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5-13(월)
 
조하식(한광고 교사,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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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 눈을 뜨고도 못 본 척, 다 알아듣고도 못 들은 체, 가까이서 고약한 냄새를 풍겨도 짐짓 아니 맡은 것처럼 처신하는 경우가 세상에는 의외로 많다. 아니 그렇게 부단히 힘쓴대도 불가항력인 양 나를 옥죄고 얽어매 끝내 슬프게 하는 일들이 지상에는 널려 있다. 더욱이 그것들이 얼마든지 남몰래 내 속에서 웅크리고 있는 못된 버르장머리이니 자못 서글픈 노릇이 아닐 수 없다. 창조적 세계관으로 재단한다면 최초의 인간인 아담은 감히 하나님처럼 되기를 원했고, 그 치명적인 원죄가 우리 후손들에게 고스란히 유전되고 말았다.
 
  피조물의 신분을 망각한 채 죄인으로 추락한 후폭풍은 사망이었다. 필자가 앞으로 진술하는 것들이 이를 증명하고도 남을 것이다. 어느덧 여명이 밝아 왔는데도 꾸물대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기를 싫어하는 게으름. 자고이래 나태는 온갖 범죄의 진원지였다. 작게는 아내가 새벽을 깨우며 힘써 다듬어 데치고 무쳐서 정성껏 상에 올린 나물을 두고 밑간이 안 맞는다며 간간이 타박을 일삼던 일. 언젠가 자질구레한 문제 앞에 골이 잔뜩 부어올라 아침도 뜨는 둥 마는 둥 훌쩍 자리를 뜰 때가 있었다. 그 화난 표정의 민낯이 희뿌연 엘리베이터 거울 속에서 마치 타인처럼 다가왔던 때를 기억한다.
 
  행여 출근시간에 늦을세라 서둘러 내닫다가는 전연 양보할 기미라곤 뵈지 않는 타자와의 소모적인 앞지르기 다툼. 육두문자를 쓰는 대열에 그대로 노출돼버린 때도 있었다. 때마침 그 광경을 나를 잘 아는 이들이나 아끼는 제자들이 봤다면 기겁을 했을 게 틀림없다. 물론 목격자로 아내나 아이들을 상정하는 건 생각하기조차 끔찍하다. 노란 불에서 빨간 불로 막 바뀌어 응당 멈춰서야할 횡단보도를 거리낌 없이 건넜던 일. 그런 상황에서 별반 양심에 찔림의 신호음이 즉각 오관에 와 닿지 않을 때, 나는 부쩍 갈수록 피폐를 거듭하는 정신세계에 스스로 주눅이 들곤 한다.
 
  그리 바쁘지 않아도 여러 제자들의 인사마저 건성건성 받고 지나칠 때. 바로 그 때 학생들이 무심코 버린 휴지조각이 구두 밑창에 밟히며 징그러운 벌레처럼 딸려온 적이 있었다. 걸으며 비벼본들 좀처럼 떨어지지 않았다. 발을 디딜 때마다 끈질기게 따라오던 쓰레기를 연신 탓하면서도 선뜻 허리를 구부려 떼어낼 결단(?)은 미뤘던 일을 후회한다. 기실 앞장서서 궂은일을 처리해낸 경우는 별반 없었다. 몹시 희미하지만 남을 가르치는 위치에 매여 그 오물을 마지못해 주워 들고는 무척 멋쩍어했었다. 그게 가감 없는 나의 현주소요 그릇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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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작종 소리를 들으면서도 왠지 교실에 들어가기를 망설일 때. 분명히 가르쳐 본 내용임에도 수업이 잘 풀리지 않을 때. 까닭인즉슨 전적으로 나의 실력과 준비가 소홀한 탓이었다. 게다가 아이들마저 잘 알아듣지 못하겠다는 듯 갸우뚱하는 눈치를 보일 때면 나는 어디론가 숨어버리고 싶었다. 그로 인해 형편없이 허물어진 자존감(自尊感)을 부여안고 부리나케 교실 문을 나서야 했다. 하지만 순간의 노기를 다스리지 못하고 제자를 실망시켰을 때보다 참담한 적은 없었다. 그때 나는 마치 설익은 과일처럼 시고 떫은 나머지 도저히 스승이라는 이름으로 불릴 수 없는 지경이었다. 
 
  가뜩이나 번잡한 교무실, 시끄럽게 울어대는 전화벨소리에 귀가 따가웠다. 연이어 들려온 공사판의 쇳소리. 거기에 덤프트럭의 경적소리를 더하니 무더운 한여름의 오후는 더욱 짜증스러웠다. 나는 대뜸 교재연구에 몰두하려던 계획을 접었다. 그건 핑계였다. 어렵사리 굳힌 결심을 쉬이 깨버린 건 순전히 나약한 내 의지 탓이었다. 그때였다. 한편이 시끄러웠다. 학생과에서 어느 학부형이 저항성 고함소리를 질렀다. 내용인즉 그 학생의 명백한 잘못이었다. 인과에 아랑곳하지 않고 무턱대고 따지며 삿대질을 해대는 몰염치는 사람을 슬프게 한다.
 
  손볼 수 없을 만치 비뚤어진 가치관. 상아탑 안에서 벌어지는 뻔뻔한 곡학아세(曲學阿世). 때마침 역사교과서 국정화의 망령이 배움터를 짓누른다. 어용을 마다 않는 출세지상주의. 유신과 5공의 교집합인지, 독재와 독선의 최소공배수인지 자꾸만 자괴감이 든다. 그렇다고 파괴적 해방을 마치 선각인 양 부르짖을 순 없다. 구부러진 무정부주의를 옹호할 수 없기 때문이다. 투사들이 대접받는 세태는 벌써 지나갔다. 힘을 가진 데 빌붙어 어느 하나쯤 움켜잡으려는 건 비겁한 노릇이다. 변신에 배신을 거듭하며 선동하는 무리들이 득세하는 몰골은 볼썽사납기 짝이 없다.
 
■ 프로필
 
 <월간에세이>를 거쳐 <한맥문학>을 통해 수필가로 등단. 본보에 6년째 ‘세상사는 이야기’를 연재하고 있으며, 신앙산문집 <주님과 동행한 오솔길>, <생각만큼 보이는 세상>을 펴냄. (홈페이지
http://blog.naver.com/johash, 이메일: johash@hanmail.net)
 
※ 다음호(360호)에는 조하식 수필가의 ‘나를 슬프게 하는 것들’ 두 번째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독자, 시민 여러분들의 많은 관심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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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사는 이야기] 나를 슬프게 하는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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