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28(일)
 

조하식(한광고 교사, 수필가)


  밤 비행기를 기다리는 시간은 무척이나 무료하다. 그럴 때 쉬어가는 한국문화박물관의 푹신한 소파. 때마침 쓸 만한 드라마가 나왔다. 제목은 ‘진짜 사랑일까요?’, 젊은 나이에 홀로 코흘리개를 키우는 제자와 얼마 전 상처한 스승과의 러브스토리였다. 서로를 간절히 원하건만 막상 의사표현은 못하는 사이, 이럴 땐 좀 옆에서 나서주면 좋으련만……. 장장 11시간의 탑승. 직항이라서 결코 좋은 건 아니다. 좀 늘어질망정 보다 싼 값에 경유지를 거치는 편이 차라리 낫다는 말이다. 게다가 네덜란드항공의 경우 좌석이 비좁다. 그 불편을 일거에 상쇄한 카드가 있었으니 다름 아닌 기내식이었다. 놀랍게도 여태껏 먹어본 비빔밥 가운데 단연 최고. 천상(?)과 지상을 통틀어 이만큼 맛깔스런 외식은 처음이었다. 고사리를 비롯한 각종 나물에 고추장은 물론 고소한 참기름까지 갖춰 길손을 대접하다니 새삼 화란이란 나라의 괜찮은 품격에 감탄해마지 않았다. 새벽에 내온 야채 오므라이스며 담백한 소시지, 원두커피와 따끈한 빵, 향긋한 과일에 신선한 요구르트는 덤이었다. 명색이 혼인 30주년 기념여행. 고맙게도 제 앞가림을 하는 딸과 아들이 정성껏 마련한 선물이라서 뜻이 더욱 깊다. 애초에 신청하기는 발칸반도를 두루 훑어보는 여정(11박12일)이었으나 아쉽게도 끝내 모객이 되지 않아 부랴부랴 프랑스와 베네룩스로 일정(6박7일)을 바꿨다. 우리 부부의 행복한 나들이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이윽고 서서히 고도를 낮추는 비행기. 밤하늘에서 흘끔 기창 밖을 내려다보다가 궁금한 게 생겼다. ‘KLM’ 항공사의 명칭이었다. 둘러보니 한국인 여승무원은 딱 한 명. 내릴 때 멋쩍은 듯이 응답한 말은 ‘Royal Touch Airline’이었다. 그런데 알고 보니 Touch가 아닌 Dutch였다. 여태껏 영어에 귀를 트지 못한 탓이었다. 오늘날과 같은 문명시대에도 임금을 떠받드는 데는 비단 영국만이 아니었다. 비에 젖은 ‘스키폴국제공항(Schiphol Amsterdam Airport)’의 첫인상은 부드러웠다. 아롱아롱 불빛에 반짝이는 빗물처럼. 청사 안의 동선은 다소 복잡한 느낌이었다. 꽤 쌀쌀한 대기를 쐬며 리무진에 올랐다. 곧바로 프랑스로 향하는 길. 하지만 한참을 달려도 어둑발은 좀체 가시질 않는다. 칠흑에 휩싸인 들판. 평소 차창으로 빨려 들어오는 풍경을 즐기는 나로서는 퍽 답답한 노릇이었다. 대뜸 인솔자에게 그 이유를 캐물은즉 겨울해가 더디게 뜨기 때문이라는 상식 수준의 대답이 전부. 결코 짧지 않은 거리를 두어 시간 내닫고서야 차츰 날이 밝아왔다. 사물을 겨우 분별한 08시 반쯤 반가운 팻말이 보였다. 네덜란드의 로테르담(ROTTERDAM). 그리고 잠시 벨기에의 끝자락을 가로질러 만난 곳은 프랑스 농촌이었다. 상투적이로되 전형적이라는 낱말과 목가적(牧歌的)이라는 수사 말고는 별다른 어휘가 떠오르지 않는 광경. 비록 스페인이나 영국만큼 정교하지는 못할망정 다시금 다채로운 불란서 풍광을 마주하니 감회가 새로웠다.

  첫 방문지는 <오베르 쉬르 우아즈(Auvers sur Oise)>. 세칭 불세출의 화가가 사랑한 마을은 고즈넉했다. 서정적 풍치를 고스란히 화목에 담을 만치. 고작 37살에 요절한 삶. 그는 이곳에서 마지막 10주를 머물며 70여 점의 작품을 남겼다. 고흐가 유숙한 여인숙(Inn)을 중심으로 들어선 상가들. 고흐를 기리는 박물관에서 지척인 그의 생가는 여느 시골집이나 다름없었다. 앙상한 고흐의 동상은 말년의 깡마른 몰골. 뚜렷한 고흐 자신의 흐릿한 생애처럼. 이리저리 헤맨 끝에 들어간 식당(Total Restaurant). 뒤늦은 점심이었다. 배고픈 김에 야채샐러드와 바게트 빵으로 허기를 메우고 나니 큼지막한 돼지고기요리(여기서는 사슴-양-돼지-소의 순으로 인기가 있음)를 내왔다. 아깝게도 식탁에는 음식이 남아돌다니, 가이드의 세심한 안내가 아쉬운 대목이었다. 그런데 이걸 어쩐담? 누꿈하던 빗줄기가 심술을 부렸다. 손수건으로 안경을 가린 채 고흐가 묻힌 묘지로 향하는 시골길. 언덕배기에 자리한 오베르성당은 전지작업이 한창이었다. 볼썽사납게 나뭇가지를 잘라내기에 물어보니 병균을 미연에 방제하기 위해서란다. 그렇지만 뭉툭한 모양새라니 왠지 예술의 나라답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렁주렁 그의 그림들이 걸린 담장을 끼고 도니 연푸른 밀밭이었다. 후줄근한 공동묘지. 프랑스에서는 사후세계에 관한 한 특권을 인정하지 않았다. 전직 대통령마저 범인으로 돌아가는 나라. 고흐는 공원 한쪽에 사랑하는 동생과 잠들어 있었다. 나란히 누운 친형제를 담쟁이덩굴이 촘촘히 옭아맨 형국. 물론 그의 영혼은 창조주에게, 육신은 흙으로 돌아간 채. 기실 그의 부친은 목사였다. 그 역시 한때는 전도사의 길을 걸었다. 하지만 불행히도 그에겐 복음이 없었다. 지구촌에서야 수많은 사람들이 그의 자취를 찾아올지언정 본인은 정작 안식할 고향을 잃었다는 게 서글펐다. <홈페이지 http://johs.wo.to/>

※ 다음호(316호)에는 서유럽 기행 두번째 이야기, '파리한 파리 시내' 편이 이어집니다. 시민, 독자 여러분들의 많은 관심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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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사는 이야기] 서유럽 기행 - 다시 찾은 프랑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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