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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세상사는 이야기] 이태원에서 서울역으로
    실은 이태원(梨泰院)이란 곳에 대한 궁금증은 이전부터 품고 있었다. 다만 나이가 들면서 동떨어진 데를 맘먹고 간다는 게 예전처럼 쉽지는 않았다. 어쨌거나 그놈의 핼러윈데이에 벌어졌다는 대참사 현장엘 가보니 도리어 이해 불가한 경우의 수였다. 어떻게 이 짧고 좁은 골목에서 무슨 조화로 인해 세계사에 유례없는 일이 지구촌을 술렁이게 했는지 연신 고개를 갸우뚱할 수밖에. 미심쩍은 김에 검색창에 ‘조화(造化)’를 치니, 그 내막이나 이치를 알 수 없을 정도로 신통하거나 야릇한 일에 이어서 천지만물을 창조하고 기르는 대자연의 이치라고 나온 터. 그렇다면 특정 세계관으로 사안을 풀어가는 필자의 문해력으로도 뭔가 꼬투리는 잡힐 성싶은데, 이 또한 곰곰이 헤아려보면 상통하기보다는 거꾸로 정반대 해석이 가능한 지점이어서 개개인에 따라서는 몹시 난삽한 국면으로 빠져들 수도 있겠다는 지각이 들었다. 왜 치안 당국은 사전에 충분히 예견할 수 있었거늘 예방이 아닌 방치를 택했을까? 무슨 연유로 유가족의 슬픔을 보듬기는커녕 한사코 진상규명과 원만한 사후처리를 외면하는 걸까? 꼼꼼히 그 주위를 둘러보고 다시금 해밀턴호텔을 눈치껏 기웃거려본들 모종의 단서는 고사하고 일말의 의구심조차 발견하기 어렵더라는 말이다. 짐짓 그때를 소환하면 간간이 흘러나온 언론의 토막기사처럼 정체 모를 세력이 밑에서 떠받치고 위에서 떠밀어 한창때 체구들을 비좁은 공간에 꼼짝없이 옭아맸다는 설이거니와, 설령 그렇다 한들 무려 158명이나 되는 인명이 질식사에까지 이를 수 있겠느냐는 문제 제기다. 위에서 짚어본 조화라는 표현이 유효한 건 그래서다. 뜯어볼수록 기괴한 나머지 그야말로 천지의 조화가 아니고서야 도무지 풀어낼 재간이 없다는 훈수밖에 달리 끌어올 낱말이 궁색하다는 군소리랄까! 기실 버스에서 내릴 때부터 보행로가 의외로 넓다는 느낌 말고는 별다른 낌새는 없었다. 그런데 그 뒷길로 몇 걸음 올라가니 외국어로 도배된 간판은 물론 한가위 연휴 탓에 수북이 쌓인 쓰레기더미에서 특유의 치즈 내가 진동하고 있었던 것. 유독 이런 분야에 예민한 아내는 독한 술에 절고 찌든 악취가 뒤섞여 콧속을 찌른다며 인상을 찌푸렸다. 애써 스멀거리는 감성을 추스르고 뭔가에 내쫓기듯 추념의 틈새를 벗어났으나 한동안 거기서 묻어온 기류는 좀체 물러설 줄 몰랐다. 제아무리 유능한 영화감독이라 해도 그 정황상의 전방위적 재현은 연출로서는 불가능하지 싶다. ▲ 이태원의 해밀턴호텔 골목 여태껏 경험칙에 따르면 타성에 젖은 첩보 가운데 유용한 건 방향을 올바로 알아차리는 오감. 요 근처에 있다는 전쟁기념관으로 가는 길목에 오랜 미군기지가 있었다. 바로 위쪽에 설치한 위압적인 철조망은 역대 한미관계를 규정하는 상징물. 그 언짢은 기분을 보상해준 건 담장을 뒤덮은 이끼류였다. 서울 한복판을 걸으면서 이만큼 신선한 대기를 마셔본 기억이 있던가? 반 시간 남짓 걸음을 내디딘 끝에 목적지가 나타났다. 갑자기 시야를 가린 대통령실의 금박휘장을 회피한 채 그 건너편으로 눈길을 돌리니 각양각색의 전투기들이 작은 숲을 이뤘다. 한눈에 번듯하게 꾸민 조경지. 눈앞에 전시한 각종 무기류에 몇 가지 조형물이며 동선의 편안함도 발끝에 와 닿았다. 비록 볼멘소리로되 청와대보다 낫다는 입말이 절로 흘러나올 만치. 3만여 평의 대지를 한 바퀴 돌아 중앙통로에 접어드니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친 장병들의 명단을 연도별로 새겨놓았다. 유유히 나부끼는 참전국 깃발들. 연못에 갇힌 물고기들도 한국전쟁에서 산화한 유엔군을 추모하듯 지느러미를 이리저리 흔들어댔다. 그러고 보니 서울에서 더부살이할 때도 차편으로는 수없이 지나쳤을 낯익은 가로변인데 우리 둘이서 용산길을 따라 남영동 거리를 걸어본 적은 없었다. 막상 해묵은 초행길에 나서니 다가오는 감회는 남달랐다. 여기저기 뜯고 손본 데 중 흔한 집은 역시나 커피점. 갈월동으로 빠지는 굴다리 위로는 소음을 내뿜는 전차들이 번잡하고, 하늘로 치솟은 빌딩만 뺀다면 언뜻 달라진 게 없어 보였다. 이윽고 여전히 구한말 자태를 간직한 서울역 구청사. 한쪽을 개축해 임대했건 딴 편에선 경의선을 운영하든 말든, 북적이는 인파에 파묻힌 신청사는 건축술의 새로운 공법을 차입했으나 노숙자에 치이고 온갖 마이크 소음이 뒤엉켜선지 산만한 분위기를 떨쳐내긴 버거워 뵌다. 이참에 여러 겹의 원형 계단을 딛고 올라선 서울역 옥상정원. 나름 꾸미느라 안간힘은 썼지만, 원도심을 가로지르는 내내 다양한 화단 구성의 필요성과 더불어 시선의 이동을 부드럽게 다듬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굴뚝 같았다. ■ 프로필 - 고교생에게 국어와 문학을 가르치며 ‘수필집·시조집·기행집’ 등을 펴냈습니다. - 퇴임 후 기고활동을 이어가면서 기독교 철학박사(Ph.D.) 학위를 받았습니다. - 블로그 “조하식의 즐거운 집” http://blog.naver.com/johash을 운영합니다. - <평택자치신문>에 “세상사는 이야기”를 14년째 연재하는 중입니다. ※ 다음호(703호)에는 ‘청와대 탐방 뒷얘기’가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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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하식의 이야기
    2023-11-25
  • [세상사는 이야기] “생태적 삶을 위한 역제안” (4회)
    ◇ 현안을 내게 적용한다면? 필자가 생각하는 생태적 삶은 매사 절제하는 생활방식에 있다. 크게는 의식주에 관한 절용(節用)과 검약(儉約)을 말함이요, 작게는 이른바 ‘아나바다’의 구체적 실천을 가리킨다. 전자는 개인적 소신이자 지론이어서 일단 유보하더라도 후자는 오래전에 범사회적 시민운동으로 확산한 적이 있었는데, 대한민국이 OECD에 가입한 뒤 국민소득이 선진국의 반열에 올라서면서 이제는 과거의 희미한 추억으로 남고 말았다. 비록 세계 제2차대전 이후 실시간 원조를 받는 처지에서 이제는 당당히 남의 나라를 돕는 위상에까지 올라선 자긍심을 고려하여 결코 가난했던 과거를 잊어서는 안 된다는 공감대가 전혀 없지는 않지만, 우리 부부는 아이들을 키울 때나 그들이 독립한 지금이나 변함없이 줄곧 주위 시선에 영향을 받지 않았을뿐더러 시류를 따라 한때 유행하는 풍조에도 거의 신경을 쓰지 않은 채 근검절약의 정신을 살리고 가능한 한 낭비적 요소를 최소화하는 것을 생태적 삶의 덕목으로 삼아왔다. 필자가 구체적으로 생각하는 생태적 의식주에 관한 생각은 이렇다. 사람이란 모름지기 의복은 늘 청결하고 최대한 품위를 유지하되 변화무쌍한 사계절의 필요와 용도에 따르자는 것이다. 지금까지 살면서 일시적이나마 자랑하거나 사치하고 싶은 마음에 채 낡지 않은 옷을 놔두고 유행이 지났다고 하여 폐기 처분한 기억은 없다. 어느덧 내 나이도 고희에 가까워지면서 지난날을 되짚어보면 어차피 유행이란 대략 5년 단위로 돌고 도는 양상을 띠더라는 경험칙이다. 게다가 우리 내외의 식탁은 퍽 단출한 편으로 두어 끼니 먹는 양마저 소식에 가까운 데다 외식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그때마다 제철 과일을 즐겨 들 뿐만 아니라 동식물이 지닌 고유한 맛을 각종 식품 첨가물에 의해 미처 느끼지 못할 때가 많아서다. 올해로 26년째 거주하는 아파트 역시 분양받을 당시 모습 그대로다. 크기를 늘린 서재에 긴 책상을 들이고 붙박이 책꽂이를 설치한 일밖에는 장롱을 비롯한 다른 가구도 여태껏 바꾼 것이 없다. ▲ 신륵사 관광단지의 인조 물레방아 평소 삶의 양태가 이러하니 물건을 아껴 쓰고 나눠 쓰고 바꿔 쓰고 다시 쓰자는 권유는 적어도 우리 가정에서는 별반 새로울 게 없다. 원래 하던 대로 입고 먹으며 자면서 생활해 나가면 되었기 때문이다. 필자의 경우 지병처럼 비염을 달고 사는 형편인 데다가 환절기에 치를 냉방병이 무서워 에어컨 없이 살며, 물 부족국가의 첨병이 되기 위해 수돗물과 탄소 중립에 앞장선다는 각오로 전기를 극도로 아껴 쓰고, 무심코 버리는 종이 한 장도 숲을 지킨다는 사명감으로 수거함에 집어넣어 재활용을 돕는 일은 기본이다. 그러니 겨울철도 아닌데 자동차 공회전을 일삼는 이들을 보면 나는 솔직히 당신들이야말로 ‘공공의 적’이라는 구호라도 외치고 싶은 심정이다. 공회전의 폐해를 들여다보면 대기오염은 물론 온난화를 부추겨 생태계를 파괴하고 소음으로 인한 난청 유발에, 도주하는 도둑에게 열쇠를 맡긴 격이 되어 속수무책 벌어지는 일들을 이따금 뉴스를 통해 접하고 있지 않은가 말이다. 기름 한 방울 나지 않는 나라에서 왜들 원윳값 인상에는 그토록 민감하면서도 오래 정차한 상태에서 마냥 시동을 걸어놓고 있는지 심히 안타까울 뿐이다. 우리가 사는 지구촌은 자손 대대로 물려가며 사용해야 할 인류 최대의 유산이다. 지난 3년간 혹독하게 치른(아직도 안심하기에 이른) 코로나바이러스 사태의 근본적인 원인을 곰곰이 따져볼 필요가 있다. 학자들 간에 다소 이견은 있을 수 있겠으나 관련 연구자들 다수는 각종 오염원에 의해 형편없이 망가진 지구의 생태환경을 주목하지 않는가? 날이 갈수록 종잡을 수 없는 기후변화 내지는 무분별한 난개발이 그 주요인으로 설득력을 얻고 있거니와 밝혀진 연구결과만 놓고 보아도 21세기 첨단사회를 살아가는 세계인들이 맞닥뜨린 현실은 실로 엄중하다. 그렇다면 견디기 힘든 지구환경을 어떻게 하면 생태적 환경으로 바꿀 수 있겠는가? 이를 위해서는 나부터 실천 가능한 항목을 하나하나 행동으로 옮기는 데 달려있다. 혹자는 이미 지구촌은 돌이킬 수 없을 만큼 오염되어 개선될 여지조차 거의 없다고 비관적으로 잘라 말하기도 하지만 이는 시시각각 다가올 미래세대를 대비한 생태적 삶의 차원을 넘어 긴박한 생존의 문제이기에 절대 체념할 수도, 지레 포기해서도 안 되는 일이다. 범지구적 생태환경을 쾌적하게 조성하지 않은 가운데 일개인의 행복한 생태적 삶은 보장될 수 없다. 과연 우리 인류에게 이보다 더 다급한 현안이 있는지 심사숙고하며 실효성 있는 대안을 마련할 때다. ■ 프로필 - 고교생에게 국어와 문학을 가르치며 ‘수필집·시조집·기행집’ 등을 펴냈습니다. - 퇴임 후 기고활동을 이어가면서 기독교 철학박사(Ph.D.) 학위를 받았습니다. - 블로그 “조하식의 즐거운 집” http://blog.naver.com/johash을 운영합니다. - <평택자치신문>에 “세상사는 이야기”를 14년째 연재하는 중입니다. ※ 다음호(702호)에는 ‘이태원에서 서울역으로’가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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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하식의 이야기
    2023-11-17
  • [세상사는 이야기] “생태적 삶을 위한 역제안” (3회)
    ◇ 인구절벽을 오르는 법은? 전기자동차 등 수소 기능에 대한 체감의 교정도 절실하다. 지금은 석유->하이브리드->전기자동차로 가는 과도기에 있으나 조만간 눈에 띄게 차종이 늘어날 거라는 데는 별반 이의가 없을 것이다. 다만 수소차는 전기자동차의 연장이라는 점이다. 말하자면 전기자동차가 배터리만으로 주행하는 데 비해, 수소연료전지차는 배터리의 양을 최소화한 상태에서 수소탱크-연료전지를 추가하고 수소를 이용한 연료전지 발전을 통해 배터리를 충전시키는 방식이다. 즉 직렬식 하이브리드 자동차나 디젤 기관차를 떠올리라는 주문인데, 기존 내연기관 자동차들과 똑같이 수소(기존의 가솔린, 디젤 대신)를 산소(산화제)와 연소시켜서 폭발적으로 구동력을 얻는 방법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설명이다. 이는 수소연료전지차에 비해 성능이 떨어지기는 하지만, 기존 내연기관이 가진 메커니즘에다가 연료의 경로만 변경해 친환경 파워트레인 체계(Powertrain system)를 구축할 수 있고, 걸어온 역사도 오래됐다는 면에서 눈여겨볼 만하다. 아울러 인구문제는 생태적 삶을 가로막는 현안 중 급선무다. 취업난과 주택난이 젊은 세대에게 깊은 절망감을 안겨줌으로써 3포(연애, 결혼, 출산 포기)도 모자라 5포(+주택과 인간관계 포기)에 더해 7포(+건강과 외모 관리까지 포기)를 운운하게 되었다면 미래상을 송두리째 포기하는 비상사태가 아닐 수 없다. 벌써 십수 년째 세계 최저 출산율(0.78)이라니 웬 말인가? 시계추를 뒤로 돌리니 둘만 낳아 잘 기르자는 구호가 불과 엊그제 같거늘 급기야는 정부가 나서서 제발 하나씩만 낳으라고 강요하더니, 심지어는 한 집 걸러 하나만 낳아도 한반도는 만원이라는 입방정이 고스란히 부메랑이 된 형국이다. 설상가상 그래도 먹고살 만한 OECD 38개국 가운데 자살률마저 연거푸 수위라기에 유심히 살펴보니 청소년 자살률만은 뉴질랜드가 1위였다. 그 까닭인즉슨 중학교까지 교과서 자체가 없을 만큼 너무 살기가 편한 나머지 도대체 일거리가 없어서라니, 그렇다면 우리 애들은 하도 일이 많아서 죽을 틈도 없다는 얘기인 듯해 씁쓸하긴 매한가지다. 어쨌거나 이대로 가면 옥스퍼드대학의 데이빗 콜먼 교수의 말처럼 한국은 국가소멸의 첫 번째 흑역사가 될 게 뻔하다. ▲ 홍수가 휩쓸고 지나간 여강 주변 기후변화에 따른 식량 생산의 패러다임 변환 역시 필연적이다. 우리네 식탁에 오르는 식품의 대부분(85% 내외)이 수입산이라는 전언이 잘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들이다. 