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28(일)
 

조하식(한광고 교사, 수필가)

  가이드가 파악한 베트남은 자못 예리했다. 겉으론 역동적이나 속으론 게으른 민족성. 더울 때면 아예 셔터를 내리고 드러눕는 행태만으로도 충분히 알만한 일이다. 하지만 막상 기업을 꾸려가기란 까다롭기 짝이 없단다. 타인 명의가 아니면 공장 하나, 구멍가게 하나를 맘대로 차릴 수 없이 구축해 놓은 행정처리 절차가 그것이다. 가까이 접촉하면 할수록 결코 만만한 족속은 아니라고 강조했다. 외국인의 비자를 해마다 갱신해줄망정 영구 이민 자체를 불허하는 마당에 교민들이 살아남을 방도는 특유의 악바리 근성밖에는 없다는 설명이다. 동포들을 괴롭히는 건 뇌물로 얼룩진 공무원사회의 카르텔. 각종 규제를 손아귀에 틀어쥔 채 뇌물을 챙기는 횡포였다. 반면 관공서의 출퇴근 시간은 07:00~16:00, 학생들 등교는 08:00, 회사원 출근은 09:00이어서 나름 합리적이다. 남다른 관심사는 베트남의 학제였다. 물었더니 우선 의과계열의 수학연한은 한국과 똑같았다. 방학은 연간 한 번뿐으로 6~8월에 몰아서 쉬는데 병역이 면제되는 4년제 대학의 진학률이 12%에 불과하지만 개방체제인 전문대를 거쳐 만학도로 학문에 일가를 이루기도 한다니 열려있는 시스템이다. 아직도 중학교까지 2부제로되 신분 상승을 향한 학구열만은 우리네 못지않다. 개인학습은 발달한 반면 검정고시제도를 두지 않았고, 높은 교육열에 비해 교사 처우는 열악한 편이란다. 프랑스가 남긴 유산은 여럿이었다. 첫째는 조경술, 아닌 게 아니라 중앙분리대에 심은 가로수와 꽃 배열이 예사롭지 않다. 둘째는 치과의술로 프랑스에 유독 가지런한 치아가 많다는 말에 이해가 갔다. 셋째는 바게트 빵을 만들다보니 제빵술이 수준급. 그밖에 유화가 유행일 만치 갤러리들이 구색을 갖추고 있다고 소개했다.

  아울러 가이드가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송한 인물이 있었다. 키 160cm가량의 ‘보 응우옌 잡’ 장군이 장본인. 미국 언론이 20세기 최고의 명장으로 꼽은 그는 1960년대 프랑스 방송과의 인터뷰에서 “우리 힘의 원천은 도덕성과 인민의 지지에서 나온다. 인민의 마음만 단결시키면 소국이 대국을 이길 수 있다.”라고 말했다. 최종 계급은 대장으로서 인도차이나 전쟁에서 프랑스군을 무찔렀고 베트남 전쟁에서 미군을 물리친 영웅이다. 그의 투철한 군인정신을 군대내 책자에서도 비중 있게 다루고 있는 바, 눈길을 끄는 대목은 초등학교를 마치고 프랑스에 유학하던 중 학생 시위를 주도하다가 퇴학당한 이력서다. 22세에 하노이대학에 들어가 역사학과 경제학을 전공했고 잠시 교사를 하다가 본격적으로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유년시절 유난히 군사서적을 좋아해 ‘손자병법’과 ‘전쟁론’에 큰 영향을 받았고, 이후 공산당에 가입하지만 프랑스 당국의 눈 밖에 나면서 수년간의 감옥살이를 거쳐 중국에 도피하던 중 호치민을 만나 함께 강경한 무장 투쟁 노선을 걸었다. 아이러니는 실제로 그 시기 장제스 지배 하의 군사학교(윈난강무당)에서 미군의 군사훈련을 받았는데 결과적으로 미국은 제 품안에서 호랑이 새끼를 키운 셈이었다. 이처럼 역사의 도도한 흐름은 때로 자충수에 의해 반전이 일어나곤 한다. 물론 이마저 원인 없는 결과물이라고 치부해 풀어내기란 쉽지 않다. 실재하시는 조물주의 섭리로 해설하는 편이 훨씬 합리적이다.

  1944년 중국에서 귀국한 그는 12월부터 몸소 게릴라전을 이끌었고, 일본이 항복하자 이 틈새를 놓칠세라 호치민은 베트남 인민공화국의 수립을 선포했다. 곧바로 프랑스가 베트남에 대한 야욕을 드러내면서 잡 장군은 베트민군(속칭 베트콩)을 이끌고 대승을 거두게 되는데, 결국 베트남이 남북으로 갈라지면서 미국을 등에 업은 남베트남과 베트민 사이에 제2차 베트남 전쟁이 시작되었다. 이때 잡은 총사령관 겸 국방장관을 맡아 공산군 병력을 총지휘했고 승리를 따냈다. 양차 대전을 거치며 그가 얻은 별명은 ‘눈 덮인 활화산’. 비록 민병대 수준인 베트콩과 빈약한 정규군을 거느리고 그가 구상한 작전 능력을 맘껏 펼치기는 어려웠지만, 차츰 미군의 사기는 떨어졌고 미국 내 반전 여론이 비등하면서 적군을 협상장으로 이끌어내는 정치적 성과를 거둘 수 있었다. 2차 대전 종전 후에도 여전히 베트남을 식민지로 두려하던 프랑스로서는 1953년 북부 국경도시 디엔비엔푸에 대규모 군대를 투입하고서도 베트남에 의해 여지없이 무너지고 말았다. 그 ‘디엔비엔푸 전투’를 프랑스 전사(戰史)에서는 가장 치욕적인 패배로 기록하고 있다. 잡 장군이 내세운 승리의 비결은 이른바 3불(不)전략. 그는 첫째 적들이 원하는 시간에, 둘째 적들이 싸우고 싶어 하는 장소에서, 셋째 적들이 예상한 방법으로 절대 싸우지 않았단다. <홈페이지 http://johs.wo.to/>

※ 다음호(311호)에는 베트남 기행 다섯번째 이야기, '붕타우는 휴양지' 편이 이어집니다. 시민, 독자 여러분들의 많은 관심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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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사는 이야기] 베트남 기행 - 베트남전의 영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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