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30(화)
 


세상사는 이야기 증명사진.jpg
조하식 수필가·시조시인, Ph.D.

◇ 생태적 삶이란 무엇인가?


이필렬 교수의 『생태적 삶을 찾아서』라는 책에는 퍽 흥미로운 접근법이 보인다. 글쓴이의 다소 뜬금없는 문제 제기는 자연인이 추구하는 웰빙(well-being)은 상생을 해치는 행위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바람직한 인간의 삶이란 타인들과 더불어 걸어가면서 해법을 찾아야 한다는 일갈이다. 필자 역시 이러한 견해에 동조하는 바가 크다. 사안을 굳이 기독교 세계관의 렌즈로 들여다보지 않더라도 모름지기 사람이란 각자에게 주어진 소명에 따라 자신의 분량만큼 사회에 이바지하며 사는 것이 옳다고 본다. 그렇다면 수도원이나 절간에서 세상과 단절한 채 종교적 삶을 영위하는 이들은 어떻게 볼 참인가? 이 문제에 대해서는 대뜸 반론이 가능한 지점이다. 참여 민주주의의 원리를 원용한다면 보다 명쾌한 지침을 발견할 수 있다. 지구촌에 두 발을 딛고 사는 동안에는 치유 목적이 아닌 한 담장을 두른 채 세상을 등진 듯한 모습은 이기적 모양새라고 간주할 수 있다. 그와 동시에 차제에 웰다잉(well-dying)이라는 낱말의 의미를 정립하고 넘어갔더라면 더 좋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른바 생태(生態, ecology)란 무엇인가? 그 기본개념부터 정리하면 생물(인간, 동물, 식물)이 자연계에서 살아가는 모습으로 생명체 사이, 나아가 생명체와 환경 간의 관계에서 상호의존성을 나타내는 상태를 가리킨다. 따라서 생태개념은 모든 생명체는 서로 유기적인 관계를 맺고 있으므로 지구환경과도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거니와, 특정한 생물체에 나타나는 심각한 변화(멸종 포함)는 직접적인 공생관계나 먹이사슬에 놓여있는 다른 생물체는 물론 주변 환경 너머의 보이지 않는 영역에까지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는 관점에서 만들어진 용어라고 볼 수 있다. 그 유래를 추적하면 생태학의 뿌리는 자연사로부터 시작되었고, 혁명적 농법이 움튼 뒤부터는 가축이나 곡물을 어떻게 생산할지에 대한 상식도 필요했을 것이다. 그에 앞서 기원전 4세기경 아리스토텔레스는 ‘Historia Animalium’에서 들쥐와 메뚜기에 대한 설명을 시도했다는 기록이 남아있어 차츰 유해동물 퇴치를 위한 방도를 고심하던 끝에 현대적 생태학으로 진보했다는 시각이다. 그러니까 20세기에 이르러서야 생태학이란 학문은 어엿한 과학의 길로 들어선 셈이다.

 

세상사는 이야기.JPG

▲ 여주 여강길의 문화생태탐방로

 

생태적 삶과 관련한 실태 및 변화양상을 보면 먼저 대기오염, 수질오염, 토양오염 등을 최대한 줄이는 일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는 게 보편적 지식이다. 대중교통의 활성화는 그중에 가장 손쉬운 실천사항이 될 것이다. 자동차 배기가스의 폐해는 별다른 설명이 필요치 않을 만치 지구촌을 충분히 더럽혀 왔기 때문이다. 그것이 독일인들이 유독 플룩샴(Flugscham)이라는 낱말에 방점을 찍는 이유다. 곧 비행기 이착륙에서 뿜어대는 최악의 대기오염을 최소화하자는 현실 인식이다. 그들은 비행거리 한 시간 남짓이면 도착할 장소를 번거롭게 기차를 갈아타고 여덟 시간의 여정을 감수한단다. 토양오염을 막기 위해서는 난개발에 따른 정화시설을 대폭 확충하자는 제안도 같은 맥락이다. 수질오염의 심각성은 새삼 강조할 필요조차 없다. 매일같이 사용하는 상수도나 하수도(종말처리시설)에만 신경을 곤두세우지 말고 선진국을 중심으로 실용화 단계에 접어든 중수도 시스템에도 눈길을 돌린다면 심각한 물 부족 사태를 상당 부분 해소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에게 닥친 재난의 형태가 어디 이뿐이랴.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COVID-19)의 대유행에 대한 원인진단 및 반응에 따른 대책도 중차대한 문젯거리다. 여태껏 그 진원지에 대해서는 모두 궁금해들 하지만 알려진 것처럼 중국 우한의 한 연구소에서 유출됐다는 설이 유력할 뿐 그에 대한 진실 공방은 오리무중이다. 설사 애초부터 거짓으로 일관하는 중국당국이야 그렇다 쳐도 세계시민의 보건업무를 총지휘하는 WHO 사무총장마저 저들을 감싸고도는 행태는 유감스럽기 짝이 없다. 특정인을 딱 꼬집어 지목할 수는 없더라도 몹쓸 바이러스 균을 퍼뜨린 경위에 대해서는 끝까지 진상을 규명해야 한다. 일단 치사율이 1918년 스페인독감이나 1968년 홍콩독감보다 훨씬 낮은 0.11% 정도여서, 이제는 팬데믹(pandemic)을 지나 에피데믹(epidemic)에서 엔데믹(endemic) 차원의 풍토병으로 관리가 가능하다니 천만다행이지만, 마냥 안심할 수만은 없는 것은 또다시 변종 바이러스가 재유행하는 일만은 막아야 한다는 노파심에서다. 생사를 오가는 들숨 날숨은 서로 안간힘을 합쳐 지켜낼 선물이기에 그러하다.



■ 프로필


- 고교생에게 국어와 문학을 가르치며 ‘수필집·시조집·기행집’ 등을 펴냈습니다.

- 퇴임 후 기고활동을 이어가면서 기독교 철학박사(Ph.D.) 학위를 받았습니다.

- 블로그 “조하식의 즐거운 집” http://blog.naver.com/johash을 운영합니다.

- <평택자치신문>에 “세상사는 이야기”를 14년째 연재하는 중입니다.


※ 다음호(699호)에는 ‘생태적 삶을 위한 역제안 - 기후변화의 끝은 어딜까?’가 이어집니다. 


태그

전체댓글 0

  • 35357
비밀번호 :
메일보내기닫기
기사제목
[세상사는 이야기] “생태적 삶을 위한 역제안” (1회)
보내는 분 이메일
받는 분 이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