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5-13(월)
 
조하식(한광고 교사,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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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버스는 방금 족자의 중앙 상징탑을 지나쳤다. 원래는 원형탑이었는데 지진으로 인해 몇 차례 무너지기를 거듭했단다. 철도 옆 옛 역사. 그 옆으로 허름한 상점들이 줄지어 서있다. 간간이 드나드는 남루한 차림새의 인적들. 저런 영세 업체에서 정찰제를 고수한다니 의외였다. 1700년대 주지사가 머물었던 사택 또한 소박했다. 한길을 따라 네덜란드의 견고한 성곽이 이어졌으나 옛적의 화려함이나 영화로움의 자취는 없었다. 길쭉하게 늘어선 극장가. 예나 이제나 서민들 소일거리로는 영화만한 게 없나보다. 토요일인데도 등교하는 초등생들이 보였다. 공무원은 주5일 근무를 실시하지만 학교는 자율에 맡긴다니 부럽다. 두 눈을 꽉 채운 건 고풍스런 왕궁의 담벼락. 그마저 옛날 왕조시대의 위용이나 위엄을 찾아보긴 어렵다. 우리는 찌는 듯한 더위를 피해 서둘러 궁궐 안으로 들어갔다. 이름은 <크라톤 왕궁>. 왕은 건재했다. 현 족자카르타를 다스리는 임금이 이곳에 똬리를 틀고 살았다. 시설은 남루했고 담긴 내용은 보잘 게 없으나 제왕의 삶에서 배울 점은 뚜렷했다. 기웃기웃 아무리 둘러봐도 족자카르타의 지배자가 살기에는 턱없이 모자란 모양새. 궁궐이라기에는 초라할 만큼 단순했다. 그야말로 여염집이나 다름없는. 보면 볼수록 수수하기 이를 데 없는 궁의 면면들. 그와 대조적인 건 일곱 개의 대문이었다. 취임식이랑 생일날 등 연중 세 번만 열린다는 출입문들. 걸어 들어가다 그림자 인형극과 마주했다. 이곳 자바에서는 음악과 춤과 연극이 어우러진 표현양식을 일컬어 와양(wayang)이라 했다. 그러고 보니 객들이 땅을 밟을 때마다 먼지가 흩날렸다. 정체는 화산재. 짐짓 쓸지를 않아서인지 아직도 엷은 흙먼지를 일으키고 있었다. 다행히 보행에 지장을 주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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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나마 볼만한 데는 풍속이 살아있는 민속박물관. 이들은 이곳을 가리켜 작은 족자카르타로 부른다고 했다. 둘러보니 자잘한 세간이 도무지 왕실의 가구라고는 믿기지 않았다. 1756년부터 줄곧 여기서 지내왔으니 어언 두 세기 반가량을 보낸 셈이다. 전시관에 들러 왕비의 자태를 보니 참으로 우아했다. 다섯 자매의 얼굴이 어쩌면 그리 부모를 빼닮았는지 사랑의 결실은 아름다웠다. 본시 왕국이었던 데를 병합하면서 자치권을 허용했다. 이를테면 특별주로 편성해 제왕의 지위를 그대로 부여한 터. 의아한 바는 여태껏 무탈하게 주민을 다스려왔다는 사실이다. 왕부터 앞장서 일부일처제를 솔선할뿐더러 매사 근검절약하는 수범을 보임으로써 백성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기 때문이다. 그도 그럴 것이 현 제왕에게는 딸만 다섯임에도 현행 왕위 계승 규정에 따를 뿐이라며 애써 태연하단다. 그러니 차기에는 어차피 동생이든 조카든 왕통을 정해진 친인척으로 바꿔야 할 처지. 오롯이 어여쁜 여인만을 사랑하는 한 남성의 일편단심이 미덥기 짝이 없다. 이처럼 군신 간에 신망이 두터우면 중앙정부로서도 더 이상 간섭할 명분이 없어질 수밖에. 총 33개주 가운데 유일한 세습지역이었다.  
 
  물의 궁전이요 꽃의 정원이라는 <따만사리>는 시멘트로 덧씌운 몰골. 한마디로 실망 그 자체였다. 복원의 초보적 개념조차 모르는 민낯에 연신 아연실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리따운 왕비와 후궁이 군왕을 위해 물놀이하는 별장이었는데 왕년에는 온갖 꽃들이 만발한 호사스런 목욕탕이었단다. 종일토록 여인의 알몸을 감상한 뒤 기분에 따라 잠자리를 정했다니 원죄의 실상에 어두운 남정네들이야 물색 모르고 부러운 내색을 감추지 못하겠지만 이는 도통 부부의 운우지락(雲雨之樂)을 모르는 소치다. 크나큰 비밀인즉 순결한 아내를 둔 사내의 기쁨이란 한 여자를 죽도록 사랑하는 데 있다. 조악한 계단을 비집고 전망대에 올라 아래를 내려다보니 시야가 툭 트였다. 곧바로 풍악을 울리던 악사의 집에도 들렀다. 그러나 졸속으로 꾸민 덧칠이 시선에 선명할 뿐 묵지근한 뇌리에 콕 박힌 건 없다. 궁정의 골목길을 걷다가 눈에 띈 건 벤자민나무 두 그루. 지난날 물길을 내고 운하로 이용한 궤적에는 목하 서민의 살림집들로 그득하다. 이 분야에는 비록 문외한이로되 과거 거인에 속하던 화란인의 건축양식이며 토목기술을 접하노라니 금세 수긍이 가는 화란 식민지의 잔상들이다. 끝자락에 구경한 바틱 공정은 여행객의 기호를 헤아린 조치. 바틱은 인도네시아의 전통의상이었다. 잠깐이나마 바틱의 직조 현장을 둘러보니 복잡한 도안 창출을 위해 방염 왁스를 사용하는 납결염색법을 택하고 있었다. 물론 가이드의 해설을 조목조목 알아들을 수는 없었다. 당국이 대대로 이어온 섬유염색법을 무형문화유산으로 지정할 만큼 애착을 보이지만 적잖은 돈을 지불하고 살 만한 물건은 쉬이 눈에 띄지 않았다. 매번 해외를 다니며 실감하는 건 지구상에 한국산 물품 수준을 따라갈 데는 흔치 않다는 사실이다.
 
※ 다음호(352호)에는 인도네시아 기행 최종회 ‘족자카르타 : 도읍지’가 이어집니다. 독자, 시민 여러분들의 많은 관심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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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사는 이야기] 인도네시아 기행 ‘족자카르타 : 왕궁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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