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5-10(금)
 

조하식(한광고 교사, 수필가)



 평소 물러 뵈던 내가 대뜸 남한의 최고봉을 오른다는 소리에 퍽 뜻밖이라는 듯 놀라는 눈치들이다. 남들이 모르는 사이 지리산(방장산)에 이어 금강산(봉래산)을 차례로 정복하고, 나머지 삼신산의 하나인 한라산(영주산)까지 마저 등정하기로 작정한 터. 친목회에서 연수차 팀을 꾸린다기에 한 점 망설임 없이 냉큼 앞장을 섰으니 딴엔 그럴 법도 하다.

 그러니까 한학자 면암(勉庵)이 유배에서 풀린 직후 여남은 동행과 짐꾼 대여섯을 거느리고 오를 때가 고종 12년(1875년) 춘삼월이었으니 시방과는 무려 140년이 벌어진 시차. 그 의기 넘치던 최익현이 감춰진 한라의 진면목을 널리 알리겠노라 한뎃잠까지 자가며 사흘에 걸쳐 올랐다는 그 백록담을 나 또한 오늘에야 비로소 찾아가는 참이다.

 이른 여섯 시 반, 우리는 나름 중무장을 마치고 서둘러 장도에 올랐다. 안내지도의 표시거리만 18km가 넘으니 대충 오십 리 가까운 길. 간간이 쉬어가면서 오를 경우 장장 열 시간 남짓 걸리는 고생길이다. 경사가 다소 완만한 ‘성판악’에서 비탈이 급한 탐라계곡을 관통해 ‘관음사’로 내려오는 탐방로. 산 밑에서 들으니 봉우리의 길이가 남북으로 백 리, 동서로는 그 갑절이나 기다랗게 뻗쳐 있단다. 그도 그럴 것이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한라산 일대에는 이른바 '오름'이라고 일컫는 등산길이 삼백여 개소를 훨씬 넘는단다. 까짓것 몇 개가 됐든 오르면 오르는 게지, 뭐 대수람?

 1970년 3월 24일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는 설명의 입간판도 본체만체, 우리는 크고 작은 현무암 덩이가 제멋대로 나뒹구는 등산로 입구로 들어섰다. 등산화에 걸리는 잔돌들을 걷어 차가며 재촉하는 너덜길. 아직 해는 뜨지 않았으나 이마에는 벌써 송골송골 땀방울이 맺힌다. 온난화의 악영향인 듯 때 때늦은 더위가 초장부터 기승을 부리는 숲속. 그때였다. 하늘을 덮은 잔가지들이 내게 불쑥 말을 걸어왔다. 고맙게도, 계절을 비웃으며 뿜어내는 열기를 식혀주겠노라고. 나아가 저 멀리 남미로부터 불어오는 엘리뇨란 놈의 광기(狂氣)를 냅다 지구촌 밖으로 내쫓아버리겠다고.

 그 말을 들으니 오랜만에 가파른 산행에 나선 가슴이 짜증에서 설렘으로 뒤바뀐다. 발을 뗀 지 한 시간쯤 흐를 무렵 투명한 햇살이 차양을 파고들어 눈자위가 부시다. 살짝 고개를 드니 빗살처럼 갈라진 광채가 콧잔등을 쏘고 있었다. 엷은 구름 몇 조각만이 떠도는 청명한 날씨. 옷깃을 스치며 치닫는 사람의 말로는 지난 삼 년간 이토록 쾌청한 일기를 본 적이 없단다. 때마침 ‘속밭샘’에서 불어오는 산바람을 타고 서로를 아끼는 눈길들이 교차한다. 속밭대피소를 지나쳐 제법 올랐다 싶었을 때 후미에서 자꾸 쉬어가자며 소리를 쳤다.

 저 멀리 ‘사라악’ 아래쪽으로 펼쳐진 한 폭의 풍경화가 어제 기창을 통해 내려다보았던 비취빛 바다와 맞닿아 무척이나 아름답다. 순간 안경을 스치고 내빼는 는개. 한라의 일기를 두고 사철 종잡을 수 없다더니 과연 그러하다. 순식간에 만학천봉을 휘감고 도는 안개비였다. 바로 그때 나는, 너울너울 춤추며 덤비는 운해를 헤치고 뻗어 올라간 아름드리나무의 신음소리를 들었다. 수백 년을 살았지만 요즘 같은 고농도의 산성비는 처음이라는 읍소였다. 이제는 아예 운신조차 어려울 만치 삭신이 쑤신단다. 아닌 게 아니라 조금 전까지 해맑게 웃으며 나풀대던 조릿대가 갑자기 얼굴을 바꿔 괴로운 표정을 지었다. 자기네도 중병이 든 지 오래라고.

 그러고 보면 나를 옥죄는 이 지긋지긋한 알레르기비염에게도 할 말이 생겼다. 문명이란 미명하에 앞 다퉈 난개발을 도모하다가 저지른 자승자박(自繩自縛). 누가 누굴 탓하고 손가락질하랴, 일신상의 안일에 물들어 실컷 이기(利器)를 부리며 으스대는 치들이 죄다 한통속인 것을. 등산로에는 유난히 돌멩이가 많았다. 그걸 피하느라 빈터를 골라 밟는 통에 송두리째 드러난 나무뿌리들. 뭇 발길에 채여 반들거리다 못해 끝내 끊어져버린 몰골이 아등바등하는 우리네 인생처럼 애처롭다. 봄 가뭄에 시달리는 요즘, 석간수(石間水)를 기다리다 못해 지쳐 죽어가는 1,600여 식물종처럼.

 한라산은 식물계가 난대에서 한대까지 고르게 분포돼 있는 보기 드문 생태의 숲. 진달래 군락지를 벗어나자마자 등 뒤에서 등산객 하나가 앞으로 나서며 말문을 튼다. “여기 잎사귀 한 장 없이 백골처럼 서있는 나무가 살아서 천 년, 죽어서 천 년을 더 산다는 한국 토종의 ‘구상나무’랍니다!” 곁들여 ‘온 세상을 통틀어 희귀종으로 알려져 있는 우리나라의 특산 수종’이라고 힘주어 말한다. 그러며 이르집기를 최근 들어 부쩍 여기저기서 부종 비슷한 나무부스럼을 자주 목격한단다. <홈페이지 http://johs.wo.to/>

※ 다음호(306호)에는 '등한라산기(登漢拏山記) <중>' 편이 이어집니다. 시민, 독자 여러분들의 많은 관심 바랍니다.


 

★자치돌이★ 기자 이 기자의 다른 기사 보기
태그

전체댓글 0

  • 27735
비밀번호 :
메일보내기닫기
기사제목
[세상사는 이야기] 등한라산기(登漢拏山記)
보내는 분 이메일
받는 분 이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