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29(월)
 

우수성과 정통성 인정받아 국가지정 중요무형문화재 제11-2호 지정
우리나라 농악 가운데 가장 역동성과 연희성 뛰어난 농악으로 평가



“평택농악, 드디어 세계의 신명이 되다” 지난해 말 유네스코 무형유산위원회는 프랑스 파리에서 회의를 열어 한국의 대표적 문화유산인 농악을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 결정했다. 우리나라 농악 가운데 가장 역동성과 연희성이 뛰어난 농악으로 평가받고 있다. 평택은 ‘소샛들’이라는 넓은 들을 끼고 있어 예로부터 농산물이 풍부하였고, 이는 평택농악을 이루는 중요한 배경이 되었다. 또한 평택 근처의 청룡사(靑龍寺)는 일찍부터 사당패들의 근거지가 되어 조선 말기에는 그들의 농악이 크게 발달하였다. 그래서 평택농악은 두레농악인 동시에 걸립패농악(승려들이 꽹과리 치면서 염불하고 공양하는 일)의 성격을 갖는다. 전문 연희패의 영향을 받아 더욱 발전해오던 평택농악은 인근의 안성·화성 등지와 함께 농악의 중심역할을 해오던 중 지난 1985년 중요무형문화재 제11-2호로 지정받으면서 웃다리가락의 대표적인 농악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본지는 3회에 걸쳐 ▶평택농악,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등재 ▶평택농악의 발생과 문화재 지정 ▶파일난장굿 ▶평택농악의 인간문화재 최은창 ▶평택농악의 인간문화재 이돌천 ▶평택농악의 인간문화재 김용래 ▶웃다리 평택농악의 특징 ▶대한민국 6대농악 평택농악의 발자취 ▶평택농악의 형태 ▶평택농악의 창조적 계승 ▶평택농악보존회 김용래 회장 인터뷰를 상세하게 보도한다. <편집자 말>

■ 평택농악,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등재

 우리나라는 지난 2001년 ‘종묘제례 및 종묘제례악’이 처음으로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에 등재된 이후 이번에‘농악’이 등재되면서 모두 17개의 인류무형문화유산을 보유하게 되었다.

 참고로 유네스코(UNESCO)는 <유엔교육과학문화기구, United Nations Educational, Scientific and Cultural Organization>의 약자이며, 교육·과학·문화의 보급 및 교류를 통하여 국가 간의 협력증진을 목적으로 설립된 국제연합전문기구이며 인류가 보존 보호해야할 문화, 자연유산을 세계유산으로 지정하여 보호한다. 2011년 기준 195개국이 종회원국이며, 8개 준회원국이 가입되어 있다. 우리나라는 1950년에 가입했고, 1987년 제24회 총회에서 집행위원국에 선출된 바 있다. 본부는 프랑스 파리에 있다.

 유네스코는 2012년부터 인류무형문화유산을 매우 제한적으로 등재시키고 있다. 2010년 12월 3일 ‘무형문화재분과 제6차 회의’에서 2011년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심사 대상 종목으로 ‘풍물놀이’, 나전칠장, 줄타기 놀이 등을 선정했다.

 이후 2011년 1월 14일 ‘무형문화재분과 제1차 회의’에서 ‘풍물놀이’를 2012년도 인류무형문화유산 심사 대상 종목으로 결정하고 3월 신청서를 유네스코 본부에 제출했다.

 하지만 중국이 ‘아리랑’과 ‘김장’을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우리 정부는 대표목록 등재 우선순위를 조정해 결국 ‘풍물놀이’가 밀려나게 된다.

 이후 ‘아리랑’과 ‘김장문화’가 차례로 등재되고 2013년 3월 8일 ‘무형문화재분과 제2차 회의’에서 ‘풍물놀이’를 2014년도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대표목록 ‘단독등재’ 심사종목으로 결정함에 따라 당초 2012년 등재키로 한 ‘풍물놀이’는 두해를 넘겨 등재하게 됐다.

‘농악’이라는 명칭 지정에 있어서도 우여곡절을 겪었다. 연구결과 농악은 20세기 이전부터 사용됐고 1966년 처음 국가지정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될 당시 ‘농악’으로 명칭이 지정돼 현재까지 사용되고 있으며 지역별로 다양하게 사용되고 있는 ‘풍물’ ‘풍장’ ‘매구’ 등의 용어를 모두 아우르는 용어라는 결론이 내려졌다.

 이에 따라 2011년 3월 처음 인류무형문화유산 등재신청서에 명기된 종목 명칭인 ‘풍물놀이’는 올해 2월 최종적으로 ‘농악’으로 변경해 유네스코에 수정등재신청서가 제출됐다.

 유네스코 사무국은 매년 ‘무형유산위원회’ 개최 한 달 전 ‘심사보조기구’에서 권고한 사항을 홈페이지에 공개하고 있는데 ‘농악’에 대해 만장일치로 ‘등재권고’ 의견을 제시했다.

 특히, 유네스코 사무국은 우리나라의 등재신청서를 모범사례로 평가해 농악의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등재에 더욱 힘을 실어줬다.

 11월 24일부터 28일까지 5일간 프랑스 파리 유네스코 본부에서 열렸던 ‘제9차 무형유산위원회’에서 농악의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등재가 최종 결정되었다.

 웃다리 농악의 대표성을 띤 평택농악은 우리나라 농악 가운데 가장 역동성과 연희성이 뛰어난 농악으로 국내무대는 물론 세계무대에서 정통성 있는 농악으로 더욱 가치를 인정받게 될 것이다.

