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20(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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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하식 수필가·시조시인

거기서 왼쪽으로 가파른 언덕배기에 올라 서면 ‘노산대’에 이른다. 1457년 6월, 겨우 열두 살 소년이 왕위에 오른 지 불과 2년여 만에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봉된 채 날마다 해질 무렵이면 힘겹게 기어올라 하염없이 한양을 바라봤다는 지점. 그가 정순왕후 송씨를 그리워하며 돌을 하나씩 둘씩 주워 모아 쌓았다는 망향탑을 대하노라니 나도 모르게 숙연해지는 느낌이다. 슬프게도 청령포로 유배된 지 고작 4개월 만인 1457년 10월 24일, 단종은 무자비한 세조에 의해 사약을 받고 관풍헌에서 짧은 생을 마감한다. 그의 억울함은 그로부터 무려 200여 년이 지난 1681년(숙종 7년)에야 풀어져 대군에 추봉되고, 1698년(숙종 24년)에 가서야 다시금 임금으로 복위되어 그 묘호(廟號)를 단종이라 부르게 하였다. 하지만 그 와중에 척살을 당한 원혼들을 달래줄 방도가 마땅히 없다는 푸념에는 응답할 얘깃거리조차 없다. 어쨌거나 아름다운 청령포의 전경이 한눈에 들어오고 굽이치는 강물이 휘감아 도는 정경을 지척에 두고서 감상할 수 있다는 연유로 인해 이처럼 명승지로 변모한 걸 보면 무심한 세월에 격세지감마저 든다.


무엇보다 길손이 지닌 처연한 감성을 자극하는 곳은 그의 무덤이었다. 사적 제196호로 지정된 '장릉(莊陵)'이 그곳. 하기야 오랜 세월 구슬픈 사연을 애써 감내하는 데가 어찌 이뿐이랴마는 숙부인 수양대군에게 쫓겨나 짧은 일생을 지레 마감할 줄을 어찌 알았으랴. 당시 의금부 도사였던 왕방연은 비운의 왕을 이곳에 가두고 떠나기 하루 전 이렇게나마 가엾은 고혼(孤魂)을 달래주었다. 직책상 부득불 조정에서 명령한 업무를 수행하던 한 관리의 비통한 심정이 ‘단장가’라는 한 편의 시조로 남겨져 나루터에 떠돌고 있다.


  천만리 머나먼 길에 고운 님 여의옵고

  이 마음 둘 데 없어 냇가에 앉았으니

  저 물도 내 안 같아야 울어 밤길 예놋다


하지만 불의를 보고서 항거를 마다치 않은 절개는 가만히 있지 않았다. 단종 복위 운동을 꾀하다가 장렬히 죽음을 맞은 성삼문, 박팽년, 하위지, 이개, 유응부, 유성원을 묶어 우리 후손은 '사육신(死六臣)'이라 칭송하고, 비록 죽음을 불사하지는 아니했으되 수양대군의 왕위찬탈에 분개한 나머지 한평생을 죄인이라 자처하며 살다간 김시습 등의 여섯 명을 두고는 '생육신(生六臣)'으로 부르고 있다. 그게 비록 아니어도 이른바 ‘배일치(拜日峙) 고개’에 이르면 가슴이 아려오는 구구절절한 사연에 젖어 누구라도 옷깃을 여미게 된다. 그 암울한 시절 단종이 유배지에 가까이 오면서 앞날을 기원하기 위해 해를 보고 절을 했다는 데서 붙여진 이름이란다. 그래서 더욱 처량한 청령포는 오늘도 도도히 흐르는 강물 속에 서슬 퍼런 역사를 떠내려 보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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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원도 영월에 소재한 청령포

 

해 질 녘 우리의 발걸음은 또 다른 팻말을 향해 바삐 움직였다. 남녘으로 얼마큼 달려가니 특이한 종유석으로 유명한 ‘고씨동굴’이 있었다. 임진왜란 때 이 근처에 살던 고씨 일가가 숨어들어 난을 피했다는 은신처. 이곳 역시 늘어뜨린 밧줄을 부여안고 내를 건너 좁디좁은 굴속을 비집고 들어가니 지하에서 솟구치는 시원한 물줄기가 일품이었다. 몸집이 큰 아줌마 때문에 간신히 빠져나오는 길에 사방을 두루 살피니 래프팅하기에 최적인 동강(東江)의 물줄기. 해마다 뗏목 축제를 개최하여 그 옛날 운송수단의 정취를 맛보는 곳에 무시무시한 인공 댐을 건설하겠다고 으름장을 놓고는 적잖은 기간 환경 지킴이들과 힘겨운 싸움을 벌이던 기억이 생생하다. 모름지기 한번 파괴된 자연이란 복원이 거의 불가능해지거늘 어찌하여 심각한 고민의 흔적도 없이 그토록 쉽사리 어리석은 시도를 거듭하는지 실로 안타까울 뿐이다.

 

예로부터 인적이 드문 오지였기에 불과 얼마 전까지는 동해안을 찾는 경유지 정도로 여겨온 영월 지방. 하루 온종일 맑은 대기를 들이마시며 푸르디푸른 솔잎 속에서 유유히 흘러가는 깨끗한 냇물에 발을 담그고는 며칠 전 무거운 벼슬을 내려놓은 선비인 양 한껏 유유자적을 맛보고 싶었다면 나만의 과욕일까? 시나브로 꽉 막힌 가슴이 탁 트이는 청량한 고을이기에 가능한 일이었고, 잘 보존된 산하가 아직 우리 곁에 오롯이 남아 있기에 크나큰 축복을 누릴 수 있었다. 이 장경(場景)을 만끽한 뒤 무사히 집에 돌아온 우리 식구들 표정은 한층 밝아져 있었다. 그렇다면 오호라 경사로다, 비록 식전부터 뜻한 바는 아니었을지언정 홀가분하게 다녀온 당일치기 여행이라는 데 자족하리라.



■ 프로필


- 고교생에게 국어와 문학을 가르치며 수필집·시조집·기행집 등을 펴냈습니다.

- 평택에서 기고 활동과 기독교 철학박사(Ph.D.) 과정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 블로그 “조하식의 즐거운 집” http://blog.naver.com/johash 꾸립니다.

- <평택자치신문>에 “세상사는 이야기”를 13년째 연재하는 중입니다.


※ 다음호(647호)에는 ‘다양한 교회의 필요성 - 급변하는 다문화 상황론’이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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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사는 이야기] 청령포의 오래전 풍경화 ‘처연한 단종의 인물화’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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