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언 모리스에 따르면 전쟁은 줄곧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아니 전쟁은 평화를 향한 유일한 방편일 수 있다고 강변한다. 심지어 그는 갈리아인과 그리스인을 학살하고 지배세력이 된 로마제국이나 수백만의 원주민을 죽이고 미합중국을 세운 행위가 정당했다고 주장한다. 과연 그럴까? 이는 무정부 상태에서 안정적으로 안전과 풍요를 제도화한 정부의 역할을 강조하기 위한 궤변처럼 들린다. 하지만 강제된 평화는 단지 현상일 뿐 안정의 본질은 아니다. 거의 모든 전쟁에서는 상생의 원리가 작동하지 않기 때문이다. 전장에서 상식이 통할 리 없다는 에드워드 루트웍의 전략분석이 더 합리적이다. 상호 모순되지 않는 선형논리 규칙은 세상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리델 하트의 말대로 좋은 결과를 바라고서 나쁜 일을 획책하는 게 전쟁이라고 규정한 이유다. 그나마 차악론이라도 힘을 얻으려면 미래의 어마무시한 살상극을 막아내야만 한다. 오늘날보다 그 옛날에 더 살인극이 난무했다는 추정에서 벗어나려면 말이다. 필자는 오히려 카실다 제타가 제기한 초기 인류는 극심한 폭력에 노출되지 않았다는 설에 심증이 간다.
홉스가 적시한 만인 대 만인의 투쟁을 종식시킨 동력은 전쟁에 의한 권력 행사가 아닌 법과 질서를 존중한 최소한의 도덕률이었다. 전쟁광이 있는 한 폭력성은 절대 사라지지 않는다는 논리다. 곧 전쟁의 역설을 풀어내는 방법론이 개인적 접근이든 군 역사의 기술적 연구이든 간에 진화의 일부분으로 파악하는 방향성에는 일정 부분 동의하는 편이로되, 케인즈이 지적도 어느 정부이건 전쟁을 획책한 내막을 들여다보면 범죄집단에 가깝다는 사실관계를 염두에 둔 말이다. 예컨대 히틀러, 스탈린, 모택동, 이디 아민, 김일성 등이 그 철면피들이다. 영국 외무성이 간파한 사상에 해당하는 이즘(ism)이 과거의 사상(워즘, wasm)에 지나지 않는다는 일갈이 설득력을 얻는 건 그래서다. 이야기는 자연스레 로마군 침략사로 옮겨 간다. 즉 초토화를 자행한 팍스 로마나를 가리켜 평화라고 우기는 형국이다. 오죽하면 코먼웰스(commonwealth)라는 개념부터 재정리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왔으랴.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이제는 전쟁 대신 범죄와 법에 시달린다는 볼멘소리는 농담이 아닌 현실이 되었다. 어쨌거나 로마는 제국이었다.
▲ 인형의 눈으로 바라본 전쟁 무기들
바로 창조적 소수를 가리키는 소수정예(a-few-good-men) 지배이론이 소구력을 얻는 지점이다. 하지만 거꾸로 정주형 도적이라는 지적을 간과하면 곤란하다. 리바이어던의 출현을 극도로 경계는 하되 수로와 도로를 뚫어 우편을 활성화한 지혜는 높이 살만하다. 처칠의 말처럼 제아무리 장황할지라도 파국을 부르기보다는 설득이 낫다는 교훈이다. 미개한 적들을 향해 물질문명을 길들이는 전략을 구사하자는 제안이야말로 예수의 가르침이나 바울의 충고가 유효한 국면 전개다. 급진주의로 인해 자칫 과거로의 회귀를 막자는 필요성에서다. 일찍이 평화는 허구일 뿐이라는 플라톤의 전언과 맥을 같이하는 대목이긴 하되 그렇다고 일방적 단정에 마냥 수긍하기는 어렵다. 전쟁은 언뜻 상기된 발명품이나 한낱 타성에 젖은 관성을 확인하는 차원의 도구만은 아니니까 말이다. 야노나미족에 얽힌 일화 또한 인류사에 남은 환부로 뒤덮기에는 양심의 그물이 걸려있다. 데이터베이스에 따르면 최근 100년간 100억 명 중 전쟁, 살상, 불화로 인한 사망자가 1~2억에 달하는 데 비해 소규모 사회에서는 그 열 배라는 통계도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다시금 로마로 눈을 돌려야 한다. 희랍어 가운데 카오스(chaos)라는 낱말이 적합한 표현일 듯하다. 그때 상황은 그야말로 전쟁터를 방불했다. 하지만 저자는 서구사회를 두고 안전하다고 두둔하지 않는다. 인류사에서 명멸했던 제국들이 그 증거다. 팍스 로마나에 필적할 만한 나라가 팍스 시니카였다. 중국의 한나라 역시 평화를 정착시켰다고 회고한다. 팍스 인디카도 있었다. 세간에 알려지지 않은 인도의 마우리아 왕조를 일컫는다. 얼마 전 다행히 한때 사라졌던 아르타샤스트라 고문서가 출현했단다. 페르시아는 어떠한가. 중국판 폼페이도 비슷한 맥락이다. 그러한 측면에서 고고학자를 두고 남의 불행을 먹고 사는 자들이라는 자각은 유효하다. 성경에 나온 대로 해 아래 새것이 없기에 그렇다. 역설적으로 진화론 논쟁 자체가 부질없는 일이다. 리바이어던이 무너진 경위를 보면 정반합의 조합이다. 단, 후손의 생계에 도움이 되는 국면은 고무적이다. 일찍이 빈손으로 돌아간 알렉산더대왕의 깨달음이 새삼스럽다. 다소 가혹할지라도 통치자는 살인자였다. 코끼리는 전시실을 그냥 놔두지 않는 법이다.
■ 프로필
- 기고활동을 이어가며 산문집·시조집·기행집 등을 펴냈습니다.
- 교직 퇴임 후 기독교철학 분야와 문화교양학을 공부했습니다.
- 블로그 ‘조하식의 즐거운 집’ https://blog.naver.com/johash
- 본지에 “세상사는 이야기” 코너를 16년째 연재하고 있습니다.
※ 다음호(756호)에는 ‘전쟁의 역설적 교훈 - 야만과 문명의 충돌 양상’이 이어집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