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5-21(화)
 

조하식(한광고 교사, 수필가)

  눈을 뜨자마자 창문을 여니 밤새 단잠을 방해하던 에어컨 환풍기 소리가 더욱 요란하다. 뒤꼍에 수영장이 있고 주차장이 넓건만 옆으로 기차가 지나가고 큰길이 바로 곁이어서 도회지의 소음을 피할 길은 없었다. 게다가 새벽 두 시가 넘도록 옆방의 TV 수상기는 거푸 떠들었으니 잠을 설칠 수밖에. 하지만 어쩌랴, 이런 게 후진국의 여정인 것을. 예배를 드리고 마주한 아침 식탁. 열대나라임에도 과일 한 쪽조차 없다. 다행히 흰죽이 있어 그런대로 빈속을 채웠으나 뱃속이 허하기는 매한가지. 방에 들어와 컵라면을 하나씩 들고나니 얼마큼 포만감이 들었다. 창밖으로 뵈는 교회 첨탑. 그 앞에 자리한 학교에 세로로 내걸린 플래카드에는 큼지막하게 P.M.M.S.라고 씌어있다. 때마침 조회시간. 학생이라야 기껏 100명 미만이었다. 허름한 건물을 보노라니 귀족풍과는 동떨어졌고, 소규모인 걸 보면 엘리트를 양성하는 듯한데 어딘지 어설프게 느껴진다. 초등학교는 여전히 2부제로 돌아가고 초등학생부터 대학생까지 죄다 교복을 입는단다. 한쪽 구석에 국기와 주기를 나란히 매달아 놓았다.

  오늘 일정은 <따가이따이(Tagaytay)>. 홍보지를 들추니 세계에서 가장 작은 활화산(기네스북의 기록)이다. 등산이 아니라 각자 조랑말을 타고 올라간다고 했다. 예상 이동거리는 두 시간 남짓이었으나 지독한 교통체증을 만나 거의 갑절이나 걸렸다. 하지만 복병은 딴 데 있었다. 바뀐 가이드가 다른 일행의 경비 정산을 꺼내면서 분위기가 이내 싸늘해지고 말았다. 얼마간 침묵이 흐르고 가이드가 나왔다는 랏사대학교(본인 말로는 돈은 있고 공부하기 싫은 부류가 다니는 곳)를 지나 복잡한 마닐라시내를 벗어나니 힘겹게 살아가는 농민들의 실상이 속속 드러난다. 끊어질 듯 이어지는 양철때기 판잣집 동네. 빨리 더워지고 빨리 차가와져 함석을 선호한다는데 백번을 생각해도 그게 결코 단점일지언정 장점은 아닌 것 같다. 단지 어딜 가나 염분이 많아 지하실을 팔 수 없다는 말에는 쉬이 수긍이 간다. 가옥은 대부분 허름하고 과수농사를 짓는 밭뙈기는 별반 기름져 뵈지 않았다. 이따금 어슬렁거리는 사람들이 눈에 띄지만 애써 땀 흘려 일하는 농부들을 구경하기란 쉽지 않다.

  여기서 택시를 탈 때는 잔돈을 반드시 준비하란다. 듣자니 현지어가 능통하고 두둑한 배포가 있다면 모를까 아예 거스름돈을 내주는 법이 없다는 정보였다. 기막힌 일은 시비의 책임을 고스란히 손님에게 떠넘기는 풍조. 속이는 사람보다 속는 사람이 더 바보라는 비논리가 지배하는 곳이니 한마디로 불합리하다. 문제는 분통 터지는 경우가 일상사가 되고 만 터. 그러고 보니 터키의 무슬림들도 똑같은 소리를 했더랬다. 덧붙여 온갖 사치로 악명 높은 이멜다 여사를 들먹였다. 그녀는 단 두 가지만 국산을 썼다는데 커피와 진주인즉 네스카페의 원산지가 여기여서고 진주의 질이야말로 세계 최고여서라 했다. 버스가 한적한 시골길로 접어들었다. 얼마 후 가이드는 열대과일을 시식하자며 차를 세웠다. 자그마한 바나나와 속이 고깃살을 닮은 과일을 까주며 늦은 점심에 대비하란다. 그나저나 야산을 깎아 구불구불 이어지는 내리막길을 속력을 줄이지 않고 내닫는 바람에 이리 쏠리고 저리 흔들리는 바람에 몸뚱어리가 괴롭다. 그렇게 얼마를 더 내려가니 산 너머로 작은 섬이 보이고 가까이 호수가 다가왔다. 여기가 바로 뉴욕타임스에서 소개한 죽기 전에 꼭 가봐야 할 여행지 1위로 꼽은 <따알화산(Taal Lake)>이었다.

  나름 꾸미려고 애쓴 정원을 거쳐 도착한 선착장. 눈앞에 나타난 산자락이 한국과 엇비슷하다. 부드러운 능선이 그렇고 은은한 연록색이 그랬다. 따알호수에서 불어오는 산들바람을 가르며 30여 분 필리핀의 전통 배를 타고 들어가니 관광객들로 북적인다. 섭씨 30도라고는 하지만 체감온도는 그리 높지 않다. 당장 부닥친 문제는 흩날리는 흙먼지에 뒤섞여 당나귀들이 연신 풍기는 노린내. 매니저가 줄을 세운 채 힘주어 말 타는 요령이랑 마부와 호흡을 맞추는 법을 설명했지만 막상 올라타서는 별로 도움이 되지 않았다. 성미 급한 마부가 지나치게 서두르는 통에 하마터면 말 잔등에서 떨어질 뻔한 위기를 겪어야 했다. 걱정거리는 아내였다. 남자인 내가 이리 힘들거늘 가녀린 여자의 몸으로 얼마나 힘겨울까를 헤아리니 내릴 때까지 내내 속이 편치 않았다. 그때였다. 반갑게도 저 멀리 산등성이에 아내를 태운 나귀가 보이기 시작했다. 그 장면을 놓칠세라 나는 잽싸게 카메라의 줌을 당겨도 보고 놓아도 보며 뜻밖에 안정된 자세로 올라오는 걸 확인하고서야 마음이 놓였다. 무사히 당도한 아내를 반가이 맞으며 괜찮으냐고 물으니 의외라 싶게 태연하다. 그녀의 무딘 운동신경으로는 말 잔등에서 버텨내기가 그리 쉽지 않았을 텐데 말이다. <홈페이지 http://johs.wo.to/>

※ 다음호(298호)에는 '필리핀 기행: 칼데라호수' 편이 이어집니다. 시민, 독자 여러분들의 많은 관심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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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사는 이야기] 필리핀 기행 '따가이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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