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29(월)
 

조하식(한광고 교사, 수필가)

 만시지탄이로되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고서야 국제결혼에 제한을 둔 양국의 시책은 팔 벌려 환영할 만하다. 그동안 성행한 집단 맞선을 금지한 가운데 앞으로는 맘에 드는 짝을 선택한 뒤 건강검진을 받게 하고 신부 부모에게 허락을 받은 다음 혼인사진을 남기고 친구들을 증인으로 내세우는 수순을 밟는다니 전보다는 진일보한 조치임에 틀림없다. 근본적 문제는 생판 모르는 남녀의 결합. 한류의 영향으로 인해 한국에 대해 호감을 가진 베트남 처녀들이 혼기를 놓친 한국 남자들에게 가정을 이뤄주는 일이야 한없이 고맙고 권장할 일이로되, 부랴부랴 설레는 첫날밤을 지새우고 서둘러 비자를 신청하는 절차야 어쩔 수 없다 쳐도 두고두고 못 사는 친정을 물질로 돕고픈 신부의 가상한 뜻을 헤아리고 존중하지 않는 한 불화의 불씨는 여전히 남는다는 게 다문화가정을 바라보는 걱정스런 시각이다. 버스는 시방 일행의 여정을 싣고 부지런히 내닫고 있다. 도시외곽에 접어들자 ‘필성월남책임유한공사’라는 간체자 간판이 눈에 띄었다. 흡사 이웃나라 중국을 연상하는 회사 명칭. 해묵은 사회주의의 기치를 내걸고 경제 부국을 향해 묵묵히 임무를 다하는 첨병이다. 마치 도로처럼 이어진 다리를 건널 때 부레옥잠을 재배하는 호수가 나타났다. 거푸 해설을 쏟아내던 가이드가 갑자기 건가드 금고의 위상을 전했다. 정작 은행을 믿지 못하는 현지인들에게 어떤 위험 상황에서도 현금을 지켜줄 최후의 보루가 절실했기 때문이란다. 그 맥락인 듯 작금의 한국에서도 시중에 풀린 5만 원 권이 집으로 숨어든다지 않는가? 한편으론 한국의 대졸자들이 일자리를 얻지 못해 이리저리 헤매는 형국을 비웃는 것 같아 마음이 짠했다.

  시골집 뒤로 보이는 채소밭. 싱싱한 야채를 공급하는 원천이었다. 덕분에 푸짐한 점심을 들었다. 고소한 삼겹살에 상추와 깻잎, 풋고추와 마늘된장에 쌈장은 물론 된장찌개와 김치찌개에 오이무침, 배추무침, 콩나물까지 고루 갖추니 식탁이 풍성하다. 바지런히 서브하는 소년소녀들에게 수고비를 살며시 쥐어줬다. 덩달아 커피 맛에 반해 해외에서 커피를 사들고 온 일도 우리 부부에겐 흔치 않은 일이다. 좀 더 사올 걸 후회할 만치 기분 좋게 소비한 기억이 생생하다. 더없이 고마운 이는 가이드 같지 않은 가이드. 꽤나 쪼들릴 텐데도 돈에 연연하지 않는 초연함은 어디서 오는 걸까? 그는 주 수입원인 옵션을 단지 소개할 뿐이어서 길손들이 되레 얼마큼씩 사례할 정도였다. 그러나 정작 다원주의자임을 자긍하는 속내를 들여다보면 영적인 근원은 몹시 허약했다. 저녁에 들른 쇼핑센터. 식상한 라텍스의 선택 기준과 관리 요령에 건질 게 있었다. 라텍스의 원료를 공급하는 고무나무 숲을 지나 공항 옆에 내리니 한인촌이었다. 보잘 것 없는 노니 제품들. 한눈에 짝퉁으로 수지타산을 맞추려는 분위기였다. 베트남 역사에 해박한 가이드는 외환위기 전까지는 어엿한 직장인이었다. 퇴사 후에도 재능을 인정받아 베트남에 눌러앉게 됐다는데, 개인 사업을 하다가 가이드로 등록해 몇 년째 활동하고 있다는 고백이었다.

  마지막 일정은 <사이공강>을 누비는 <크루즈>. 하지만 예상한 대로 선상식이 입에 맞지 않은데다가 별반 야경이랄 게 없어 다들 가이드를 도와주자는 의도에 족해야 했다. 플라맹고를 추는 무희의 몸짓은 그나마 괜찮았지만 허접한 공연이 사람의 취향을 금세 뒤바꿀 수는 없었다. 1층 밴드 소음에 놀라 냉큼 3층으로 올라가니 아마추어 기타와 아르바이트생 플루트가 제법 고전적인 선율을 자아낸다. 부럽게도 베트남은 용솟음치는 30대 이하가 60%를 차지하는 피라미드형 인구구조. 마치 메콩델타에서 나는 쌀로 베트남인의 60%를 먹여 살리는 것처럼. 이상의 베트남 약사(略史)를 요약하면 젊은 베트남은 고대부터 중국 여러 왕조의 침입과 지배를 받다가 중세에 독립하여 근세까지 왕조를 유지했으나 1859년 프랑스가 호치민을 점령한 뒤 1884년 전 국토가 프랑스의 식민지가 되었다. 활발히 독립운동을 전개하던 중 1940년 일제 군화발굽에 짓밟히면서도 처절한 항쟁을 통해 1954년 프랑스를 완전히 몰아낸 데 이어 20여 년간 내전을 겪은 끝에 1976년 남북으로 나뉜 베트남의 통일을 이뤄냈다. 공산주의의 지배하에 급속도로 경제 활력을 잃어버린 호치민시. 자급자족을 주문하는 당국이 새로운 투자 사업들을 속속 시도했으나 뾰족한 돌파구를 찾지 못하다가 현명한 최고 지도부의 도이모이 정책에 힘입어 오늘날 눈부신 성장을 거듭하게 되었다. 아쉬운 작별의 시공. 수고한 가이드에게 얼마간 정성을 전하고 나니 빚진 마음이 다소 풀린다. 숙소를 겸한 밤 비행기의 기류는 늘 그렇듯이 비몽사몽(非夢似夢). 내내 맘씨 좋은 일행과 함께 유용한 안식을 누리게 하신 예수님께 감사기도를 올리는 사이 어느덧 인천공항이 발밑이었다. <홈페이지 http://johs.wo.to/>

※ 다음호(314호)에는 서유럽 기행 첫번째 이야기, '다시 찾은 프랑스' 편이 이어집니다. 시민, 독자 여러분들의 많은 관심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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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사는 이야기] 베트남 기행 - 사이공강 크루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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