유전자 변형 유기체(GMO)의 하나인 인공 고기는 아무리 사려해도 건강 대체 식품으로는 부적합할 것 같다고 흔쾌히 동의하면서도 말이다. 이번에 터진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을 통하여 널리 겪어내고 있듯이 재배 여건은 물론 설령 수확까지 마쳤다고 한들 통상적 수출입 절차가 원활하게 돌아가지 않으면 농산물값은 춤을 출 수밖에 없다. 하긴 해마다 버려지는 먹거리만도 부지기수라니 무슨 입말을 더 보태랴. 지구촌 구석구석이 목하 양극화의 그늘로 뒤덮이고 있다는 게 공공연한 진단서다. 적절한 처방은 없는가? 끼니를 대신하는 약품 개발도 신뢰가 가지 않는다. 무엇보다 일용할 양식은 자급자족이 관건이다. 국가 차원에서 연차적 계획을 세워 여차하면 무기로 둔갑할 방지책을 마련하지 않으면, 왠지 국제사회를 향해 구걸할 날이 올 성싶은 불길한 예감마저 든다. 저자는 15회에 걸쳐 생태적 삶의 개념에 따른 문제의식과 현주소를 구체적으로 되짚었다. 응당 신자유주의의 거센 물결이 일렁이는 가운데 미래 에너지의 수급방안까지 다각적으로 톺아본 기회였다. 돋보인 점은 예리한 문제 제기를 뒷받침하는 분석비판과 대안 제시였다. 1인당 1차 에너지 소비량을 대폭 줄여야 하되, 에너지를 효율적으로 쓰는 법이 생태적 삶의 중요한 요소라는 데 십분 공감한다. 잘잘못에 대한 명확한 구분 없이는 사람들을 납득시키지 못하기 때문이다. 지은이가 매번 잘못된 부분을 강조하는 건 그래서였다. 불과 얼마 전까지 풍요를 풍유한다며 물건을 물 쓰듯 한다고 쓰더니만 급기야는 물 부족국가가 되었고, 세계 3위의 전기 과소비국이라는 오명에도 불구하고 불야성 같은 야경은 그대로다. 지면을 빌려 호소하건대 공회전이야말로 공공의 적임을 만천하에 공포하고자 한다. 대낮에는 꼭 소등하고, 수도꼭지부터 절약형으로 교체하자. 결국 생태적 삶이란 ‘더불어 살아가기’의 일환이므로 상극의 상쇄를 위한 역제안이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나 혼자서 잘살아보겠다는 개인주의는 자칫 이기적 행태로 흘러갈 수도 있다는 꾸지람으로 들린다. ■ 프로필 - 고교생에게 국어와 문학을 가르치며 ‘수필집·시조집·기행집’ 등을 펴냈습니다. - 퇴임 후 기고활동을 이어가면서 기독교 철학박사(Ph.D.) 학위를 받았습니다. - 블로그 “조하식의 즐거운 집” http://blog.naver.com/johash을 운영합니다. - <평택자치신문>에 “세상사는 이야기”를 14년째 연재하는 중입니다. ※ 다음호(701호)에는 ‘생태적 삶을 위한 역제안 - 현안을 내게 적용한다면?’이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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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하식의 이야기
    2023-11-10
  • [세상사는 이야기] “생태적 삶을 위한 역제안” (2회)
    ◇ 기후변화의 끝은 어딜까? 급격한 기후변화의 전망 및 적응에 관한 우려는 어느덧 인류의 생존권을 위협하는 단계까지 밀려든 양상이다. IPCC(기후변화에 관한 정부 간 패널) 6차 보고서 발표(2021.8. <- 2014년 5차 보고서)와 2021.11. 열린 기후정상회의에 따르면 대표적 탄소 흡수원으로 식물, 토양, 해양 등을 명시하고 있다. 이는 인간의 탐욕이 부른 재앙으로 일교차가 섭씨 10도만 나도 인체는 무척 힘들어하는데 요즘 같은 환절기 날씨를 보면 일교차가 무려 섭씨 20도를 웃도는 지경이니 어쩌랴. 게다가 담뱃불이 산불의 주요인이라는 통계수치에도 불구하고 하루가 멀다고 들려오는 불장난을 접하면 애간장이 탄다. 문제는 무분별한 벌채마저 아무런 제재 없이 버젓이 일어난다는 점이다. 그 선상에서 독일의 인공 숲 조성은 성공적인 사례일 것이다. 이와 병행하여 습지 보존을 위한 논농사 장려책은 물론이고 친환경 농작 방식으로 재배한 무농약 작물의 경쟁력을 높임으로써 탄소 흡수율을 획기적으로 높여야 한다는 의견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우리 주변에 깔린 아스콘이나 인조 잔디의 위험성은 진즉부터 요로를 통해 경고등을 깜박이고 있었다는 점도 잊지 말아야 한다. 2020년에는 미국과 중국을 비롯한 각 나라의 탄소중립(carbon neutral), 즉 탄소 배출량과 흡수량이 균형을 이뤄 탄소의 실질 배출량이 zero가 되는 상태를 만들자고 약속했으나 인류의 모든 에너지 및 비에너지 활동과정에서 발생하는 온실가스(GHG : Green House Gas)는 여전히 태양에서 오는 가시광선은 통과시키고 지구 표면에 복사되는 적외선을 흡수하여 대기의 기온이 급격히 상승함으로써 기후변화를 끌어내지 못한다 해도 별 뾰족한 수는 없다. 온실가스 종류에는 이산화탄소(CO2), 메탄(CH4), 아산화질소(N2O), 수소불화탄소(HFCs), 과불화탄소(PFCs), 육불화황(SF6) 등이 있는데, 2015년 파리협정을 기점으로 독일(2045), 한국, 미국, 일본 등 67개국은 21세기 중반(대략 2050년), 중국은 2060년까지 국가 단위의 탄소 배출량을 0(Net Zero <-> Real Zero) 수치로 만드는 탄소중립을 선언한 바 있지만, 각국 기업체의 이해관계와 맞물린 데다가 구속력 있는 조약체결이 아니어서 약속이행은 불투명한 상태다. ▲ 여주 강변유원지의 이식 고사목 그에 따라 에너지 전환 정책에 대한 세간의 관심이 증폭하는 현상도 간과하기 어렵다. 필자는 문재인 정부 출범과 함께 숙의 민주주의적 절차에 맡긴 결과물을 대하고서 적잖이 놀란 적이 있다. 각자의 입장을 가진 주체들이 깊이 있는 대화를 통해 쟁점을 해결해보려던 시도였지만 원자력발전을 지지한 세력이 과반수를 차지했다. 그 사례의 본질은 올바른 방향의 정책일지라도 멀게 느껴지는 안전보다는 가까운 현재의 먹거리가 다급하다는 외침이었다. 목구멍이 당장 포도청인 마당에 장래를 담보할 만한 가치마저 파묻힐 수밖에 없는 절박감이랄까. 그렇지만 2021년 기준 광물자원통계포털에서 보듯이 화력(34%), 가스(29%), 원자력(27%), 수력(?)에 이어 신재생 에너지에서 나오는 비율이 8%에 이른 걸 보면 태양력, 풍력, 지력, 조력=파력(?)의 전망도 결코 어둡지는 않아 보인다. 게다가 중앙정부와 지자체가 힘을 합쳐 가가호호의 지붕을 활용하고, 실내 자전거를 이용해 자가전력 생산을 독려한다면 머잖아 괄목할 만한 성과가 나올 걸로 기대한다. 이재에 민감한 인간의 속성으로 볼 때 눈앞에 전기료 감액이라는 금전적 이익을 확인하는 순간 재빨리 태세를 전환할 것으로 확신한다. 디지털의 가속화 문제도 시급한 사안 중 하나다. 분초를 다투는 첨단산업 분야나 공공업무에 전 자동화 시스템을 구축함으로써 투명성과 효율성을 제고할 수는 있겠으나, 현실적으로 스마트폰의 과다한 전자파로 인해 꿀벌 생태계에 혼란을 초래하는 사태까지 빚어지고 있거니와 인공지능, 곧 AI(Artificial Intelligence)까지 목전에 등장했다면 인간의 고유역할을 고민하지 않을 수 없지 않은가. 배경지식이 일천한 필자로서도 쉬이 예측할 수 있는 일 가운데 실존하는 나와 엇비슷한 물체가 챗 GPT(Chat Generative Pre-Trained Transformer)를 장착한 채 길거리에 나돌아다니지 말라는 보장이 있느냐는 볼멘소리다. 그도 그럴 것이 요즘은 은행에 문의 전화를 걸어도 AI가 받아서 처리하고 있는데, 문제는 판에 박힌 문답을 벗어나면 아직은 엉뚱하게 전개되는 단계여서 이건 짜증을 내야 할지 그나마 안도할 일인지를 모르겠다며 허허실실 자세로 웃어넘겼으나 앞으로는 일상에서 자주 맞닥뜨릴 수밖에 없다는 데 사안의 본질이 숨어있다. ■ 프로필 - 고교생에게 국어와 문학을 가르치며 ‘수필집·시조집·기행집’ 등을 펴냈습니다. - 퇴임 후 기고활동을 이어가면서 기독교 철학박사(Ph.D.) 학위를 받았습니다. - 블로그 “조하식의 즐거운 집” http://blog.naver.com/johash을 운영합니다. - <평택자치신문>에 “세상사는 이야기”를 14년째 연재하는 중입니다. ※ 다음호(700호)에는 ‘생태적 삶을 위한 역제안 - 인구절벽을 오르는 법은?’이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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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하식의 이야기
    2023-11-03
  • [세상사는 이야기] “생태적 삶을 위한 역제안” (1회)
    ◇ 생태적 삶이란 무엇인가? 이필렬 교수의 『생태적 삶을 찾아서』라는 책에는 퍽 흥미로운 접근법이 보인다. 글쓴이의 다소 뜬금없는 문제 제기는 자연인이 추구하는 웰빙(well-being)은 상생을 해치는 행위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바람직한 인간의 삶이란 타인들과 더불어 걸어가면서 해법을 찾아야 한다는 일갈이다. 필자 역시 이러한 견해에 동조하는 바가 크다. 사안을 굳이 기독교 세계관의 렌즈로 들여다보지 않더라도 모름지기 사람이란 각자에게 주어진 소명에 따라 자신의 분량만큼 사회에 이바지하며 사는 것이 옳다고 본다. 그렇다면 수도원이나 절간에서 세상과 단절한 채 종교적 삶을 영위하는 이들은 어떻게 볼 참인가? 이 문제에 대해서는 대뜸 반론이 가능한 지점이다. 참여 민주주의의 원리를 원용한다면 보다 명쾌한 지침을 발견할 수 있다. 지구촌에 두 발을 딛고 사는 동안에는 치유 목적이 아닌 한 담장을 두른 채 세상을 등진 듯한 모습은 이기적 모양새라고 간주할 수 있다. 그와 동시에 차제에 웰다잉(well-dying)이라는 낱말의 의미를 정립하고 넘어갔더라면 더 좋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른바 생태(生態, ecology)란 무엇인가? 그 기본개념부터 정리하면 생물(인간, 동물, 식물)이 자연계에서 살아가는 모습으로 생명체 사이, 나아가 생명체와 환경 간의 관계에서 상호의존성을 나타내는 상태를 가리킨다. 따라서 생태개념은 모든 생명체는 서로 유기적인 관계를 맺고 있으므로 지구환경과도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거니와, 특정한 생물체에 나타나는 심각한 변화(멸종 포함)는 직접적인 공생관계나 먹이사슬에 놓여있는 다른 생물체는 물론 주변 환경 너머의 보이지 않는 영역에까지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는 관점에서 만들어진 용어라고 볼 수 있다. 그 유래를 추적하면 생태학의 뿌리는 자연사로부터 시작되었고, 혁명적 농법이 움튼 뒤부터는 가축이나 곡물을 어떻게 생산할지에 대한 상식도 필요했을 것이다. 그에 앞서 기원전 4세기경 아리스토텔레스는 ‘Historia Animalium’에서 들쥐와 메뚜기에 대한 설명을 시도했다는 기록이 남아있어 차츰 유해동물 퇴치를 위한 방도를 고심하던 끝에 현대적 생태학으로 진보했다는 시각이다. 그러니까 20세기에 이르러서야 생태학이란 학문은 어엿한 과학의 길로 들어선 셈이다. ▲ 여주 여강길의 문화생태탐방로 생태적 삶과 관련한 실태 및 변화양상을 보면 먼저 대기오염, 수질오염, 토양오염 등을 최대한 줄이는 일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는 게 보편적 지식이다. 대중교통의 활성화는 그중에 가장 손쉬운 실천사항이 될 것이다. 자동차 배기가스의 폐해는 별다른 설명이 필요치 않을 만치 지구촌을 충분히 더럽혀 왔기 때문이다. 그것이 독일인들이 유독 플룩샴(Flugscham)이라는 낱말에 방점을 찍는 이유다. 곧 비행기 이착륙에서 뿜어대는 최악의 대기오염을 최소화하자는 현실 인식이다. 그들은 비행거리 한 시간 남짓이면 도착할 장소를 번거롭게 기차를 갈아타고 여덟 시간의 여정을 감수한단다. 토양오염을 막기 위해서는 난개발에 따른 정화시설을 대폭 확충하자는 제안도 같은 맥락이다. 수질오염의 심각성은 새삼 강조할 필요조차 없다. 매일같이 사용하는 상수도나 하수도(종말처리시설)에만 신경을 곤두세우지 말고 선진국을 중심으로 실용화 단계에 접어든 중수도 시스템에도 눈길을 돌린다면 심각한 물 부족 사태를 상당 부분 해소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에게 닥친 재난의 형태가 어디 이뿐이랴.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COVID-19)의 대유행에 대한 원인진단 및 반응에 따른 대책도 중차대한 문젯거리다. 여태껏 그 진원지에 대해서는 모두 궁금해들 하지만 알려진 것처럼 중국 우한의 한 연구소에서 유출됐다는 설이 유력할 뿐 그에 대한 진실 공방은 오리무중이다. 설사 애초부터 거짓으로 일관하는 중국당국이야 그렇다 쳐도 세계시민의 보건업무를 총지휘하는 WHO 사무총장마저 저들을 감싸고도는 행태는 유감스럽기 짝이 없다. 특정인을 딱 꼬집어 지목할 수는 없더라도 몹쓸 바이러스 균을 퍼뜨린 경위에 대해서는 끝까지 진상을 규명해야 한다. 일단 치사율이 1918년 스페인독감이나 1968년 홍콩독감보다 훨씬 낮은 0.11% 정도여서, 이제는 팬데믹(pandemic)을 지나 에피데믹(epidemic)에서 엔데믹(endemic) 차원의 풍토병으로 관리가 가능하다니 천만다행이지만, 마냥 안심할 수만은 없는 것은 또다시 변종 바이러스가 재유행하는 일만은 막아야 한다는 노파심에서다. 생사를 오가는 들숨 날숨은 서로 안간힘을 합쳐 지켜낼 선물이기에 그러하다. ■ 프로필 - 고교생에게 국어와 문학을 가르치며 ‘수필집·시조집·기행집’ 등을 펴냈습니다. - 퇴임 후 기고활동을 이어가면서 기독교 철학박사(Ph.D.) 학위를 받았습니다. - 블로그 “조하식의 즐거운 집” http://blog.naver.com/johash을 운영합니다. - <평택자치신문>에 “세상사는 이야기”를 14년째 연재하는 중입니다. ※ 다음호(699호)에는 ‘생태적 삶을 위한 역제안 - 기후변화의 끝은 어딜까?’가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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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0-26
