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6-22(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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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우 가족행복학교 대표, 평택성결교회 원로목사

예루살렘을 입성하던 순간만 하더라도 예수와 그 일행은 환호하는 군중으로 인해 흥분해 있었다. 하지만 제자들이 예루살렘 성전을 바라보며 그 위용을 자랑하자 예수는 소리 내어 통곡하기 시작했다.


누가는 통곡하신 이유를 두 가지라고 전해 준다. 하나는 평화를 선택하지 않고 전쟁을 선택했기 때문이며, 또 하나는 하나님의 돌보심을 저버렸기 때문이라고 했다. 예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다고 전해준다.


예수는 그들이 선택한 전쟁이 얼마나 처참할지를 생생하게 경고했다. 적들은 토담을 쌓아 성을 포위해 고사작전을 펼 것이다. 최후엔 적들 손에 어린아이들까지 도륙 당하는 비참한 패망을 가져올 것이라고 했다.(눅19:41-44)


주후 70년 로마제국은 티토 장군이 이끄는 대군을 보내어 예수의 예언대로 감행했다. 그날이 예루살렘 패망의 날이 되었다. 그 이후 예루살렘 회복은 1948년 유엔의 독립국가 선포로 이루어졌다. 이스라엘은 근 2천 년 가까운 세월을 전 세계에 흩어져 디아스포라로 살아가며 나라 잃은 대가를 혹독하게 치루어야 했다.


예루살렘 성을 바라보며 통곡하신 예수의 경고는 단지 패망의 날을 바라보며 애절한 통곡으로 끝난 것일까? 통곡의 의미를 음미해보면 통곡 너머 희망을 암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지금은 평화의 가치에 대해 그 눈이 가리어져 있지만 내 나라 내 영토를 잃고 고난에 찬 방랑의 긴 세월을 보낸 후에는 알게 되리라. 자유와 독립이 보장된 평화가 얼마나 소중한지 알게 되리라. 


이제 이스라엘은 비록 2천 년 고난의 세월을 살았지만 뼛속 깊이 새길 유산을 얻게 되었다.

역사의 미래를 읽지 못했던 눈이 열리고 인간의 나약함을 깨닫게 되었다. 평화를 지켜내고 야훼를 전적으로 의지하는 백성이 되어야 함을 깨닫게 되었다.


튀르키예와 시리아를 덮친 대지진과 폐허를 바라보며 떠오르는 역사적인 의미를 생각해 본다. 처참한 현실 앞에 통곡으로 주저앉아 있지만 말고 통곡 너머의 희망을 바라보자. 


전쟁과 테러, 경제 불황과 자국 이기주의, 대립하는 국제 관계로 갈등과 분열 상태에 놓여 있던 여러 나라들이 대재난을 겪고 있는 나라를 돕기 위해 손을 모으고 있다. 긴급 구조대와 구호팀, 구호물품과 의료진을 보내고 있다. 여기에서 희망의 불씨를 보았다. 평화를 위한 가능성을 보았다. 자연 대재앙 가운데 일어난 희망을 보았다. 아직은 인류애가 살아있어 완전한 종말은 아닌가 보다.


통곡 너머 희망을 보았던 선견자의 시선을 가져보자. 한 치 앞의 미래도 볼 수 없었던 교만과 무지를 내려놓자. 값비싼 대가를 지불하고 얻어낸 평화의 가치를 붙잡자. 세계를 움직이는 더 큰 손을 바라보자. 희망은 언제나 고난의 보자기에 싸여 찾아오는 것.


세계의 미래를 암담하다고 예고하는 지표와 증상이 날마다 쏟아지고 있지만 아직은 희망을 내려놓을 때가 아니다. 통곡하는 그들을 위해 희망의 메시지를 나눌 수 있다면. 선한 세계시민이 마지막까지 인류애로 사랑의 손을 마주 잡는다면. 자비와 인류애가 입맞춤할 수 있다면.


베르디 오페라 ‘나부코의 3막 2장’에 나오는 <히브리 노예들의 합창>은 통곡을 너머 희망을 노래한다. 마치 우리의 기도인 듯 이렇게...


“우리 마음속 깊이 자리한 그 아픈 기억들을 되살려다오. 예루살렘의 슬픈 운명을 기억하도록... 그리하여 하나님을 기억하여 그 도우심으로 이 아프고 힘든 나날을 이겨 나갈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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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우 칼럼] 통곡과 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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