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28(일)
 

- 문화재명: 충의각(忠義閣)
- 시대: 조선시대
- 지정번호: 평택시향토유적 제5호
- 지정일자: 1991년 7월 11일
- 소재지: 이충동 산 37-1
- 소유자: 강종진

■ 조광조와 오달제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세운 각(閣)

 충의각은 조선 중기의 정치가 정암 조광조(1482~1519)와 삼학사의 한 사람이었던 추담 오달제(1609~1637)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세운 각(閣)으로, 각(閣) 안에는 유허비(遺墟碑:선인들의 자취가 남아 있는 곳에 그들을 기리기 위하여 세운 비)가 세워져 있다. 유허비는 순조 1년(1800) 진위유림들이 이충마을과 동령마을에 있던 조광조와 오달제의 유허에 세운 비로써 오랫동안 ‘오학사 비’라고 불리었다.

 유허비의 규모는 비신 55×16×123cm, 비대 67×49×15cm이다. 유허비의 상부에는 ‘송장(松莊)’이라는 글씨가 전서체로 장식되어 있으며, 그 아래로 조광조와 오달제의 유허지임을 알리는 내용이 있다.

 입석 당시 진위 유림에서 조광조·오달제 선생의 자취가 있음을 길이 전하고자 나라에 청하여 허가를 얻었다고 전하며, 비의 위치는 오달제 선생의 옛 집터가 있는 산 윗부분에 해당한다. 이 비는 1950년대까지 길 옆에 방치되어 있었으나 1960년대부터 동령마을 주민들에 의해 보호·관리되었으며, 1990년에 기와를 보수하고 단청을 다시 하였다.

■ 조광조의 생애(趙光祖: 1482~1519)

 조광조는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효직(孝直), 호는 정암(靜菴)이다. 서울에서 개국공신인 온(溫)의 5대손으로 사헌부 감찰을 지낸 원강(元綱)의 둘째 아들로 성종 13년(1482)에 태어났다. 17세에 어천찰방(魚川察防)으로 부임하는 부친을 따라갔다가 희천에 유배되어있던 김굉필(金宏弼)에게서 수학하였다. 학문으로는 《소학》,《근사록》등을 토대로 경전을 연구하였으며, 이때부터 성리학에 힘써 사림파(士林派)의 영수가 되었다.

 중종 5년(1510) 29세 때 사마시인 진사회시(進士會試)에 장원으로 급제, 개성의 천마산(天魔山), 성거산(聖居山) 등지에서 공부하였으며, 그 후 중종 10년(1515) 성균관 유생들의 천거와 이조판서 안당의 추천으로 조지서사지(造紙署司紙)라는 관직에 임명되었다. 같은 해 가을 알성시(謁聖試)인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성균관 전적(典籍), 사헌부 감찰, 예조좌랑을 역임하고 사간원 정언(正言)이 되었다. 그는 유교의 이념으로써 정치와 교화의 근본을 삼아 왕도정치(王道政治)를 실현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중종 13년(1518) 부제학(副題學)이 되어서는 미신타파를 내세워 소격서(昭格署)의 폐지를 주장하였다. 당시 상황으로는 용납될 수 없는 일이었으나 여러 차례의 논쟁을 거듭한 끝에 중종의 허락을 얻어 폐지시켰다. 그의 도학정치에 대한 주창은 대단한 것이었고 그의 주창으로 당시의 학풍은 변화되어 갔다. 그의 도학정치는 조선시대의 풍습과 사상을 유교적으로 바꾸어 놓는 계기가 되었고 이 시대에는 일반 서민들까지도 주자의 가례(家禮)를 지키게 되었다.

 중종의 신임이 두터워지자 조광조는 혁신정치를 실시코자 현량과(賢良科)를 설치할 것을 간청하였다. 현량과는 당시의 과거제도를 개혁하는 것으로 신진 관리의 발탁을 위해 중국 한(漢)나라의 현량방정과(賢良方正科)를 본받아 제정하는 것으로 1519년에 실시되었다. 천거시취제(薦擧試取制)인 현량과에서 김식(金湜), 안처겸(安處謙), 박훈(朴薰)등 전국에서 28인이 선발되었으며 소장 학자들을 뽑아 조정 각 부문 요직에 배치하였다. 이로 인해 훈구세력들은 기성관료의 기반을 무너뜨리는 일이라 하여 반격의 음모를 시작하였다.