  • [세상사는 이야기] 몽골 초원의 재발견 ‘몽골의 값진 자원은 대자연’ (후)
    “넓은 벌 동쪽 끝으로~” 감미로운 애창곡을 들으며 내닫는 길에 펼쳐진 몽골의 대초원! 그 한가운데서 만난 드넓은 밀밭이 있었다. 거기서 건진 이시화 교수의 “황금 밀바다”라는 즉흥시를 어찌 감상하지 않고 그냥 지나치랴. 몽골의 광활한 밀바다 / 황금빛 물결이 끝없이 펼쳐져 / 하늘과 맞닿아 있네. // 끝없이 펼쳐진 황금의 천국, / 밀의 숨결이 바람에 흔들리며 노래한다. // 산뜻한 공기를 타고 스며드는 / 밀 향기는 우리 마음을 취하게 해. // 이곳에서 함께한 / 따뜻한 친구들의 웃음소리, / 즐거운 대화, 따뜻한 배려, 시간이 / 멈춘 듯한 황홀한 이 순간! // 끝없이 밀려오는 황금빛 밀 바다의 / 황홀한 풍경과 행복한 시간 속에서 / 하나가 된 이 순간, 영원히 기억되리라. ( / 행, // 연을 가리킴) 응당 멋진 시에 대한 조하식 시인의 3행시(이시화) 화답이 빠질 수는 없었다. 이국 땅 몽골의 하늘 아래 / 시심에 담긴 순정을 보니 / 화폭에 그린 사랑이구려! 마치 경주를 지키는 왕릉처럼 이어지는 산맥의 능선은 정겨운 풍경화의 향연. 펑퍼짐한 벌판에 난 샛길의 곡선미도 눈여겨볼 만했다. 희고 검은 양 떼가 평화로이 노니는 들판을 보며 흡사 흑백의 돌들이 자웅을 겨루는 바둑판을 떠올렸는데, 국유지가 무려 80%에 달한다는 안내자의 설명에 오히려 마음이 놓인 건 왜일까? 남한의 15배가 넘는 면적에 1억 마리에 달하는 사육동물(양, 말, 소, 염소 등)을 비롯해 각종 지하자원(우라늄, 금, 구리, 희토류 등)의 매장량이 풍부해서 앞날이 밝다는 전언이다. 그래서 나온 제안이 한·몽 연합국가 구상이었다. 한국의 인력, 자본, 기술에다가 몽골의 영토와 자원을 결합하면 상생을 추동하는 시너지가 분출할 거라는 제안이었으나 CU가 300여 개소, GS25가 150여 개소, 이마트가 네 번째 문을 여는데도 현실적으로는 불가하다는 게 중론이 되었다. 남양주 거리를 거쳐 도심에 다가올수록 난개발로 몸살을 앓는 본새를 대하는 마음이 좀 불편했는데, 가이드에게 한국을 떠나 고국으로 돌아온 연유를 들어보니 웬일인지 350만 몽골인들의 장래에 대한 노파심이 일었다. 까닭인즉 극심한 경쟁에 시달리기보다는 실시간 사막화를 막아내고 장차 뉴질랜드 같은 낙농 선진국을 지향해야 하므로. ▲ 비칙트하드 게르를 품은 몽골 초원의 한 장면 세차게 불어닥친 변화의 바람은 숙박업소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었다. 게르 옆구리에 화장실을 매달고 보일러도 모자라 난로에 갈탄을 때는 곳도 있었다. 문제는 실내에 가득한 일산화탄소의 폐해. 필자는 왜 이들의 평균수명이 고작 60대에 머물러 있는지를 몸소 겪어야 했다. 울란바토르 시내에서 배수구를 찾기 어려운 점도 같은 맥락. 고인 빗물에 곤죽이 된 흙탕물이 말라 흩날리는 뿌연 먼지 또한 대기오염원이다. 몽골인의 진정한 자존심은 칭기즈칸 기마상을 찾아가 맘껏 기상을 펼치는 일과 함께 시간을 정해 여럿이 말갈기에 차례로 올라타 보는 질서의식이 아닐까? 허르헉이라는 특식에 대해서도 보탤 말이 있다. 십 년 전 맛본 현지인의 요리를 소환하면 연한 양고기를 항아리에 담아 달군 돌로 충분히 익혀 씹을 때마다 담백한 맛을 음미할 수 있었다. 누린내 나는 질긴 고기에 소금을 풀고 밑반찬도 아까워 짜게 만든 꼼수라니, 그보다는 감칠맛 나는 돼지고기 두루치기에 싱싱한 상추쌈을 실컷 즐기게 해준 ZALAAT 식당 주인을 양심적인 한국인으로 강력추천하고 싶다. 연초록과 갈색 톤의 오묘한 조화, 그러나 이 나라 수도는 어느덧 회색빛 콘크리트 정글로 변해버렸다. 이번 몽골여행에서 필자가 가장 놀란 건 수흐바타르 광장에서 본 사물놀이도 아니요, 랜드마크인 거북바위나 난코스가 포함된 승마체험도 아닌 독립 영웅들을 기리는 자이승 승전기념탑 전망대였다. 실로 천지개벽이라는 말이 어울릴 법한 광경. 대통령궁을 중심으로 툴강을 끼고 자리한 빼곡한 택지는 이미 과포화 상태였는데, 근현대사 공간을 신설한 몽골국립박물관의 자료를 통유리를 통해 들여다보는 일에 의미를 두려면 주도면밀한 국토개발계획이 절실한 시점이렷다. 그밖에 세계 정상급이 머무는 칭기즈칸 호텔에서의 하룻밤이나 아침 일찍 찾은 아리아발 사원은 새벽사원이라는 별칭에 걸맞게 고즈넉해서 좋았고, 독특한 침엽수림이 어우러진 테를지 국립공원의 목가적 풍광이야말로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것이다. 그러나 결코 잊지 말아야 할 일은 의열단을 이끌며 독립운동에 앞장선 이태준 열사의 희생적 업적이리라. ■ 프로필 - 고교생에게 국어와 문학을 가르치며 ‘수필집·시조집·기행집’ 등을 펴냈습니다. - 퇴임 후 기고활동을 이어가면서 기독교 철학박사(Ph.D.) 학위를 받았습니다. - 블로그 “조하식의 즐거운 집” http://blog.naver.com/johash을 운영합니다. - <평택자치신문>에 “세상사는 이야기”를 14년째 연재하는 중입니다. ※ 다음호(698호)에는 ‘생태적 삶을 위한 역제안 - 생태적 삶이란 무엇인가?’가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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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하식의 이야기
    2023-10-20
  • [세상사는 이야기] 몽골 초원의 재발견 ‘몽골이 마주한 변화의 바람’ (전)
    필자가 처음 몽골을 찾은 때는 대략 10년 전(2013.9.18.~9.23.), 한가위 연휴를 맞아 아들과 함께한 단기선교의 일환이었다. 평택콜로키움에서 추진한 이번 행사에는 곁에 아내가 있으니 명실공히 구색을 갖춘 셈이다. 평온한 여행을 위해 새벽기도를 드린 뒤 출발한 여정은 애써 준비한 손길들에 힘입어 일사천리. 칭기즈칸 국제공항에 안착하니 번듯한 신청사도 놀랍거니와 신도로의 승차감은 몽골의 대변신을 예고하는 듯했다. 한눈에 잡힌 울란바토르시의 급격한 변화상. 160여만 명이 운집한 시가지를 피해 엘승타사르하이라고 불리는 미니고비로 가는 동안 나는 연신 차창밖에 비치는 풍경을 카메라에 담느라 바빴다. 짬짬이 채우는 기록장에는 “샌배노(안녕하세요), 바이를라(고마워요), 바이르테(안녕히 계세요)”라고 적혀있다. 김범수 교수의 당부로 특별 가이드를 자처한 ‘부재’(몽골어 음가는 ‘푸재’로도 들림) 사장은 서울대 유학생 출신으로서 외모는 영락없는 한국인이요, 받침에 약한 발음은 일본인을 방불했다. 이흐몽골과 헉나칸산 사이를 가득 메운 사막에서 낙타를 타는 일은 의외로 쉽지 않았다. 언뜻 보아서는 점잖은 걸음걸이여서 쌍봉을 꽉 잡고만 있으면 별일이 아닐 듯한데 실상은 큰 덩치로 인해 좌우로 흔들리는 폭이 넓어서인지 네 발을 옮길 때마다 허리에 적잖이 무리가 따랐다. 가까스로 20여 분을 참아낸 나는 반환점에서 결단을 내렸다. 낙타 고삐를 냉큼 가이드에게 건넨 뒤 밀가루 같은 모래사장을 밟으니 성큼성큼 걸음을 내딛기는 힘들어도 발바닥에 와 닿는 촉감은 더없이 부드러웠다. 곧장 평소 동물과의 접촉을 꺼리는 아내와 합류해 모래밭에 자생하는 풀포기를 주의 깊게 살펴본즉 잔뿌리를 깊숙이 내렸다. 걱정스러운 건 여기저기 거센 바람결에 휩쓸린 흔적들. 이곳 역시 실효성 있는 보호책이 시급한 지점이었다. 이어진 샌드보트(모래썰매)는 잠시 망설이다가 아예 타지 않기로 했다. 아닌 게 아니라 사각거리지 않는 모래언덕의 성질상 미끄러지듯 내달리기는 거지반 어려운 형편. 나오는 길에 잠깐 유목민의 집에 들러 시음한 수태차는 손님을 극진히 모시는 꼬마가 있어 질박한 감동이 밀려왔다. ▲ 자이승 전망대에서 바라본 울란바토르 변화상 비칙트하드 게르에서 머문 첫날 밤, 해외여행 중 부부가 떨어져 잠든 첫 사례였다. 잔뜩 기대했던 별자리마저 하늘에 놔둔 채 옛 수도로 향하는 길. 그 도중에 유채꽃이 만발한 곳에 내려 노란 들판을 가슴에 담았다. 카라코룸은 오래전 다녀온 지인에게서 전해 들은 바로는 허허벌판이나 다름없다더니 칭기즈칸 후손의 유지를 받든 당국의 적극적 이주 계획에 따라 어느새 상주인구가 13,000명에 이르고 있단다. 그나마 번듯한 관공서(시청, 경찰서, 학교 등)에서 주거단지를 지탱해주고 있었다. 나름 위용을 갖춘 카라코룸 박물관에는 세계 주요 도시의 거리를 표시해 놓았는데 서울까지는 2천km가량, 기록을 남기지 않은 몽골족의 특성상 전시품 가운데 특별한 건 없으나 드물게 글씨를 새긴 비석을 볼 수 있었고, 박물관 건립에 자금을 보탠 일본의 발빠른 행보가 눈에 띄었다. 곧바로 에르덴조 사원을 거닐어본 감회 또한 색달랐다. 라마교의 건축양식을 본뜬 사찰을 비롯해 동물 형상의 석상들이 늘어선 통로에 군데군데 담장을 장식한 흰 돌탑들이 나그네의 눈길을 끌었다. 기원후 683~734년의 역사를 정리했다는 빌게강 박물관을 뒤로한 채 어젯밤 머문 숙소에 다시금 들러 뒷동산에 오를 기회를 잡은 건 행운이었다. 언덕배기에서 자라나는 야생화는 물론 바위산 뒤편에 펼쳐진 초원이야말로 그대로 천연 잔디 구장. 꼭대기에서 탁 트인 사방을 배경으로 추억을 담아 내려오며 시간이 멈춘 듯한 착각에 빠진 건 나뿐이었을까? 서둘러 도착한 노마디크 캠프에서는 굵직한 영화 촬영이 막 끝난 뒤였다. 그 이튿날 선보인 호스 타이노 야생말의 생태. 여느 때 마부들의 역할과 전통 생활방식은 물론 질서정연하게 이주하는 모습이며 마상에서 펼치는 묘기에 이어 마두금이 이끄는 3인 연주를 통해 울림과 감흥을 받은 몽흐 텡게르에서의 체험은 흥미로웠다. 다만 필자의 경우 숨이 막힐 것 같은 실내공기에 잠이 깨는 바람에 한 시간 이상을 환기하고 나서야 부족한 잠을 청했으나 막상 놓친 숙면을 보상해준 건 큼지막한 별자리였다. 난생처음 손에 잡힐 듯 바로 앞에서 바라본 북두칠성의 자태. 돌이켜보니 유년 시절에도 이처럼 가까이서 밤하늘을 품속에 꼭 안아본 적은 없었다. 누군가 몽골 초원의 밤을 노래한 ‘총총총 별이불’처럼…. ■ 프로필 - 고교생에게 국어와 문학을 가르치며 ‘수필집·시조집·기행집’ 등을 펴냈습니다. - 퇴임 후 기고활동을 이어가면서 기독교 철학박사(Ph.D.) 학위를 받았습니다. - 블로그 “조하식의 즐거운 집” http://blog.naver.com/johash을 운영합니다. - <평택자치신문>에 “세상사는 이야기”를 14년째 연재하는 중입니다. ※ 다음호(697호)에는 ‘몽골 초원의 재발견 - 몽골의 값진 자원은 대자연’이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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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하식의 이야기
    2023-10-13
  • [세상사는 이야기] “한국 사회가 풀어야 할 난제”
    ◇ 사교육 카르텔의 본질 톺아보기 러시아의 대문호인 안톤 체호프(1860-1904)는 “인간은 스스로 믿는 대로 된다.”라는 명언을 남겼다. 진보적 세계관을 가진 필자가 오랜만에 읽어본 그리스 신화 중 주목한 대목은 피그말리온 이야기다. 그 내용이 지닌 상징적 의미를 곰곰이 헤아리니 일종의 확증 편향이 아닌 꼭 이루고 싶은 일에 대한 도전정신이었다. 그 지점을 한국 사회의 현실에 적용해 본다면 세계 최저 출산율로 인한 급속한 경기 하강을 우려하는 상황에서 이른바 ‘피그말리온 효과(Pygmalion effect)’를 얼마나 기대할 수 있을까? 그에 따른 대전제는 어떠한 경우에든지 개인이나 집단이 소망하는 바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대내외적으로 최적화한 뒷받침이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그 요건 가운데 으뜸은 목표를 향한 진정성이요, 버금은 뒤로 물러설 줄 모르는 지속성이라고 본다. 아름다운 아내를 얻고 싶은 피그말리온의 일관된 심리상태를 두고 단지 허황한 희망 사항에 불과하다고 가볍게 치부할 수 없는 이유다. 이에 필자는 이미 선진국에 진입(2021년 UNCTAD: 유엔무역개발회의 발표 결과)한 대한민국의 문제들을 어떻게 하면 바로잡을 수 있을 것인가에 관한 대책을 구체적으로 생각해보았다. 김누리 교수(중앙대)가 전한 프랑코 베라르디(이탈리아 철학자)의 한국 사회에 대한 진단은 날카롭다. 즉 ‘끝없는 경쟁, 극단적 개인주의, 일상의 사막화, 생활 리듬의 초 가속화’가 그것이다. 위 현안의 근저에 현행 대입제도가 도사리고 있다. 첫째, 독립적 인격체인 학생들에게 점수를 매겨 줄을 세우는 식의 선발방식을 바꾸지 않는 한 무한경쟁은 계속될 것이다. 둘째, 청소년 시절에 실패한 경험이 두고두고 낙오의 이력으로 남아있는 한 공동체를 좀먹는 개인주의는 더욱 기승을 부릴 것이다. 셋째, 어렵사리 대학을 나와 봐야 쓸만한 일자리가 없으면 이구동성으로 외치는 워라밸(Work and Life Balance)은커녕 생계를 걱정할 만치 삶은 초토화로 치달을 것이다. 넷째 학문의 전당마저 빨리빨리 문화에 길든 대충주의가 판을 치는 한 생활 전반의 급발진 현상은 좀처럼 줄어들지 않을 것이다. ▲ 평택 부락산 문화공원 인공폭포 바위 이와 같은 강력한 허무주의를 극복할 대안은 없는가? 