과를 끝내는 소년들. 관광객을 부르는 건물로 들어가니 초콜릿과 치즈를 팔았다. 하지만 시식에 응한 이들은 고개를 흔들었다. 눈길을 돌린 데는 나막신체험관 겸 간이박물관. 물론 이골 난 상술의 일환이었다. 덤으로 본 건 <담 광장(Dam Square)>. 제2차 세계대전의 전사자를 기리는 위령탑이 있었다. 각종 공식 행사와 축제, 콘서트, 노천시장을 연다는데 산책 나온 시민들이 비둘기 떼와 어우러져 한가로운 한때를 즐겼다. 네덜란드의 여행을 마치며 스치는 감회는 또렷했다. 중세 이후 온 유럽이 계몽주의에 편승한 나머지 인본주의로 돌아선 시절 진리를 깨달은 백성들은 도대체 무얼 했을까? 급기야 신본주의를 저버린 자유주의 신학이 뭇 생명줄을 옥죌 때까지……. 이로써 프랑스와 베네룩스를 대충은 섭렵한 셈. 출국수속은 허리춤까지 만지는 초강수였다. 의외의 혜택도 건졌다. 면세점에서 0.6유로짜리 사과를 세 개나 발견한 것. 돌이켜보매 이번 여정의 책무는 일종의 정탐꾼이었다. 이를테면 부족한 우리 부부가 선지자 여호수아와 갈렙을 본받아 담대한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의 행보를 겸허히 내딛은 참이었다. <홈페이지 http://johs.wo.to
 
※ 다음호(320호)에서는 '남도 문예 기행' 1회 - <진도대교>의 모습, 2회 - <김영랑 생가>, 3회 - <소록도>, 4회 - 거제 <외도>의 모습이 연재됩니다. 독자, 시민 여러분들의 많은 관심 바랍니다. 아울러 6년째 본보에 '세상사는 이야기'를 연재해주고 계신 조하식 선생님께 본보 임직원 모두가 감사드립니다.
★자치돌이★ 기자 이 기자의 다른 기사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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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사는 이야기] 서유럽 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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