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29(월)
 
 
 
조하식(한광고 교사, 수필가)

세상사는 이야기.jpg
 
강진의 <영랑생가>는 윤기가 흘렀다. 널따란 마당을 끼고 들어선 대가(大家). 안채를 비롯한 여러 채의 집들이 알부자의 풍모를 유감없이 보여줬다. 500년 묵은 은행나무가 풍요로운 세월을 대변하고, 담장을 타고 올라간 담쟁이덩굴에 수북한 동백은 그 연륜을 웅변했다. 초등교육의 모태인 <금서당>을 보러 둔덕에 오르니 덩그러니 ‘완향찻집’이 앞을 가로막았다. 1905년 ‘사립금릉학교’로 출발해 1909년 ‘강진공립보통학교’를 거쳐 1926년 ‘강진중앙초등학교’로 개명한 뒤 오늘의 <강진초등학교>가 되었다는 입간판이 무색할 지경. 시류에 밀려 민가에 가려진 저간의 사정은 모르겠으나 그대로 원형을 보존했더라면 얼마나 대견했을까? 거기서 김윤식의 모교라는 팻말을 등진 채 그가 남긴 유리알 같은 시 한 편을 떠올렸다.
 
돌담에 속삭이는 햇살같이
풀 아래 웃음 짓는 샘물같이
내 마음 고요히 고운 봄길 위에
오늘 하루 하늘을 우러르고 싶다.
새악시 볼에 떠오는 부끄럼같이
시의 가슴에 살포시 젖는 물결같이
보드레한 에메랄드 얇게 흐르는
실비단 하늘을 바라보고 싶다.



<청자도요지>를 가는 중간에 ‘단국대학교 강진도예연구소’가 보였다. 도자기 박물관은 애써 지은 노적(勞績)이 역력했다. 9세기경 통일신라시대부터 이 땅이 훌륭한 자기의 생산기지가 된 데는 무엇보다 자연여건이 적합하고, 중국과의 교역이 가능했으며, 남도인의 창의력이 뒷받침됐기에 가능했다는 주장이다. 사적(史蹟)으로 지정된 고려청자가마터를 돌아보는데 언젠가 시청했던 자기 빚는 경로가 생각났다. 엄숙하다 못해 자못 숙연한 자태를 대면하니 그 숭고한 장인정신에 절로 고개가 숙여졌다. 기실 작금에 당하는 예술혼적 위기는 그간 기술자를 홀대한 세월의 족적이자 누적이었기 때문이다.

 
비록 차창 밖이로되 천관산도립공원을 거쳐 ‘봉촌유물전시관’에 내렸으나 때마침 휴관인지라 허탕을 치고, ‘지석묘군’마저 대충 지나쳐 부랴부랴 녹동에 당도했다. 그야말로 북새통. 가는 날이 장날이라더니 오늘이 ‘한센가족의 날’을 겸한 그들만의 잔칫날이랬다. 한사코 내키지 않아하는 아내를 달래 오른 뱃전. 다행히 바로 코앞이 <소록도(小鹿島)>였다. 아, 이번 탐방을 위해 얼마를 기다렸던가! 일제 총독부가 113만여 평을 골라 조성한 ‘국립소록도병원’. 대뜸 뇌리를 스치는 이는 스스로 문둥이기를 자초했던 시인 한하운이었다. 아시다시피 그의 시 ‘보리피리’는 두고두고 뭇 가슴을 아리게 한다.
 
보리피리 불며 / 봄 언덕
고향 그리워 / 피 ㅡㄹ 닐니리

보리피리 불며 / 꽃 靑山
어릴 때 그리워 / 피 ㅡㄹ 닐니리

보리피리 불며 / 因環의 거리
고향 그리워 / 피 ㅡ ㄹ 닐니리

보리피리 불며 / 방랑의 幾山河
눈물 언덕 지나 / 피 ㅡㄹ 닐니리.

 
※ 다음호(323호)에서는 '남도 문예 기행' 3회 - <소록도>가 이어집니다. 독자, 시민 여러분들의 많은 관심 바랍니다. 아울러 6년째 본보에 '세상사는 이야기'를 연재해주고 계신 조하식 선생님께 본보 임직원 모두가 감사드립니다.
★자치돌이★ 기자 이 기자의 다른 기사 보기
태그

전체댓글 0

  • 57515
비밀번호 :
메일보내기닫기
기사제목
[세상사는 이야기] 남도 문예 기행, (2회)
보내는 분 이메일
받는 분 이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