먼저 유럽의 교육선진국들이 시행하고 있는 유연한 교육과정과 융통성 있는 입시제도, 졸업자격에 관한 학사운영의 실태를 심층적으로 파악하라고 요구한다. 우선 국립대학들이 앞장서 학과목 성적 위주의 입시 사정에서 탈피해야 한다. 수학에 남다른 재능이나 흥미가 있는 사람이 수학과에 입학하면 된다. 한 나라의 발전적 존속에 필요한 인재가 어찌 의사와 법관뿐이겠는가? 우리 몸의 장기들이 주어진 기능을 수행할 때 건강한 것처럼 대학입시 역시 더는 특정 분야로 몰리는 경쟁률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 상생할 수 있는 여지를 없애버려서는 곤란하다. 날로 피폐화되어가는 삶의 환경을 개선하기 위해서는 눈앞에 보이는 성과에만 집착한 채 임계점에 다다른 정신세계를 가열된 속도감에 꿰맞추려 들지 말아야 한다. 그렇다면 모두가 잠시 숨을 고르며 오랜 기간 약육강식을 용인하는 관습에 무감각해진 사회 전반을 돌아볼 때다. 문제해결을 위한 실마리는 생산적인 문제의식을 통해 풀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정해진 절차를 밟아 문제를 제기하는 방식이라도 개개인의 형편을 최대한 고려해야 할 것이다. 이를 감안한 분석적 비판은 필수적이다. 하지만 전문가들의 도움을 받아 현실에 맞는 해결책을 도출한다고 해도 관건은 실천이다. 권한을 위임받은 지도자들이 그 열쇠 꾸러미를 쥐고 있다. 특권층의 기득권 포기가 결정적이로되 사회 구성원이 적극적으로 호응할 때라야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 잘못된 관행을 바로잡는 데는 서로 양보할 부분도 생길 것이다. 혈연, 지연, 학연은 물론 집단 이기주의만큼 공동체를 병들게 하는 요소는 없기 때문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변혁을 요구하는 시기에는 예외 없이 진통이 따르기 마련이다. 결국 피그말리온의 간청을 들어준 아프로디테의 행위를 보면 구약성경의 잠언을 떠올리게 한다.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받을 것이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다.”(『현대인의 성경』 「잠언 8:17」). 따라서 종교나 신화의 영역을 떠나 열리는 축복의 통로는 자신이 갈망한 만큼 그 꿈을 이루고자 하는 부단한 노력에 달렸다고 본다. 하지만 그간 우리 사회는 얼마나 지병에 가까운 병리 현상을 고치기 위해 몸부림을 쳤는가? 여러 가지 문제점을 안고 있는 현재의 대입제도를 AI(Artificial Intelligence, 인공지능) 시대의 챗 GPT(Chat Generative Pre-Trained Transformer)에 초점을 맞춰 과감히 혁신한다면, 잠재적 역량을 지닌 한국인은 과거 이룩한 한강의 기적을 뛰어넘어 장차 다가올 우주 시대의 새로운 주역으로 등장할 수 있을 것이다. ■ 프로필 - 고교생에게 국어와 문학을 가르치며 ‘수필집·시조집·기행집’ 등을 펴냈습니다. - 퇴임 후 기고활동을 이어가면서 기독교 철학박사(Ph.D.) 학위를 받았습니다. - 블로그 “조하식의 즐거운 집” http://blog.naver.com/johash을 운영합니다. - <평택자치신문>에 “세상사는 이야기”를 14년째 연재하는 중입니다. ※ 다음호(696호)에는 ‘몽골 초원의 재발견 - 몽골이 마주한 변화의 바람’이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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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하식의 이야기
    2023-10-05
  • [세상사는 이야기] 초로의 무거운 기억들 '갑질이 상수인 사회' (6회)
    우리 사회 곳곳에 만연한 병폐들이 비일비재하지만 이른바 ‘갑(甲)’들한테 ‘을(乙)’들이 당하는 ‘갑질’의 행태야말로 더는 참아내기 어려운 지경에 와있다고 본다. 문제는 천부당만부당한 일들이 점점 사라지기는커녕 교묘히 기승을 부리고 있다는 점이다. 왜 도도한 인류사의 수레바퀴는 짐짓 볼썽사나운 과거사를 소환이라도 하듯이 자꾸만 거꾸로 뒷걸음질 치는 걸까? 비근한 예로 필자 역시 몸으로 직접 겪었거나 가까운 데서 일어난 일들을 여럿 알고 있다. 첫째는 기고문 때문에 벌어진 한 인간의 민낯을 공개하련다. 이는 물론 교정이 필요한 부분에 관하여 언급하는 게 아니다. 지면에 부적합한 어휘나 내용은 마땅히 걸러져야겠지만 맞춤법과 띄어쓰기는 물론 국립국어원의 규정에 따른 각종 문장부호조차 모르면서 자신의 존재감을 위해 자의적으로 행사하는 권리 남용을 두고 되짚는 말이다. 반평생을 국어교육에 종사한 자로서 비록 학생의 글이라도 당사자의 고유한 문체(style)는 최대한 살려줘야 하거늘 어찌 ‘외부√필자의 기고는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를 내세워 함부로 문맥에도 맞지 않는 개악을 일삼는지 캐묻고 싶다(보시다시피 명사 배치를 고친 교정부호만도 두 군데임). 둘째는 층간소음에 얽힌 어처구니없는 체험담이다. 이 사안에 대해서는 이미 “흩날리는 층간소음의 잔해”라는 글을 통해 지상에 밝혔거니와 지금도 진행 중이어서 고난도의 인내심이 언제까지 버텨주려나 내심 임계치 반 기대치(?) 반인 상태다. 누군가의 말처럼 맘씨 좋은 위층을 만날 확률은 운명에 맡겨야 한다지만, 개인적 습관인 듯 거실에서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건 다반사고 발뒤꿈치를 바닥에 콕 박은 채 골프연습을 하는가 하면, 매번 나 몰라라 오리발도 모자라 관리소장이 나서면 집에 없는 것처럼 철저히 위장하니, 철면피 앞에서의 기대치란 단지 상상력에 불과하다. 셋째는 음식점을 운영하는 이들의 어리석은 대처법이다. 자영업자는 최대한 손님들의 소비심리를 파악하고 있어야 한다. 가게 앞이 지저분하면 들어가고픈 마음이 반감된다는 사실을 명심하라. 인건비에 자잿값이 올랐으니 음식값을 올리는 거야 얼마큼 양해할 일이로되, 덩달아 요리의 질까지 형편없이 떨어진다면 왜 주객전도의 상황을 감수해야 하는 건지 도무지 이해하기 어렵다. 게다가 밖에서라도 종사자의 흡연하는 모습이 보일라치면 냉큼 발길을 돌릴 수밖에 없다. 누구든지 건강을 위해 끼니를 이어가는 법이므로 자신의 기호품으로 인한 피해자가 생긴다면 더이상 일개인의 권리 주장은 성립하지 않는다. 넷째는 공무원의 구태의연한 일 처리 방식이나 태만한 근무태도에 관한 일갈이다. 애초에 ‘공복(公僕)’이라는 낱말을 듣고 기분이 상하면 국가사회를 위해 기꺼이 심부름하겠다는 자세가 흐트러진 게 맞다. 철밥통에 걸맞은 신분과 연금을 보장하고 있음에도 최근 조사에서 공채 경쟁률이 한풀 꺾인 건 왜일까? 사안을 공익차원에서 바라보는 시민으로서는 올 게 왔다는 입장이다. 임용제도의 틀이 대부분 점수에 의한 줄 세우기여서 근본적인 개선책이 마련되어야겠지만,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면 심층 면접을 거쳐 사명감 있는 사람에게 공직을 맡기는 편이 더 나을 것이다. 다섯째는 택시를 모는 기사분들에게 정중히 건네고픈 이야기가 있다. 제발 요금 올리는 데만 열을 올리지 말고 손님을 정성껏 대하시라. 친절히 짐을 실어주고 내려주면서 상냥하게 인사를 나누면 거스름돈 외에 웃돈이라도 얹어주고 싶지 않을까? 온종일 앉아만 있다가 생기는 질병도 틈날 때마다 부지런히 일어났다 앉기를 거듭하면 상당 부분 치유되거나 예방되지 않겠는가? 개인적 경험으로도 연약한 인간인지라 베풀고픈 마음은 상대에게 달린 경우가 많으니까 말이다. 나아가 흡연으로 인한 담배 냄새가 차 안에 배어있다면 그 차는 다시는 타고 싶지 않을 것이다. 끝으로 우리 고장 시내버스 기사들의 난폭운전을 고발한다. 필자는 이따금 서울 갈 때 외에는 솔직히 단말기에 신용카드의 어디를 갖다 대는지도 서툰 경우에 속한다. 아내에게 물어 애써 숙지하고 가도 망설이는 건 어쩔 수 없다. 그런 마당에 신경질적으로 급출발에 급정거는 기본이고, 뭘 묻기라도 하면 귀찮다는 듯 불친절한 데다가 심지어는 내릴 때 뒤에다 대고 상소리를 해대는 건 심하다 못해 역겹다. 굳이 흔한 역지사지라는 사자성어를 떠올리지 않더라도 조금씩만 남을 배려하면 얼마나 좋을까? 이제 갑질은 우리 주위에서 더는 변수가 아닌 느낌이다. ■ 프로필 - 고교생에게 국어와 문학을 가르치며 ‘수필집·시조집·기행집’ 등을 펴냈습니다. - 퇴임 후 기고활동을 이어가면서 기독교 철학박사(Ph.D.) 학위를 받았습니다. - 블로그 “조하식의 즐거운 집” http://blog.naver.com/johash을 운영합니다. - <평택자치신문>에 “세상사는 이야기”를 14년째 연재하는 중입니다. ※ 다음호(695호)에는 ‘한국 사회가 풀어야 할 난제’가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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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하식의 이야기
    2023-09-14
  • [세상사는 이야기] 초로의 무거운 기억들 ‘떠돌다 떠난 지인들’ (5회)
    몇 번을 되짚어도 ‘대기리’의 생애는 참 무모했어요. 그의 마음속에 과연 창조신앙이 있었는지 심히 의심하고 있다는 말이오. 그를 마지막으로 본 때는 임종을 불과 하루 앞둔 날이었어요. 보자마자 실로 충격적이었죠. 글자 그대로 피골이 상접한 모습이었으니까요. 여태껏 그런 형태의 사람을 만나본 적이 없었거든요. 내심 당황할 정도였어요. 줄기차게 찬송가를 틀어 놓고 앉아있더군요. 평소 좋아한 빵이며 수박을 잘랐는데 입술에 댔다가 금세 떼고 말더라니까요. 한눈에 물 한 모금 제대로 넘기지 못하는 상태가 몇 달째 이어진 거처럼 보였어요. 이런저런 수식 자체가 전혀 불필요할 만치 가느다란 뼈대를 가진 새까만 인형으로 분장해 놓은 듯했어요. 외마디 말이라도 건네는 게 퍽 신기했을뿐더러 마치 연기하는 듯한 독백에 가까웠으니까요. 심각한 문제는 죽음에 대한 준비가 아예 안 되어 있었다는 거예요. 코앞에 닥친 현실 인식조차 찾아볼 수 없는 황당한 모습이었죠. 그걸 보고 어찌 생에 대한 의욕이랄 수 있을까요? 순간 나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거든요. 저분들이 믿는 예수님은 누구일까? 그래서 가끔 자신이 만든 신을 조종하며 살아온 건 아닌지 이따금 그들의 검은 그림자가 떠오르곤 한답니다. 대속의 은혜로 얻은 영생의 소망은 어디로 날아갔을까요? 그 부부를 닮은 ‘기어이’의 삶 역시 상당히 지저분했다는 평가가 지배적이외다. 자신의 신분이 하늘만큼 높으신 양 으스대는 몰골이거든요. 웃기는 사건이 있었죠. 카센터에서 무전취식한 얘기를 들을 때는 같은 교육자로서 수치심을 느낄 정도였어요. 차를 고쳤으면 응당 대가를 지불해야 마땅하거늘 종교인이 무슨 벼슬인가요? 심지어 강대상에서 처갓집 경조사에 봉투가 몇 개나 들어왔다고 자랑을 늘어놓더이다. 그것도 제 부조금을 떼먹은 자들을 질타하면서 말이오. 그 웃픈 실화를 통해 끈질긴 죄의 생물성을 확인할 수밖에 없었어요. 결국은 날마다 편한 일만 골라 살아온 주제에 일말의 양심도 없이 돈 몇 푼 더 먹으려다가 지레 동티가 나고 말았던 거죠. 업무방해죄도 모자라 어린 여자애를 추행한 돌풍에 휩싸여 그야말로 치명적 곤욕을 치렀거든요. 그래도 남은 연금으로 먹고사는 데 지장은 없겠으나 꼬박 사흘을 방언에 몰입해본 사람이 있으면 나와보라고 큰소리치던 꼴이 떠오를 때면 실로 실소를 금치 못하고 있다오. ‘화나지’의 행보는 무릇 너저분하다고 볼 수 있답니다. 그는 그렇게 하나님의 기사를 확인하고픈 행보를 보이더군요. 아마도 사후세계를 믿지 못하는 배우자의 영향이 아닌가 했어요. 아마도 본인 생각도 그러하니 아무 거리낌 없이 남들 앞에서 털어놓았겠죠. 솔직히 다소 의외의 사건이자 사태였어요. 어쩌면 그와 어울린 ‘히하니’와 상통하는 일면이 있어 덧붙이는 말이외다. 아니 글쎄 이런 일도 있었다니까요. 선교여행을 하는 도중에 우리가 믿는 하나님의 존재를 정의하다가 아뿔싸, 악심을 품더라니까요? 말하자면 자기가 믿는 신이 내가 믿는 신에게 졌다는 이유로 해코지를 감행한 셈이죠. 사실 이만치 황당한 상황을 맞닥뜨리기란 정말 쉽지 않아요. 여정 내내 몸살로 죽을 지경이던 나를 그토록 미워했으니까요. 심중에 예수그리스도를 믿는다면 도저히 일어날 수 없는 일들이죠. 불신의 늪에서 허덕이는 자들의 모습은 놀랄 만치 빼닮았어요. ‘호려니’의 운신을 들으면 참으로 실망스럽소이다. 그러니까 그와 나의 인연은 내 집들이였어요. 서재에 눈길이 꽂혔는지 이튿날 전화를 했더군요. 다시금 들렀고 이후 지속적으로 만남을 이어갔죠. 학사행정 전반은 물론 개념 없는 인간들을 함께 성토하며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교분을 키워갔어요. 주로 그가 묻고 내가 답하는 때가 많았죠. 보통 서너 시간을 넘겼고, 유선상으로도 한 시간이 짧았어요. 오죽하면 아내가 연애하느냐 놀릴 정도였다니까요. 나는 진심으로 그를 위로하곤 했어요. 혹여 따끔한 충고가 그를 아프게 할까 봐 조심스러웠거든요. 제일 힘들었을 때는 밤 열 시에 만나자고 간청해 자정이 넘어 헤어질 때였어요. 친구라고 여겼기에 잠자코 들어주는 게 도리라고 생각했어요. 그가 화나 있으면 나는 더 화가 났어요. 그런데 그런 이심전심은 애석하게도 착각이었어요. 가시처럼 걸리는 게 딸내미의 혼사였어요. 집 나간 영적 이단아를 단죄한 일에 대해 그가 몰이해한 거죠. 알고 보니 그가 그 식장엘 갔어요. 나 같으면 벗으로서 자초지종을 물었을 거예요. 하지만 그는 실망스럽게도 나를 떠날 핑곗거리로 삼아버렸어요. 진정한 동무는 아니었던 겁니다. 나는 아주 오래 그의 영혼을 근심할 거예요. ■ 프로필 - 고교생에게 국어와 문학을 가르치며 ‘수필집·시조집·기행집’ 등을 펴냈습니다. - 퇴임 후 기고활동을 이어가면서 기독교 철학박사(Ph.D.) 학위를 받았습니다. - 블로그 “조하식의 즐거운 집” http://blog.naver.com/johash을 운영합니다. - <평택자치신문>에 “세상사는 이야기”를 14년째 연재하는 중입니다. ※ 다음호(694호)에는 ‘초로의 무거운 기억들 - 갑질이 상수인 사회’가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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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하식의 이야기
