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3-29(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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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하식 수필가·시조시인

솔로몬의 회고담을 두고 일견 가소롭다고 느낀다면 심오한 인생의 이치를 전혀 깨닫지 못한 소이(所以)다. 전도자가 허무를 통해 알리고자 하는 주제를 아직 이해하지 못한 근인(近因)을 찾기는 그리 어렵지 않다. 온갖 부귀영화를 누린 사람의 사치가 덧없어도 좋으니 단 한 번만을 부르대는 것이 엄연한 현실이기 때문이다. 전도자는 매사에는 때가 있다고 일갈한다. 그때를 어김없이 지키는 일이 창조주에 대한 순종이라고 역설한다. 하나님만 공의로우신 분이라고 인정할 때라야 영리한 사람이 된다는 경종이다. 창조자 앞에서 겸허하게 수긍하는 젊은이의 지혜가 시급하다고 목청껏 외치는 이유다. 전도자는 형식적으로 드리는 예배를 처절하게 후회한다. 잘못된 사연들을 보고도 왕으로서 바로잡지 않은 일을 두고두고 한탄한다. 뒤늦게나마 소외된 계층을 외면한 죄가 큼지막함을 깨닫는다. 두루 만연한 악의 요소를 왕이었던 자신이 부추겼음도 상기한다. 재삼 범사에는 때가 있음을 알아야 했다고 땅을 친다. 막강한 힘을 가졌던 자신이 주어진 사명에 극히 불충실했다고 뼈저리게 느끼고 있다.


전도자는 무엇이 유익하고 가치 있는 것인가를 깨닫고 나서야 크게 뉘우친다. 자신의 젊은 날에 영적 지혜가 없었음을 개탄한다. 악인이 흥하고 의인이 쇠하는 원리를 망각한 처사였다. 하나님의 주권을 송두리째 이해하지 못했다고 자인한다. 초기에 받았던 슬기로움을 여태껏 회복하지 못한 탓이었다. 죄악사의 종점은 파멸이라는 철칙을 몰랐을 리 없었다. 평범한 진리가 비범한 지혜임을 온전히 알아차리지 못한 자신을 자책했다. 물론 하나님께서 의도하시는 세계를 유한한 인간으로서는 미처 알 수 없었기에 부단한 기도가 필요한 참이다. 바로 이러한 사실을 속히 깨닫는 것이 진정한 지혜다. 과다한 번뇌야말로 마귀가 주는 간계에 불과한 것이다. 세상근심이 죄다 소용없는 짓이라는 깨달음이다. 살아 역사하시는 창조주의 뜻에 따라 죽기까지 순종하셨던 예수 그리스도를 묵묵히 따라가라는 가르침이다. “너는 청년의 때, 곧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할 해가 가깝기 전에 너의 창조자를 기억하라."(전도서 12:1)는 대속의 은혜에 감사하라는 명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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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도서는 가치 있는 인생에 관한 탐구서다. 우리에게 태생적 원죄로부터 겸허함을 배우라고 요구한다. 잠언처럼 여호와를 경외함이 원초적 순종이라고 이르집는 사유다. 창조주의 경영에는 시종일관 통일성이 내재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물질과 비물질을 아울러 전 통치영역을 섭리하신다. 이를 두고도 인간의 태도는 극단적으로 갈린다. 그 하나는 배타적 경건주의고, 다른 하나는 문화적 자율주의다. 솔로몬의 음란한 행각을 보면 얼마큼 의문이 풀린다. 처첩을 무려 천 명이나 둔 그였다. 당대의 문호 개방은 괄목할 만했다는 평가는 더욱 세속적이다. 무역업은 성황을 이뤘고 나라는 풍요를 구가했다. 세간의 관심사는 온통 타락한 지식이었다. 날로 수수께끼 형식의 풍자에 익숙해지면서 낯선 비유들이 한껏 기승을 부렸다. 사람마다 상투적 우화를 즐기는 통에 저마다 식상한 격언을 들먹였다. 특정계층의 지적 독점으로 인해 진리가 왜곡될 만치 불합리한 상대성이 산처럼 쌓여갔다. 그들이 간직한 신앙적 유산의 순수성은 급기야 외부로부터 유입된 이방 문화에 오염되고 만다. 비진리가 진리에 승하는 순간 멸망하는 지름길로 치닫는다는 인류사를 보여준 실례였다.


전도서는 인간의 말초적 사안들을 치밀하게 추궁한다. 살아온 인생을 향하여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전도서 1:2)라는 되뇜은 인간이 무얼 추구하고 살아야 하는가를 적실히 보여주는 일갈이다. 자칫 인생무상으로 비추어지기 쉬운 질문은 자신을 향한 통회 어린 자복이라고 해야 마땅하다. 제아무리 선행을 실행한다고 해도 여호와를 경외하지 않고서는 허무를 체험할 수밖에 없다고 말해주는 것이다. 하나님은 늘 정직한 관점을 주문하시기 때문이다. 슬기로운 삶을 경영하는 도정에는 절망의 표지들이 끊임없이 순환할뿐더러 결실 없는 탐구에 휘둘려 인생의 궤도를 제어 불능상태로 몰아갈 수 있다고 일러준다. 그 지점을 파고드는 말씀이 전도서 1장 8절이다. ”모든 만물이 피곤하다는 것을 사람이 말로 다 말할 수는 없나니 눈은 보아도 족함이 없고 귀는 들어도 가득 차지 아니하도다.“ 하나님께서는 솔로몬을 내세워 인간존재의 유의미한 섭리를 확언하셨다. 


전도서에 대한 분분한 의견들을 듣노라면 부질없는 논란에 지나지 않는다. 구원의 초점은 말씀으로 돌아가는 데 있다. 곧 영접을 촉구하시는 예수님을 만나야 한다는 반복이다.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에게 헛됨의 반대개념으로 영원한 가치를 선물하셨다. 새삼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저버린 삶의 종국을 허무로 규정하신 참이다. ”청년이여, 네 어린 때를 즐거워하며 네 청년의 날들을 마음에 기뻐하여 마음에 원하는 길들과 네 눈이 보는 대로 행하라. 그러나 하나님이 이 모든 일로 말미암아 너를 심판하실 줄 알라.“(전도서 11:9) 더 나아가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명령들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모든 사람의 본분이니라.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 간에 심판하시리라.“(전도서 12:13~14) 이보다 더 경종을 울리는 말씀은 있을 수 없다. 하나님을 불신한 상태에서 ”많은 책들을 짓는 것은 끝이 없고 많이 공부하는 것은 몸을 피곤하게 하느니라.“(전도서 12:12)라고 타이르신 연유다.



■ 프로필


- 고교생에게 국어와 문학을 가르치며 수필집·시조집·기행집 등을 펴냈습니다.

- 평택에서 기고 활동과 기독교 철학박사(Ph.D.) 과정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 블로그 “조하식의 즐거운 집” http://blog.naver.com/johash 꾸립니다.

- <평택자치신문>에 “세상사는 이야기”를 13년째 연재하는 중입니다.

 

※ 다음호(627호)에는 ‘지혜문학과 떠난 자유여행 - 은혜로 얻은 지향점’이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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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사는 이야기] 지혜문학과 떠난 자유여행 ‘솔로몬이 깨달은 것’ (4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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