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28(일)
 

- 문화재명: 홍학사비각
- 시대: 조선시대
- 지정번호: 경기도문화재자료 제5호
- 지정일자: 1983년 9월 19일
- 소재지: 팽성읍 본정1길 8-16 (팽성읍 본정리 322)
- 소유자: 이종인
- 관리자: 이종인


■ 삼학사(三學士)의 한 사람, 홍익한 선생의 비를 보호하는 건물

 조선 인조(仁祖) 때의 문신으로 병자호란 당시 최명길(崔鳴吉)이 주장한 화의론(和議論)에 극구 반대하다 윤집(尹集) · 오달제(吳達濟)와 함께 청나라에 끌려가 처형당한 삼학사(三學士)의 한 사람인 화포 홍익한(花浦 洪翼漢)선생의 비를 보호하는 건물이다.

 1964년 본정리의 삼거리 부근에 처음 건립되었는데 1982년에 비를 현재의 장소로 이전하면서 다시 건립하였다. 이 비각은 포의각(褒義閣)이라고도 하는데 본정리 마을 뒤쪽의 꽃산에 있는 선생의 묘서 앞에 자리 잡고 있다.

 정면 2칸, 측면 1칸의 익공계(翼工係) 맞배지붕집(기둥 위에 새날개처럼 뻗어 나온 장식과 옆면에서 보았을 때 ‘人’ 모양의 지붕 집)인데, 사방에는 벽체 없이 홍살만 시설되어 내부가 개방되어 있다. 낮은 장대석(長臺石)기단에 놓은 높은 사각 초석(楚石) 위에 민흘림기둥이 세워져 이익공이 일정형태로 만들어졌고 삼량(三樑)의 지붕 가구가 짜 올려져 있다. 익공과 첨차(기둥 머리나 소로에 얹혀 두 개가 직각으로 교차하여 십자맞춤으로 짜여져 올라가 공포를 형성하는 부재), 화반 등의 세부는 18세기의 형식을 모방한 것이다.

 내부에는 선생의 신도비(神道碑)와 묘비, 아들 수원(수元)의 묘표와 홍익한의 증손자 대성(大成)의 묘표가 있으며 상부에는 1964년의 비각 창건 사실을 기록한 현판이 걸려 있다. 이 비각은 최근에 건립된 것으로 건축사적 측면에서 크게 의미 있는 건물은 아니다.

■ 홍익한의 생애(洪翼漢:1586~1637)

 홍익한의 본관은 남양(南陽). 자는 백승(伯升). 호는 화포(花浦)이다. 홍익한은 진사 이성의 아들로 선조19년(1586)에 현재 팽성읍 함정리에서 출생하여 서울 마포에서 자랐다고 한다.

 월사 이정구의 문인이었으며 광해군 7년(1615)에 생원이 되고, 인조 2년(1624)에 공주행재정시문과(公州行在庭試文科)에 장원급제하였다. 그 후 사서(司書)를 거쳐 인조13년(1635)에는 사헌부 장령(掌令)이 되었다. 1636년 청나라가 조선을 속국시하는 모욕적 조건을 내세워 사신을 보내왔을 때 사신을 죽임으로써 모욕을 씻자고 주장하였다.

 1636년 청의 침입으로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이때 조선은 끝까지 싸우자는 척화파와 백성의 무고한 피만 흘리게 되니 화친하자는 화의론으로 의견이 갈렸었다. 하지만 청군에게 남한산성을 겹겹이 포위당하고 성내에 식량이 떨어지자 결국 강화를 청하기로 하였다. 이 때 청태종은 인조가 친히 나와 항복할 것과 함께 척화론의 주모자를 보내라 하니 인조는 피치 못하여 적진의 삼전도(三田渡)에 나아가 군신의 예를 다한다는 조건으로 강화를 성립시켰다. 청태종은 강화도에서 잡은 포로를 송환한 다음 그들의 진중에 억류하였던 세자, 세자빈과 봉림대군을 인질로 하고 척화론의 주모자 오달제, 윤집, 홍익한을 잡아 심양으로 돌아갔다. 이들을 훗날 삼학사(三學士)라 칭하였다.

