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2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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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수근 학예연구사(평택문화원)
 
 요즘 고시를 준비하는 사람들을 참 많이 있다. 그런데 만약 고시에 합격하고도 자리를 거절하는 사람이 있다면 뭐라고 할까? 300여 년 전 남하정이라는 선비는 진사시(1714년)에 합격(3등 2위 - 32/100)하고도 세태의 어지러움에 벼슬길을 단념하고 진위현 동천장에 은거하였다. 당시 사람들은 “그 재주는 남들도 미칠 수 있지만 그 뜻은 빼앗을 수 없다”라고 하며 그의 뜻을 높이 샀다.
 
 남하정이 은거하였던 동천장(현 진위면 동천리)은 의령 남씨인 남이장군의 조모인 정선공주묘가 있는 곳이었으며, 아버지 성균관 생원인 남수교가 진위 출신인 것으로 보아 의령 남씨의 세거지였을 것이다. 그는 이곳에서 효도하며, 겨를이 생길 때마다 시문을 지었고 그 글을 모은 문집이 바로 ‘동소선생유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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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은 8권 4책으로 안산 15학사의 한사람인 유경종이 서문을 짓고 시, 문 등을 엮었으며, 성호 이익의 묘표와 순암 안정복 묘갈 등이 같이 수록되어 있다. 이 책에는 남하정의 실학사상과 관련된 내용이 포함되어 있는데, 조선후기 기호 남인 학자들의 당론과 정국인식 등에 많은 영향을 미쳤던 남하정의 대해 알 수 있는 자료이다.
 
 이외에도 한문소설 『사대춘추』를 지어 이상적인 정치세계를 위한 통치자들의 덕목을 말하였고, 붕당에 관한 통사적인 책인 『동소만록』을 지어 “사가의 동호(춘추 시대 진 나라 사관으로서 직필로 사실을 기록하였음. 공자는 ‘동호는 옛날의 훌륭한 사관이다. 법대로 기록하여 숨기지 않았다’고 말하였음)이다”라는 평가를 받았다.
 
 남하정 선생(1678 ~ 1751)은 자는 시백, 호는 동소이며,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고 학문에 전심하여 경사와 제자백가에 통달하였다. 항상 검약을 생활신조로 청빈하게 살았으며, 특히 글을 잘 지어 당대 학자들 사이에서 이보다 앞서는 이가 없었다고 한다. 그가 지은 ‘출사책’은 명문장으로 일컬어져 사람들은 그를 흔히 조선중기 문신이자 한문4대가로 꼽는 이식과 비교하였다.
 
 남하정은 남인에 속하며, 조선후기 대표적인 실학자이자 남인인 성호 이익과는 교우가 깊었다. 가문대대로 세교가 있었고 경세치용과 사학에 대해서 강론한 학우이다. 이익은 남하정묘표를 통해 “내가 일찍이 경외하고 존경하던 분이다”라고 하였으며, 장자 남규가 일찍이 죽자 묘갈을 이익이 지어주는 등 각별한 관계에 있었다. 남하정은 평택지역의 실학자이자, 재야지식인의 한 부분을 보여주고 있으며, 우리가 기억하고 연구해야할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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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택문화원 소장사료로 본 평택이야기] 동소선생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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