    2023-09-08
  • [세상사는 이야기] 초로의 무거운 기억들 ‘모종의 씁쓸한 종말’ (4회)
    (이 편지는 원래 내용이 워낙 무거워 등장인물과 전개를 색다르게 바꿨습니다.) 그토록 한국의 풍경을 좋아하던 미스터 구루마가 이곳을 떠난 지도 벌써 6개월이 다 되어가는군요. 그동안 가족과 함께 건강한지요? 그대가 섬기는 신께서 돌보아 주시리라 믿기에 이렇게 맘 편히 안부를 전할 수 있소. 조국 인도로 돌아간 이후 하는 일은 뜻대로 잘 되겠지요? 우리 가족 역시 다들 무사히 잘 있다오. 공단에서 같이 근무할 때 서로 도우며 우의를 다지던 일이 생각나오. 떠올릴수록 당신은 참으로 마음 바탕이 고운 사람이었소. 처음 몇 달간 회사가 어려워 월급을 제대로 받지 못하면서도 불평 한마디 없이 끝까지 남아 무사히 위기를 넘겨주었고, 남들이 귀찮아 피하는 궂은일이나 온갖 잡일을 마다치 않고 동료들을 위해 앞장서서 뛰어다니던 모습이며, 어려움에도 늘 용기를 잃지 않고 환하게 웃던 얼굴이 눈앞에 선하오. 그런 마음씨와 인간 됨됨이라면 어디에 가든지 틀림없이 성공하리라고 여기 동료직원들은 확신하고 있다오. 끝내 마음에 걸리는 점은 비록 일부라고는 해도 한국인 가운데 악덕 기업주가 있다는 사실이오. 여러 번에 걸쳐 대신 사과하고 나름대로 힘껏 돕기는 했지만 차마 당신들 앞에서 얼굴을 들 수가 없었소. 형제는 그때마다 오히려 나이 많은 나를 위로하려 들었고, 아버님의 마음만 고맙게 받겠다고 눈물을 흘리며 의연하게 행동하던 자태가 부러웠소. 돌이켜보면 세상에 어찌 착한 사람들만 살 수 있겠소마는 애써 일한 대가를 지불하지 않고 상대의 약점을 잡아 노동력을 착취하는 일만은 근절되어야 한다고 매번 목청을 높인 연유요. 하지만 그 악성 종양은 생각보다 깊이 뿌리를 내려 외국인 근로자들을 끊임없이 괴롭히고 있으니 걱정이 크다오. 언론 보도를 통해 피 같은 임금을 떼먹고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숨어 지내는 악덕 경영주를 보면 그야말로 거룩한 분노가 일어나는 걸 주체하지 못한다오. 사실 이역만리 떨어진 타국에 와서 고생하는 외국인 근로자만큼 좋은 외교사절이 어디 있겠소? 늘 안타까워하며 흥분하던 내 얼굴이 생각나는지 모르겠소. 나는 외국인 노동자들이 코리안드림을 이루는 만큼 민간외교는 이루어진다고 믿고 있소. 그간 모은 돈으로 부인과 함께 차릴 예정이라던 액세서리 가게는 예정대로 잘되는지요? 물론 작은 규모의 가내수공업이란 게 유독 불황을 잘 타는 업종이어서 묻는 말이오. 부디 성공하여 재회하기를 바라오. 그리고 염치없는 부탁인 줄은 아오만 유창한 우리 한국어를 절대 잊지 말고 인도에서 우리 한국의 좋은 점을 널리 홍보해 주시오. 한반도가 일제 강압에 의해 신음하던 시절, 한국을 위해 인도의 시인 타고르가 선물한 “동방의 등불”을 내가 기억하는 것처럼 말이오. // 일찍이 아시아의 황금시기에 / 빛나던 등불의 하나 코리아 / 그 등불 다시 한번 켜지는 날에 / 너는 동방의 밝은 빛이 될지니 / 마음에는 두려움이 없고 / 머리는 높이 쳐들린 곳 / 지식은 자유스럽고 / 좁다란 담벼락으로 세계가 조각조각 갈라지지 않는 곳 / 진실의 깊은 곳에서 말씀이 솟아나는 곳 / 끊임없는 노력이 완성을 향해 팔을 벌리는 곳 / 지성의 맑은 흐름이 / 굳어진 습관의 모래벌판에 길 잃지 않는 곳 / 무한히 퍼져 나가는 생각과 행동으로 우리들의 마음이 인도되는 곳 / 그러한 자유의 천국으로 / 내 마음의 조국 코리아여 깨어나소서 // 아시다시피 일제강점기에서 한민족에게 큰 감동과 용기를 북돋운 시였소. 악랄한 일본의 눈치를 보면서도 한국의 밝은 미래를 축원해준 덕분에 우리는 멋지게 일어섰고, 이제는 인도의 차례라고 확신하오. 미스터 구루마! 꼭 조국의 발전에 이바지하는 사람이 되시오. 참, 동네 이름이 ‘넬루푸디’라 했던가요? 발음은 낯설지만 언젠가 방문하겠다는 약속은 꼭 지키겠소. 그렇지 않아도 TV에서 인도를 소개할 때면 온 식구가 눈을 부릅뜨고 쳐다본다오. 그만큼 몸은 멀리 떨어져 있을망정 마음만은 가까이 있다는 증거 아니겠소? 우리 서로 소식을 전하며 지냅시다. 새삼 함께 있었던 3년여의 세월이 그립소. 이번 크리스마스 때는 손수 만든 예쁜 엽서를 부치리다. 그럼 다시 만날 때까지 내내 평안하길 빌겠소. 그대 가정에 주님의 평화가 깃들기를 바라오. 2004년 10월 30일 -구루마를 그리워하는 한국인으로부터- (그런데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심장마비로 인해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서글픈 지점은 그 죽음을 두고 종교적 인과응보라는 소문이 인근에 자자했다는 사실입니다.) ■ 프로필 - 고교생에게 국어와 문학을 가르치며 ‘수필집·시조집·기행집’ 등을 펴냈습니다. - 퇴임 후 기고활동을 이어가면서 기독교 철학박사(Ph.D.) 학위를 받았습니다. - 블로그 “조하식의 즐거운 집” http://blog.naver.com/johash을 운영합니다. - <평택자치신문>에 “세상사는 이야기”를 14년째 연재하는 중입니다. ※ 다음호(693호)에는 ‘초로의 무거운 기억들 - 떠돌다 떠난 지인들’이 이어집니다.
    • 시민광장
    • 조하식의 이야기
    2023-09-01
  • [세상사는 이야기] 초로의 무거운 기억들 ‘소환한 과거의 관계’ (3회)
    매서운 한겨울에 이어 찾아온 봄날이어서 대지에 스며든 냉기마저 아직 가시지 않았거늘 기실 아직도 곁을 떠나지 못하는 육친의 한기는 어쩔 수 없는 혈연의 징표일 터다. 얼마 전 그리고 며칠 전 손아래 핏줄 둘이서 병영으로 향하던 그 날, 우리는 그 흔해 빠진 가슴팍 한 번 제대로 비벼대지 못한 채 뻘쭘하게 헤어지고 말았지. 단 한마디 건넬 낱말조차 동나버린 채 도통 말문을 열지 못했어. 이를테면 ‘어쨌든 자네는 이제 대한민국의 어엿한 국군이라네’라든가, ‘당분간은 교정에서 즐겨온 나약한 찌꺼기들과 싸워야 할 거야’라든지, 하다못해 하루빨리 한낱 형식에 그친 충성 구호를 굳센 조국 수호의 신념으로 승화하라는 둥, 아주 근사한 아울러 퍽 약삭빠른 상황론이라도 발동해 국민의 4대 의무 중 하나를 과감히 떨쳐버리길 바란다는 정도의 메시지는 나왔어야 했는데 말이야. 물론 바람대로 원만한 일 처리는 어려울 테니 어차피 끌려가기 싫은 길임을 위로하는 형태로 적당히 얼버무려야 했거든! 슬그머니 자네들과 깨어진 관계를 뼈아프게 여기는 것도 실은 그래서라네. 재기발랄한 빛돌이와 똘똘이! 뒤늦게나마 이렇게라도 한번 불러보고 싶었네. 이제야 털어놓네만 나는 아우들을 무척이나 아꼈다네. 믿거나 말거나 형제라는 연줄로 만나 밤새껏 고통하면 할수록 이른 아침 거울에 비친 나의 낯빛이 볼썽사납게 일그러져 있었으니 말일세. 그도 그럴 게 자네들이 두고 간 공책을 펼칠 때면 행간에서 늘상 못다한 얘기들이 들려오는 듯했다네. 언젠가 어느 농막에 머물며 나무토막에 걸터앉아 밤 깊은 줄 모르고 나누던 우리의 젊음은 비록 유치찬란했지만 꽤나 정겨운 거였지. 치열한 대화가 차츰 열악한 가정경제로 옮겨가면서 그간의 갈등이 거대한 명제 앞에 멈춰 서버리곤 했어. 순간 공허한 위선이 얄팍한 뇌리를 배회했고, 저 멀리 흩어져있던 사료(思料)의 편린들이 하나둘 벗겨지기 시작했거든. 미처 사랑을 예비하지 못한 못난 나 자신을 모질게 질책했지. 곧바로 터뜨린 서로의 쌍방적 단죄로 인해 다들 한없이 왜소한 몰골이 되어 스스로 주눅이 들곤 했었어. 아무리 그렇더라도 그건 분명 버르장머리없는 짓이랬잖아. 매우 뿔나고 충격적인 일로부터 한참이 지난 뒤에야 송두리째 잃었던, 아니 뜻도 모를 넋두리들을 목적 없이 추스르고 있었으니까. 우리가 더 허약해진 소이(所以)는 비단 그뿐만이 아니었어. 서툴게 빚어낸 껄끄러운 정서라면 이건 관용을 숫제 유희 따위로 추락시킨 참이야. 차라리 정죄의 능선을 넘어선 죄악의 범주라며 격하게 흥분했거든? 일단은 그걸 “화려한 사랑의 고요한 근원에 대한 소고(小考)”라고 마감했으되 고스란히 남겨놓은 묵직한 과제였고 짙은 유산이었어. 뒤돌아보니 언뜻 혼돈과 방황의 지점이었으니 한편으론 봐줄 만한 소행이었지. 거푸 저주와 불행을 토로하던 시공에서 타협점을 찾으려 시도한 대적이었던 것 같아. 그렇게 한참 미궁을 헤매다가 급기야 언성이 높아져 한 가닥 남은 우애마저 한순간에 혼탁해진 걸 그냥 내버려 둔 거야. 우린 결국 서둘러 핏기없는 건배와 협력하고 말았지. 어리석게도 그 증거들을 깡그리 인멸해버린 거야. 설마하니 그때 우리네 근본을 사춘기처럼 세상 풍정(風情)에 구토하듯 죄다 포기한 건 아니었겠지? 아직 우리 앙상한 가슴에 고귀한 한 줄기 빛이 사라지지 않았기에 되뇌는 말이야. 어차피 야멸찬 세파에 지쳐 세정(世井)이 메말라갈수록 외려 그 탐욕 위에 탕진할 삶을 애써 축적한다면 더는 소망은 없는 거잖아. 적어도 알면서 범하는 오만의 오차라도 최소한 줄여보자는 게 나의 지론이거든! 왜 사람들은 조건들에 얽매어 마냥 유랑을 거듭할까? 조금만 자신을 깊숙이 인식했던들 덜 중요한 요인들에 훨씬 초연할 수 있을 텐데 말야. 엽서 한 장에 녹여내는 시공은 어쩌면 가장 수더분한 현장인지도 몰라. 내 속에 있는 또 다른 나를 얼마만큼 지켜내느냐에 초점을 맞추지 말고, 정녕 타인을 위해 배려하는 마음을 먹는다면 더 큰 보람과 자긍을 느낄 거야. 너무 교과서적인 전언이었다면 그대로 풋풋한 사려쯤으로 이해해 주게나. 곧 영내에서 닦은 응결된 멋을 보고 싶으이. 부디 쓰디쓴 표정에 담긴 비생산적인 언어가 아닌 서로를 껴안고 포용하는 원숙한 남성에 관해 논해보세나. 지난날 이 형이 고향에 싣고 왔던 군대 문화를 저울질하거나 지레 미숙한 육신의 산고였다며 짐짓 생색내지는 말고! 아우들아, 이제라도 우리 한번 한껏 포효하며 어둡고 궁벽진 땅 위에서 맑고 밝은 빛살을 맘껏 뿌리며 살아갈 수는 없을까? ■ 프로필 - 고교생에게 국어와 문학을 가르치며 ‘수필집·시조집·기행집’ 등을 펴냈습니다. - 퇴임 후 기고활동을 이어가면서 기독교 철학박사(Ph.D.) 학위를 받았습니다. - 블로그 “조하식의 즐거운 집” http://blog.naver.com/johash을 운영합니다. - <평택자치신문>에 “세상사는 이야기”를 14년째 연재하는 중입니다. ※ 다음호(692호)에는 ‘초로의 무거운 기억들 - 모종의 씁쓸한 종말’이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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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하식의 이야기
    2023-08-25
  • [세상사는 이야기] 초로의 무거운 기억들 ‘박사는 장애물 경주’ (2회)
    지금으로부터 20여 년 전 ㅎㄱㅇ대 문학박사과정에 당당히 합격한 뒤 등록까지 마쳤지만 재단 측의 비협조와 현실적 장애물로 인해 접을 수밖에 없었다. 다시금 구성원의 달란트를 백안시한 자들의 근시안적 처사에 깊은 유감을 표한다. 지역 언론에 학교명과 함께 글이 실리면 홍보에 곧잘 활용하면서도 어찌 그런 이중적 자세를 취할 수 있는지 도무지 그 속내를 모르겠다. 사람을 키우지 못하는 조직은 급변하는 세상에서 유의미한 성과를 거두기도 어렵거니와 미래지향적으로 뻗어 나갈 수 있는 토양을 일구어낼 수 없다고 본다. 그래서 두 번째로 찾아간 곳은 주말강좌를 개설한 ㄱㅈ대 교육학 박사과정이었으나 큰 사고를 당한 정신적 여파에 실력마저 모자라 입학을 허락받지 못했다. 아쉽게도 십여 년 전에 마친 교육학석사의 완결판이 불발된 터다. 공들인 신학대학원 뒤로는 틈틈이 다듬은 글월을 모아 여남은 책자를 펴내는 일에 주력했다. 차분히 맞이한 정년과 함께 찾아온 코로나바이러스는 해묵은 숙제인 박사과정을 앞당긴 계기였다. 원래는 미처 밟지 못한 지구촌 맞은편의 여행지를 두루 다닌 다음 공부를 시작할 요량이었으니 말이다. 그곳은 ㅇㅅㅌㅁㅅㅌ대학원 기독교교육학이었다. 수업내용은 초장부터 만만치 않았다. 매주 쏟아지는 과제물에 치여 지레 겁을 집어먹고 하마터면 멈출 뻔했을 만큼 말이다. 설상가상 다원주의자들과 맞서 싸울 일까지 겹쳤다. 마귀는 한통속이라더니 교수와 원생이 한 팀이 되어 대적하는 양상은 실로 영적 전투였다. 일련의 과정은 고맙게도 연재물로 승화시켰다. 끝내 학점에서 불이익을 당한 기록은 씁쓸한 기억일 수밖에. 어찌 교육자라는 위치에서 양심을 헌신짝처럼 팔아먹을 수 있는지 경멸스럽다. 하긴 심중에 예수그리스도가 없는데 무슨 의로움을 기대하랴. 사람이란 본시 믿을 만한 대상이 아닌 이해하고 사랑받을 존재라는 사실이 새삼 입증된 경우다. 유사한 고민의 종양은 동종교배를 마다한 결정을 접고 목회학을 마친 ㅍㅌ대로 회귀한 뒤 불거졌다. 여기서도 다원주의자를 맞닥뜨린 참이다. 그 역시 공식처럼 원생과 연대해 수준 낮은 짓거리를 일삼더니만 학점에 불이익을 주었다. 