 잡혀간 홍학사는 청의 태종 앞에 끌려가 준엄한 문초를 받으며 청의 신하가 되도록 백방으로 설득을 당했으나 그는 “온 세상의 사람들이 형제는 될 수 있으나 천하에 아버지가 둘 있는 자식은 없다. 조선의 신하로서 내가 너희 나라를 황제국으로 칭한다면 아버지가 둘 있는 자식이 되고 말 것이 아니겠느냐. 내가 끝내 버티고 싸우고자 함이 마땅히 신하된 직분일 뿐이다. 다만 이제 신하된 몸으로 위로 임금과 어버이가 계시는데 모두 보호하여 안정하게 하지 못함에 죽도록 원통할 뿐, 더욱이 왕세자와 대군은 포로가 되었고 늙은 어머니는 죽었는지 살았는지 조차 모르니 이 어찌 대장부의 여한이 없을까보냐. 마땅히 충효와 도리를 다하지 못한 죄는 죽어야 옳을 뿐 용서받을 수 없는 것, 비록 만 번 베고 무찌름을 당할지라도 진실로 마음에 달게 여기겠다. 그리고 피를 한번 북에 바르고 혼은 하늘을 날아가서 고국에 돌아가 노닌다면 가슴 시원하겠다. 이밖에는 다시 할 말이 없다. 오직 빨리 죽기만 원한다.” 하여 비장한 최후의 유언을 남기고 이로부터 닷새 후에 갖은 악형과 고문을 당해 마침내 순절하니 나라에서는 그의 충절을 찬양하여 영의정에 추증하고 충정이란 시호를 내렸다.

 홍학사의 시신은 구하지 못해 현재의 팽성읍 본정리에서 혼을 불러 초혼장(招魂葬)을 지내고 그의 충성과 공적을 기리고자 신도비를 세웠다. 그리하여 홍학사 묘에는 심양에서 입고 있던 그의 의관만이 돌아와 부인 양천 허씨와 합장되어있다.

 전설에 의하면 모시고 오던 홍학사의 복장이 압록강을 건널 때까지는 홍학사를 부르면 대답을 하였으나 압록강을 건너와서는 대답이 끊어져 이때 홍학사가 참사를 당했다는 것을 알았다고 한다.

 홍학사 비각은 1726년에 건립한 것이고, 그 비문은 우암 송시열이 지었다고 하는데 글씨가 마멸되어 내용을 알기는 어렵고 더구나 큰 비각의 비문 23행중 왼쪽 모서리가 깨어져서 1행은 소멸되어 있다. 현재 비문 2기가 나란히 서있는데 모두 화강암으로 되어 있으며 큰 비는 높이가 230cm, 폭이 96cm이며 작은 비는 높이가 125cm, 폭이 54cm인데 모두 개석이 앉아 있다.

 원래 유택은 이곳에서 좀 떨어진 함정리에 있었으나 세계2차대전시 일제가 군사시설을 하게 되어 묘의 이장이 불가피하게 되니 1942년 12월경 현재 비각에서 0.8km 떨어진 이곳 본정리 꽃산에다 면내 대동청년단의 이종린, 박세황 주선으로 이장케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묘와 함께 옮겨 왔어야 할 묘비 등의 비석들은 그대로 버려두어 흙과 풀 속에 덮어져 있던 것을 1964년 4월 7일 현재의 비각을 지어 안치케 된 것이다. 그 후 1982년 12월에 당시의 군수가 예산을 주어 비각 전부를 꽃산의 홍학사묘의 옆에 옮겨 놓았고 그 공사는 김의용이 시행하였다.

 세간에서는 홍학사의 집안을 오형문(五刑門)집이라고 하였다는데 이는 화포가 심양에서 목숨을 잃었다는 소식이 집안에 전해지자 부인, 아들, 딸, 며느리가 모두 자결을 했기 때문이라고 홍학사의 문중 내용을 아는 이곳 촌로들이 전하고 있다. 또한 청까지도 3학사의 기개와 지조를 높이 보고 삼한산두(三韓三斗)라는 기념비를 심양에 세워놨다고 한다.

 이 홍학사 비각 외에 광주의 현절사, 강화의 충열사, 홍산의 창열서원, 영천의 장엄서원, 부안의 도동서원, 고령의 운천서원, 평양의 서산서원 등에서 제향을 올리고 있으며 이곳에서는 평택 유도회(儒道會)에서 매년 3월 31일에 제향을 드리고 있다.

※ 자료제공: 평택문화원 향토사연구소

정리 서태호 기자 ptlnew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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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택의 문화재] 홍학사비각(洪學士碑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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