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2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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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우 가족행복학교 대표, 평택성결교회 원로목사

사람은 기억하는 존재요, 추억하는 동물이다. 특히 유교권 나라들은 조상에 대한 도리로써 추도일, 즉 제사를 지냄으로 조상을 추억하고 역사를 이어간다. 양반 문화가 자리 잡은 우리나라는 심할 정도로 가문과 조상의 공적을 길이 전승·보존하고 싶어 했다. 우리 형제들은 얼굴도 뵌 적이 없는 조부님의 독립운동 이야기를 아버지를 통해 듣고 지금까지 그 공적을 기억하며 추도식을 지키고 있다. 그리고 국가로부터 조부님의 공적을 인정받아 유공자 자손이 되어 그 정신을 이어가고 있다.


유대인들은 수천 년에 걸친 유랑생활과 차별과 박해를 받아 살아왔고, 조상들의 그 고난의 역사를 기념하고 추억하는 절기가 많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 나치정권에 의해 6백만 명이 독가스실에서 집단 학살을 당했다. 그 역사를 잊지 않기 위해 홀로코스트라는 기념관을 만들었다. 그 입구의 현판에 유명한 구절이 쓰여있다고 한다. “우리는 용서하지만 잊지는 않겠다”


이태원 참사가 일어난 지 1주년이 되었다. 우린 무엇을 기억하고 무엇을 추모할 것인가? 이런 시점에 그렇게 죽어간 군중들의 함성, 소리 없는 함성을 생각하며 의미 찾기를 위해 고민해 보자. 억울한 죽음, 청춘들의 좌절, 살아남은 가족들의 한, 즉 자살생존자라는 말이 있듯이 피해생존자의 한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기억해야 하는지.


그날의 비극은 군중이 모여든 가운데 일어난 참사였다. 그 많은 사람들이 좁은 골목길에서 엉키고 밀치면서 쓰러졌고, 압박을 받아 질식을 하거나 쇼크로 심장이 멎어 청춘들의 생명을 앗아 갔다. 죽음의 순간, 그들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 소리 없는 함성의 의미를 다시 챙겨보자. 군중이 몰려올 것이라고 예측은 했으나 만일의 사고에 대비하는 공권력은 부재했다. 


일차적으로 상기해 볼 부분은 우리가 살아가는 공간이 자유로운 시민 생활이 보장된 사회인가라는 점이다. 급격한 경제 성장은 이루었으나 시민사회를 위한 안전과 위기관리에 허점이 많았음이 사실이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친다’는 속담은 알아도 대형 사고가 일어난 후에 유사한 사고가 반복되어 온 것도 사실이다. 왜 우리는 건망증 환자로 살아가고 있을까? 누군가는 깨어서 위험을 예고하고 나팔을 불고 경고해야 했었다. 이제라도 경고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할 수 있도록 인적 개선이 있어야 할 것이다.


다음으로 생각해 볼 점은 군중심리에 매몰되어 가는 군중으로부터 한 걸음 비켜나 보는 일이다. 그날도 사람 구경을 위해 사람들이 거리를 메운 게 아니었던가? 우리와 색다른 축제 문화에 대한 호기심이 군중이라는 무리를 짓게 했다. 젊은이는 호기심이 강렬한 시기를 사는 자들이다. 이것이 세상을 변화시키기도 하고 발전시키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하지만 무분별한 문화 유입은 정체성을 잃게 할 수도 있다. 지금이라도 그날의 참사처럼 밀려오는 문화에 압사당하지 않았으면 한다. 우리 것으로 승화시킨 건강한 문화를 창출해 보자.


그리고 나아가 개인과 사회를 위한 철학적 사유가 필요하다. 예수의 경우를 생각해 보자. 그는 언제나 무리에 둘러싸여 있었지만 무리로부터 안전거리를 유지했다. 안전한 공간을 확보했다는 말이 아니란 것은 짐작했을 것이다. 가령 갈릴리호숫가에서 무리에 둘러싸여 진퇴양난에 빠졌을 때 예수는 홀연히 어부의 작은 배에 올라 육지 쪽을 향해 강론을 펼쳤다. 상상으로 그림이 그려지지 않는가? 


이런 행동은 우리에게 군중으로부터 한 발 나와 먼저 자신을 바라보게 한다. 이어서 무리를 바라보게 한다. ‘군중 속의 고독’이라는 말은 현대인은 군중 속에 묻혀 있어도 개인적으로는 여전히 고독하고 고립된 존재에 불과하다는 말이다. 인간은 개체요 독립된 존재이기 때문이다. 누구도 나를 대신할 수 없고, 내가 그들을 대신할 수도 없다. 나만의 고유한 세계가 있다. 나만의 특화된 영혼이 있다. 그래서 외롭고 고독한 존재다. 예수는 때때로 한적한 곳을 찾았다. 자신을 깊게 바라보며 고유한 창조적인 시간을 가졌다. 그런 시간 속에서 매우 역설적인 진리를 깨달았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원수를 사랑하라. 낮아져라. 죽어야 산다.” 그리고 그 길을 묵묵히 걸어갔다. 십자가를 지나 부활을 실현했다.


1년의 시간이 흘러갔다. 우린 어디에 서 있는가? 여전히 심각한 위험불감증 사회에 살고 있는 건 아닐까? 아직도 군중심리에 매몰되어 정체성 상실의 시기를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나답게 창조적인 영역을 구사하며 군중으로부터 한 발 벗어나 고유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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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우 칼럼] 군중과 예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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