복병은 뜻하지 않게 찾아온 탈수증세였다. 매주 ‘평택섶길’을 강행군한 데다가 주중에 하루를 더 할애해 한남정맥을 정복하려는 대열에 합류한 게 화근이었다. 자칫 입이 비뚤어질 수도 있는 구안와사로 인해 양·한방 진료를 받았다. 다행히 양의에게는 돈을 뜯겼으나 한방에서의 한 방으로 위기를 넘겼다. 이후 우리 부부는 좋은 한약을 처방받고 있다. <출처 = 픽사베이> 그 덕분에 범위를 고지한 영어시험을 무난히 통과했고 내친김에 종합시험까지 이겨냈다. 이제 남은 장벽은 논제를 정하는 일이었다. 아마 4학기 들어 유능한 강사를 만나지 못했더라면 난감한 지경에서 헤맸을 것이다. 그러나 신실한 성령님은 나에게 어렵잖게 프로포절을 구성해낼 은사를 허락하셨다. 이미 써놓은 몇 편의 글월이 결정적 역할을 감당해주었다. 곧이어 두 번의 심사절차가 필자를 벼르고 있었다. 논제를 여러 번 바꾸는 일이야 다반사여서 충분히 감내할 만한 절차였거니와 불투명한 가운데 투명한 빛을 잃지 않은 것이야말로 오롯이 주님의 은혜로밖에는 설명이 되지 않는다. 진통 끝에 심사위원들이 정해지고 이윽고 중간심사에 들어갔다. 신랄하게 난타를 당한 끝에 급기야 원고는 반토막이 나고 말았다. 깊은 시름은 무거운 몸살기로 나타났다. 이내 추스르고 논문을 재설계하는 작업에 돌입했다. 서로들 아귀가 맞지 않으니 마뜩잖은 기류는 오래 갔다. 이 난국을 돌파하는 데는 하늘로부터의 지혜가 절실했다. 늘 복병은 예기치 않은 데 숨어있는가 보다. 방어 한번 못한 지도교수가 훼방을 놓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다. 하지만 예수님은 심사위원장을 든든한 원군으로 내정해놓으셨다. 끝판을 뒤흔들어 자신의 존재감을 과시하려던 그의 궤계는 수포로 돌아갔다. 드디어 나는 신학에 문학을 접목한 간학문적 시도를 인정받았다. 아직은 학문적으로 미숙할지언정 성삼위 하나님으로부터 기독교 철학박사로서의 인증을 마친 참이다. 물론 혼신을 다한 아내의 기도가 없었더라면 그때마다 밀려든 고초를 의연히 견뎌내기는 무척 버거웠을 것이다. 그러니 학위의 절반은 사랑하는 여인의 몫이다. 여기서 나란 사람은 일대 반전이 될 만한 구상을 공표했다. 방송대에서 문화교양학을 수학하기로 결정하였다. 이를 두고 필자는 박사후과정의 일환이라는 해설을 덧붙이며 각 학문을 섭렵하는 재미가 쏠쏠하다고 말씀드리고 싶다. ■ 프로필 - 고교생에게 국어와 문학을 가르치며 ‘수필집·시조집·기행집’ 등을 펴냈습니다. - 퇴임 후 기고활동을 이어가면서 기독교 철학박사(Ph.D.) 학위를 받았습니다. - 블로그 “조하식의 즐거운 집” http://blog.naver.com/johash을 운영합니다. - <평택자치신문>에 “세상사는 이야기”를 14년째 연재하는 중입니다. ※ 다음호(691호)에는 ‘초로의 무거운 기억들 - 소환한 과거의 관계’가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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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8-18
  • [세상사는 이야기] 초로의 무거운 기억들 ‘병마는 싫은 불청객’ (1회)
    우리 몸은 오묘한 유기체요, 현재 건강상태에 따른 신호등이다. 과로나 나태로 인해 빚어진 적신호를 실시간 오감을 통해 보여주기 때문이다. 필자는 생모의 생체가 원활하지 않아 태어날 때부터 유약했다는 말을 자주 들었다. 어린 시절 구황식물이나 시래기죽으로 연명할 때가 적잖았으니 영양분은 늘 부족했으며, 유독 손발이 차가워 동상에 시달리던 가려움증도 엊그제처럼 스멀거린다. 너나없이 보릿고개를 겪을 때여서 시대적 가난을 탓할망정 그 문제를 파헤치겠다는 듯 누구를 딱히 지목할 수도 없다. 사람들이 그토록 오래 소중한 자유를 저당 잡히고서도 지긋지긋한 독재정치를 그리워하는 건 아마 그래서일 가능성이 높다. 그런데 실은 병마라는 불청객에게도 할 말은 있을 성싶다. 그쪽에서 청했으니 방문한 길손에 지나지 않는다는 항변이렷다. 그것이 부지불식간이든 아니면 밀려든 상황을 애써 무시한 결과이든지 간에 우리네 몸은 끊임없이 더는 견디기 힘들다는 신호를 보내온다는 얘기다. 그때 중 한때를 소환하면 초등학교 저학년 시절 극심한 홍역을 앓았던 적이 있다. 뜬눈으로 꼬박 밤을 지새운 끝에 새벽녘에야 잠깐 눈을 붙였다 싶었는데 맥없이 실눈을 뜨니 온몸에 물집이 잡혀 있어 차마 눈 뜨고는 볼 수 없는 모양새였다. 천지사방이 열악한 때 엄마를 따라 보건소에 가본들 무슨 뾰족한 수가 있었으랴. 며칠을 마치 주검처럼 누워있다가 가까스로 일어나 움직였었다. 이러구러 직장생활을 막 시작했을 무렵 주공아파트에 살면서 겪은 몸살은 좀처럼 잊을 수 없다. 추정컨대 환경호르몬이 독한 단열재로 인해 인체가 극심한 악영향을 받으며 자고 일어나기조차 곤욕스러운 일상이었다. 물론 출퇴근하는 일정이 버거웠던 건 거꾸로 주독야경을 겸하던 수학기여서 더 그랬을 테지만 돌이켜보면 복음을 깊이 깨닫지 못한 연고였다. 고로 주위에서 무늬만 기독교인을 만날 적마다 긍휼히 여기는 마음의 십상팔구는 동병상련의 연유다. 병영을 나오면서도 못내 아쉬웠던 건 이왕지사 치를 고생이라면 왜 적극 추억거리를 만들지 못했느냐는 안타까움이다. 성숙한 인간의 힘이란 모름지기 올챙이 적 시절을 간직할 줄 아는 기억력인데 말이다. 여고에서 남고로 막 전근을 갔을 때 삽화 한 토막이다. 학교도서관에 머물며 마냥 심신이 풀렸던지 집에 오면 거실 소파를 벗 삼아 운동을 게을리했었다. 그러다 보니 걸터앉은 자세는 물론 비스듬히 TV 시청을 지속하는 바람에 허리에 이상이 생기고 말았다. 하루는 간신히 출근한 뒤 수업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급기야 구급차에 실려 가는 신세가 되었다. 고맙게도 이틀 밤을 지낸 뒤 서둘러 짐을 챙겨 빠져나올 수 있었으나 여태껏 앙금처럼 고여있는 건 칙칙한 병실에 알고 보니 밥값을 덤으로 계산하지를 않았나, 억지로 입원 날짜를 늘리려고 꼼수까지 쓰지를 않나, 딴은 지역사회에 장학금을 투여하던 병원장의 행동마저 곱게 보이질 않았다. 다들 기피하는 담임교사를 자처하던 시절, 연이은 야근에 기흉 비슷한 증세가 가슴 한편을 옥죄었다. 지금 생각하면 일 중독에 빠져 허우적대다가 자초한 일이었다. 다행히 입원한 지 하루 만에 전격 병실 문을 박차고 나온 데는 그만한 까닭이 있었다. 우리 몸도 적색에서 청색으로 넘어갈 때 황색 신호등이 깜박인다는 걸 뒤늦게 알아차린 참이다. 그렇다면 다시는 무리한 일을 일삼지 말아야 하거늘 참으로 바뀌지 않는 자체가 인간의 속성이어서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건 여전히 단순한 관성을 벗어나지 못한 탓이다. 이쯤 되면 일대 각성이 필요한 단계라고 볼 수 있다. 아니 대오각성이라는 사자성어를 동원한들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그밖에 다른 글에서도 밝힌 바 있거니와 가볍지 않은 주제의 과제물에 주간 연재를 위해 온종일 뛰어다니다가 우습게 뵈는 등산 코스에서 탈수증세를 겪었다. 때마침 주말이어서 약사의 대처로 급한 불은 껐으나, 이는 무리수를 거듭하는 몸을 향해 던진 경고등이었다. 뒤이어 생애 처음 맞닥뜨린 구안와사는 몹시 당황한 나머지 여러 문제점을 노출했다. 무슨 일이든지 사전에 정보를 숙지하고 차분히 병원을 찾았더라면 쓸데없는 수고를 얹지 않아도 되었을 것을 이중치료에 과다비용을 지출한 경우다. 따라서 병마라는 불청객은 늘 우리 곁에서 호시탐탐 뭇 인간을 곤욕스럽게 만드는 재주가 있다. 다만 그와 동시에 삼색등을 번갈아 바꾸며 요긴한 신호를 보내준다. ■ 프로필 - 고교생에게 국어와 문학을 가르치며 ‘수필집·시조집·기행집’ 등을 펴냈습니다. - 퇴임 후 기고활동을 이어가면서 기독교 철학박사(Ph.D.) 학위를 받았습니다. - 블로그 “조하식의 즐거운 집” http://blog.naver.com/johash을 운영합니다. - <평택자치신문>에 “세상사는 이야기”를 14년째 연재하는 중입니다. ※ 다음호(690호)에는 ‘초로의 무거운 기억들 - 박사는 장애물 경주’가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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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하식의 이야기
    2023-08-11
  • [세상사는 이야기] “최인훈을 광장에서 만나다”
    최인훈(1936-2018)의 사상사가 녹아든 『광장』(1960)은 정전(정통 소설)으로써 4·19혁명을 겪으며 좌우익 이념의 폭압성을 고발한 작품이다. 그의 이력을 보면 1959년 「자유문학」에서 『그레이구락부전말기』, 『라울-전』으로 천료한 바, 전자는 행동을 유보한 채 우울한 삶을 꾸려가는 청춘과 회색을 겹쳐 놓은 듯한 그림으로 작가 특유의 관념적 기법을 보여준다는 평가를 받고 있으며, 후자는 신의 뜻을 따르는 두 사제를 통해 진리에 다가가는 두 방식, 즉 철학자의 면모를 가진 주인공 라울과 무지하지만 행동이 앞서는 바울이 대립하는 과정을 형상화하고 있다. 이후 통역장교, 서울예대 교수를 거쳐 미국에 머무는 동안 자전적 소설 『화두』(1994)라는 화제작으로 한국 문단에 문제적 사고의 깊이를 더했다. 1. 『광장』, 낯설고도 거대한 세계: ‘광장’은 ‘밀실’의 상대개념으로 해방 공간부터 동족상잔의 비극까지를 아우른 시간여행 속에서 주인공 이명준이 추구한 사생결단의 철학적 세계를 그려냈으나 남북분단의 문제를 사상사적, 정신사적으로 접근한 이면에는 근현대사의 통찰은 있었을지언정 명쾌한 해답지는 없었다. 다만 그의 자전적 기행을 통해 진무한(眞無限)이 아닌 악무한(惡無限)의 실체가 드러났을 뿐이다. 인간이 지닌 한계를 몸소 체험한 주인공에게 돌아온 것은 중립국행을 빙자한 자살극이었다. 이것을 두고 어찌 개인적 의식의 발전적 과정이라고 포장할 수 있는가? 제아무리 복잡다단한 현실을 전제한다고 하더라도 궁극적인 가치평가는 선이 아닌 악이요, 본질이 아닌 현상에 머물렀으니 우연을 가장한 필연을 벗어나기는 버겁다. 2. 이식된 근대 혹은 자유의 감옥: 명준이 꿈꾼 이상세계의 실상은 유토피아가 아닌 디스토피아였다. 즉 자아를 세계화한 건 교술(수필)이요, 세계를 자아화한 건 서정(시)이어서 두 갈래의 길이 자아와 세계가 대결을 벌인 서사(소설)라고 보기는 어렵다. 단지 제풀에 서사시적 세계의 사랑을 갈망하다가 끝내 자살로 이어지는 여로에 대해서는 보다 면밀한 단서가 필요해 보인다. 결국 밀실과 광장이 조화를 창출하는 세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명준에게 “사람이 무엇 때문에 살며, 어떻게 살아야 보람을 가지고 살 수 있는지 알아야 한다.”라는 명제는 애초부터 무리수였다. 따라서 남한 사회를 무의미한 삶의 서식처로 규정한 것이나 북한 사회에 대해 곧바로 환멸과 공포를 느끼는 것은 당연했다. 둘 다 이식된 감옥에 불과하므로 광기의 이성이거나 이성의 광기라고 보아도 무방하다. 인간은 옥죄면 옥죌수록 꿈틀거리는 존재이니까. ▲ 서울시 광화문광장 3. 사랑, 존재증명을 위한 또 하나의 길: 이제 명준에게 남은 선택지는 낭만적 사랑뿐이다. 하지만 그것 역시 도피처는 아니다. 전제가 잘못된 근거에 개인적인 차원의 혁명은 사치에 지나지 않는다. 설령 둘이 아니라 수많은 여인들에게 구걸해본들 이루어질 수 없는 신파극이다. 명준이 윤애를 통해 발견한 인과율은 남녀의 황금률이 아닌 성적 폭력성이었다. 기실 거짓의 뱃살이 부풀어 오른 건 누구도 예외는 아니다. 사랑은 외침으로 이루어지는 진리하고는 거리가 멀다. 그것이 어찌 당에서 명령함으로 완결해낼 수 있는 과업이더냐? 모스크바를 향해 떠나는 그녀를 뒤로하고 마주친 건 탈출구처럼 뵈는 동란이었다. 그가 위악(僞惡)이라는 치명적 실수를 감수한 건 그래서다. 짐짓 악한 척한 게 아니라 그 자신의 기대지평이 그 불투명한 순간을 기다렸던 셈이다. 잉태한 딸의 배냇짓이 어리석은 생부모의 죽음으로 끝날 줄이야! 4. 회색인의 진실 혹은 『광장』의 리얼리티: 『광장』은 실제 제3국행을 택한 실존 인물들을 보고 쓴 소설로 알려져 있다. 최인훈은 철학도를 주인공으로 설정함으로써 한국인의 내면 심리를 파헤치고자 고심했다. 한국에서는 더이상 밀실과 광장의 조화가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이유다. 우리가 『광장』이라는 성채에서 엿들은 한마디는 “미친 믿음이 무섭다면, 숫제 믿음조차 없는 것은 허망하다.”라는 독백이다. 명준은 자신의 기획으로 고유한 영혼을 인정받고 싶었고, 그것이 통하는 사회를 열망했건만 그에게 돌아온 채찍은 존재가 의식을 결정하는 게 아니라 의식이 존재를 결정한다는 철퇴였다. 제아무리 보편적 이성을 외쳐보아도 나타난 행동만이 진실이라는 고정관념은 절대적 가치로 이미 똬리를 틀었기 때문이다. 회색인에게는 진실이 사라진 지 오래다. 뼈아픈 남북분단은 역사철학적 의식의 결핍이 빚어낸 이념의 양극화였다. ■ 프로필 - 고교생에게 국어와 문학을 가르치며 ‘수필집·시조집·기행집’ 등을 펴냈습니다. - 퇴임 후 기고활동을 이어가면서 기독교 철학박사(Ph.D.) 학위를 받았습니다. - 블로그 “조하식의 즐거운 집” http://blog.naver.com/johash을 운영합니다. - <평택자치신문>에 “세상사는 이야기”를 14년째 연재하는 중입니다. ※ 다음호(689호)에는 ‘초로의 무거운 기억들 - 병마는 싫은 불청객’이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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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하식의 이야기
