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5-10(금)
 

조하식(한광고 교사, 수필가)

  하물며 눈이 이럴진대 윤곽수술의 도를 넘은 양악수술은 어떠랴. 듣고 보니 아예 아래턱을 분해하여 재조립한다니 끔찍한 일이다. 멀쩡한 턱에 드릴을 들이대고 턱뼈를 깎아내다가 개중에는 언어장애를 초래하거나 나사로 교정한 근육에 힘이 빠져 침을 질질 흘리는 신세가 되는가 하면 불행히도 식물인간으로 전락하거나 생목숨을 잃는 비극이 빚어지기도 한다니 말이다. 자고이래 몰상식을 넘어 몰지각한 행태에는 특효약이 없다. 여기서 간파할 대목은 끝없는 부작용의 폐해를 최대한 감추려는 시도가 집요하다는 사실이다. 목돈을 쥐고 푼돈을 풀어 포털사이트를 장악한 의사들의 장삿속을 속속들이 파헤치노라면 그저 말문이 막힐 따름이다. 막강한 자금력과 사회적 영향력을 동원해 피해자들의 입을 무력화하는 데 혈안이 들려있다. 입술을 잘라내는 수술 역시 온전할 리 없다. 예쁜 입을 만들려다가 입술이 마냥 벌어져 침을 흘리는 일이 벌어지는가하면 구강구조가 어긋나 음식물을 씹기조차 어려워진다니 각별히 유념할 일이다.

  코에 보형물을 집어넣는 행위는 거주하는 집에서 대들보를 손보는 일과 마찬가지다. 단순히 리모델링하는 정도의 작업이 아니다. 번듯한 주택처럼 단단히 터전을 닦고 처음부터 새로이 짓지 않는 한 한순간에 와르르 무너질 수 있는 한계를 떠안는 참이다. 피부조직이 오그라드는 구축현상에는 예외가 없다. 보다 명확한 원리는 집어넣은 이물질이 중력의 압력을 받는 바람에 코뼈를 내리눌러 급기야는 돼지코를 만들고 만다는 점이다. 나아가 세수하다가 부지불식간에 실리콘이 손바닥에 밀린다고 가정해 보시라. 눈앞에 나타난 끔찍한 사태에 당사자가 경악을 금치 못하는 건 자명하다. 참기 어려운 안면근육통에 하루하루 이상해지는 몰골이라니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이다. 한마디로 콧대를 높이는 수술은 한없이 무모한 모험이자 자학인 것이다.

  한 발 더 나가 다 자란 키를 한 뼘이나 키우고 싶어 뼈를 늘리는 수술이야말로 스스로 무덤을 파는 짓에 불과하다. 키 좀 크게 보이자고 멀쩡한 다리를 절단해 평생 걷지도 못하는 처지를 자초하다니 말이다. 억지로 키를 늘리자고 의사를 찾아가는 사람이나 무지몽매한 자들의 돈을 갈취하는 의료업자나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굳이 케케묵은 히포크라테스의 선서를 들먹이지 않더라도 의사란 모름지기 인술을 베풀 책무를 지닌 자들이 아닌가? 이쯤해서 누군가에게 전해들은 우스개 한 토막이 떠오른다. 기실 매우 불경한 농담이긴 하다. 온갖 수술을 통해 얼굴을 뜯어고친 성형미인(?)이 불과 몇 개월 만에 예수님 앞으로 불려갔단다. 그녀가 당돌하게 따지기를, “주님, 왜 저를 이토록 빨리도 부르셨나요?” 예수님 가라사대, “미안하다. 못 알아봤다!” 일회성 개그로 웃어넘기기에는 시사점이 큰 익살이다. 단언컨대 남에게 혐오감을 주는 문신 또한 자기학대의 다른 형태에 지나지 않는다.

  귀를 뚫는 행위도 그다지 아름다워 뵈지 않는다. 귓바퀴를 돌아 나오는 곡선에 언어를 관장하는 영역이 있다고 알고 있다. 시중에 떠도는 말처럼 귀를 뚫는다고 신경통이 사라지지도 않거니와 진물이 흘러나와 고생하는 사례까지 있다니 신중에 신중을 기할 일이다. 필자는 개인적으로 여인의 맨얼굴을 좋아한다. 그것이 그녀의 본디 모습이기 때문이다. 한창 풋풋한 나이에 귀고리를 주렁주렁 매달고 다니는 걸 보면 솔직히 예쁘다기보다는 거추장스러운 느낌이 앞선다. 어여뻐지고픈 여인네의 본능이겠거니 일정 부분 양보한다 해도 막상 여러 군데 뚫은 귀를 쳐다볼라치면 솔직히 섬뜩함을 느낀다. 시중에 유행하는 네일숍도 바람직한 풍경은 아니다. 가정주부가 사랑하는 가족을 위해 맛깔스런 손맛을 내다가 손톱에 바른 매니큐어가 떨어져 발암 물질이 되었다면 소스라칠 일이 아닌가?

  주름을 없애자고 보톡스를 맞는 일 역시 권할 바 아니다. 늙으면 피부에 주름이 잡히는 게 외려 자연스럽지 않은가? 백발이 늙은이의 허물이 아니듯이 깊은 주름살은 인생의 경륜을 나타낼지언정 애써 감출 일이 아니다. 치아를 하얗게 만드는 표백도 건치를 상하게 한다. 치아 색깔은 본시 살갗과 비례하는 법이다. 피부색에 비해 유난히 흰 이를 볼라치면 어딘가 어색해 보인다. 피부를 변색시키는 박피수술이야말로 바이러스를 불러들이는 지름길이다. 검은 피부가 허옇게 변색될 수도 없으려니와 종국에는 햇빛조차 맘대로 쏘일 수 없는 형편으로 전락해버리니 말이다. 약물 중독으로 인해 젊은 나이에 지레 숨을 거둔 마이클 잭슨이 그 실례다. 사안의 본질이 이럴진대 왜들 덕지덕지 사족 붙이기에 혈안이 들려 있는지 안타깝다. 고맙게도 우리 몸은 전지전능하신 창조주에 의해 놀라운 자정작용을 통해 스스로를 보호하도록 설계되어 있다. <홈페이지 http://johs.wo.to/>

※ 다음호(304호)에는 '성형의 착시현상 <하>' 편이 이어집니다. 시민, 독자 여러분들의 많은 관심 바랍니다.

 

 

★자치돌이★ 기자 이 기자의 다른 기사 보기
태그

전체댓글 0

  • 51891
비밀번호 :
메일보내기닫기
기사제목
[세상사는 이야기] 성형의 착시현상
보내는 분 이메일
받는 분 이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