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5-04(토)
 
조하식(한광고 교사,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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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렇게 깊고 침울한 여름방학을 맞았다. 고맙게도 시간의 공이 나를 깊은 수렁에서 건져냈던 셈이다. 나는 그 즉시 결심했다. 사랑하는 유리를 향해 애절한 편지를 보내리라. 세련된 그녀의 심금을 울리고도 남을 길고 긴 글월을 멋지게 쓸 요량이었다. 허술할망정 찬란한 문자를 통해 멀어진 소녀의 마음을 기필코 사로잡으리라! 하지만 세인이 감동할 글 솜씨는 고사하고 거의 일상처럼 끼적거리던 필치마저 좀체 움직여주질 않았다. 가여운 심성에 자리한 심지가 그리 굳지 못했을 뿐더러, 내 재주로는 그녀의 현주소를 도통 알아낼 길이 없었기 때문이다. 뒤돌아보니 궁색한 핑계이자 비겁한 변명에 지나지 않았다. 그렇게 흘러가는 달포를 차일피일 미루다가 속절없이 개학을 맞고야 말았다.
 
  속절없이 내몰리다보니 막다른 골목이었다. ‘까짓것 만나면 눈 한번 질끈 감고 공개적으로 사과해버려? 아니야, 그랬을 때 일파만파 퍼져나갈 제2차 뜬소문을 어찌 감당하려고?’ 몇 날을 곰곰이 곱씹어 봐도 이렇다 할 해답이 나오질 않았다. 한동안 이런저런 사념들이 줄곧 뇌리를 떠날 줄 몰랐다.
 
  아, 이제 내일이면 개학이다. 나는 가까스로 끝마친 방학 숙제를 주섬주섬 챙겼다. ‘날이 밝으면 아리따운 유리를 만나게 되리라. 그 애를 보고 뭐라고 한 마디 건네야 할 텐데 정말 큰일이었다. 어떤 말로 적당히 얼버무리며 그간 가슴 조이던 근황을 근사하게 역전시킨담?’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으되 그렇다고 지레 포기할 수도 없는 바였다.
 
  드디어 개학 날, 고개를 숙이고 들어선 교실 안은 오래 헤어졌다 만난 반가움으로 인해 퍽 시끌벅적했지만, 나만은 그들과 한데 어울려 속 편히 떠들어댈 수 없었다. 짐짓 침착한 척 위장해본들 평소와는 달리 초조하고 초라한 표정을 들키고 말 거라는 두려움이 엄습했다. 바짝 타들어가는 입술을 꽉 다문 채 가만 숨죽이고 있을 수밖엔 별다른 도리가 없는 처량한 신세였다.
 
  이윽고 종이 울렸다. 늘 무서운 담임선생님은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 조용! , 이번에 교장선생님께서 서울로 전근을 가시게 되어 우리 반 유리도 따라서 전학을 갔다.”
 
  ‘오호, 통재라 애재라, 우째 이런 일이……, 그니깨 시방 그 애가 그 분 손녀였던 거여?’ 멍멍한 귓구멍을 후벼 파고 묵지근한 머리를 세차게 흔들어본들 결과는 매한가지. 글자 그대로 나는 멘붕 상태였다.
 
  그때였다. 여기저기서 웅성대는 소리가 들렸다. 걔들이 내뱉는 말 중에는,
 
  “, 하식이 되게 서운하겠다, 그치?” “, 그래 맞어!” “고것 참 쌤통이다!”
 
그들이 재밌다고, 아니 잘 됐다고 놀려대는 입말들은 날카로운 화살촉이 되어 내 가슴팍 한복판에 내리꽂히고 있었다. 아뿔싸, 쓰리고 아린 이내 심장이여!
 
다음호(341)에서는 중국 방문기첫 번째 이야기 천진시내가 이어집니다. 독자, 시민 여러분들의 많은 관심 바랍니다.
 
조하식 수필가 프로필
 
<월간에세이>를 거쳐 <한맥문학>을 통해 수필가로 등단. 본보에 6년째 세상사는 이야기를 연재하고 있으며, 신앙산문집<주님과 동행한 오솔길>, <생각만큼 보이는 세상>을 펴냄. (홈페이지 http://johs.wo.to/, 이메일: johash@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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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사는 이야기] 첫사랑 ‘전학 가는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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