    2023-08-04
  • [세상사는 이야기] 루마니아: 시기쇼아라 및 부쿠레슈티 (11회)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록된 ‘시기쇼아라’의 역사 지구로 가는 길에는 꿈꾸는 설화가 금세 튀어나올 거 같은 원시림이 있었다. 눈 쌓인 언덕바지에 죽죽 뻗은 메타세쿼이아를 닮은 낙엽수로되 그리 삭막한 느낌이 아닌 삼림 지대에 뒤이어 독일 가문비나무가 거대한 숲을 이루었으니 금상첨화가 아니면 무엇이랴. 필자의 눈동자를 가득 메운 값진 보배의 군락지는 밤이 되면 여우는 기본이고 늑대와 곰까지 출몰하는 지역이라니 대낮에도 각별히 조심하라고 이를 만하다. 문제는 늘 그놈의 돈줄. 최근 들어 부쩍 중국의 목재상들이 수시로 나타난다는 소식에 일개 나그네에 불과한 내가 왜 이토록 모골이 송연해지는지 모르겠다. 사고의 지평을 넓히면 바로 여기가 유럽의 허파인 셈이다. 그러기에 더욱 목숨처럼 지켜내라는 건 무조건 손대지 말라는 게 아니라 과학적 간벌에 따른 체계적 식목으로 얼마든지 기존의 생태환경을 보전할 수 있다는 말이다. 복병은 인간들의 조급증이요 조바심이다. 웬만큼 먹고살 만하면 지속 가능한 상생을 추구하는 쪽이 옳은 길이다. 이만큼 청정을 유지했기에 이곳에서 세계 3대(러시아, 우크라이나, 루마니아: 광수 생각) 미인들이 태어나는 걸까? 현지 해설가는 미리 준비한 멘트를 시의적절하게 배열하는 데 능숙하다. 시기쇼아라 여행의 시작과 끝이 헤르만 오베르트 광장에서 펼쳐진다는 말과 함께 마치 기다렸다는 듯 전격적으로 등장한 인물이 있었으니 이곳 시청에서 고용한 깜짝 이벤트 맨이었다. 녹색 모자에 빨간 웃옷을 입고 세계 60개국의 인사말을 건넨다더니 과연 한글에도 제법 노출된 발음. 일행은 드라큘라 백작의 생가를 뒤로하고 등굣길에 설치한 계단식 통로를 따라 일명 드라큘라 성으로 알려진 브란성을 방문했다. 지금은 학교로 쓰이고 있는 건물의 내부를 살펴보니 스무 명 내외의 학생들이 공부하는 교실 몇 칸과 행정실이 전부. 연륜이 묻어있는 담벼락을 아내와 둘러보며 산자락을 끼고 자리한 마을을 굽어보니 평화롭기 그지없다. 아기자기한 가게를 훑어보며 다들 서둘러 내려온 건 이번 여정에서 가장 고급진 호텔방을 한 번 더 이용하려는 의도적 발걸음. 실은 이런 호사도 현지 기획을 담당한 장본인이 준 팁이다. 아침 열 시에 키를 반납한 다음 기분 좋게 방문을 나서니 이래서 여행은 숙소에 신경을 써야 한다는 상식을 확인한 경우다. ▲ 루마니아의 인민궁전 앞에서 ‘AZUGA’라는 알파벳 글자의 배웅을 받으며 떠나는 길. 하지만 그 말이 살짝 재밌다기보다는 뭔가 아쉬운 건 왜일까? 그만치 루마니아의 여정이 끝나가는 길목에서 끝으로 만나볼 ‘부쿠레슈티’의 이모저모가 궁금해서였다. 어느새 여행자의 정서를 헤아린 듯 지금껏 보았던 어떤 무리보다 눈에 띄게 많은 양 떼가 시야에 들어왔다. 곧바로 나타난 마을 입구의 커다란 공원묘지. 열병합발전소의 겉모양이 첨성대를 빼박은(표준어는 ‘빼쏘다’) 것도 흥미롭다. 여봐란듯이 우리 팀원을 맞는 루마니아의 심장부. 독재정권을 무너뜨린 혁명광장에 서니 그 시절 희생자들을 기리는 기념비보다는 차우체스쿠가 남긴 인민궁전이 두 눈을 사로잡는다. 엄청난 규모에 저만치 품격 있는 외관을 어느 건물인들 쉬이 따르랴. 하지만 프레스코화가 유난히 아름답다는 크레출레스쿠 정교회처럼 화려한 외형이 사람을 살리는 건 아니다. 죽어가는 영혼을 구하는 것은 자신이 만든 잡신이 아닌 창조주 하나님이시다. 어설픈 무신론자들은 좀체 믿어지지 않을지라도 이는 엄연한 사실. 알량한 지식으로 한 줌 흙으로 돌아갈 육신을 보존할 수 있다고 믿는 것 자체가 무지의 소산일 뿐이다. 그렇다면 루마니아 미래의 가능성은 어디에 있을까? 살아가는 동안은 최대한 지혜롭게 대처해야 하기에 산업을 일궈 먹거리를 찾고 일자리도 늘려야 하되 어차피 영생할 여지가 없다면 이제는 하늘과 맞닿은 세계를 소망해야 한다. 물론 “육체의 연단도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생목숨이 붙어있을 때만 유효하므로 한시적임)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다.”(디모데전서 4:8)라는 말씀에 착념하길 바란다. 그러나 아무리 정중히 생명의 길을 안내한다고 해도 당사자가 외면해버린다면 아무 소용이 없는 일이라는 것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조촐한 연재를 마치면서 바쁜 여정 내내 깨알 같은 메모를 멈추지 않았음에도 이번만큼은 가급적 필자의 뇌파에 고여있는 기억의 용량에 의존하려 했다면 가볍지 않은 결례일까? 출입국 도장만 열 개를 넘기는 동안 귀찮다기보다는 일말의 치유과정처럼 느껴지더라는 소회를 전하며 미흡하나마 이 글월을 맺는다. ■ 프로필 - 고교생에게 국어와 문학을 가르치며 ‘수필집·시조집·기행집’ 등을 펴냈습니다. - 퇴임 후 기고활동을 이어가면서 기독교 철학박사(Ph.D.) 학위를 받았습니다. - 블로그 “조하식의 즐거운 집” http://blog.naver.com/johash을 운영합니다. - <평택자치신문>에 “세상사는 이야기”를 14년째 연재하는 중입니다. ※ 다음호(688호)에는 “최인훈을 광장에서 만나다”가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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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7-20
  • [세상사는 이야기] 루마니아: 펠레슈성 시나이아 수도원 (10회)
    드디어 이번 여정의 마지막 국가에 무사히 입성. 루마니아(Romania, 인구: 1,900만 남짓, 면적: 한국의 2.3배)는 발칸반도의 새로운 발견이었다. 차창 밖으로 펼쳐지는 싱그러운 대자연도 그렇거니와 초장부터 연일 입담을 과시한 박대장의 강력한 라이벌이 출현했기 때문이다. 현지 가이드 김학재 씨는 명석한 두뇌를 바탕으로 루마니아 한인회장을 맡아 각종 사업을 벌이는 교포로서 한국의 공중파 방송국에서도 섭외할 만큼 정통한 소식통을 겸하고 있었다. 날카로운 눈빛으로 쉴 새 없이 쏟아놓는 다양한 화젯거리로 봐서는 도리어 과부하가 걸리지 않도록 수위를 조절해야 하는 상황. 하지만 나는 별의별 언어유희라도 유쾌하게 접수할 마음의 준비가 되어있다. 그의 일성은 루마니아라는 나라는 만만찮은 조건을 갖추고 있다는 고평가. 놀랍게도 1966년부터 ‘다치아’라는 자국 브랜드로 당당히 자동차를 생산해 왔다는 말에 의아한 반응들이다. 이에 밀릴세라 그는 세계적 기업인 현대기아차마저 ‘KOREA’라는 국명을 감춘 채 국제 사회를 상대로 광고를 제작하는 사실을 아느냐고 반문했다. 위엄을 갖추고 서 있는 개선문에 이어 기다랗게 뻗어있는 대공원. 추적추적 궂은비가 내리는 가운데 목적지를 향하며 차창을 통해 살펴본 루마니아의 거리는 건축물마다 독특한 예술미가 있었다(안타깝게도 철권 통치자의 잘못된 판단으로 현재는 유서 깊은 건물이 많이 사라진 상태라고 함). 부러운 건 자가 보유율이 무려 90%에 달한다는 사실. 더구나 아직 발굴하지 않은 다량의 지하자원은 물론 산유국으로서 세계에서 등유를 사용한 가로등을 최초로 만들었다는 말이 결코 과장이 아님을 노벨상 수상자를 네 명이나 배출한 이력에서도 단박에 알아차릴 수 있다. 나아가 농지가 국토의 60%에 이를뿐더러 인터넷 속도가 세계 5위권에 속한다는 사실도 처음 접하는 정보다. 그런데 왜 루마니아라는 국가 이미지는 체조 선수 코마네치의 활약상을 제외하면 고작 독재자 차우체스쿠의 비참한 말로가 전부인 것처럼 한국인들의 뇌리에 각인되었을까? 그 또한 무리가 아닌 것이 오랜 세월 구소련의 위성국가로서 북한과 친하다는 굴레가 좀처럼 벗겨지지 않았기 때문이란다. 그렇다 하더라도 적잖은 상주인구로 보나 한반도를 능가하는 영토의 넓이(영국과 비슷함)를 헤아리면 상당히 의외일 수 있다. ▲ 루마니아의 국보 1호 펠레슈성 현지 가이드가 입에 침이 마르도록 찬사를 거듭한 루마니아 국보 1호인 ‘펠레슈성’의 위용은 세미한 건축미뿐만 아니라 그 안에 보관한 보물급 유물을 통해서도 그 가치를 확인할 수 있었다. 1873년부터 1914년에 걸쳐 완공했다니 익히 거기에 투입된 공력을 알 수 있거니와 이 건조물을 가리켜 왜들 카르파티아의 진주라는 별칭을 붙였는지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다. 그렇다면 과연 펠레슈성은 세간의 품평처럼 화려함과 아름다움을 동시에 갖춘 건축물일까? 평자에 따라서는 약간씩 평가들이 엇갈릴 수 있겠으나 갓 문외한을 벗어난 필자의 눈에는 치밀한 설계도면에 따라 혼신의 힘을 다해 지은 걸작품이라는 판단을 내릴 수 있었다. 그러니 이 건물이 르네상스, 바로크, 로코코의 각 양식을 취한 네오르네상스 스타일의 성이라는 사실관계는 부차적이다. 카롤 1세가 여름철 궁전으로 지었으나 정작 본인은 사용하지도 못하고 죽었다는 해설도 귓전을 스칠 뿐이다. 이 시점에서 필자의 긴요한 관심사는 이 유적을 통하여 후손들에게 미치는 정신사적 영향력이요, 궁극적으로 돌아올 삶의 변화상이 중요하다고 본 참이다. 시나이아 수도원의 소박한 자태를 보고 필자는 목가적이라는 어휘를 처음으로 행간에 올리게 되었다. 이는 요란하게 꾸미지 않은 사제들의 숙소를 보고 소환한 지점이자 좌중을 향한 고요한 포효. 모름지기 인간이란 자신을 낮춘 채 순전한 겸손을 유지할수록 신을 향해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 앞서 암시한 대로 형식은 내용을 담보하지 못하고, 내용은 형식을 제어하지 못한다. 이것이 구원신앙에 대한 나의 평소 지론이자 원색적인 복음의 본질이다. 그러한 마당에 지성소를 재현해 놓고서 제사장의 흉내를 내본들 휘장은 다시는 찢어지지 않는다. 십자가상의 예수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짊어지고 돌아가셨다가 사흘 만에 부활하심으로 이미 천국의 문을 활짝 열어놓으셨기 때문이다. 문제는 청함을 받은 자는 많으나 택함을 입은 자는 적다는 것이다(마태복음 22:14). 끝내 사후세계를 인정하지 않은 채 살다가 구더기도 죽지 않는 불못으로 들어가는 것은 전적으로 본인의 몫이다(마가복음 9:48). ■ 프로필 - 고교생에게 국어와 문학을 가르치며 ‘수필집·시조집·기행집’ 등을 펴냈습니다. - 퇴임 후 기고활동을 이어가면서 기독교 철학박사(Ph.D.) 학위를 받았습니다. - 블로그 “조하식의 즐거운 집” http://blog.naver.com/johash을 운영합니다. - <평택자치신문>에 “세상사는 이야기”를 14년째 연재하는 중입니다. ※ 다음호(687호)에는 ‘루마니아: 시기쇼아라 및 부쿠레슈티’가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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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7-14
  • [세상사는 이야기] 불가리아: 소피아와 벨리코 투르노보 (9회)
    불가리아(Republic of Bulgaria, 인구: 약 690만, 면적: 한국보다 10%가량 큼)는 세르비아보다 넓은 땅을 소유하고 있으나 허접한 미개발 지구를 지나 도심에 가까워질수록 얼마나 영토를 효율적으로 활용하고 있는가에 대하여 내심 갸우뚱하지 않을 수 없었다. 확연히 균형감이 부족해 보이는 산야와 농지의 비율. 숲을 보니 간벌을 아예 하지 않는지 나무들이 너무나 빽빽한 나머지 도무지 인공림인지 자연림인지 건강치 않아 보였다. 이처럼 한 뼘 국경을 사이에 두고 풍경이 일시에 뒤바뀌는 예는 흔치 않은 일이다. 노면이 거칠고 길섶이 다듬어지지 않은 거야 얼마큼 이해할 수도 있으나 나라 이름이 바뀌자마자 대번에 뭔지 모를 장벽이 느껴지는 건 왜일까? 이는 단지 군데군데 기분 나쁜 잔해들이 굴러다님으로 인해 발생하는 현상으로는 설명하기 곤란하다. 말하자면 아직도 공산당의 폐쇄적 기운을 떨쳐내지 못한 시차의 공백은 아닌지? 이런 걸 보면 어느 곳이든지 허술한 관리자에게 노출되어있는 한 인구밀도가 낮다는 것이 개개인에게 정서적 여유를 가져다주지는 못하는 것 같다. 그에 비해 수도인 ‘소피아’는 투박스럽기는 하지만 나름대로 중후한 멋을 풍기는 도시였다. 한복판 네델리아 광장이야 한 나라 행정의 중심지이니 그렇다 쳐도 고대 성채의 면모를 보여주는 세르디카 유적이나 오스만투르크 지배 당시 숨어들었던 페트카 지하교회의 자태는 의연함 그 자체였다. 이를 두고 혹자는 카파도키아 데린쿠유에 버금가는 역사적 현장인 양 은근히 내세우려 하나 그거야말로 잔뜩 신비감을 조성하기 위해 웬만하면 한 여인의 승천설을 퍼뜨리는 일과 별반 다르지 않다. 필자는 소피아성당에서 행해지는 정교회의 예전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복장을 가다듬고 사진 촬영을 금지함은 물론 실내에는 의자조차 없앴을뿐더러 아카펠라에 의해 부르는 성가 또한 엄숙하게 들렸다. 성호를 세 손가락으로 그리는 건 삼위일체를 상징한다는데 정숙한 분위기를 중시하는 걸로 봐서는 천주교의 전례를 크게 벗어나지는 않았으나 핵심은 경건의 모양이 아니라 본질이요 그 능력에 있다(디모데후서 3:5). 반어적인 건 종소리만큼은 귀가 따가울 정도로 시끄럽다는 점. 필자가 잘못 들었는지는 몰라도 일단은 끌어들인 뒤 기를 죽이는 방식이라나 뭐라나? 누구라도 우스개처럼 풀어줄 만한 얘기일 수도 있겠으나 아무튼 그는 일상적인 소재를 재밌게 풀어가는 솜씨가 있었다. ▲ 불가리아의 벨리코 투르노보 개신교나 성당과는 색다른 십자가의 형태를 뒤로한 채 연이어 나타나는 우중충한 지붕들. 