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29(월)
 

- 문화재명: 만기사철조여래좌상(萬奇寺鐵造如來坐像)
- 시대: 고려시대
- 지정번호: 국가지정보물 제567호
- 지정일자: 1972년 7월 22일
- 소재지: 진위면 진위로 181-82(진위면 동천리 548 만기사)
- 소유자: 만기사
- 관리자: 만기사

■ 고려초기, 전형적인 고려시대의 불상양식

 철조여래좌상은 진위면 동천리에 위치하고 있는 조계종 사찰인 만기사의 대웅전안에 모셔진 고려 초기의 불상으로 전형적인 고려시대의 불상양식을 나타내고 있다.

 만기사는 고려 태조 25년(942년)에 남대사에 의해 창건된 것으로 알려졌다. 본래 위치는 현재보다 1km정도 떨어진 동천리에 있었다고 하나 이러한 사실을 알려주는 기록은 전해지지 않으며 다만 옛 절터에 일부 유지(遺址)가 남아 있었다고 한다. 지금은 나무가 우거져서 찾기가 쉽지 않다. 옛 절터에서 현재로 위치를 옮긴 시점은 19세기쯤이라 하는데 정확한 사유는 알 수 없다. 절 경내에는 신라 말에서 고려 초기의 수법으로 판단되는 석조여래좌상이나 석등의 부재들이 흩어져 있는 점으로 이 절의 창건시기를 미루어 알 수 있게 한다.

 본래의 절이 폐사(廢寺)되고 옮겨지는 과정에서 불상을 받치는 대좌(臺座)와 광배(光背)는 없어지고, 불신만 남아 있는 상태이며 오른팔과 양 손도 따로 떨어져 새로 만들어 끼운 것으로 본래의 모습에서 많이 변형되었다. 불상의 정수리 부근에는 상투 모양의 머리(육계)가 큼직하게 있다. 갸름한 얼굴에 이마에는 백호가 있으며, 반쯤 뜬 눈과 가름한 코, 근엄하게 다물고 있는 입, 뚜렷한 삼도(三道) 등 이목구비가 신라 말 고려 초의 강건한 호족의 기상에서 점차 귀족화 되어가는 과도기적 양식을 느끼게 한다.

 법의는 오른쪽 어깨를 드러내고 왼쪽어깨 에만 걸치고 있으며 어깨는 거의 수평을 이루면서 넓은 편이다. 어깨 부분에서는 크게 접어 계단식의 주름을 만들었고, 팔과 다리 부분에도 주름을 표현하였는데 매우 형식적이다. 오른손은 무릎 위에 올려 손끝이 땅을 향하고 있으며 왼손은 배 부분에 놓고 있는 모습이다. 불상의 크기는 높이가 142.5cm, 어깨의 폭이 58cm이다. 상체가 약간 긴 편이나 전체적으로 비례가 알맞은 편이어서 안정감이 있다. 당당한 형태 이지만 도식적인 옷 주름의 표현과 단정해진 얼굴 등에서 고려시대 불상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 9세기 선종과 함께 유행한 비로자나불의 형식

 철불(鐵佛)은 시기적으로 신라 말 고려 초기인 9세기 중엽 이후 호족 세력이 대두하고 선종(禪宗)이 지방을 중심으로 발달하면서 만들어진 불상이다. 만기사에 모셔진 철조여래좌상은 신라 말 고려 초의 철불 중 대표적이라고 할 수 있는 철원 도피안사의 철조여래 좌상보다 제작 연대가 늦고 규모도 작다. 그보다는 규모면에서는 훨씬 크지만(288cm) 시기적으로는 비슷한 경기도 광주의 춘궁리 철불과 비슷한 분위기 다. 철원 도피안사의 철불이 강하고 단단한 근골, 강한 눈매, 강건한 기상에 9세기 선종과 함께 유행한 비로자나불의 형식을 갖춘데 비 하여, 춘궁리 철불과 만기사 철조여래좌상은 10세기에 나타난 항마촉지인의 특징이다.

 부처의 수인(手印:불상의 손 모양)에서 비로자나불 이 하고 있는 지권인(智拳印)은 “부처님의 진리가 태양처럼 우주에 가득 비친다.”라는 의미인데 비하여,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은 “석가모니가 부다가야에서 모든 잡귀를 물리치고 도(道)를 이루었던 때”를 말한다. 이와 같은 수인은 이 철불의 조성 시기가 고려가 후삼국을 통일 한 후라는 시대적 배경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

※ 자료제공: 평택문화원 향토사연구소

정리 김선우 기자 ptlnew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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