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5-22(수)
 

조하식(한광고 교사, 수필가)

 필리핀에 대한 갈증을 푸는 현장. 그러나 농어가든 도심지든 전체적인 모양새에 일정한 짜임새란 없다. 일그러진 현실을 체념한 몰골들이 날이 저물어야 거리로 쏟아져 나오는데 영락없이 불나방을 방불케 한다는 게 가이드의 표현이다. 제아무리 날씨가 무덥다지만 해가 짧고 게으르다 보니 얼굴에 생기가 없다. 아, 이들에게 과연 미래는 있는가? 다들 발마사지를 받는 동안 호텔에서 쉬다가 저녁상으로 받은 샤브샤브. 그 역시 부실하다. 바로 옆 다른 한국 여행객의 몰상식한 소란은 금도를 넘었다. 한국인의 창피한 자화상. 이들이 내세우는 고급식당가에서 식사를 마치고 잠시 거닌 마닐라 배이는 서늘했다. 씁쓸한 뒷맛을 안고 미니버스에 오르니 몇몇 불자(佛子)들이 먼저 와있었다. 오가는 용어를 듣노라면 108배, 다비식, 방생, 목탁에 염주 알들이 용주사와 수덕사를 드나든다. 재밌는 대목은 박지성을 사위 삼게 해달라고 날이면 날마다 절간에서 빈다는 동네 아줌마 얘기였다. 나름대로는 공덕을 쌓느라고 힘껏 공력을 들이지만 길이 아닌 데로 헤매는 걸 볼작시면 안타깝기 짝이 없다.

 숙면을 취하고 맞이한 아침 식탁. 그러나 눈앞에 마주한 메뉴는 형편없었다. 어제부터 가이드가 강조한 오늘의 하이라이트는 <팍상한(Pagsanjan) 폭포>. 소위 세계 7대 절경 중 하나로써 그토록 유명한 곳이란다. 문제는 극심한 교통정체. 이를 상쇄해 준 묘약(?)이 있었으니 일행 할머니들의 수다였다. 수원 연꽃모임으로 포문을 연 그녀들의 대화는 변함없이 불교 용어 일색. 담소 틈틈이 손자녀들의 자랑을 푸지게 늘어놓는가하면 요즘 며느리들의 생태적 특성에다 남편 험담까지 다채롭다. 다만 대체로 교양미에 생활수준이 높은 분들이어서 오가는 낱말에도 절제가 있고 품위가 묻어난다. 새삼 말재주를 타고난다는 게 은사이고 홍복이로구나하고 감탄할 만치. 도중에 가이드가 끼어들어 필리핀 여성들의 사회적 위상에 관해 거들었다. 들어본즉 행실이 어떻든지 예쁘면 죄다 용서된다는 내용. 그래서 행여 여자와 말다툼하는 남성을 볼라치면 한꺼번에 덤비듯 바보라고 마구 손가락질을 해댄단다. 이렇듯 여성우월주의가 확실한 사회구조로되 모든 의식과 사고를 앞지르는 가치는 금전이었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 현금 수송차량의 모양새가 장갑차를 닮았다. 그것도 실제 이동할 때는 두세 대가 무리를 지어 움직인단다. 어느 게 진짜인지 가짜인지 헷갈리라고.

 이곳 휴게소는 우리나라와 흡사하다. 물론 규모면에서는 한국에 훨씬 못 미치지만. 역시나 장총을 두르고 권총을 찬 경관이 버티고 있었는데, 특이한 건 아파트 모델하우스의 모형을 선보이고 있다는 점. 어제와 똑같은 도로를 내닫다가 반대편으로 접어든 길은 몹시 비좁았다. 동네를 관통하는 골목길이었는데 ‘히든밸리’가 얼마 떨어지지 않아서인지 유황냄새가 코를 찔렀다. 바로 그때 가이드가 갑자기 특식을 걸고 퀴즈를 내겠다며 나섰다. 물은 건 ‘야자수와 코코넛의 차이점’. 다들 차례가 돌아간 뒤 공이 내게로 튀었다. 기실 나도 잘은 모르는 문제였으되 어휘 감각을 살려 ‘전자는 한글이고 후자는 영어’라고 응답하니, 딩동댕 정답! 그런데 반응은 대수롭잖게 미리 알고 있을 줄 알았다는 투였다. 어쨌거나 점심이 한참 늦어지는 마당에 부코파이 한 쪽은 꿀맛. 끈적거리는 ‘부코’는 담백하고도 고소한 이들의 고유식으로 코코넛의 현지어란다.

  오랜 만에 만난 벼논의 행렬. 알고 보니 여기가 그 통일벼의 원산지였다. 애초에 우리 농촌진흥청에서 개발한 품종으로 뇌리에 각인된 게 잘못이었다. 이채로운 건 길가에 간이농장을 차리고 묘목을 판다는 사실. 그나저나 스치듯 곱게 가꾼 꽃길을 달리는 기분이야말로 싱그럽기 한이 없다. 짙푸른 벌판을 온몸으로 맞닥뜨리는 동안 길손은 한껏 달떠있었으니까. 창밖에 비치는 천주교 묘지. 9일장을 치르는 기간 상갓집에서 밤새 주전부리를 하며 노름을 즐긴단다(이곳 상가는 밥을 주지 않음). 우리네 초상집처럼. 묘지의 모양새가 마치 살림집을 축소해 놓은 꼴이란 사나 죽으나 서로 붙어있고픈 반영이라고 했다. 빈부격차는 묘소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다. 불필요한 치장과 오해의 현장. 분묘는 늘 사람을 축 처지게 만든다. 밀물처럼 왔다가 썰물처럼 가버린 뭇 영혼의 과거를 알기에 더욱 을씨년스럽다. 이 순간도 불심 가득한 앞자리의 노파들은 저마다 여생을 즐기고 나름 공덕을 쌓기에 여념이 없다. 안타깝지만 그걸 영생의 길이라고 착각하는 세계관을 어쩌랴. 멜론 밭에 윤기가 흐르고 마을에 생기가 도는 건 노작물이 돈이 되기 때문이란다. 몇 백 년 묵은 식민지 유산일까? 저 멀리 낡은 고성을 두고 점점 멀어지는 시공이 자못 서글프다. <홈페이지 http://johs.wo.to/>

※ 다음호(300호)에는 '필리핀 기행 여섯번째 이야기 '막다피오강' 편이 이어집니다. 시민, 독자 여러분들의 많은 관심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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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사는 이야기] 필리핀 기행 '팍상한폭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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