하지만 얼핏 허술해 뵈는 집이나 특이한 형태의 아파트만 해도 공산주의 시절에 아무렇게나 지어서라기보다는 인민을 위해 최선을 다하다 보니 배고픈 시절에 겪었을 만한 질보단 양을 중시한 결과란다. 그것이 꿈보다 해몽이든 아니든 도대체 전원이라는 낱말이 떠오를 법한 경치를 여태 조우하지 못한 것 못지않게 너나없이 기대치가 높았던 불가리아 요거트에 대한 실망감은 꽤나 컸다. 하지만 그건 전 세계를 강타한 물가고 때문이기도 하거니와 그만치 이곳 역시 돈이 되는 맛에 길들이다 보니 인심이 사나워진 탓이리라. 허탈감에 허기진 식탁을 메운 이는 역시나 로컬 가이드. 한참을 공들여 이제는 좋은 짝을 찾겠다며 좌중을 향해 읍소하듯 감쪽같이 연막을 치더니만 막판에 가서야 슬그머니 불가리아 처자와의 동거 사실을 털어놓는 단막극 주인공을 자처할 줄이야! 아, 이런 경우는 출연료를 줘야 하나, 거꾸로 받아야 하나? ‘벨리코 투르노보’는 불가리아의 옛 도읍지. 일행의 발길은 협곡을 굽이치며 흐르는 얀트라 강물을 따라 수직으로 솟은 자연성벽을 향해 가고 있었다. 보면 볼수록 신묘한 산악지형. 마치 탁월한 설계자에 의해 건설된 해자와 성곽처럼 그 누구도 넘보지 못할 천혜의 요새라는 형용으로는 태부족한 풍광이로다! 가까스로 불가리아의 숨은 보물을 찾아낸 느낌이랄까? 그러고 보니 관광지인데도 거리는 깨끗했고 곳곳에 만발한 야생 벚꽃마저 새색시처럼 고와 보였다. 일거에 이룬 이미지 변신의 현장. 흡사 폐차장에서도 꺼릴 만한 1981년식 고물차를 고치고 고쳐 여태껏 애지중지한 사연을 듣고 난 뒤의 기분과 엇비슷하다면 선뜻 이해가 갈는지 모르겠다. 아쉽게도 여기를 가리켜 우리나라 경주에 해당한다는 설명을 끝으로 현지 가이드와는 작별을 고해야 했다. 불과 6개월 후면 고국으로 회귀할 거라는 소식과 함께 불가리아가 살아갈 길은 보시다시피 지천인 해바라기, 유채, 옥수수를 재배해야 한다는 말을 남기고 말이다. ■ 프로필 - 고교생에게 국어와 문학을 가르치며 ‘수필집·시조집·기행집’ 등을 펴냈습니다. - 퇴임 후 기고활동을 이어가면서 기독교 철학박사(Ph.D.) 학위를 받았습니다. - 블로그 “조하식의 즐거운 집” http://blog.naver.com/johash을 운영합니다. - <평택자치신문>에 “세상사는 이야기”를 14년째 연재하는 중입니다. ※ 다음호(686호)에는 ‘루마니아: 펠레슈성 시나이아 수도원’이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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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7-07
  • [세상사는 이야기] 세르비아: 베오그라드 다음은 지평선 (8회)
    세르비아(Republic of Serbia, 인구: 약 700만, 면적: 한국의 3/4 남짓)의 현대사는 필연적으로 밀로셰비치의 카멜레온적 변신과 선동가적 영욕 사이를 재단할 수밖에 없다. 티토 사망 이후 정치적 광폭 행보를 보이던 그가 왜 일순간에 추락했는지에 관해서는 보다 면밀한 분석을 요하겠으나 두루 요직을 거쳐 공산당 당수가 된 뒤 코소보에 사는 세르비아인 저항세력을 규합하는 와중에 일약 세르비아 민족주의자들의 영웅으로 급부상한 데는 타고난 극단적 기질과 대세에 영합하는 지도자적 결단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그가 벌인 광란의 질주는 과연 치밀한 상황극일까, 기획된 자살극일까? 우리는 정교회 사제인 그의 친부와 장성인 삼촌, 교사인 모친(열성 공산당원)이 모두 비극적 자살자라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첨단권력이 행사되는 꼭짓점에서 소용돌이치는 안간힘의 역학관계는 양자물리학 이론에 비해서는 전연 난삽하지 않다. 지난한 과거사를 소환해보면 결정적인 변수는 늘 주의주장을 맴도는 상수보다 유전적 형질을 넘나드는 자유의지에 달려있었다. 필자는 그 경우의 극소수를 신인 양자 간의 영적 교집합으로 간주하고 있다. 현재는 시민공원으로 사랑받고 있는 ‘칼레메그단 요새’. 박대장은 한사코 오가는 데만 한나절 이상이 소요되는 베오그라드를 이번 일정에서 빼버려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막상 이곳을 와보면 발칸이 발끈할 말이다. 오히려 하루를 더 늘리거나 다른 곳을 줄여서라도 사라예보를 집어넣으라는 게 여행자의 호소 어린 진언. 그만치 이른바 하얀 도시는 니콜라 테슬라를 낳은 명소답게 제 몫을 감당하고 있다고 본다. 물론 테슬라의 사례는 종잡기 어려운 언행과 기형적 발상으로 인한 공과가 얽혀있어 한마디로 규정할 순 없지만, 특정 관광지를 묘사하면서 거기에 세운 동상이나 기념물을 적당히 나열하는 식의 서술처럼 더이상 큰 의미를 부여하긴 어렵다. 그러한 독서물을 읽어보았자 독자의 뇌리에서 이내 사라져버릴 가능성이 농후하기 때문이다. 눈앞에 보이는 사보르나 정교회만 해도 그렇다. 그곳이 각 종교가 혼합된 형태여서 독창적이라거나 그래서 여타 종교인들이 화합을 도모해야 한다는 식의 피상적 논리에 무작정 동조할 수 없는 까닭이다. ▲ 세르비아의 칼레메그단 요새 필자의 눈에 비친 세르비아는 보헤미안 거리로 불리는 스카다리야에 확 꽂힌 것도 아니요, 시선이 주도로인 크네즈 미하일로 거리에서 브레이크 댄스를 맹연습하는 젊은이들에게 있지도 않았다. 로마제국 시절 단단한 작업을 거쳐 중세 세르비아왕국을 건설했고, 다뉴브강과 사바강을 끼고 제아무리 오스만제국의 진출을 두 세기 동안이나 막아냈다고 한들 결국에는 저지선이 뚫릴 수밖에 없지 않았는가? 요체는 늘 중요한 변환기의 태세전환에 매달려있다. 차라리 재래식 대포를 전시하고 지하철 건설이 막힌 유적지를 놔둔 채 당찬 미래를 설계하는 편이 신세대에게는 명약이 되는 법이다. 어차피 한 줌 흙으로 돌아간 인생들과 과거사를 붙들고 늘어져 향수에 잠시 젖는다 한들 남는 게 무어랴. 그렇다고 해도 나 역시 한겨레인 현실감의 한 자락은 어쩔 수 없는 모양이다. BTS 노래에 맞춰 댄스연습에 열중하는 무리를 보고는 냉큼 고개를 돌려 흐뭇한 표정으로 물끄러미 응시할 수밖에 없는 한류의 향기를 한껏 공유하지 않을 수 없었던 거다. 다소 딱딱한 느낌의 ‘베오그라드’를 벗어나니 곧장 부드러운 지평선이 나타났다. 대략 30km의 시야에 지형지물이 없어야 지평선이랄 수 있다는 설명은 기실 루마니아 현지 가이드의 설명이로되 기행문을 총정리하는 마당에 뒤엣것을 좀 앞당겨 쓴들 무슨 나무랄 일이랴. 그 거리감이야말로 필자가 재보는 통밥으로도 감이 잡히는 개념. 곧 우리나라에서는 김제평야에 가야 겨우 볼 수 있는 정경이라는 말까지 시비할 일은 아니로되 실제로 가보니 야산이나 동네에 가려 지평을 여는 데도 무리더라는 말이다. 비옥한 땅 한가운데를 가로지르는 물길. 갈색 늪지에 이어지는 키 작은 유채꽃밭도 장관이다. 필자는 대지라는 소설용어를 천하를 품은 중국에서도 이처럼 폐부에 와 닿도록 느껴보지는 못했다. 이러한 옥토를 소유하고도 풍부한 곡물을 축적하지 못한다면 그건 게으른 탓이거나 적절한 농법을 외면한 잘못이라고 보아야 한다. 적어도 드넓은 평야만 두고 보면 프랑스나 영국의 농촌 풍경과 별반 다르지 않다. 발갛게 녹슨 가드레일이 무슨 대수이고 허름한 철길은 무슨 큰 약점이랴. 매끈한 노면에 이만큼 균형감 있는 국토 개발을 이뤘다면 이제는 쓰레기 무단투기 현장을 바로잡고 난개발의 유혹만 과감히 뿌리치면 되리라. ■ 프로필 - 고교생에게 국어와 문학을 가르치며 ‘수필집·시조집·기행집’ 등을 펴냈습니다. - 퇴임 후 기고활동을 이어가면서 기독교 철학박사(Ph.D.) 학위를 받았습니다. - 블로그 “조하식의 즐거운 집” http://blog.naver.com/johash을 운영합니다. - <평택자치신문>에 “세상사는 이야기”를 14년째 연재하는 중입니다. ※ 다음호(685호)에는 ‘불가리아: 소피아와 벨리코 투르노보’가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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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7-04
  • [세상사는 이야기] 북마케도니아: 오흐리드 이어 스코페 (7회)
    북마케도니아(the Republic of Northern Macedonia, 인구: 200만 남짓, 면적: 한국의 1/4가량)의 지형은 다소곳하지 않았다. 하지만 호반의 도시로 알려진 ‘오흐리드’는 달랐다. 여행자를 기다린 순서는 드넓은 호수와 한껏 어우러져 여러 폭의 병풍을 연상케 하는 풍경화. 아침나절까지 오락가락하던 눈비마저 그쳤으니 누군들 신의 가호에 감사하지 않으랴. 야외공연장을 내려다보며 둘러본 건물들 가운데 특히 요한의 이름을 붙인 카네오 교회당이 눈에 들어왔다. 소형유람선 타고 초점을 맞춘 곳은 ‘사무엘 요새’. 오랜만에 타보는 승선감도 신선했거니와 뱃전에서 바라만 보던 섬에 올라 둔덕을 오르내리며 걸어본 산책길은 평소 즐겨 찾는 뒷동산에 온 기분. 홍보지에는 성경을 번역해 복음을 전파한 성인을 기리기 위한 클레멘트 교회에 더해 천년을 견뎌온 소피아성당까지 묶어서 소개하고 있으나 한발 앞서 눈치를 챈 독자들도 더러 있을 것이다. 필자는 산 사람이 죽은 사람을 높이는 일에 관해서는 견해를 달리한다. 이는 물론 세계관의 문제여서 서로를 설득하고 말 사안은 아니로되 창조신앙을 가진 자는 원칙적으로 삼위의 하나님 외에 피조물의 형상을 향해서는 경배하지 않는다. 이는 사람을 존중히 여기고 예를 갖추는 일상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접근이다. ▲ 북마케도니아의 사무엘 요새 온화한 공기를 마시며 수도 ‘스코페’의 중앙거리를 걸어보니 정교한 맛은 없어도 선이 굵은 동상이며 건조물들이 내방객의 눈길을 끌었다. 그중에 필자의 눈을 사로잡은 건 빌딩을 지을 때 인부의 안전을 도모하는 비계가 매우 견고하고 촘촘하다는 것. 매번 인명사고로 이어지는 뉴스가 끊이지 않는 한국의 공사현장에서도 이렇게만 대비한다면 소중한 목숨을 잃는 일은 현저히 줄어들 거라는 생각을 내자와 나눴다. 놓치면 아니 될 로컬 가이드의 일목요연한 해설. 이곳에서 10년 이상을 선교사 부인으로 일하고 있다는 분의 지식 전반은 여태껏 접한 설명과는 수준이 달랐다. 그도 그럴 게 그녀는 현지 대학의 부름을 받아 한국어 강사로 일하는 재원. 교인이라야 여남은에 지나지 않은 한인교회를 묵묵히 지키는 일이 하나부터 열까지 어디 쉬운 게 있으랴마는 애써 웃는 얼굴에서 풍기는 인상이 그간 헤쳐온 수많은 고초의 흔적을 대변하였다. 그러면서도 남몰래 선교헌금을 내밀지 못하는 게 필자의 현주소. 거리에 돌아다니는 영국의 중고 이층버스들. 사도 바울은 이곳 마케도니아를 거쳐 로마로 향해야 하리라는 성령의 명령을 거스르지 않았다. 신약성경에 기록된 ‘마게도냐’에 관한 언급은 필자가 확인한 구절만 해도 무려 스물네 군데(사도행전을 비롯해 로마서, 고린도전·후서, 빌립보서, 데살로니가전서). 현지 해설가는 그간 차곡차곡 쌓아온 이야기를 풀어놓기에 여념이 없다. 이곳에서 러시아의 끼릴문자를 쓰는 것도 염두에 둘 사항. 짧은 시간에 들은 내용이 차고 넘치는 가운데 몹시 걸리는 대목은 욱일기를 빼닮은 이 나라 국기였는데 일행 중에는 빨간 바탕에 여덟 개의 노란 줄이 뻗어 나간 형상이 하얀색 바탕에 붉은 태양이 이글거리는 열여섯 개의 일장기와는 다르다고 우겼으나 필자가 보기에는 매한가지. 나아가 그것이 나치의 표식과 상통하는가 하면 그 방향을 달리한 절간의 표시와 어떤 공통점을 지녔는지는 제한된 지면상 더는 덧붙이지 않으리라. 발칸반도를 돌아보며 좀처럼 찾아보기 어렵던 과수원이 눈앞에 나타났다. 아내에게 물으니 수종은 체리라 했고, 규모는 그리 크지 않았다. 심심찮게 지나가는 밀밭과는 여러모로 대조적, 밀 농사가 선선한 날씨에 적격이라는 건 상식이로되 좀 우려스럽기는 바로 옆 협궤열차가 다니는 철로와 나란히 흐르는 도랑물이 엷은 황톳빛이었다는 점이다. 유독 생태환경에 관심이 많은 나로서는 누차에 걸쳐 이에 관한 근심 어린 필치를 이어가면서 우리가 사는 지구야말로 후손에게 물려줄 생명의 터전이거늘 왜들 멀쩡한 산을 깨부수고 마구 원석을 캐낸 뒤에도 후유증을 최소화하는 후속 조치는 실행하지 않는지 답답하다. 그나저나 양쪽 귓속은 멍멍한 상태, 이때를 놓칠세라 마이크에서는 이내 해발고도를 알리는 파열음이 흘러나온다. 이곳은 본시 산악지대여서 천여 미터에 달하는 산맥은 예사라는데 오래된 폐가인 듯 우중충한 가옥 몇 채를 앞에 두고 산기슭에 색다른 형태의 묘비들이 널브러져 있다. 무릇 핑계 없는 무덤은 없다는데 저들이 외따로 묻힌 사연은 무얼까? 그리고 한동안은 울퉁불퉁한 노면의 연속. 거쳐온 나라들보다도 열악한 도로 조건을 보면 전반적인 경제 상황은 꽤 뒤처져 있는 게 확실하다. ■ 프로필 - 고교생에게 국어와 문학을 가르치며 ‘수필집·시조집·기행집’ 등을 펴냈습니다. - 퇴임 후 기고활동을 이어가면서 기독교 철학박사(Ph.D.) 학위를 받았습니다. - 블로그 “조하식의 즐거운 집” http://blog.naver.com/johash을 운영합니다. - <평택자치신문>에 “세상사는 이야기”를 14년째 연재하는 중입니다. ※ 다음호(684호)에는 ‘세르비아: 베오그라드 다음은 지평선’이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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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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