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26(금)
 
조하식(한광고 교사, 수필가)


 집에서 가까운 평택항. 때는 2013년 마지막 날이었다. 이번에는 예상치보다 많은 16명의 제자들을 동반한 터. 지난해에 이어 아들을 도우미로 대동했다. 나는 기실 어제부터 오늘 오전까지는 드림캠프의 지도교사였다. 게다가 지난 주말에 덕유산으로 교직원연수를 다녀온 참이어서 눈코 뜰 새 없는 일정. 하지만 나는 이제 바쁜 일상에 더 익숙하다. 두 아이를 기르며 다소 느긋하던 삶이 신학을 시작하고 글을 가다듬으면서 양상이 확 바뀌었다. 가르치는 틈새에 글을 쓰며 여행하랴 연수하랴 보람을 쌓아가는 일이 즐겁기 때문이다. 출발 네 시간 전 승선. 출국수속은 배든 비행기든 우리나라만큼 빠른 데가 또 있을까? 여객 정원 720명의 대룡페리(시속 25노트, 약 40km)는 25,000여 톤(길이 178m, 폭 25m)이나 되는 규모. 그런데 좋은 일이 생겼다. 예약한 4인1실을 2인1실로 배정받은 것. 덩달아 다인실이었던 학생 둘마저 4인1실로 옮겨주었다. 통보 없는 파격에 잠깐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경우 대개는 웃돈을 요구하거나 생색을 내는 법이거늘, 아무튼 미래의 고객을 겨냥한 배려라고 담담히 받아들였다. 느림의 시간(13시간 소요)에 쾌적한 공간이 결합한 시공. 선내식(한식)을 마치고 때마침 ‘러브인아시아’와 ‘하늘에서 본 한반도’를 보며(오가는 동안 선박과 호텔에서 국내 티비 시청이 가능했음) 뒤척뒤척 뒹굴다보니 어느덧 중국 영성의 용안항이었다. 내릴 즈음 맞이한 갑오년을 여는 해돋이는 그야말로 덤이었다.

  가이드를 따라 방문한 곳은 <성산두> 풍경구. 산동성의 성산산맥 끝에 붙어있어 성산두(成山頭)라고 하는 바, 바다에 맞닿은 하늘 끝이어서 ‘천진두(天盡頭)’라고도 불렀다. 진시황이 불로초를 구하기 위해 두 번이나 찾아와 제를 올렸다는데 예로부터 태양신이 머문다는 전설이 서려있어 중국 역대 황제들이 여러 차례 시찰했던 곳이란다. 지명의 유래를 살펴보니 기원전 219년 진시황이 여기를 동쪽 끝이라고 판단해 ‘천진두진동문(天盡頭秦東門)’이라는 글자를 남기도록 했다는 것. 사기(史記)에 의하면 주나라 무왕을 보좌해 천하를 평정한 강태공이 일주사당을 세웠다는 흔적을 찾아 볼 수 있단다. 산동반도 가운데 툭 불거진 자리에 흡사 만리장성을 빼닮은 성곽을 복원해 놓았다. 알고 보니 중국내에서 일출을 제일 먼저 볼 수 있는 부상(扶桑). 눈을 드니 깎아지른 듯한 벼랑에 세찬 파도가 부딪친다. 이처럼 끊임없이 솟구쳤다 사라지는 물보라가 있기에 아름다운 8대 해안 중 하나로 손꼽힌단다. 그래서인지 혹자는 여기를 중국의 희망봉이라고 일컫는다고 했다. 우리는 인공 연못을 지나 커다란 <복여동해>로 향했다. 번듯한 건물에 거액을 투자했다더니 뿌리 깊은 기복문화를 테마로 자연경관과 유적지, 역사적 자료, 신화와 전설, 민간습속에 체계적으로 다가가려는 시도였다. 명명하기를 기운전(起運殿, RISE LUCK PALACE). 청성조부터 청고종까지 역대 12명의 황제들과 임칙서와 손중산에 이르는 29명의 흉상을 늘어놓았다. 더불어 중화민국의 근대화를 이끈 29명의 주요인물을 기렸다. 눈에 띄는 사람은 공자와 노자에 이은 모택동과 등소평이었다. 다음은 행운전(幸運殿). 인류에 기여한 인물 155명을 대하니 내심 존경스럽다. 자국인은 고대구, 근대구, 현대구에다, 타국인은 국제구에 배치했다. 거기서 반갑게도 반기문을 만날 수 있었다. 호운궁(好運宮)에는 26인의 신선상을 세워놓았다. 뿌리 깊은 미신의 현장. 도교의 영향일진대 이는 복음(福音)이 아니다. 점심은 현지식. 놀랍게도 향이 거의 없고 밑간이 딱 맞았다. 감자, 풋고추, 전, 닭, 양배추, 김치에 쌀밥이 나오니 자연히 포식할 수밖에. 중국에는 이런 말이 있단다. 하늘을 나는 것 중에 비행기와 다리 달린 것 중에 책상걸상 다리를 빼놓고는 죄다 먹는다는. 

  가이드에 따르면 위해(威海)는 인구 57만(지명사전에 제시한 280만 명은 인근지역을 포함한 것으로 보임)의 아담한 지급시(地級市). 우리네와 비교하면 큰 편이로되 여기서는 소도시에 속한다. 잘 닦은 도로의 매끈한 노면. 그 정교한 시공이 일본에 버금갔다. 이 정도면 인프라는 이미 선진국 수준. 애최 영국이 조차할 당시 도심구도를 제대로 잡은 터였다. 부럽게도 한때의 식민지조차 득이 된 형국. 여기저기를 둘러보니 시가지가 가지런하다. 이른바 풍경이 나오는 거리. 맑은 대기는 물론 깨끗한 해변을 중심으로 꾸며놓은 공원은 솔직히 중국답지 않다. 이와 같이 각양각색의 건물에 색상의 통일을 기할라치면 절묘한 조화미를 얼마든지 이룰 수 있다. 한국의 경우 새마을운동이 도리어 악영향을 끼쳤다. 다소 번거롭더라도 독특한 초가지붕의 모양을 살리고 벽면의 도색 기준을 정했어야 했다. 절대 권력의 할 일이 정작 그런 부분이거늘 미루고 미루다 야당 요구에 떠밀려 쫓기듯 지방자치제를 실시하다보니 행정구역을 합리적으로 나눌 적절한 시기마저 놓치고 말았던 거다. 위해 시가지는 조경이 일품이었다. 땅바닥을 이만치 고르게 깐 데는 처음이다. 이정표를 보니 황해로에서 홍콩을 본뜬 향항로(香港路)까지 작명 또한 탁월하다. 텅 빈 상가를 앞에 둔 <위해공원>을 흘끔 훑어본 뒤 시계를 보니 고작 오후 1시 반. 공들여 탐방한 이역만리에서 백주대낮에 호텔방에 갇힌 신세라니……. 그렇다고 아이들을 데리고 일정을 벗어나 자의로 프로그램을 돌리는 일이야말로 신중을 요하는 부분이라서 못내 아쉬웠다. <홈페이지  http://johs.wo.to/>


※ 다음호(280호)에는 중국 사제동행 두번째 이야기 <연대산 공원>이 이어집니다. 독자, 시민 여러분들의 많은 관심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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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사는 이야기] 중국 사제동행 '산동성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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