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29(월)
 

- 문화재명: 서각장 이규남 (書刻匠 李圭男)
- 시대: 조선시대
- 지정번호: 경기도무형문화재 제40호
- 지정일자: 2004년 1월 5일
- 소재지: 평택시 비전동 어인남로 40-8(비전동 524-13 목계서각연구실)

■ 사찰을 중심으로 최전성기 이루어

 나무판에 글자나 그림을 새긴 목각판을 서각(書刻) 또는 각자(刻字)라고 하고, 그 기술을 가진 장인(匠人)을 서각장(書刻匠) 또는 각자장(刻字匠)이라 한다. 우리나라는 일찍부터 서각문화가 발달하였다. 동양에서 서각문화의 선구는 중국으로 은대(殷代)의 갑골문(甲骨文), 주대(周代)의 각종 금문(金文), 진대(秦代)이후의 석각(石刻), 당대(唐代)이후부터는 종이의 사용이 일반화 되었으나 ‘문자의 새김’인 각자는 모필로 쓰는 것 보다 먼저 발달하였다.

 우리나라의 각자문화 역사는 중국 만주 집안현(輯安縣)에 있는 광개토대왕비(서기 414년), 중원고구려비(5세기 후반), 고구려 평양성 석각(5세기), 진흥왕 순수비, 단양적성비, 신라 남산 신성비, 울진 봉평비, 백제 무령왕릉 매지권(525년) 등의 석각류를 비롯하여 을묘년국강상광개토지호태왕호우명문(415년), 연가칠년명금동여래입상광배문, 익산 왕궁리 5층석탑 출토 금판경첩 등의 금문과 약간의 삼국시대 인장류(印章類) 등이 고대 각자문화의 찬란한 유존물이며, 이들 대부분은 국보로 지정되어 있는 상태이다.

 또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목판본으로 알려진 신라시대의 『무구정광대다라니경』과 현존하는 가장 훌륭한 목각판인『팔만대장경』이 만들어 지는 등 사찰을 중심으로 최전성기를 이루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도 그 기술이 전해져 훈민정음 원본을 비롯한 많은 목판 인쇄물이 간행되었다.

 서각은 위와 같은 종류 외에도 거울에 새긴 문자, 화폐에 새긴 문자, 도자기에 새기거나 찍은 문자, 옥기, 석경(石經), 봉니문자(文字), 벽돌 기와에 남긴 문자 등 그 종류는 무수히 많다. 그러나 이러한 서각들은 탁본이나 인쇄를 하기 위한 새김이 아니지만 분명히 후대의 조판 인쇄의 각자 방법과 기술상 연결되는 것은 확실하며 그 선구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전통적인 각자문화는 근래에 이르러 사진술과 인쇄물의 발달로 인해 급속히 사라져 가고 있는 실정이므로 전통기술의 보존·계승을 위하여 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전국에 서각인은 200여명, 경기도에는 10여명 안팎으로 존재한다.

 현대의 각자 작품은 인쇄를 목적으로 하는 목판(木版)과 목활자(木活字), 건물에 거는 편액(扁額)·시판(詩板) 등 현판류(縣板) 등이 주종을 이루며, 의걸이장과 책장 등 목가구에도 활용되는 등 그 쓰임새가 다양하다.

■ 이규남 선생, 글자나 그림 새기는 기술에 머무르지 않아

 이규남 선생은 고등학교 2학년 시절, 강화도의 전등사에 갔다가 그곳에 보관돼 있던 팔만대장경판과 탁본을 보고 대단히 충격적인 감동을 받았다고 한다. 그 이후 생계를 위해 직장생활을 하다가, 1984년 중용무형문화재 106호 각자장인 철재 오옥진 선생을 만나게 된다. 세 번이나 뿌리침에도 불구하고 네 번째 찾아간 이규남 선생은 그가 원하던 서각을 3년 동안 본격적으로 배우게 된다. 그와 함께 한글서예는 여성구 선생에게서, 한문은 무불 선주석, 사군자는 백산 유기곤, 전각은 공계 진영근 선생에게서 가르침을 받았다.

 이규남 선생은 주로 오래된 느티나무나 돌배나무, 대추나무 등 견고하면서 결이 좋은 나무를 사용하여 단순히 현대적인 것보다는 와당문이나 고분벽화의 전통적인 문양에 현대적인 것을 가미하여 글자나 그림을 새기는 기술에 머무르지 않고 글의 내용이 살아 감동을 주는데 호평을 받고 있다.

※ 자료제공: 평택문화원 향토사연구소

 정리 김선우 기자 ptlnew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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