 중종 14년(1519) 대사헌이 되고 세자부빈객까지 겸임하게 되었다. 훈구세력들은 더욱 그를 질시하게 되었으나 신진세력들의 힘을 입어 국정을 도맡아 처리하게 되고 왕도정치의 표방아래 보수 세력인 훈구재상들과 그의 혁신적인 시책에 반대하던 기성관리들은 거의 모두가 탄핵되어 파직되거나 좌천되었다. 또한 조광조는 중종 반정시 공신으로 추대된 인물 중 부당하게 책정된 유자광(柳子光), 성희안(宬希顔)등 정국공신(靖國功臣)들의 공을 삭제하자는 위훈삭제(爲勳削除)를 강력히 주청하였다. 처음에는 허락지 않던 중종도 거센 주청이 계속되자 11월 9일 103명의 공사 중 78명을 삭훈하였다. 이 사건의 피해지인 훈구파의 대신들은 중종 14년(1519) 12월 16일에 기묘사화(己卯士禍)를 일으켜 결국 정치경력이 짧은 신진세력들은 숙청된다.

 조광조가 전라도 화순의 능주(陵州)로 유배되고 한 달쯤  뒤 홍경주 등의 강경한 주장으로 사약을 받고 세상을 하직하니 그때 나이 38세였다. 그 뒤 선조 초 신원되어 영의정에 추증되고 문묘에 배향되었다. 조광조의 본래 살던 집은 한양이었지만 집안의 전장(田莊)이 이충동에 있었기 때문에 어린 시절 이곳에 거주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 오달제의 생애(吳達濟: 1609~1637)

 오달제의 집은 동령마을 성재 아래에 있었다. 오달제는 조선시대 3학사의 한 사람으로 광해군 원년인 1609년에 태어났으며 본관은 해주(海州)이다. 자는 계휘(季輝), 호는 추담(秋潭)이라 불렀으며 오윤혜(吳允諧)의 아들로 용인의 신갈이 고향이었지만 외가가 오좌동 수성 최씨여서 상속받은 전장과 집이 이충동 반지산 기슭에 있었다. 19세 되던 해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한 바 있으며 인조 12년(1634) 26세로 별시문과에 장원급제하였다. 전적·병조좌랑·시강원사서·정언·지평수찬을 거쳐 1636년 부교리(副校理)가 되었다.

 이 무렵 후금의 세력이 날로 강대해져 칭제건원하고 국호를 청으로 고치고 조선을 위협하였다. 명나라는 이미 그 세력이 약화하였으며, 후금은 조선이 은연중 명나라를 지원하면서도 사절의 내왕조차 없다는 구실로 1627년 침공을 감행해오니 이것이 곧 정묘호란(丁卯胡亂)이다. 그 후 후금은 명나라를 공략하는 한편 조선에게는 식량과 병선 등 많은 물자를 요구하니 조선에서는 청과 손을 잡아야 한다는 주화파(主和波)와 청은 무조건 배척해야 한다는 척화파(斥和波)가 대두하였다. 오달제는 홍익한, 윤집과 함께 척화주전론을 주장하며 청과의 화해를 끝까지 반대하였다.

 1636년 청태종은 척화론자를 압송해서 보낼 것을 요구하였고, 조선이 이를 듣지 않자 10만 대군을 이끌어 재차 침공해왔다. 강화론과 주전론이 맞서 논쟁을 거듭하였으나 성내에 식량이 떨어지자 결국 강화를 청하기로 하였다. 청태종은 강화도에서 잡은 포로를 송환한 다음 그들의 진중에 억류하였던 세자, 세자빈과 봉림대군을 인질로 하고 척화론의 주모자 오달제와 윤집을 잡아 심양으로 돌아갔다. 적장 용골대(龍骨大)는 오달제의 기개와 뜻을 꺾기 위하여 처자를 거느리고 청나라에 와 살 것을 권유하며 회유도 하고 협박도 하였지만 그는 죽음보다 두려운 것은 불의(不義)라 주장하면서 저들의 말을 좇으면 오랑캐가 되고 마는 것이라 하여 끝내 굽히지 않았다.

 마침내 심양성 서문 밖에서 윤집, 홍익한과 함께 처형을 당하니 세상에서 이들을 삼학사(三學士)라 부르며 그 절개와 충성심을 높이 기리게 되었다. 오달제가 심양에서 처형당하자 기이하게도 그가 태어난 원삼면 학일리(學日里) 마을에는 모든 풀들이 말랐다고 하는데 이로 인해 지금도 마을 이름을 고초골(枯草谷)이라 부른다.

 삼학사의 절개와 충의는 효종조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포상되었는데 좌승지·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충렬(忠烈)이라는 시호가 내려지고, 광주(廣州)의 절현사(節顯祠), 평택의 포의사우(褒義祠宇), 홍산(鴻山)의 창렬서원(彰書烈院), 영주의 장암서원(壯巖書院), 고령의 운천서원(雲川書院)에 제향되었다.

※자료출처: 평택문화원 향토사연구소

정리 김선우 기자 ptlnew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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