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25(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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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하식 수필가·시조시인

알고 보면 사람들은 정녕 자기에게 무엇이 필요한지도 모른 채 하루하루 살아갑니다. 앞뒤 안 가리고 더 많이 소유하고자 몰두하다가 영원히 죽는 줄도 모르는 형국이지요. 성도 여러분, 이치가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가 이렇게 살다가 기한이 차서 죽음으로써 모든 게 끝난다면 인생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짧게 살다 죽으나 길게 살다 죽으나 도대체 무슨 차이가 나느냐는 말입니다. 게다가 우리 교인들은 지금 뭐 하자는 겁니까? 맘대로 놀지도 즐기지도 못하다가 그냥 사라지는 거 아닙니까? 한마디로 내세를 전제하지 않는 삶은 아무 의미가 없다는 말입니다. 지정의를 동원해 남을 감쪽같이 속여도 되고 법적 테두리에서 의도한 목적만 달성하면 그만이라는 논리가 성립하잖아요? 그런데 왜 사람들이 종교 시설에 모여들까요? 나름대로 기부나 봉사도 하면서 공덕을 쌓기 위해 애쓰는가에 관한 답이 나온 셈이죠. 막연하게나마 사후세계에 대한 두려움이 남아있다는 증거입니다. 만약 저마다 이생이 전부라는 확신이 확고하다면 굳이 자신의 행동을 선행의 틀 안에 담보하려고 그토록 몸부림치지는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제 성경이 제시하는 은혜의 샘을 찾아 나서야 합니다. 그것만이 진정으로 성삼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희소식이기 때문입니다. 감사하게도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를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죄로 인해 에덴에서 쫓겨나는 처지였지만 살뜰히도 챙기셨습니다. 자, 보십시오. 가죽옷을 지어 입히신 것도 모자라 지나가다가 혹시라도 생명나무 열매를 따먹고 죄를 지은 상태로 영생할까 봐 동산 동쪽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 칼을 두어 그 길목을 지키게 하셨잖아요.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피조물을 돌보시는 마음입니다. 오죽하면 죄악이 관영한 세상을 홍수로 쓸어버리시면서도 노아 식구들로 하여금 후일을 도모하셨겠습니까? 손수 지으신 사람에 대해 한탄하셨음에도 말입니다. 심지어는 더 이상 구원받을 만한 영혼이 없을 때 창조주께서 인간이 되신 사건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는 생각할수록 인간의 유한한 머리로는 이해할 수 없는 미증유의 대사건이었습니다. 그것은 우주의 법칙을 만드신 분이 스스로 피조물이 되심으로서 그 원리를 몸소 증명해주신 대역사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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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택시 대추리길에 열린 으름열매

 

다시금 말씀으로 돌아가 태초의 에덴동산을 상상해보십시오. 얼마나 살기에 쾌적한 날씨였겠습니까? 아예 옷도 걸치지 않은 채 살았잖아요. 사람이 일교차로 인해 받는 스트레스가 인체를 겉늙게 만든다고 하거든요. 그런데 언제부터 자신들이 벌거벗었음을 알게 되었나요? 동산에서 하나님이 아담을 불렀을 때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 숨었다고 대답하잖아요. 죄를 짓고 나서 자신들이 벌거벗은 걸 알았다는 말입니다. 게다가 먹을 게 지천이었잖아요. 땀 흘려 일하지 않아도 입맛에 따라 끼니를 즐겼다는 얘기거든요. 뭐니뭐니 해도 가장 큰 혜택은 아담과 하와는 힘들게 배우는 과정 하나 없이 어마무시한 지식을 가지게 되었다는 겁니다. 태어나자마자 성인이었고 하나님과 대화를 나눌 만치 언어 실력을 충분히 갖춘 상태였잖아요. 그렇다면 뭐가 더 필요한 거죠? 도대체 무엇이 모자라 단 한 가지 규정을 지키지 못하고 이 모양 이 꼴을 만들었는지 심히 유감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실 이렇게 복잡미묘한 문제에 관해서는 보다 깊은 연구가 필요할 참입니다.


흥분을 좀 가라앉히고 차분히 한 가지씩 짚어봅시다. 아담은 삼위의 하나님으로부터 땅을 관리하고 동식물을 통치하라는 중대한 권한을 위임받았습니다. 하지만 그가 주어진 자리에서 에덴동산을 다스린 건, 각 생물의 이름을 지어준 게 전부입니다. 하나님께 감사기도나 찬양을 드렸다는 장면도 없습니다. 아내와 함께 가정예배를 드린 흔적도 찾지 못했습니다. 돌이켜보면 아담은 창조주에 버금가는 위상을 가졌다는 추정이 가능합니다. 그래서 단 한 가지 정해놓은 규칙이 금단의 열매였습니다. 선악과의 의미는 “나는 창조주요 너는 피조물임을 절대 잊지 말라.”고 하신 일종의 ‘신분 자각 장치’였던 것입니다. 에덴동산의 조건이야말로 얼마든지 아담 자신이 창조주인 양 착각하고도 남을 상황이었습니다. 따라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범죄를 유발한 게 아니라 에덴의 상태를 존속시키기 위한 축복의 도구였다는 게 필자의 분별입니다. 그게 바로 심각한 문제의 근원이요, 부끄러운 입술로는 미처 다 형언하기 어려운 요체였다고 생각합니다.



■ 프로필


- 고교생에게 국어와 문학을 가르치며 수필집·시조집·기행집 등을 펴냈습니다.

- 평택에서 기고 활동과 기독교 철학박사(Ph.D.) 과정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 블로그 “조하식의 즐거운 집” http://blog.naver.com/johash 꾸립니다.

- <평택자치신문>에 “세상사는 이야기”를 13년째 연재하는 중입니다.


※ 다음호(641호)에는 ‘에덴동산에 숨은 비밀 - 인간의 내면을 주시하다’가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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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사는 이야기] 에덴동산에 숨은 비밀 ‘지상의 본분을 망각하다’ (3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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