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30(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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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하식 수필가·시조시인, Ph.D.

일찌감치 시외버스에 올라 강남 한복판에 내릴 때만 해도 뭔가 다르다는 느낌은 들었다. 대체로 걸리적거리는 게 많지 않은 보행로도 그렇거니와 줄지어 늘어선 건조물들이 나름 세련미를 갖추고 있었으니까. 곧바로 올라탄 광화문 방향의 시내버스 또한 승차감은 합격점. 그런데 남산을 넘어가는 차창 밖 풍경은 오래된 병풍에 가까웠다. 이곳을 떠난 지 어언 한 세대가 흘렀건만 그동안 바뀐 게 없는 건지, 아니면 내 눈에 비친 오늘이 어제를 그리워하는지 아리송한 일이로다. 우리 부부는 하차 지점을 앞당겨 남대문을 갓 지난 지점에서 내렸다. 이를테면 실시간 화폭의 보폭을 대폭 넓힌 터인데, 고맙게도 중간에 들른 은행지점 화장실은 여태껏 이용한 편의시설 가운데 단연 으뜸이로되, 굳이 대로변 광장을 파헤쳐 전면 재시공했다는 광화문공원은 거의 낙제점이다. 눈에 익은 교보문고를 그냥 지나치고 정부서울청사를 애써 외면한 채 주위를 흘끔거린 거 말고는 딱히 소환할 게 마뜩잖았다는 말도 빠뜨릴 수 없다. 식상한 나그네를 물끄러미 응시하는 세종대왕상과 이순신 장군상. 두 분은 작금의 이 나라를 어떤 심경으로 바라보실까?


청와대를 향해 걷는 도중에 잠시 경복궁 내 옛 정원을 둘러보았다. 그래서일까? 궁궐 동편을 휘감고 걸어가는 동안 마음이 편치 않았다. 담장을 수리하는 인부들의 전문성이 현저히 떨어질뿐더러 게을러 뵈기까지 했으니 말이다. 도대체 떨어뜨리는 횟가루에 묻혀 죽어가는 맥문동 군락은 어찌할 셈이람? 기실 이번 정부를 맡은 이들이 청와대를 내치며 내뱉은 언사는 퍽 무모했다. 주권을 가진 국민은 단 한 번도 청와대를 국민 품으로 돌려달라고 한 적이 없지 않은가. 애당초 인수위라는 데서 국방부는 물론 합참본부 예하 기관들을 점령군처럼 줄줄이 내쫓아버린 갑질도 모자라 취임 첫날부터 마치 북한을 따라 하듯 꽃을 들고 달려가도록 종용한 연출부터 연일 밀려드는 빤한 민원 처리까지 부실투성이였기 때문이다. 총 1조 원에 달하는 연쇄 이사비용(추정치)을 전 부처에서 막 끌어다 쓰면서도 국민의 기본적인 알 권리는커녕 외교부 공관을 내친 뒤 대통령 관저를 옮기는 과정에서 누출한 온갖 불법적 사례는 추후 감사와 수사를 통해 철저히 밝혀내야 할 지점이렷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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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와대 본관 앞에 선 조하식 수필가·시조시인

 

여유가 있어 청와대 사랑채를 돌아보고 경내로 들어갔으나 아직도 입장시각은 한참 전. 내친김에 동선을 바꿔 청와대 외곽 담장을 끼고 오르는 산행길에 나섰다. 촘촘히 박힌 경비초소들이 눈에 좀 거슬리긴 해도 눈 아래 경관이 빼어나니 고점을 매길 만했다. 이윽고 춘추관을 지나 뉴스 영상을 통해 보던 대정원이 관람객을 맞았다. 차례로 청와대 본관으로 들어가니 누구의 발상인지 중앙계단에 어두운 카펫을 까는 바람에 칙칙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말았다. 휑한 집무실보다는 영부인의 응접실에 더 정감이 가는 거야 어쩔 수 없더라도 나중에 지은 상춘재에마저 선뜻 눈길이 가지 않는다면 이는 외양을 떠나 건축미가 뒤떨어진다고밖에 다른 해명이 필요할까? 문외한의 눈동자에 들어온 상춘재 역시 고아한 한옥의 자태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 실망감은 관저에 가서는 숫제 절망감으로 나락(얽거나 감아서 뭉뚱그림)했다. 한눈에 여름나기는 무덥고 겨울나기는 매서운 구조였기 때문에. 게다가 요즘 자주 써먹는다는 영빈관도 건축학적으로는 내어놓을 만한 게 없으니 잔뜩 기대감을 안고 찾아온 외빈들에게 면이 설지 의문스럽다. 아닌 게 아니라 대충 한 바퀴 훑어보니 별 볼 일이 없더라는 전언이 허언만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이제는 대통령 관저를 세종시에 서둘러 마련해야 마땅하다. 우리나라만이 지닌 고전미에 정치한 섬세미를 얹어 새로운 한옥의 진면목을 선보이라는 주문이다. 천하제일복지는 원래부터 정해진 텃세가 아니라 애써 가꿔가는 터전임을 알려야 한다. 덤처럼 청와대를 찾아가다 만난 명소들이 정작 청와대를 돌아보고 남은 기억보다 뇌리를 지배하고 있다면 문제가 아닌가. 기껏 청와대를 거닐며 스멀거리는 일들로 인해 그 잡념이 내내 사그라지지 않더라는 쓴소리다. 만에 하나 여기저기 심어 놓은 기념 식수들이 없었다면 그 역사적 의미마저 한껏 퇴색되었겠다는 노파심인 게다. 바로 옆 유서 깊은 왕궁처럼 한 나라의 상징적 장소로 그 가치를 인정받으려면 과학적 보존과 체계적 관리에 심혈을 기울여야 하리라. 비록 미확인 정보이긴 하지만 유사시를 대비한 지하 벙커나 비상 탈출로 같은 비밀장소가 있다면 부디 노출하지 않기를 권한다. 그리 멀지 않은 거리인데도 어쩌다 서울에 행차하는 날이면 나른함이 진한 건 왜일까?


■ 프로필


- 고교생에게 국어와 문학을 가르치며 ‘수필집·시조집·기행집’ 등을 펴냈습니다.

- 퇴임 후 기고활동을 이어가면서 기독교 철학박사(Ph.D.) 학위를 받았습니다.

- 블로그 “조하식의 즐거운 집” http://blog.naver.com/johash을 운영합니다.

- <평택자치신문>에 “세상사는 이야기”를 14년째 연재하는 중입니다.


※ 다음호(704호)에는 ‘시코쿠 가가와 기행 - 자연을 방불한 인공미’가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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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사는 이야기] 청와대 탐방 뒷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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