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린 시절 등하굣길이 멀었던 나에게 걷는 취미가 생긴 건 가정을 이루고부터였다. 무기력한 청소년기에는 야무지게 걸을 힘조차 없었거니와 등 떠밀려 잡혀간 병영의 일과에서조차 하루하루 죽지 못해 날짜를 채우고 나온 경우였으니 오죽하랴. 어쨌거나 대학에서 취득한 자격증에 맞춰 가까스로 직장을 잡고 이세들이 잇달아 태어나면서 가족이 함께 집 주위를 거닐기 시작한 건 덤처럼 주어진 복락. 그러나 심신의 건강을 생각하며 보행 운동에 본격적으로 착수한 지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특이하게 걷기보다 힘겨운 등산이 먼저였으니 말이다. 그러다가 아이들이 기숙사에 머물면서 지금 거주하는 집을 중심으로 동네를 한 바퀴씩 돌아온 게 계기였는데 초기에는 반경을 좁혀 주로 동쪽으로 가는 편이었다. 이후 차츰 발길이 닿는 대로 지경을 넓히며 다른 방향을 기웃거렸고 틈나는 대로 산책을 즐기는 부류에까지 끼게 되었다. 물론 퇴임과 동시에 박사과정에 적을 두었을 때는 어쩔 수 없이 한두 주가량을 건너뛰기도 하지만 최종학위를 마친 뒤에는 한 달에 열흘 정도는 동서남북을 가리지 않고 활기차게 돌아다니는 중이다.
그 지형지물 가운데 으뜸은 부락산 둘레길. 제법 산허리가 굵은 동산이다 보니 반경을 넓히면 이십여 리는 족히 되지 싶다. 현관을 나와 레포츠센터를 지나면 곧바로 동령마을인데 아담한 교정보다는 그 뒷산을 밟아주는 편이 낫다. 그날그날 기분에 따라 널찍한 아파트단지를 끼고 산책로를 돌아가거나 한산한 자전거길로 빠져나와도 좋다. 둘레길에서 해 질 녘 마주친 등나무 터널은 좀 스산한 느낌이 든다. 조심스레 내리막길을 내려와 만나는 찻집은 정원이 예뻐 언제든 한 번쯤은 들어가 보고 싶지만, S자형 갈림길에서 수성 최씨 장군 묘를 보며 위로 빠지든 우곡마을을 지나쳐 깔딱고개를 넘을 때는 숨이 좀 치오른다. 전엔 균형을 잡고 논두렁과 친할 때도 있었으나 이젠 그마저 여의치 않은 상태. 가끔은 보폭을 넓혀 마산리 쪽의 옛길로 접어들어도 괜찮다. 발걸음이 가벼울 때 둥실봉 너머를 엿보는 재미 또한 빼놓을 수 없다. 거기 한구석에서 발견한 절이 불법사. 알려진 동녕사나 최유림 장군 사당 근처 사찰 말고 이만치 작은 절이 숨어 있는 줄을 미처 몰랐던 터다. 물론 부락산의 해발이 150m에 지나지 않으니 보통은 완만한 능선길을 선호함에도, 아래로 내려가 성불사를 등진 채 문화공원을 딛고 오르는 가파른 계단이나 그 주변을 아울러 둘러보는 샛길을 권하련다.
▲ 부락산 둘레길로 접어드는 이충분수공원
다음은 장당동 야산을 벗 삼아 지경을 대폭 늘린 삼성길. 일단 평택시의회를 기점으로 조성한 신시가지를 보노라면 상전벽해에 버금가는 설계도에 가깝다. 다만 나는 다랑논이 있던 시절을 더 그리워한다. 아직 차량통행을 허용하기 전 논밭을 뭉개고 닦은 도로변을 걷던 때를 소환하면 그간 이룬 브레인시티 안내도는 그야말로 격세지감. 그걸 접어둔 채 시멘트 농로를 걸을 날도 얼마 남지 않았다. 곧 사라질 농가에는 몇 마리 가축만 남았는데 인적이 드문 언덕길에도 운치는 있건만 그보단 가구 숫자가 불어난 전원마을을 굽어보며 타고 넘는 산행길이 훨씬 익숙하다. 짓다가 만 가옥 골조는 늘 보아도 흉물스럽다. 언젠가 그 앞집에 사는 노인분에게 사연을 물으니 반색하며 이주 의향이 있느냐는 표정을 지었다. 신축도서관을 거쳐 아치형 육교를 가로지르면 큼지막한 삼성반도체 캠퍼스가 한눈에 들어온다. 아내와 뻥 뚫린 곧은길을 완주한 횟수도 도합 다섯 차례. 꼬박 세 시간이나 걸리는 길이어서 쉽사리 나설 순 없으나 새로 쓰는 고덕국제신도시의 초창기 역사를 지켜보는 기분은 남다르다.
급변하는 세태에도 옛 모습을 유지하고 있는 구시가지를 살펴보는 일 또한 흥미롭다. 심심할 때마다 찾아가는 신장동 일대는 실은 재개발지구로 지정된 채 몇 년을 끌어왔었다. 일부 헛바람에 기댄 부동산 거품이 빠지면서 그대로 눌러살게 된 원주민으로서는 한숨을 돌린 참. 문제는 여기가 바로 옆 투기를 불러온 신도시와 인접해 있다는 사실이다. 혹자는 그 중간에 널따란 공원이 생겨 완충지대가 될 거라지만 도리어 다닥다닥 붙은 공동주택으로 인해 슬럼가로 전락할 확률이 높다는 진단이거니와 거기에 비교의식이 출중한 민족성이 단단히 한몫 거들리라는 우려감에서다. 그나저나 신장쇼핑몰보다는 평택국제시장이라는 새 이름이야말로 보편성을 띠기에 충분하다. 숨통을 트여준 근린공원에서 그네를 뛰며 잠시나마 동심으로 돌아가 보는 틈새도 추천할 만하다. 요즘 부쩍 이용객이 는 철길을 따라 성의껏 꾸민 벤치에 앉아 색다른 여유를 가져보는 건 어떨는지?
■ 프로필
- 고교생에게 국어와 문학을 가르치며 ‘수필집·시조집·기행집’ 등을 펴냈습니다.
- 퇴임 후 기고활동을 이어가면서 기독교 철학박사(Ph.D.) 학위를 받았습니다.
- 블로그 “조하식의 즐거운 집” http://blog.naver.com/johash을 운영합니다.
- 정론지 <평택자치신문>에 “세상사는 이야기”를 15년째 연재하는 중입니다.
※ 다음호(749호)에는 ‘고덕국제신도시라는 이름값’이 이어집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