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5-21(화)
 

소사동대동비·자비사·팽성읍객사·원심창 의사 생가터 평택시티투어’ 코스로 지정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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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세환 금요포럼 회원

지난 4월 15일(토) 오전 9시에 출발한 <평택시티투어 - 평택남부 문화탐방>을 다녀왔다. 시티투어 코스는 소사동 대동비 → 자비사 → 팽성읍객사 → 팽성현관아터 → 평택향교 → 농성 → K6(캠프험프리스) 및 원심창 의사 생가터 → 홍학사비각 순으로 이루어졌다. 


◇ 선조 41년 처음 실시된 대동법을 기념하는 ‘대동법시행기념비’ 


오전에 가장 먼저 평택시 소사동 140-1번지에 위치한 ‘대동법시행기념비’를 방문했다. 대동법시행기념비는 대동법 시행에 지대한 공을 세웠고, 그 공로와 고마움을 기념하기 위해 당시 백성들의 모금으로 세워졌으며, 왕래가 많은 경기도에서 충청도로 넘어가는 소사동 삼남길에 세워졌다. 


대동법은 각 지방의 특산물을 공물로 바쳐야 했던 이전의 폐단을 없애고, 쌀로 대신 곡물을 바치도록 한 조세제도로, 조선 선조 41년(1608) 경기도에서 처음 실시되었고, 효종 2년(1651) 충청감사로 있던 김육이 충청도에 대동법을 시행토록 상소하여 왕의 허락을 받아 실시하게 되었다. 지금으로 따지면 그야말로 세금 개혁이라고 할 수 있으며, 이러한 역사적인 대동법시행기념비가 평택에 있다는 것이 자랑스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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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사동 대동비를 방문한 팽성역사문화특구시민연대 회원들

 

◇ 중국으로 가는 뱃길인 아산만 인근에 위치한 ‘자비사’


두 번째로 방문한 ‘자비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용주사의 말사로, 평택시 팽성읍 객사1리 75번지에 위치하고 있다. 옛 이름은 망한사이다. 망한사는 1,600여 년 전 중국의 고승과 명장들이 타고 있던 배가 태풍을 만나 서해안 아산만에 표류하여 돌아가지 못하게 됐고, 이에 땅의 모양과 기운이 뛰어나고 고향을 바라볼 수 있는 망한사 자리에 터를 잡고 살게 되었다는 말이 전해져오고 있다. 필자는 망한사를 둘러보면서 중국으로 가는 뱃길인 아산만 인근에 위치하여 중국으로 돌아가지 못한 고승들과 명장들의 새로운 고향이 되어준 부처님의 자비로움이 깃든 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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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비사 무량보전 앞 기념촬영

 

◇ 공무수행을 위해 지방에 온 관리들이 배례를 올린 ‘팽성읍 객사’


세 번째로 방문한 곳은 ‘팽성읍 객사’였다. 팽성읍 객사는 평택시 팽성읍 동서촌로 101-3(객사리)에 위치해 있다. 현재는 대문간채와 본채가 남아 있는데, 본채는 전체 9칸이다. 3칸은 중대청이고, 좌·우에 동·서헌이 각각 3칸씩이며, 중대청은 안에 왕을 상징하는 전패를 모시고 고을 수령이 한 달에 두 번 배례를 올리던 곳이었다. 동·서헌은 다른 지방에서 온 관리들이 머물던 숙소로 사용됐으며, 대문간채의 중앙에 1칸의 대문이 있는데 솟을지붕으로 꾸몄다. 특히 중대청과 대문의 지붕 용마루 양 끝에는 용머리를 놓아 관리청으로서의 위엄을 나타냈으며, 공무수행을 위해 지방에 온 관리들이 왕을 잊지 않고 배례를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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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택현 관아터 앞을 방문한 회원들

 

◇ 1872년 제작된 평택현지도를 통해 알 수 있는 ‘평택현 관아터’


네 번째 방문한 곳은 ‘평택현 관아터’였다. 평택현의 관아가 있던 곳은 지금의 팽성읍 행정복지센터로, 1872년 제작된 ‘평택현지도’를 통해 옛 관아의 모습을 알 수 있다. 관아는 수령의 업무 공간인 ‘동헌’과 살림집인 ‘내아’, 곡물 대여 기관인 ‘사창’과 망궐례 의식을 행한 ‘객사’ 등이 자리하고 있었다. 현재 관아의 건물 중 유일하게 팽성읍 객사(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37호)가 남아 있으며, 나머지는 일제강점기에 사라졌다. 일제강점기에 소중한 역사가 사라진 것을 안타깝게 느꼈지만 다행히 관아터라도 남아 있어서 다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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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학사비각을 둘러보는 참가자들

 

◇ 조선시대 지방에 세운 공립 고등교육기관인 ‘평택 향교’


오전에 마지막으로 방문한 곳은 ‘평택 향교(鄕校)’였다. 향교는 평택시 팽성읍 부용로 17번길 40(객사리)에 위치해 있다. 향교는 조선시대 지방에 세운 공립 고등교육기관으로, 중국 춘추 시대의 학자인 공자(孔子, B.C.551년-B.C.479년)와 여러 성현(聖賢)들의 제사를 지내는 동시에 지역민들을 교육하는 곳이었다. 향교는 공자를 모시는 대성전(大成展)과 선현을 모시는 동무·서무(東廡·西廡), 학생들의 강학소인 명륜당(明倫堂)과 그들이 기숙하는 동재·서재(東齋·西齋)로 구성되어있다. 그 이외에도 재사(齋祠)를 관장하는 전사청 등이 있다. 필자는 교과서에서만 보던 조선시대 교육기관을 직접 보면서 조선시대의 학구열을 느껴볼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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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동비 앞에서 설명을 듣고 있는 참가자들

