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30(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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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하식 수필가·시조시인, Ph.D.

(이 편지는 원래 내용이 워낙 무거워 등장인물과 전개를 색다르게 바꿨습니다.) 그토록 한국의 풍경을 좋아하던 미스터 구루마가 이곳을 떠난 지도 벌써 6개월이 다 되어가는군요. 그동안 가족과 함께 건강한지요? 그대가 섬기는 신께서 돌보아 주시리라 믿기에 이렇게 맘 편히 안부를 전할 수 있소. 조국 인도로 돌아간 이후 하는 일은 뜻대로 잘 되겠지요? 우리 가족 역시 다들 무사히 잘 있다오. 공단에서 같이 근무할 때 서로 도우며 우의를 다지던 일이 생각나오. 떠올릴수록 당신은 참으로 마음 바탕이 고운 사람이었소. 처음 몇 달간 회사가 어려워 월급을 제대로 받지 못하면서도 불평 한마디 없이 끝까지 남아 무사히 위기를 넘겨주었고, 남들이 귀찮아 피하는 궂은일이나 온갖 잡일을 마다치 않고 동료들을 위해 앞장서서 뛰어다니던 모습이며, 어려움에도 늘 용기를 잃지 않고 환하게 웃던 얼굴이 눈앞에 선하오. 그런 마음씨와 인간 됨됨이라면 어디에 가든지 틀림없이 성공하리라고 여기 동료직원들은 확신하고 있다오.


끝내 마음에 걸리는 점은 비록 일부라고는 해도 한국인 가운데 악덕 기업주가 있다는 사실이오. 여러 번에 걸쳐 대신 사과하고 나름대로 힘껏 돕기는 했지만 차마 당신들 앞에서 얼굴을 들 수가 없었소. 형제는 그때마다 오히려 나이 많은 나를 위로하려 들었고, 아버님의 마음만 고맙게 받겠다고 눈물을 흘리며 의연하게 행동하던 자태가 부러웠소. 돌이켜보면 세상에 어찌 착한 사람들만 살 수 있겠소마는 애써 일한 대가를 지불하지 않고 상대의 약점을 잡아 노동력을 착취하는 일만은 근절되어야 한다고 매번 목청을 높인 연유요. 하지만 그 악성 종양은 생각보다 깊이 뿌리를 내려 외국인 근로자들을 끊임없이 괴롭히고 있으니 걱정이 크다오. 언론 보도를 통해 피 같은 임금을 떼먹고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숨어 지내는 악덕 경영주를 보면 그야말로 거룩한 분노가 일어나는 걸 주체하지 못한다오. 사실 이역만리 떨어진 타국에 와서 고생하는 외국인 근로자만큼 좋은 외교사절이 어디 있겠소? 늘 안타까워하며 흥분하던 내 얼굴이 생각나는지 모르겠소. 나는 외국인 노동자들이 코리안드림을 이루는 만큼 민간외교는 이루어진다고 믿고 있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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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간 모은 돈으로 부인과 함께 차릴 예정이라던 액세서리 가게는 예정대로 잘되는지요? 물론 작은 규모의 가내수공업이란 게 유독 불황을 잘 타는 업종이어서 묻는 말이오. 부디 성공하여 재회하기를 바라오. 그리고 염치없는 부탁인 줄은 아오만 유창한 우리 한국어를 절대 잊지 말고 인도에서 우리 한국의 좋은 점을 널리 홍보해 주시오. 한반도가 일제 강압에 의해 신음하던 시절, 한국을 위해 인도의 시인 타고르가 선물한 “동방의 등불”을 내가 기억하는 것처럼 말이오. // 일찍이 아시아의 황금시기에 / 빛나던 등불의 하나 코리아 / 그 등불 다시 한번 켜지는 날에 / 너는 동방의 밝은 빛이 될지니 / 마음에는 두려움이 없고 / 머리는 높이 쳐들린 곳 / 지식은 자유스럽고 / 좁다란 담벼락으로 세계가 조각조각 갈라지지 않는 곳 / 진실의 깊은 곳에서 말씀이 솟아나는 곳 / 끊임없는 노력이 완성을 향해 팔을 벌리는 곳 / 지성의 맑은 흐름이 / 굳어진 습관의 모래벌판에 길 잃지 않는 곳 / 무한히 퍼져 나가는 생각과 행동으로 우리들의 마음이 인도되는 곳 / 그러한 자유의 천국으로 / 내 마음의 조국 코리아여 깨어나소서 //


아시다시피 일제강점기에서 한민족에게 큰 감동과 용기를 북돋운 시였소. 악랄한 일본의 눈치를 보면서도 한국의 밝은 미래를 축원해준 덕분에 우리는 멋지게 일어섰고, 이제는 인도의 차례라고 확신하오. 미스터 구루마! 꼭 조국의 발전에 이바지하는 사람이 되시오. 참, 동네 이름이 ‘넬루푸디’라 했던가요? 발음은 낯설지만 언젠가 방문하겠다는 약속은 꼭 지키겠소. 그렇지 않아도 TV에서 인도를 소개할 때면 온 식구가 눈을 부릅뜨고 쳐다본다오. 그만큼 몸은 멀리 떨어져 있을망정 마음만은 가까이 있다는 증거 아니겠소? 우리 서로 소식을 전하며 지냅시다. 새삼 함께 있었던 3년여의 세월이 그립소. 이번 크리스마스 때는 손수 만든 예쁜 엽서를 부치리다. 그럼 다시 만날 때까지 내내 평안하길 빌겠소. 그대 가정에 주님의 평화가 깃들기를 바라오. 2004년 10월 30일 -구루마를 그리워하는 한국인으로부터- (그런데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심장마비로 인해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서글픈 지점은 그 죽음을 두고 종교적 인과응보라는 소문이 인근에 자자했다는 사실입니다.)



■ 프로필


- 고교생에게 국어와 문학을 가르치며 ‘수필집·시조집·기행집’ 등을 펴냈습니다.

- 퇴임 후 기고활동을 이어가면서 기독교 철학박사(Ph.D.) 학위를 받았습니다.

- 블로그 “조하식의 즐거운 집” http://blog.naver.com/johash을 운영합니다.

- <평택자치신문>에 “세상사는 이야기”를 14년째 연재하는 중입니다.


※ 다음호(693호)에는 ‘초로의 무거운 기억들 - 떠돌다 떠난 지인들’이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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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사는 이야기] 초로의 무거운 기억들 ‘모종의 씁쓸한 종말’ (4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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