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5-14(화)
 
조하식(한광고 교사,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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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눈뜨기가 귀찮고 싫은 겨울 아침, 꿈꾸는 나를 흔들어 깨우는 손길이 있다. 밤새 뒤척거리다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매만지는 아내의 물기 묻은 손가락. 사랑하는 가족을 위해 조반을 짓느라 바삐 움직이다가 어서 일어나라고 또다시 부르는 그녀의 또랑또랑한 목소리가 나를 잠결에서 일어나게 한다. 아직 단잠에서 덜 깬 눈동자로 소파에 걸터앉아 잔뜩 볼멘소리로 투정하면서도 한껏 기지개를 켜는 아이들의 모습은 앙증맞기 짝이 없다. 바지런한 손놀림으로 식구들을 위해 정성껏 아침밥상을 차리는 여인네. 그 화장기 없는 중년여인의 얼굴을 마주볼 때면 나는 무척 행복하다.
 
 기실 엊저녁부터 주절대는 어리광이 들렸더랬다. 연신 칭얼대는 아이들의 준비물 챙겨주랴, 급식으로 한시름 덜었구나 싶었는데 굳이 매식을 마다한 채 꼬박꼬박 점심을 싸 달라는 지아비에게 도시락가방 건네주랴, 하루도 거르지 않고 승강기 앞까지 따라 나와 각자의 목적지로 향하는 가족에게 보내는 그윽한 눈길은 눈부시게 아름답다. 시동을 걸고 발진하는 자동차가 저만치 시야로부터 사라질 때까지 허름한 행주치마를 두른 채, 발코니에 서서 두 손을 흔들며 배웅하는 지어미의 수더분한 자태보다 소중한 게 또 있을까?
 
 매일 아침 학교 앞에 내려주는 나를 보고 아빠, 이따 만나요!”하며 살포시 웃는 예쁜 딸내미의 상냥한 인사. 의젓한 목소리로 아빠, 고맙습니다!”라며 당차게 걸어가는 아들 녀석의 굵어 가는 어깨선. 급히 우회전할 때 느긋이 기다려주는 이름 모를 운전자의 여유로움. 이맘때면 늘 주차장에서 어김없이 만나는 모 씨의 활기찬 발걸음. 보이지 않는 곳에서 맨 손으로 버려진 휴지를 줍는 지구 지킴이가 눈에 띌 때. 시간에 쫓겨 바쁜 나를 앞질러 껑충껑충 내닫으며 미안한 듯 꾸벅 예의를 갖추는 학생의 뒷모습이 나를 흐뭇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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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어지는 수업시간, 목청을 돋우며 설명하는 나의 입놀림을 행여 한 자라도 놓칠세라 자신이 마치 그 옛날 관동별곡의 화자라도 된 것처럼 몰입하는 표정의 진지함. 일과 중 몇 차례씩 마주칠지언정 모른 척 그냥 스쳐 지나치지 않고 그때마다 목례를 빼놓지 않는 동료의 겸허한 눈빛. 갓 부임한 신임교사를 볼작시면 때마침 기다렸다는 듯 먼저 길쭉하게 허리를 굽히는 나이 지긋한 선생님의 아주 낮아짐. 전연 가식 없는 칭찬. 담백하게 지적하는 개운한 질책. 아랫사람이 어렵사리 꺼낸 건의사항을 귀담아 듣는 상사의 열린 마음. 이런 일상의 모습들이 오늘을 사는 나를 투명한 즐거움에 젖어들게 한다.
 
 어느 날 갑자기 잊고 있던 친구로부터 걸려온 한 통의 전화. 지기로부터 오랜만에 전송된 전자우편. 집전화로 걸려온 제자의 혼인 주례 부탁. 뜻하지 않은 학부모님의 감사 방문. 새까맣게 까먹었던 자료 뭉치를 발견했을 때. 몇 차례 투고를 거듭한 끝에 통보받은 원고 채택 소식. 고마운 이들의 도움을 받아 해묵은 난제를 해결했을 때. 나른한 오후 나절 수업 종료를 알리는 종소리. 이윽고 붉게 물든 황혼 녘, 기다랗게 드리운 햇살을 손바닥으로 가리며 퇴근하는 여선생의 가벼운 발걸음이 내 기분을 덩달아 들뜨게 한다.
 
 갓난아기의 우렁찬 울음소리. 지루한 산고를 견뎌낸 초보 엄마의 눈길. 젖비린내 나는 영아의 해맑은 얼굴. 소꿉장난 재미에 푹 빠져있는 동네 아이들. 생동감 넘치는 사춘기 소년소녀의 맥박. 시행착오를 딛고 일어서는 청년의 당찬 기개. 남북을 따지지 않은 선남선녀의 풋풋한 첫사랑. 신혼부부의 그칠 줄 모르는 속삭임. 아래위를 아울러 헤아릴 줄 아는 중년의 깊이. 학처럼 고고하게 늙어 가는 노년의 백발. 4대가 어울려 살아가는 가문의 그림. 그밖에 이웃집 담장을 넘어 불어오는 훈훈한 인심의 바람을 쏘일 때. 사회 전반에 깃들인 넓고 깊은 이해와 공감대야말로 나를 절로 웃음 짓게 한다.
 
 단란한 가정에서 피어나는 잔잔한 웃음꽃. 내가 바로 이들과 더불어 멋진 공동체를 이룬 가정의 가장이라는 사실. 온 집안이 영생을 꿈꿀 때. 하지만 안타깝게도 스스로 계신 삼위의 하나님을 믿는 기적은 쉽사리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니 더욱 누군가의 영육(靈肉)이 거듭났다고 확신할 때. 하루하루 성실히 살아가며 천성을 예약한 자의 비밀을 다른 이들에게 전파할 책무를 느끼는 건 그래서다. 그 거룩한 부담감이 창조주께서 명하신 바를 준행하는 나를 더없이 기쁘게 한다.
 
프로필
 
<월간에세이>를 거쳐 <한맥문학>을 통해 수필가로 등단. 본보에 6년째 세상사는 이야기를 연재하고 있으며, 신앙산문집 <주님과 동행한 오솔길>, <생각만큼 보이는 세상>을 펴냄. (홈페이지 http://blog.naver.com/johash, 이메일: johash@hanmail.net)
 
다음호(358)에는 조하식 수필가의 나를 기쁘게 하는 것들두 번째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독자, 시민 여러분들의 많은 관심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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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사는 이야기] 나를 기쁘게 하는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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