 이와 함께 세계인에게 당당히 내놓을 수 있는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을 보유한 도시로 평택시의 브랜드 가치 향상에도 크게 기여하는 계기가 마련될 것이다.

■ 평택농악의 발생과 문화재 지정

 평택농악의 발상지인 평택시 팽성읍 평궁리는 예부터 지신밟기, 두레굿 등 농악이 발달했다. 이러한 “평택농악”이 전국무대에 선을 보인 것은 한국전쟁 직후 이승만 정부시절 대통령 생일을 기념해 열리는 전국농악경연대회였다.

 평택농악의 초대 인간문화재였던 최은창 명인은 당시 평택군의 요청으로 농악패를 구성해 “평택농악”이라는 이름으로 지금의 광화문인 중앙청 앞에서 열린 이 대회에 참가하여 1958년과 1959년 2회 연속 우승을 차지했다.

 평택농악은 두레농악과 걸립농악을 가장 잘 계승한 웃다리 지역을 대표하는 농악으로 두레농악에서 하던 지신밟기, 두레굿과 더불어 난장굿, 절걸립, 촌걸립 등 걸립패에서 하던 전문연희적 요소를 함께 갖고 있다. 1985년 12월 1일 그 우수성과 정통성을 인정받아 국가지정 중요무형문화재 제11-2호 지정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 ‘파일난장굿’이란?

 정기적으로 열리는 장날 이외에 특별히 열리는 장을 난장이라고 하는데, 난장굿은 이러한 난장에서 벌어지는 놀이판을 말한다. 평택지역에서는 주로 명절을 맞아 난장을 열었는데 “파일난장”, “백중난장” 등이 있었다. 난장이 열릴 때 상인들과 사람들을 보다 많이 끌어 모으고 시장에 활기를 불어넣기 위해 전문적인 기·예능을 가진 농악단체를 초청하여 장터 한가운데서 포장을 치고 공연을 하게 했다.

평택농악은 “파일난장”, “백중난장” 등에서 이러한 난장굿을 주관하고 연희하였다. 난장굿 중에서 초파일(부처님 오신 날, 음력 4월 8일)에 열리는 난장에서 연희를 하는 것을 “파일난장굿”이라고 하였으며, 백중날(명절의 하나로 음력 7월 15일)에 열리는 난장에서 연희를 하는 것을 “백중난장굿”이라고 하였다.

■ 평택농악의 인간문화재 최은창

 지금의 평택농악이 있기까지 큰 업적인 남긴 최은창 선생은 1914년 4월 18일 평택군 팽성면 원정리에서 대대로 농사를 짓던 집안의 태어나 출생 직후 평택농악의 발상지인 평궁리로 이주한 후 마을 두레패 상쇠에게서 꽹과리를 배웠고, 16세 때에는 두레패의 상쇠(농악대의 꽹과리 제1 주자)를 쳤다.

 성인이 되면서 마을단위를 벗어나 전문연희패에서 활동하게 되었으며 나중에는 직접 절걸립 행중을 꾸려서 활동을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최고의 상쇠로, 비나리꾼으로, 장고잽이로 명성을 얻었다. 전문연희패에 몸담아 전국적인 활동을 하는 중에도 평궁리에서 평택농악을 결성하여 현재 연희하는 평택농악의 원형을 완성하는데 심혈을 기울였다.

 1985년 평택농악이 국가지정 중요문화재로 지정받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으며, 평택농악 상쇠 예능보유자가 되었다. 이후 평택농악을 알리고 후진양성에 힘쓰다 지난 2002년 작고하였다.

■ 평택농악의 인간문화재 이돌천

 최은창 선생과 함께 평택농악을 이끌어 온 이돌천 선생은 1919년 5월 26일 천안시 쌍용동에서 태어나 12세 때부터 무동으로 농악을 시작하였으며, 16세 때 마을 상쇠에게서 쇠를 배워 쳤고, 17세 때에는 충북 출신의 박치삼에게 법고를 배웠다.

 18세 때에는 남운룡(南雲龍) 밑에서 법고를 배워 남운룡농악단의 법고수로 활동 했다. 1980년 평택농악을 공식 결성할 때 합류하여 1985년 법고 예능보유자로 지정받아 당대 최고의 법고잽이로 명성을 얻었다. 평택농악에서 활동하면서 천안 흥타령 농악단을 결성하여 천안농악의 활성화에도 노력을 하였다. 평택농악을 알리고 후진양성에 힘쓰다 지난 1994년에 작고했다.

■ 평택농악의 인간문화재 김용래

 평택농악의 현 인간문화재인 김용래 선생은 1939년 4월 19일 충남 천안시 쌍용동에서 태어나 13세 때 난장패에 사미로 들어가 처음으로 농악을 시작했다. 16세부터 대전 송순갑 행중과 안성 남운룡 행중에서 활동하다 18세 때 상모를 배우기 시작했는데 스승이 바로 평택농악의 명인 이돌천 선생이다.

 이후 최고의 법고잽이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고, 무동놀이에도 뛰어나 밑동과 앞뒤곤두 등을 도맡아 하면서 전국적인 활동을 가졌다. 1987년 평택농악 전수교육조교로 지정받았으며, 2000년 평택농악의 예능보유자로 지정받아 현재까지 평택농악의 보존과 전승에 매진하고 있다.

 특히 현재 평택농악에서 연희하고 있는 무동놀이의 체계를 확립하는데 큰 역할을 하였으며, 사라진 무동놀이 기술 복원에도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다음호에 '평택농악, 세계의 신명이 되다!' 두번째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안연영 기자
ptlnew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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