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3-29(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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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하식 수필가·시조시인

재밌는 것은 뜻하지 않게 생긴 횡재(?)에 고마움을 느낀 대상이 결단을 내린 모친보다는 돈을 번 그 아저씨로 뒤바뀐 국면이었다. 비록 내게 수시로 분풀이를 해대던 탓에 인격적인 야속함이야 있었을망정 오늘날 나의 서재를 형성해준 일등공신이 일벌레 어머니라는 데는 별 이의가 없다. 생계를 위해 발이 부르트도록 들판을 돌아다니며 농부들에게 책을 소개하던 그 책 장수를 두고 ‘책 보급 왕’으로 뽑아도 손색이 없겠다는 뜬금없는 발상을 하며 이따금 빙그레 웃곤 한다. 이는 책다운 책이 내 옆에 둥지를 튼 첫 번째 사건이었기에 이렇게 길게 서술이 늘어진 것이다. 하지만 그 책 오십 권은 이후 실상 내 손을 많이 타지도 않았다. 그로 인해 부모님께 실컷 받은 지청구도 한몫 했지만 책들을 만지느라 도통 교과서하고는 사귈 생각을 하지 않는 데 있었다. 촌뜨기의 좁아터진 시야에 비해 거창한 독서계획을 세운 것까지는 퍽 가상한 일이었으나 관심 없는 난해한 내용에는 좀처럼 흥미를 느끼지 못한 것이 지적 성장의 화근으로 작용했던 참이다. 먼 훗날 뒤늦게 철이 들어 그때 정황을 곰곰이 헤아려보니 세계문집으로 인하여 나는 일종의 ‘접근 장애성 내용 공포증’(필자의 명명)을 앓게 되었던 것 같다.


내가 그토록 읽어내고자 공을 들였던 책자 중에는 괴테의 명작 <파우스트>가 있었다. 아직 변변히 한국문학에도 딱지를 떼지 못한 주제에 그런 대작을 펼쳤으니 기껏 더딘 판독에 의미 파악인들 무슨 진척이 있었겠는가마는 그때 내게 생긴 난삽(難澁)한 책자에 대한 두려움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차츰 딱지가 지고 떨어져 고맙게도 고무라기처럼 아물었다. 알고 보면 그 증세는 머리를 싸맬 게 아니라 대충 넘어가도 상관없는 사안에 불과했다. 그 뒤로는 내용이 필요 이상 어렵고 산만하다 싶으면 잠간 어떻게 껄끄러운 부위를 고쳐볼까 들여다보다가 이내 눈앞에서 치워버린다. 이는 자칫 잘못하면 청소년들에게 지식에 대한 고질적 내성으로 악화할 소지가 있으므로 각별히 주의를 요한다는 말을 덧붙이고 싶다. 사실 나는 어릴 적부터 타의 추종을 불허할 만치 참을성이 있었다. 또래에 비해 내구력이 있었기에 자식 칭찬에 극히 인색했던 우리 집에서까지 나의 인내심만은 인정하는 편이었다. 자칫 심각한 문제로 키워 일을 그르치는 어리석음은 범하지 말라는 조언이다. 오죽하면 신경질적인 어머니까지 “쟤는 죽은 다음 무슨 말을 하려나?”라고 핀잔을 주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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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토에서 책을 통해 사색에 빠져든 것은 어쩌면 불가해한 경사였다. 문제는 마냥 손을 놓고 현실성 없이 펼치는 상상력에 있었다. 미지의 세계를 향해 공상에 젖어 든 일상이 가져다주는 유익은 무엇일까? 잘못 박힌 세 살 적 버릇이 여든까지 간다는 격언의 경고를 무작정 불러들인 격이어서 되짚는 말이다. 이런 나의 증세는 중2가 되면서 엉뚱한 곳으로 번져갔다. 제대로 읽지도 않을 책을 마구잡이 수집하기로 작정한 터였다. 대관절 무엇에 쓰려는 심산이었는지는 몰라도 여하튼 나는 책이라고 생긴 것이면 다치는 대로 긁어 들이기를 즐겼다. 이런 취미의 최대 걸림돌은 응당 금전이었다. 그러나 어머니는 웬일로 책만 사겠다고 조르면 의외로 후하셨다. 열 권을 사면 고작 한두 권을 읽어내는 판국임에도 사들이는 것만으로도 마냥 좋아하던 그 심사에 대해서는 참으로 아리송하다. 지적 허기를 달래기 위한 일말의 몸부림이었다면 그나마 다행이겠다.


이러구러 고등학교를 졸업할 무렵 내 곁에는 약 삼백여 권의 책이 쌓였다. 월부책 사건 이후 자그마치 2주일에 세 권씩은 꼬박꼬박 책꽂이에 꽂아 왔던 셈이다. 푼돈을 모아 사들인 책치고는 어지간히 눈에 띄게 불어났던 참이다. 나는 그 시기를 ‘지적 탐색기’로 부르기로 했다. 떠오르는 대로 어렴풋이나마 세계문학전집을 기쩍이면 다음과 같다. 스탕달의 <적과 흙>을 비롯해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 오스틴의 <오만과 편견>, 세계단편문학선>,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 사르트르의 <구토>, 톨스토이의 <부활>과 <전쟁과 평화>, 서머싯 몸의 <달과 6펜스>, 마가렛 미첼의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 레마르크의 <개선문>, 에밀리 브론테의 <제인 에어>, 릴케의 <말테의 수기>,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 호메로스의 <일리아드>와 <오디세이>, <세계희곡선> 등이 맨 꼭대기 서가에 그대로 꽂혀있다. 깨알 같은 글씨가 누렇게 바래 고개를 쳐들고 읽어낼 만치 낡았지만 하나같이 소중한 추억의 서책들이다.



■ 프로필


- 고교생에게 국어와 문학을 가르치며 수필집·시조집·기행집 등을 펴냈습니다.

- 평택에서 기고 활동과 기독교 철학박사(Ph.D.) 과정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 블로그 “조하식의 즐거운 집” http://blog.naver.com/johash 꾸립니다.

- <평택자치신문>에 “세상사는 이야기”를 12년째 연재하는 중입니다.

 

※ 다음호(619호)에는 ‘죽향재(竹向在)의 주인의식 - 지적 탐색기에 들어’가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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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사는 이야기] ‘죽향재(竹向在)’의 주인의식 ‘손에 들어온 전집류’ (2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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