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6-03(월)
 

선조 30년에 칠천량해전에서 전사...선무1등공신 책봉


 지난 8월 10일(음력 7월 15일)에는 제417주기 제향이 평택시 송탄동 도일리 소재 원균장군 사당에서 열렸다. 또한 오는 10월 25일(토) 오전 11시 송탄북부문예회관 대공연장에서는 “원균장군기념사업회 창립대회”가 열릴 예정이기도하다.
 
이번호에서는 역사적 사료 검증 등을 통해 재조명되면서 호국의지를 불태운 용장으로 재평가되고 경기 기념물 재57호인 조선중기의 무신 원균장균의 묘를 찾았다. 80년대 이후 급격한 산업화, 자본화 시대에 접어들면서 도시개발이라는 우선순위에 밀려 안타깝게도 지역의 소중한 문화유산들을 하나 둘씩 잃어가는 현실에서 지역의 소중한 문화유산들을 둘러봄으로써 독자 여러분들이 평택 지역의 역사와 문화유산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 좀 더 깊어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편집자 말>

◆ 선조 37년 선무1등공신으로 책봉

 조선 선조 때의 무관 원균(1540~1597)장군의 자는 평중(平仲)으로 어려서부터 기골이 장대하고 성격이 호탕한 전형적인 무인기질의 인물이었다고 전해지며, 젊은 나이에 무과에 급제한 후 선전관을 거쳐 조산만호 부령부사를 지내면서 여진족 토벌에 큰 공(功)을 세웠고 임금과 조정의 신임을 받은 것도 이 무렵이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경상 우도 수군절제사로서, 처음 옥포해전에서 이순신장군에게 구원을 요청하여 왜선 30여척을 무찔렀다. 그 후 합포해전, 적진포해전 등 여러 차례에 걸친 크고 작은 해전에서 큰 승리를 거두었다. 선조 30년(1597)에 칠천량해전에서 전사하였다.


 임진왜란이 끝난 뒤 논공행상의 자리에서 많은 논란의 대상이 되었던 인물은 원균과 권율이었다. 조정에서는 원균(元均)의 공(功)은 인정되지만 패장(敗將)이라는 이유로 선무2등공신에 녹공(祿功)하였으나, 전쟁의 패배는 원균의 책임보다는 무리한 명령을 강요한 도원수 권율의 책임이라는 선조 임금의 적극적인 옹호와 조정(朝廷)의 들끓는 여론에 의해서 선조37년(1604) 원균 장군은 다시 이순신, 권율 장군과 함께 선무1등공신으로 책봉되어 원릉군(元陵君)에 봉해졌다.

 선조실록에는 "선조는 원균, 이순신, 권율 이 세 사람을 선무 일등공신으로 봉(封)하면서 말했다. 원균은 패전한 뒤, 사람들은 그를 비난하고 있으나 내 생각은 다르다. 원균은 지용인(智勇人)이다", "원균의 충성된 마음이 후세에까지 밝혀지지 아니할까 두렵다. 그렇게 될 경우 지하에 있는 그가 어찌 그 죄에 복종할 것이며 또한 얼마나 원통하게 생각할 것인가˝라고 기록되어 있다.


◆ 원균장군에 대한 역사의 재조명

 평택시 도일동 산 82번지에 위치한 원균장군의 흔적은 묘(墓)와 사당(祠堂), 그리고 보물 제1133호로 제정된 원릉군 원균 선무1등공신 교서(敎書)와 울음밭이라고 하는 생가(生家) 터가 있다. 묘(墓)는 내리저수지 옆에 있고 사당(祠堂)은 홍살문 앞으로 난 비탈길을 따라 여의실로 가는 언덕 위에 있으며, 생가 터인 울음밭은 내리 저수지 위쪽에 자리한 안골마을에 있다.

 묘역 안에는 돌로 만든 등이 있고, 멀리서도 무덤이 있음을 알려주는 망주석과 무인석이 배치되어 있다. 국한문 혼용체로 쓴 비문에는 왕이 내린 교서와 장군의 행적을 기록하고 있으며, 사당 입구로 들어가면 정면에 원릉군사우(原陵君祠宇)라는 현판이 걸린 사당이 있고, 긴 칼을 차고 서 계신 원균 장군의 영정을 볼 수 있다.

 최근 역사의 재조명을 통해 항상 앞장서서 주어진 임무를 이루는 용맹스러운 장군, 오직 나라를 염려하여 장열하게 산화한 장군으로 기억되는 원균장균의 묘를 주말을 이용해 가족과 함께 찾아보자.

서태호 기자 ptlnew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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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균(元均) 장군 묘 및 사당을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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