 

◇ 외부의 침입을 대비해 쌓은 ‘농성’


오후에 첫 일정은 ‘농성(農城)’ 방문이었다. 농성은 평택시 팽성읍 안정리 산41-5번지에 위치해 있다. 농성은 팽성읍 안정리 마을의 북쪽 논 가운데 있는 성으로, 흙으로 쌓았다. 전체 모습은 타원형으로 둘레는 약 300m이고, 높이는 4m 내·외이며, 동쪽과 서쪽에 문터가 있다. 무너진 곳의 단면을 보면 붉은색의 고운 찰흙을 층층이 다져 쌓은 흔적이 있다. 성을 쌓은 이유는 삼국시대에 도적 때문에 쌓았다는 이야기를 비롯하여 신라 말기 중국에서 건너온 평택임씨의 시조인 임팔급이 축조하여 생활 근거지로 삼았다는 설도 있다. 그리고 고려시대에 서해안으로 침입하는 왜구를 막기 위해 쌓았다는 설과 임진왜란 때 왜적을 막기 위해 쌓았다는 설 등이 전해지고 있다. 성 바로 옆에는 겨울철에는 따뜻한 물이, 여름철에는 찬물이 샘솟는 우물이 있었다고 한다.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외부의 침입을 대비해 쌓았다는 공통점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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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밭으로 변한 원심창의사 생가터

 

◇ 개인의 소유가 되어 밭으로 사용되고 있어 안타까운 ‘원심창 의사 생가터’


오후에 두 번째로 방문한 곳은 ‘원심창 의사 생가터’였다. 원심창 의사 생가터는 평택시 팽성읍 안정리 175번지에 있다. 1919년에 어린 나이로 3·1 운동에 참여한 뒤, 항일 운동을 전개했다. 또한 1920년에는 무정부주의 단체인 흑우회에 가입해 박열과 함께 활동했으며, 이후 베이징, 상하이, 도쿄 등을 오가면서 무정부주의 운동에 나섰다. 그 후 1931년에는 흑색공포단에 가입했으며, 1933년에 화암 정현섭, 구파 백정기 등의 아나키스트 동지들과 함께 중국 주재 일본공사 아리요시 아키라(有吉明)를 살해할 계획을 세우고 현장에서 대기하던 중 체포됐다. 이후 나가사키시로 압송되어 무기징역형을 선고받고 복역했으며, 해방 후에는 1951~1952년 재일본 대한민국민단의 11, 12대 단장을 지냈다. 이렇게 훌륭한 업적을 가진 분의 생가터가 이제는 개인의 소유가 되어 밭으로 사용되고 있어 안타깝고 씁쓸한 동시에 평택시 차원에서 관리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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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비사를 안내하고 있는 보문스님

 

◇ 삼학사의 한 사람인 홍익한을 기리는 ‘홍학사비각’


마지막 방문지는 평택시 팽성읍 본정리 322번지에 위치한 ‘홍학사비각’이었다. 홍학사비각은 조선 인조 때의 문신인 홍익한(洪翼漢, 1586년-1637년)과 병자호란(丙子胡亂: 1636년-1637년에 일어난 조선과 청나라의 싸움) 때 정절을 지켜 죽은 그의 가족들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내려진 비석을 보호하고 있는 건물이다. 


홍익한은 ‘삼학사(三學士: 홍익한, 윤집, 오달제)’의 한 사람으로, 중국 청나라와의 화의를 반대하면서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인물이다. 홍학사 비각에는 ‘포의각(褒義閣)’이라 쓰인 현판이 걸려있는데, 이는 “의를 기리고 칭찬한다”는 뜻이다. 이 비각은 1964년 본정리의 삼거리 부근에 세웠다가 1982년 마을 옆 홍익한의 묘소 앞으로 옮겨 다시 건립했다. 비각은 앞면 2칸, 옆면 1칸 규모로 맞배지붕으로 되어있으며, 비각 안에는 4개의 비석(홍익한의 신도비와 묘비, 아들 홍수원의 효자비, 어머니의 열녀비)이 있으며, 상부에는 1964년 비각을 세울 당시의 기록이 적힌 현판이 걸려있다. 이 비석들은 예전에 포의사가 훼철(헐어서 치워버림)되면서 방치된 것들로, 일제강점기 말기에 홍익한의 묘를 이장하고 비각을 세우면서 한 곳에 모았다고 한다. 나라를 위해 헌신한 분들을 기리는 유적지를 방문하면서 평택에는 참 많은 훌륭한 분들이 계셨구나라는 생각을 가졌다.


◇ 투어를 마치면서


투어를 마치면서 평택에는 훌륭하고 중요한 우리나라의 역사를 되새겨 볼 수 있는 문화재가 많다는 것을 새삼 느꼈으며, 필자는 ‘진작에 찾아보고 방문해보지 못했을까’라는 생각을 했다. 향후 평택시의 많은 홍보와 연구가 이루어져 더 많은 평택시민들과 다른 지역민들도 방문할 수 있도록 오늘 돌아본 유적지가 다양한 평택시티투어 코스로 지정되길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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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행문] 평택남부지역 역사문화유산 시티투어를 다녀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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